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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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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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상렬의병장 묘역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417-3오상렬(吳相烈, 1879~1907)의 이명은 오인섭(吳寅燮)이다. 광산구 본량동 대명동 출신이다. 1907년 후반부터 의병장 김준(金準)과 김율(金聿)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대명동 영사재에서 무기를 제작하였다. 그는 어등산과 석문산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1907년 음력 12월에 용진산 사호치(沙湖峙)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묘비는 1984년에 세웠다.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1977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산골 깊숙한 영사재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오상렬 의병장의 묘역은 아직 그날의 전투를 기억하는 듯 의기로 가득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2018-12-02 | NO.37
  • 오자치 원당영각 입구 비석군
    광주시 광산구 원당길 1011913년이 오자치신도비(吳自治神道碑)를 비롯하여 오상열 의병장 오성술 의병장 등의 비가 원당영각 인근에 있다.원당영각(元堂影閣)은 1892년 유림 및 후손에 의하여 건립되었으며 양평공 오자치의 영정(보물 1190호)을 배정하고 있으나 현재는 서울 중구 궁중유물전시관에 보관중이다. 건물은 1975년에 지붕을 보수했으며 1976년에는 대문을 보수했다.영각 뒤편에는 1918년에 건립된 시기재(始基齋)를 비롯하여 모정과 이곳을 알리는 안내판 등으로 구성되있다.  나조오씨 중조라 할 오자치(1426~?)는 1467년(세조13년)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직개공신 2등에 책록된 인물이다.이 공으로 당시 세조 임금이 그의 영정을 하사한 것이라 전해 내려온다. 오자치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기록은「세조실록」과「성종실록」에 약간의 내용이 있을 뿐 그 외의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오자치의 묘와 영당이 용진산 밑 원당리에 있고 오자치의 묘 옆에 심어져 있는 백일홍은 나라에 슬픈일이 일어날때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吳自治神道碑  (정리중)公諱自治吳氏望羅州者爲世名族高麗中郞將偃寔公高祖也曾大父諱季愼中郞將大父諱類達益山郡事考諱愼中進士 贈參判錦城君?李氏 贈貞夫人盖以公貴也公天資湍溫才器夙然性於孝有至誠深愛好讀書弱冠淹貫經史智勇絶倫能於射御錦城嘗有惡獸多像人物又有妖僧偉暴資?一州?然公以一箭一椎函除兩害閏境賴以得安公家甚貧躬執漁樵?難繼欲爲春親以圖祿仕而屢屈科場乃反武科魁讓付宣傳官由主簿經歷求補郡邑政治淸白?之以嚴恕吏民?其德累蒙褒賞之典及遭外憂哭?無節而復甦專以事母爲心益致愉小宛不復有仕進之計 光陵丁亥叛賊施愛據有嶺?朝野憂惶莫過?鋒 廟堂薦公召命勤塾公見國執山俗○郞應命從征 上召人別殿賜西溫慰諭公乃與曺錫文魚有沼等一心效勞身了昌矣石斬獲甚多高原有宜陳之地恐爲賊所奪以車巫騎疾馳先據左執大旗右捲障泥吹作角聲明聞之不敢上我軍遂獲大捷施愛之弟施合方在吉州勢甚?張公興李?等空入賊里縛施合以歸未及營而追騎大至前裏被執公奪身回擊斬施愛而還一軍莫不震?二賦戮餘黨悉平振旅返京遂策高火氣二等勳盖八茂績不下曺魚諸公而以其官階之卑未尋參元勳識者恨之翌年四月陞通政七月進階嘉善封羅城君桑拜兵曹參判公不以勳責自居謙牧思退累疎陳懇曰臣之親年益高養旦不多 上特許以南遝故里恒侍親則務盡順滴時或黃冠野眠逍林泉不復渡漢津也丁內艱廬丁墓則○○○柴毁骨立成疾漸劇竟至不叔壽五十訃開 上震悼賜賻致祭禮葬于元堂山枕良原睿完朝賜不初之典配食 次廟廟庭後 贈吏曹判書諡襄平配呂氏處士孟?女擧二男張世勳府使○○在左贊成羅原石次世翊上護軍日謙右議政錦陽君認進士?庶尹 贈參議長房出也曾玄以下不少錄公氣溫粹才識明敏吏政兵籌周涉?奇通其卓掌英達世鮮倫比而建功身退以成五湖扁周之樂視諸同勳諸人多不保終公之先見不翅超然而可以欽服於百世之下也代久遠且經兵焚(희)文叡巳失立朝履歷生年紀皆僕而難詳矣遂靑蓮李公所撰狀文?括如右以寒公後孫偉才達簿試郡府발難北發??射日 王曰汝征公起家念奮厥義勇?昌天石衡突賊陳敢我道大?敦獻? 王靈斯赫策公鬼勳錫賚進針讓不代願欲赤松歸着老因務盡順澗旣忠且孝垂各竹帛原始要終久矣彬總曾我銘昭揭無垠 施蒙大荒落復之上浣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侍講院贊善德殷 宋秉璿 撰十三代孫 駿善書兼篆 崇禎五癸丑十一月日立
    2018-12-01 | NO.36
  • 오정선-균음당오선생 묘역
    광주시 광산구  본동로 158 부근(동호동)동학농민군으로 활약한 전현령 오정선(吳禎善, 1861~1923)은 <균음당유고(筠陰堂遺稿)> 3권1책이 1963년 석판본이 있다.  
    2018-12-10 | NO.35
  • 오처대-서송정오처대묘비
    광주시 광산구 삼도동 복호마을1978년서송정오처대묘비墅松亭吳處大墓碑는 종후손 오중렬이 짓다. 進士墅松亭吳公(處大)墓表는 후석유고(後石遺稿)에 실려 있다.조선 숙종 때 광산구 삼도면 지평리 사실마을에 오처대라는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있는 학자가 있었다. 오공은 젊은 시절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자 숙종 임금이 친히 불러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도록 분부를 내렸다. 전례가 드문 특별한 운명이었다. 오공이 압록강을 건너 중국땅에 이르렀는데 길목에 난데없이 양면에 잔글씨가 빽빽히 쓰인 8폭짜리 병풍이 둘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중국의 천자가 사신으로 오는 사람의 지혜를 시험하기 위해 꾸민 일이었다. 오공은 그것을 보고 말채찍을 힘껏 후려쳐서 병풍 한쪽을 제치고 지나쳤는데, 자기 앞에 선 오공을 보고 중국 천자는 오는 길에 뭔가를 본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오공이 노변에 세워진 '글씨병풍'을 보았노라고 대답하자, 천자가 껄걸 웃으면서 그 병풍에 쓰여진 글귀를 외워 보라고 했다. 오공이 그 글귀를 한 자도 빠짐없이 술술 외우는데 그 말미의 한 구절만을 외우지 못하니 천자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신하를 시켜 그 현장을 보고 오도록 하였다. 그 신하가 돌아와서 병풍의 한 가닥이 접어져 있었다고 아뢰었다. 천자는 무릎을 치고 탄복하면서 오공의 깊은 학문을 치하하고 그 자리에서 서송정墅松亭이라는 호를 내리고 잔치를 베풀어 크게 환대 했다고 한다. 조사결과 오처대 선생은 숙종 때 인물로 중국사신으로 가 중국천자로부터 서송정(墅松亭) 이라는 호까지 받았지만 선생에 관한 자료가 없어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다.
    2018-12-02 | NO.34
  •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
    월봉서원(月峯書院) 묘정비명(廟庭碑銘) 병서 -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최근덕(崔根德)조선조 명종ㆍ선조 연간에 문운(文運)이 빈빈(彬彬)하고 사류(士類)가 성(盛)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대(前代)에 겪은 사화(士禍)의 남은 불씨가 아직도 척신(戚臣)과 간인(奸人) 사이에 남아 있어서 은밀히 선비를 해치는 재앙을 빚고 있기도 했다. 이런 때를 당해 힘써 독류(毒流)를 배척하고 청의(淸議)를 끌어당기며 의리를 밝혀 학문이 이룩되고 도가 높아 우뚝하게 유종(儒宗)이 된 분은 고봉(高峯) 기 선생이시다. 일찍이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가 되어 경연(經筵)에 입시하여 아뢰기를 “천하의 일에 옳고 그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을 밝힌 뒤에야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고 정부의 명령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입니다. 대저 옳고 그름은 비단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일 뿐만 아니라 실상 천리(天理)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한때 비록 가리고 베어내 버린다 하더라도 그 옳고 그름을 아는 본심(本心)은 끝내 없어지지 않습니다.” 하였고, 또 아뢰기를 “언론 창달(言論暢達)은 국가의 중대한 일입니다. 언로(言路)가 열려 있으면 국가가 평안하고 언로가 막혀 있으면 국가가 위태롭습니다.” 하였으며, 또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道)를 논하기를 “학교 교육을 밝게 닦아 인재를 양성해서 그 성취도에 따라 뽑아 등용할 것이며, 능히 국가의 치란(治亂)과 백성의 기쁨ㆍ슬픔을 헤아려 아는 자와 더불어 정치를 하면 묵은 병폐(病弊)를 개혁하고 앞사람들이 미처 하지 못한 일들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치를 논하고 주장을 세움에 있어서 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다. 상세한 것은 《논사록(論思錄)》에 실려 있다.선생의 휘는 대승(大升)이고, 자는 명언(明彦)이며, 호는 고봉(高峯)이고 또 존재(存齋)라고도 한다. 성은 기씨(奇氏)로 행주(幸州) 사람이다. 고(考)의 휘는 진(進)이고 호는 물재(勿齋)이며, 호가 복재(服齋)인 아우 준(遵)과 더불어 학행으로 세상에 저명했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복재가 화를 입자 세상일에 뜻을 멀리하고 광주(光州) 고룡향(古龍鄕)으로 물러나 살게 되었다. 비(妣)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 선생께서 고룡리(古龍里) 집에서 태어났다.공은 천자(天資)가 빼어나고 꿋꿋하여 어릴 적부터 지절(志節)이 있었으며 성품이 또한 강개(慷慨)해 항상 도의(道義)를 선양(宣揚)하고 퇴패적(頹敗的)인 풍조를 일소해서 천박한 학문에 대해 모범을 보이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음식을 물리치고 눈물을 흘렸으며 두문불출(杜門不出)했다. 〈자경설(自警說)〉을 지어 스스로를 경계(警戒)했다.기유년(1549, 명종4)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고, 을묘년(1555)에 물재공(勿齋公)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로 삼년상을 마쳤다.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저술하였다. 무오년(1558) 7월에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선생과 일재(一齋) 이항(李恒) 선생을 찾아뵈었고, 10월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명(第一名)으로 과거에 올라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으며, 이달에 퇴계 선생을 서울에서 찾아뵈었다. 추만(秋巒)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선생에게 보여 주었다. 기미년(1559) 3월에 퇴계 선생에게 편지를 올렸는데, 이로부터 8년여 동안 두 선생께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변(論辨)했다.계해년(1563, 명종18)에 거듭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에 제수되었으며 사관(史官)이 되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에 올랐다. 주강(晝講)에 입시해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다.”라고 하였다. 을축년(1565)에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과 지제교(知製敎)가 되고, 또 이조정랑 겸 교서관교리(吏曹正郞兼校書館校理)로 임명되었으나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2월에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진국원(鎭國院)으로 찾아보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논하였다. 소재가 나정암(羅整菴)이 지은 《곤지기(困知記)》를 옳다고 주장하니, 선생께서 〈곤지기론(困知記論)〉을 지어 분변해 주었다.정묘년(1567) 5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관서(關西)로 가서 허국(許國)과 위시량(魏時亮) 두 사신을 영송(迎送)했다. 마침 명종이 승하(昇遐)하여 중로(中路)에서 부음(訃音)을 들었다. 두 사신은 모두 중국의 명유(名儒)로, 많은 질문을 하였으나 선생께서 응대(應待)하되 상(常)과 변(變)을 강론하는 것이 다 적절하였다. 조정에 돌아오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고, 조강(朝講)에서 사림이 화를 입는 이유 및 선정(先正)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의 신원(伸寃)을 건의하였으며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자세하게 논하였다. 여러 번 옮겨 대사성(大司成)과 대사간(大司諫)에 두 번이나 임명되었다.경오년(1570, 선조3)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강으로 나와 하룻밤 묵는데 서울의 사대부들이 조정을 비우다시피 전송(餞送)을 나왔다. 5월에 고마산(顧馬山)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지어 낙암(樂庵)이라 이름 붙였으니, 퇴계의 글 가운데 “가난할수록 더욱 도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었다. 이보다 앞서 선생께서는 청량봉(淸凉峯) 아래에 자그마한 집을 짓고 은거하며 공부할 곳으로 삼았는데 귀전(歸全)이라 이름하였다. 부모가 온전히 낳으시매 자식이 온전히 몸을 보전하여 돌아간다는 뜻을 담은 것이다. 문인으로 좇아 배우는 자가 더욱 많았으며 사림의 중망(重望)이 선생에게로 돌아왔다. 여러 번 소명(召命)이 있었으나 소장을 올려 사퇴(辭退)했다.임신년(1572, 선조5) 2월에 종계변무 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또 소명이 있게 되니, 선생께서 사명(使命)이 중대한지라 부득이 조정에 나아가기로 하였다. 중도에서 대사간에 임명되고, 7월에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제수되었다. 10월에 벼슬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당대의 많은 사대부가 한강까지 전송을 나왔다. 천안(天安)에 이르러 갑자기 둔종(臀腫)이 생겼고 태인(泰仁)에 이르자 더욱 위독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이 달려와 병문안을 하니, 선생께서 “목숨이 길고 짧은 것은 명(命)이고 죽고 사는 것은 천(天)이니 모름지기 관념(關念)하지 마시오. 다만 어릴 적부터 문한(文翰)에 힘쓰다가 드디어 성현(聖賢)의 학문에 뜻을 두었는데, 중년 이래로 비록 스스로 체득(體得)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다만 공부가 독실(篤實)하지 못해 처음 마음먹은 바에 부응하지 못할까 항상 저어하였지만 늠름(凜凜)하게 날로 반성하고 조심하였습니다. 만약 공부한 이들 사이에서 옛 성현의 진면목(眞面目)을 헤아려 논한다면 나도 또한 부끄러울 것이 없지만 단지 한 일들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니 그것이 두렵습니다.” 하였다. 이튿날 길을 재촉해 김공(金公)의 집에 이르러 이틀 만에 돌아가시니, 11월 1일이었다. 이때가 밤이 4경인데 갑자기 바람이 거세게 불고 우레와 번개가 치므로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향년 46세였다.임금이 선생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에게 약을 갖고 달려가 치료하게 하고, 또 위문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다 미치지 못하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고는 크게 슬퍼하였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대사간 기대승은 어릴 적부터 성현의 학문에 종사하여 견식(見識)이 고명(高明)했고, 이황(李滉)과 더불어 의리(義理)를 논변하니 앞사람이 발명하지 못한 바를 많이 발명했으며, 경악(經幄)에 입시해서 진술하고 계옥한 것이 모두 성제(聖帝)ㆍ명왕(明王)의 도 아닌 것이 없었습니다. 온 세상이 추앙하고 존중해서 유종(儒宗)이 되었으나 불행히도 병이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졸(卒)하였습니다. 가세(家勢)가 청빈(淸貧)해 상장례(喪葬禮)를 치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본도(本道)에 명해서 넉넉하게 도와줘 나라에서 선비를 높이고 도를 중히 여기는 뜻을 보여 주소서.” 하니, 상이 이에 따랐다.선생께서 평소에 주대(奏對)한 말씀들을 상이 사관(史官)에게 명하여 1권으로 기록해서 《논사록(論思錄)》이라 이름 붙였다. 시문(詩文) 6권과 《주자문록》4권, 퇴계와 왕복한 서간(書簡) 3권과 《양 선생 이기왕복서(兩先生理氣往復書)》 상하 2권이 간행되었다. 증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成均館春秋館事)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7년 되던 해인 무인년(1578, 선조11)에 사림이 뜻을 모아 고마봉(顧馬峯) 아래 낙암동(樂庵洞)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때에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 공이 본도의 감사(監司)로 있으면서 힘을 많이 썼고 또한 강진(康津)의 언답(堰畓) 30여 석지(石地)를 서원으로 넣어 주었다. 그 후에 송강(松江) 정철(鄭澈) 공이 감사가 되어 또한 많이 돌보아 주었고 노비와 전토(田土)도 지급해 주었다. 임진왜란 후에 망월봉(望月峯) 아래 동천(桐川) 위로 이건(移建)하였으며, 효종 5년 갑오년(1654)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이 되었으며, 6년 을미년(1655) 4월에 편액을 맞이하고 예랑(禮郞) 원격(元格)이 제문(祭文)을 받들고 와서 치제했다. 현종 10년 기유년(1669)에 중창(重刱)을 했고, 12년 신해년(1671)에 문간공(文簡公) 눌재(訥齋) 박 선생과 문충공(文忠公) 사암(思菴) 박 선생을 추향(追享)하였으며, 숙종 9년 계해년(1683)에 문원공(文元公) 사계(沙溪) 김 선생을 추향하였고, 문경공(文敬公) 신독재(愼獨齋) 김 선생을 종향(從享)하였다. 정조 12년 무신년(1788) 4월에 예조 좌랑(禮曹佐郞) 박흥복(朴興福)이 명을 받들고 와서 치제하였다. 고종 5년 무진년(1868)에 훼철(毁撤)되니 사림과 자손이 모두 슬퍼하고 통탄해 마지않았다.광복 전 무인년(1938)에 문중에서 논의가 발의되어 계획을 세우고 재정을 모아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 광곡(廣谷)에 빙월당(氷月堂)을 중건하여 강당으로 하고 광복 후 기미년(1979)에 지방문화재로 등록되었으며, 사림과 본손(本孫)이 당국에 건의하여 국비로 임술년(1982)에 숭덕사(崇德祠)와 내삼문(內三門)을 세웠고, 계해년(1983)에 장판각(藏板閣)을 지었으며, 경오년(1990)에 명성재(明誠齋) 4칸과 존성재(存省齋) 4칸 및 외삼문(外三門)을 세웠다. 신미년(1991)에 서원을 복원해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의전(儀典)을 순성(順成)했으며 3월 상정일(上丁日)에 향사하게 되었으니, 어찌 사문의 큰 다행이고 사림의 성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루는 예손(裔孫) 대종회(大宗會) 회장 세훈(世勳)과 서원복원회(書院復元會) 회장 세탁(世鐸)이 나를 성균관(成均館)으로 찾아와 묘정비문(廟庭碑文)을 청탁하니, 내가 비록 그럴 사람이 못 되지만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대략 위와 같이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미묘를 정밀하게 연구하니 / 精究微妙도체를 꿰뚫었네 / 道體透洞널리 보고 조예가 뛰어나서 / 博覽超詣탐구하고 토의해 종합하고 분석하였네 / 探討約綜주대한 말씀은 / 奏對之辭논사록으로 외우고 / 論思以誦사칠이기설은 / 四七之說철학의 지표라 칭송하네 / 指南以頌법도 지키기를 준엄하게 하니 / 典則峻嚴예학에도 달통하였네 / 禮學達通많은 선비 추앙해 / 多士追仰사당 세워 받들고 / 建祠供奉백세의 모범 되니 / 百世矜式월봉이라 사액하였다네 / 賜額月峯경과 의 함께 세웠으니 / 敬義偕立길이 뒤를 따르리 / 永年隨踵서기 1998년 무인 5월 상한(上澣)에 성균관장(成均館長) 후학(後學) 경주(慶州) 최근덕(崔根德)은 삼가 짓고 번역하다.
    2022-04-30 | NO.33
  • 유경현묘지 (庾敬玄墓誌銘)
    유경현묘지 (庾敬玄墓誌銘)는  1235년(고종22)의 것으로 추정된다. 유경현(1180~1235)은 본관은 무송(茂松).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유자량(庾資諒)의 아들이다.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1227년(고종 14)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관장하였다. 이 해에 상서우승 지어사대사(尙書右丞知御史臺事)가 되고, 1232년에는 우승선으로서 몽고사신 도단(都旦)의 행패를 진정시키기도 하였다. 이규보(李奎報)와 친교가 깊었다.
    2023-07-17 | NO.32
  • 유사-설강유사선생묘갈명
    광주시 광산구  1885년瑞山柳氏鍾城府使雪江公諱泗 설강유사선생묘갈명은 덕은 송병선이 짓다.유사柳泗(1503~1571)는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연(仲沿), 호는 설강(雪江)이다. 남구 유등곡柳等谷(현 이장동 양과동) 출신으로 봉훈랑(奉訓郞, 문관 또는 종친에게 준 종 5품 벼슬) 경흥교수(慶興敎授, 유생을 가르치는 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1522년(중종 17) 21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28년(중종 23) 27세 문과(별시別試 병과4丙科4)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무장현감 . 전라도사 . 낙안군수 . 삭주부사 . 종성부사 등을 역임했다. 1545년(인종 1 을사)에 인종이 죽자 새로 즉위한 명종의 외숙인 소윤(小尹)의 거두 윤원형이 인종의 외숙인 대윤(大尹)의 거두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대윤파에 가담했던  문신 류인숙柳仁淑ㆍ류관柳灌 등 많은 문신들을 죽이거나 유배시킨 을사사화가 5-6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또 1547년(명종 2 정미)에 정미옥사까지 이어지니 관료 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어 나타난 대옥사(大獄事)는 을사사화로서 마지막이 되었으나,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한 사림세력에 의해 붕당(朋黨)이 형성되었다. 1558년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량李樑(1520-1571)이 왕의 총애를 기화로 전권을 휘두르며 당파를 만들어 윤근수尹根壽 심의겸沈義謙 등을 제거하려 하자 그를 위시한 권신들을 배척하는 상소를 했다가 무고로 몰려 권신 이량(李樑)과도 사이가 벌어져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욕심 없이 유유자적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자신이 제례를 제정하여 자손에게 가르치고, 장횡거(張橫渠)의 글을 베껴서 간행하고자 손에 훈계하는 글을 써서 심광언(沈光彦)에게 부탁하여 간행했다. 1563년(명종 18)에 삼사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보령에 유배되어 이량이 세력을 잃게 되자 선생을 다시 기용하려고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제수했으나 선생은 나이도 늙고 병이 있어서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58년 고향의 건너편인 극락강과 황룡강이 합류하는 곳 노평산魯平山 기슭에 터를 잡아 정자를  처음 세우고 "소강절邵康節 호가지의浩歌之意"를 취해 호가정浩歌亭이라 이름 붙이고 종노지계終老之計로 삼아 서식棲息하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이 정자가 불타 없어져 후손에 의해 1871년에 다시 세웠다. 그 후 1932년과 1956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정자의 건물은 정사각형으로 축조한 대지의 중심부에 정측면 다같이 3칸으로 지어졌다. 저서로 『설강집』2권과 『위친필봉제축유서爲親筆奉祭祝遺書』가 전하고 있으며, 광주의 유림들은 경렬사에 추향하였으나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의해 훼철되었다.류사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혼탁한 정치 현실에 휘둘리지 않며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를 보면 류사라는 인물의 절개와 지조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현실정치에서는 꽃을 피우지는 못했으나 그의 학문적 열의와 절조는 이 땅에 뿌리내려 후세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2018-12-02 | NO.31
  • 의병대장죽파오성술묘비
    광주시 광산구 송산동 417-31978년義兵大將竹坡吳成述墓碑는 종후손 전 국회의원 오중렬 짓다.광산구 본량동을 가다보면 항일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죽파(竹坡) 오성술 선생의 묘지를 만날 수 있다.선생은 1884년 5월 15일 광산군 삼도면 송산리 죽산마을에서 오영선과 나주 임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인수, 자는 성술, 본관은 나주이다.선생의 가문은 전형적인 지방 양반가였고, 경제적으로도 매우 윤택했던 것 같다. 그것은 부친이 참봉 벼슬에 있었으며, 훗날 선생이 거의할 때 50여 두락의 전답을 팔아 군자금으로 충당했던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특히 선생은 손이 귀한 집안의 외아들이기에 더욱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일제의 정치적·경제적 침탈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고 1907년 용문산에서 거의했다.먼저 가재를 털어 의병기금을 마련, 김태원의 의진에 입대해 활약했다.오성술 선생은 몸을 담고 있던 의진의 의병장 김태원은 호남 창의대장 기삼연이 체포되어 순국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욱 적과 격렬히 접전을 전개하다가 1908년 4월 광주 무등산 전투에서 전사하자 이전부터 함께 전투에 참여한 바 있던 전해산과 함께 의진을 수습하고, 일부 잔병은 조경환이 인솔했다.선생은 적과의 접전에서도 적극적이었으나 군자금 모금도 소홀하지 않았다.1908년 1월 10일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광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제등 일가를 습격해 3인을 살해하고 소총·일본도 등 무기를 탈취한 후 방화했다. 그리고 나주에서는 밀정 황도현의 재산을 몰수한 후 살해했다.1909년 1월 30일에는 광주 대기면에 살던 일본인 삼십내의 집을 습격해 2천500엔 상당의 물품을 몰수했다.이러한 일련의 모금 활동이 적에게 알려지고, 마침내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됐다.뒤따라 박영근, 심남일, 강무경 등 의병장이 체포되어 왔는데 이들 중 특히 심남일과는 일찍이 남평에서 회동해 군사문제 제반에 걸쳐 상의한 바도 있었다. 오성술은 광주 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사형언도를 받았다.후에 공소했으나 기각, 1910년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사형 순국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내 평생 시름없는 사람이라 자위했건만 나라의 운명이 어려워져 그 걱정뿐이네 술 속의 취기는 밤낮이 없건만 글 속에 대의는 춘추를 지녔구나 집안이 기울어도 천금 부자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붓을 내던지니 오직 백성 시중들 생각만 하네.세상살이에 마음속 일을 알기 어렵지만 분노 그밖에 다시 무엇을 구하겠는가生平自謂我無愁 天步艱難是可憂 酒褒微?罔晝夜 書中大義有春秋 傾家不顧千金富 投筆唯思萬戶候 處世難知心內事 慨然此外更何求-광산저널(2007)
    2018-12-02 | NO.30
  • 이긍-사은부사 이긍 묘역
    광주시 북구 각화동 산 28 부근태봉 서쪽 자락에 이긍李兢1389-1433의 묘가 있다. 북구 군왕로 311 휴먼파크서희스타힐스아파트 건너편이다. 국가에서 이곳에 묘를 쓰도록 하였다. 연고가 없는 광주에 묘를 쓰게 된 데에는 광주의 유력인사였던 그의 장인 광산인 이초 李椒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1405년(태종 5)과 1427년(세종 9) 두 번이나 문과에 급제한 뒤 중앙 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 후 1433년(세종 15) 당시 명나라 사은부사로 북경에 가던 도중 병을 얻어 압록강 첨수참括木站에서 인타깝게 생애를 마감하였다.그가 죽은 뒤 묘를 광주에 쓰게 되면서 광주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의 증손 계인 繼仁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선조의 묘와 가까운 오치동으로 이사해 오면서 함평이씨가 오치동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2018-12-07 | NO.29
  • 이선제-필문이선제신도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51-61996년필문이선제신도비(蓽門李先齊神道碑)는 원래 1912년에 면우 곽종석(俛宇 郭鍾錫, 1864~1919)이 비문을 지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95년에 이가원(1917~2000) 박사의 추기 비문을 받아 1996년에 세웠다. 한 비에 시기를 달리하여 두 사람이 지은 비문이 있는 셈이다.마을 입구 도로변에 그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이 신도비는  전서는 미수 허목(眉叟 許穆, 1595~1682)의 전서를 집자하였다. 이 비와는 다르게 1957년(정유)에 곽종석 찬 비문의 신도비도 있었다.공적이 있어 나라에서 부조묘(不祧廟)를 명하였는데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 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또한 광주광역시는 1988년 필문 이선제의 위업을 기리 위해 필문로(蓽⾨路, 남광주-서방사거리)의 가로 명을 지정하였다. 재실인 여재각(如在閣, 1960년 건립)도 함께 있다.그리고 제청골 골짜기에는 양심당(養⼼堂)이 있다. 이선제의 큰 아들인 이시원이 시묘살이 하던 터라 한다.신도비 원문은 《면우선생문집》권47(한국문집총간 344집 122쪽)에 실려 있다. 마을 앞에는 필문이 심었다고 하는 600년쯤된 왕버들이 있다. 괘고정수라 한다.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글이 써 있다.光國佐理功臣嘉善大夫行吏曹參判藝文館提學問知春秋館事世子左副賓客慶昌君 贈正憲大夫曺判書藝文館大提學蓽門先生李公神道碑銘 幷序 參贊 俛宇  郭鐘錫 謹撰  文正公  眉臾 許先生穆 集篆際聖朝啓運英碩雲興贊成右文之治類多以經論謨譙章翰詞頌假鳴於一時其能游心理域率履法門循聖賢之塗轍而進則訃君以當道退則倡學一方俾來者有可繼焉盖亦十不二三矣時則有若慶昌君篳門先生李公者其庶乎爲先覺於草昧之世而不洋於行藏之正其學足以有爲其功足以開後者乎先生諱先齊字家父蓽門號也其先新羅之金也至麗祖時有諱宗金以功賜今姓封光山入傳而日珣白翰林以忠 贈尙書左僕射是生奇丹陽府今 贈密直副使生弘吉密直提學生日映府使贈兵曹參判娶密直副使草溪鄭允吉之女以共武甲子生公干光之泥館山下幼而眉字淸瀅神采照人寡言笑重作止儼乎有成人儀屆就傳穎悟絶倫博經史通大義旣而嘆曰人之性天也非學無以知性知天下知性天無以爲人遂慨然有求道之志閒權楊村梅軒先生兄弟者遂邃性理之學從之難疑講質渙然有得踐行米篤而所适益精徵蔚有斯文之望 莊憲王甲午府策選第一由翰施玉著歷敭淸華亞長銓曺賓客 曺筵啓沃論思懇懇於出治之本嘗啓曰今之言者以富國强兵爲先務然此覇政之餘習人君正必正朝延百官萬寐則國安有不富兵安有不强又曰古者擇士入學學成然後論之論定然後宮之今不擇賢否不論高下槪取功今文詞之未望其謀國之無缺不亦難乎又言宜選有德之士置之儲宮興之起居出入如莊嶽之聽齊語則此宗杜生靈無疆之福時 上勵勵精圖治虛心采納春注日深倚以公輔繪公像於御屛以龍之甲辰遭外艱丙午居內憂時喪紀廢壞百日卽吉公獨行三年之制哀毁踰節情文兩旨造主立祠一依於禮人多化之嘗爲藝文館提學鄭麟趾金銚望等受命撰麗史錄光國勳封慶昌君退老于鄕上疏請陞光山爲洲牧建喜慶堂選一鄕文學地淫之士別爲需籍以獎育又立約于鄕倣藍田遺意春秋會集而勸規之於光之士皆敦尙經行民俗丕變爲湖南之純享年七十一而經葬于萬山洞亥原後 贈吏曹判書藝文館大提學高齎峰先生敬命以先生存倡學之功嘗疏請陞享聖廡而不報識者恨焉士林立祠宇康津之秀巖以俎頭祀之者淸心堂詞元玄孫履素齊仲虎來孫東巖發南溪洁從享焉其數之垂于家者遠而不替德之入于人者以以不忘斯可以觀矣配貞夫人寶城宣氏節度使仲吉女生五男始元判中樞調元吏議 贈禮判翰元校理贊元修撰享元副提學孫曾而下詵善詵然不可勝紀先生之墓久闕神道之刻后孫承鎰以其門父老之命走四百里于伽倻之西徵銘於鐘錫今距先生將五百年劫灰屢晹文獻寢泯其徵言懿蹟固有不可得以悉孝矣謹據夫性齊許文靈公傳之狀與後孫承愚之錄最其槪而爲之銘曰郁郁文化莊靈之世號爲鄧隆來汝 王佑篳門不閉風雲之從其稱差覇學不貴藝沃于 宸哀王肅不舍罘罳有繪贊我笙鏞衣冠孲孲損護孝悌湖學螵螵陽海之老有會有詣載篤于耶歸 歸箇箇鳳翥邁以奕厥宗千載起懦光山麗君子攸宮湖天不夜湖樹不髮孰識其功通政大夫前議政府參贊弘文館 經筵官兼侍講院書筵官苟一郭鐘錫撰文正公眉叟 許先生穆集篆 丁酉 三月日立번역광국좌리공신 가선대부 호조참판 세자좌부빈객 증정헌대부 리조판서 예문관대제학 필문선생이공신도비명[서문을 함께 쓰다.]참찬 후한 곽종석이 삼가 짓고 문정공 미수 허목선생의 전자를 집서하다.성군의 명대를 즈음하여 인걸이 많이 태어나 문학을 숭상한 정치를 도왔다. 거의가 경륜모모와 장한사송으로서 일시에 이름을 올렸으나 그 능히 성리학에 전념하여 법문을 따르고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고 나아가서는 군상을 대도에 어긋나지 않게 받들고 물러난 즉 일방을 거느려 후학으로 하여금 가히 이어가게 한 사람은 대개 열에서 둘셋도 못되었다.그대 경창군 필문 이선생 같은 이가 있어 거의 초매한 세상에 선각이 되고 행장의 정직함이 도에 배반함이 없어 그 학문은 족히 써 하옴이 있고 그 공은 족히 써 후학을 깨우침인져. 선생의 휘는 선제요, 자는 가부이며 필문은 그의 호이다. 그의 선계는 신라의 김씨이다.고려 때에 휘 종금의 공으로 광산을 봉하니 팔전하여 순백은 한림이니 충으로 상서좌복야로 증직하였고, 아들 기는 단양부령으로 밀직부사를 증직하였고, 그의 아들 홍길은 밀직제학이요, 그의 아들 일영은 부사로 병조참판을 증직하였는데 장흥위씨 평장사 문하시중 충의 딸과 밀직부사 초계 정윤길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종 기묘년에 광주 이관 산하에서 선생을 출생하였다.어려서 미우가 맑고 신채가 훌륭하였다. 언소를 적게 하고 기거를 무겁게 하여 엄연히 성인스러웠다. 좀 자라서 두뇌의 명석함이 뛰어나 경사를 널리 보고 대의를 통달하였다.이윽고 탄식하여 가로되 사람의 성정은 곧 하늘이니 학문이 아니면 성정과 천리를 알 수 없고 성과 천을 알지 못하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개연이 구도의 뜻이 있어 양촌 권근, 매헌 권우 선생 현제가 성리설에 공부가 깊다는 말을 듣고 스승으로 섬겨 강론하고 질문하여 환연히 득함이 있어 더욱 독실히 실천하고 더욱 공부가 정밀하여 유림 간에 물망이 높았다.세종 기해년에 제일등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한원옥서로부터 청화아장 전조빈객을 역이하였다. 위연에서 군상에게 치국의 근본을 간간히 논하였으며, 일찍이 아뢰어 가로되 이제 말하는 사람들이 부국강병으로서 먼저 할 것을 생각하나, 그러나 이는 패정이 여습이니 인군이 정심하여 조정 백관 만민을 바로 잡은 즉 국가가 어찌 불부하며 병이 어찌 불강하리요.또 가로되 옛날에 선비들을 뽑아 학교에 들여보내 학문이 성공한 뒤 인품을 의논하고 의논을 정한 뒤 벼슬을 시키더니 이는 현부도 가리지 아니하여 고하도 의논하지 않고 대개 공령문사만 취하니 그 모국의 무결함을 바람이 또한 어렵지 않나이까. 또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유덕한 선비들을 뽑아 세자 곁에 두고 같이 기거하며, 출입하기를 장악에서 제어를 듣는 것 같이 한즉 종사생령의 무궁한 복이나이다.그때 상이 정치를 한번 잘하자는 뜻으로 마음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상의 총애가 일심하여 재상으로 추대 하였다. 공의 초상화를 어병에 그려 총애를 받았더니 갑진년에 부친상을 당하고 병오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그때 상기가 퇴패하여 백일로 탈복할세 공께서 홀로 삼년상을 행하여 쇠훼가 절도에 넘고 정문이 겸하여 극진하였으며,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한결같이 예를 따르니 사람들이 많이 본받았다.일찌기 예문관 제학이 되어 정인지, 김도 등으로 더불어 명령을 받아 고려사를 찬하니 광국훈으로 경창군으로 봉하였다. 향리에 퇴로할세 상소하여 주목의 고을로 승격하고 일향문학의 선비들을 뽑아 별도로 유적을 만들어 장려하며 기르며, 또 향약을 세워 남전여씨 유의를 모방하여 춘추로 회합하고 권하며 따르게 하니 이에 광주 사림들이다. 경행을 돈상하여 민속이 크게 변하여 호남의 순향이 되었다. 나이 팔십에 돌아가시니 만산동 해원에 장사를 지냈다. 그 뒤에 이조판서 예문관 대제학을 증직하였다.제봉 고경명이 선생께서 창학의 공이 있다하여 일찍이 문묘에 배향할 것을 소청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니 식자들이 한탄하였다. 순묘 경진년에 사림들이 강진 수암에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니 아들 청심당 조원과 현손 중봉, 중호와 내손 동암 발과 남게 길이 같이 배향되었다. 그 가르침이 가문에 미친 것이 이와 같이 멀어도 없어지지 않고 덕이 남에게 미쳐 오래도록 잊지 않는 것을 가히 알 수 있다.부인은 정부인 보성선씨이니 다섯 아들을 낳았다. 시원은 판중추요, 찬원은 수찬이요, 조원은 이조참의로 이조판서를 증직받았고, 한원은 교리요, 형원은 부제학이요, 손증 이하는 하도 많으니 다 기록하지 못하노라.선생의 묘에 오래도록 신도비가 없더니 수혼 승일이 그 문중 부로의 명으로써 사백리 길로 가야산 서쪽에 와서 종석에게 비명을 청하니 생각해 보면 선생께서 졸아가신지 오백년이 지난지라 난리를 여러번 지나 문헌이 없어져 그 중요한 말과 아름다운 사적이 진실로 가히 다 알지 못한지라 삼가이 성재 허문헌공 전의 행장과 후손 승우의 기록을 상고하여 그 요점만을 뽑아 명을 짓노라. 명에 이른다.성한 문화여! 세종시대에 가장 훌륭하였으니 어찌 왕을 돕지 않을까? 필문을 닫지 아니하였으니 풍운의조화로다. 그 패도를 부끄러워하며 학문은 재주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하여 왕의 마음을 깨우치니 왕께서 버리지 아니하여 공의 초상화를 그려놓고 그 공적을 칭찬하였도다.의관이 줄줄이 늘어짐이며 읍양하고 효제하도다. 호남의 학문이 융융함은 양촌 권근과 매헌 권우의 제자로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학문이 독실하니 면면개개가 봉황새와 붕조와 같이 상서스러워 그 씨족을 빛내도다. 천재에 게으른 사람들을 깨우침이여! 광산의 고을은 군자의집이로다. 호남에 광명을 주었으며, 호남에 몽매함을 면하게 하였으니 누가 그 공을 알리요? 임자년.*수정 2023.11.21.
    2018-06-11 | NO.28
  • 이용헌-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
    광주시 북구 오치동 956-8(오산정 내)1923년이 조선유민오산이공지비朝鮮遺民梧山李公之碑는 오산梧山 이용헌李龍憲의 묘비로  현와 고광선高光善이 짓고 종2품 가선대부 전 참판 이우명李愚明이 쓰다.  오산정 앞에 있었다. 오산정은 부친을 위해 아들인 송천松泉 이계익李啓翼이 지었다고 한다.현재 오산정과 이 묘비는 사라졌다. 제보를 받은 바에 따르면 이 비석은 현재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봉명리 753번지 해림농원 부근에 있다. *2020.4.21. 수정
    2018-11-12 | NO.27
  • 이홍길-퇴은 이홍길 신도비
    광주시 남구 원산동필문 이선제의 부친인 퇴은退隱 이홍길李弘吉 신도비퇴은 이홍길(1324~1406)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초명은 계방桂芳. 호는 퇴은退隱. 본관은 광산光山. 밀직부사기의 아들로 이장동 출신이다. 정몽주의 문인으로 학업에 탁월하고 시문에 밝았으며, 역리에 통달하여 공양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제학과 개성윤을 역임하고 상호군이 되었다. 시국의 어지러움을 알고 있던 차 1388년(우왕 14)에 이성계가 왕명으로 중국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압록강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쳐들어와 왕을 내쫓고 최영을 유배시킨 것을 보고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학문을 벗 삼아 도리를 밝혔다.고려가 망하고 조선에서 누차 관직을 높여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절계를 지켰다. 항상 선악화복을 모든 자질에게 일깨워 가르쳤다. 이때 상을 당하여서 당시 백일 탈상의 고려 풍속을 독단으로 주자의 가례를 본받아 삼년상을 치루니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이 고장에서도 이 풍속을 따르기 시작 하는 계기가 되었다. 뒤에 가선대부 예조참판에 증직 되었다. 2019.1.8. 수정
    2018-12-17 | NO.26
  • 전상의 장군 예장석묘(묘비)
    광주시 북구 화암동 산239전상의장군예장석묘(全尙毅將軍禮葬石墓)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전상의(1575∼1627)의 장군의 묘소이다.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3호이다. . 장군은 선조 36년(1603)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인조 3년(1625)에는 구성부사로서 좌영장을 겸하였다. 광해군 9년(1617) 오윤겸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에 건너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동포 1500여 명을 귀국시키는 공을 세웠다. 또한 인조 5년(1627)에 후금이 인조의 친명정책을 구실삼아 3만 대군으로 침략하자 안주성 싸움에서 분전하였다. 그러나 구원병이 오지 않자 모든 장병과 함께 죽기를 각오하고 누각 위에 올라 싸우다 53세의 나이로 전사하였다. 난이 끝난 후 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로 관직이 높여졌으며, 숙종 10년(1684)에는 안주의 충민사에 헌종 15년(1849)에는 광주의 경렬사와 제주의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다. 현재 묘역에는 장군과 정부인 풍천 임씨 및 광산 김씨가 합장되어 있으며, 묘 아랫부분에는 둘레석이 둘러져 있다. 묘 앞에는 1857년에 세운 묘비가 있고, 묘역 근처에는 유적보존회에서 1979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다.
    2018-07-02 | NO.25
  • 전상의-충민공 전상의 신도비
    광주시 북구 무등로 1050 충민사 內(화암동)1972년전상의신도비(全尙毅神道碑)는 충민사에 있다. 구성부사 증자헌대부 병조판서 시충민 전공 신도비(龜城府使 贈資憲大夫 兵曹判書 諡忠愍 全公 神道碑)라 한다. 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627(정묘)년에 건노(建虜, 후금국)가 반적(反賊) 강홍립(姜弘立)을 앞세워 쳐들어올 때 구성부사 겸 좌영장인 전공 휘 상의가 전사하였다. 처음에 공이 평안병사 남이홍과 안주목사 김준과 같이 안주에 진치고 있다가 남 김 양공(兩公)은 중영(中營)을 지키고 공은 백상루(百祥樓) 아래 진을 치고 있었다. 적병이 점점 가까이 올 때 공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적의 세력이 저렇게 강성하고 우리는 밖에서 개미새끼만한 구원병도 오지 않으니 강약이 분명하고 수효의 많고 적음이 대등하지 않으니 전쟁을 이길 방법은 오직 군기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 지금 군기가 부족하니 함부로 남용하지 말라 당부하였다. 갑자기 적진에서 철갑을 입은 기병들이 달려오니 공이 군사를 정리하여 기다리고 있는데 발사명령을 하기도 전에 먼저 총을 쏜 자가 있어 곧 베어 죽이니 일군이 놀라 숙연하였다.이에 병기를 감추고 일부러 약세를 보이니 적군이 더욱 교만하여 바로 성 아래로 갑자기 뛰어 들어왔다. 공이 선봉에 발포 명령을 내려 전군이 일시에 계속 발포하니 포성이 천지를 진동하였다. 노병(虜兵)이 크게 무너져 죽은 시체가 산 같이 쌓이니 싸움에 이긴 여세를 타서 적병을 평야에서 크게 쓸어버렸다. 모든 군사가 재빨리 앞을 다투어 추격하고자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병사가 교만하면 패하는 것이니 적의 정세를 파악하기 어려움에 함부로 진격하지 말고 성벽을 견고히 지켜서 그때그때 형편에 맞추어 알맞게 처리하는 것이 병법가의 계책이다” 하고 대오를 정비하고 망동치 못하게 엄중히 경계하고 사방에서 모여든 자 그 수효를 알 수 없었다. 우리 병사는 미약하고 식량과 군기도 다되어 가니, 공이 눈물을 흘리며 군졸과 더불어 여기서 순국할 것을 맹세했다. 이때 남공이 노병(虜兵)에게 강화를 요청하여 잠시라도 그 세력을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전공은 분연 대노하여 대의로써 남공을 꾸짖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하다가 남공의 뜻이 실지로 강화하려는 것이 아닌 줄을 알고 멈추었다.연일 싸움을 격려하며 충의로 장사들을 권장하여 모두 죽기로 맹세하고 발길을 돌리지 않고 싸우고 있는데, 남공이 불을 질러 스스로 타 죽자고 하니, 공이 말려 말하기를 “만일 먼저 방화를 하면 우리 남은 군사가 다 죽을 것이며 군기도 다 없어질 것이니 우리에게 좋을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적의 세력만 더 높게 할 뿐이다. 잔병을 수습하여 적 한 사람이라도 더 잡아 죽인 것이 먼저 죽는 것보다 나은 일이 아닌가? 싸우다가 군사와 화살이 다 떨어진 뒤에 조용히 나가 죽어도 늦지 않다” 하였다.남이흥과 김준 부자가 마침내 불에 타 죽고, 군졸과 병기가 모두 타 없어지고 말았다. 전공이 남은 병기를 수습하여 누중(樓中)에 두고 장사들을 불러 놓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병기와 식량이 다 떨어지고 후원군은 오지 않고 중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천명을 어찌 할 것인가? 너희 장사들이 있어 보았자 어찌할 수 없다. 너희들은 속히 생명을 도모하여 지체 말고 나가거라. 관교 배상증과 백유정이 머뭇거리며 차마 공만 남겨 두고 갈 수 없어 배회하고 가지 않으니, 공이 크게 꾸짖어서 내보냈다.홀로 백상루 위에 서서 활을 들어 적을 쏘면서 일현(一弦)에 화살 3개를 매겨 적을 향하여 쏘아 대니 화살이 맞지 않음이 없었다. 적의 화살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화살이 공의 좌측 정강이에 맞아 화살을 뽑아내니 살대만 빠지고 촉은 살 속에 박혀서 나오지 아니하자 차고 있던 칼을 빼어 납시공생(納矢貢生)을 주며 살을 헤치고 촉을 빼라 명하고 조금도 돌아보지 않고 연속 활을 쏘아댔다. 그러나 날은 저물고 화살은 없어지고 힘이 다하여 공이 서울을 향해 네 번 절하고 칼을 뽑아 자문(自刎)하여 백상루 아래로 떨어져 죽으니 그날이 정월 이십일일이다. 노병들도 놀래어 서로 말하기를 충신열사의 시체를 군중의 시신 속에 섞여 둘 수 없다 하고 루 앞에 매장하고 표를 세워 두고 갔다. 뒤에 광주 무등산에 예장하니 유좌이다.이 일을 조정에서 듣고 자헌대부병조판서의 증직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숙종 갑자(1684)년에 정려를 명하고 그 이름을 충신지문이라 하였다. 그리고 안주 충민사에 배향하고 광주 경열사에 추향하였으니 조정의 포상과 사림의 은덕을 보답함이 또한 지대하였다.공은 천안인이니 백제 십제 공신 환성부원군 휘 섭(聶)이 그 시조이고, 본조에서 광주목사가 휘 구생(俱生)이 그 육대조이다. 증조의 휘는 완(琬)이고 조고(祖考)의 휘는 개(漑)이니 참봉을 지내었고 고(考)의 휘는 용(蓉)이니 증 승지이다. 공은 만력 을해(1575)년에 출생하여 계묘(1603)년에 중식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배(配)는 증정부인 풍천임씨이니 묘는 합장하였다. 아들이 셋인데 백원(伯元), 중원(仲元), 계원(季元)이고 손자는 유긍(有恆)과 유성(有成), 유장(有章)이다.공이 훈련되지 아니한 군사를 거느리고 범과 이리와 같은 십만 적병을 대하고 보니 형세가 난처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 아무리 해도 목숨을 건질 수 없음을 알고 살기를 돌아보지 아니한 그의 기특함을 알 수 있다. 계책과 사려가 공허하지 아니함이 없어 결국 몸을 희생하고 말았으니, 옛 현인들의 말이 대담하게 죽기는 쉬워도 조용하게 의를 취해서 죽기는 어렵다고 하였다. 공은 이 두 기지를 겸하였으니, 이른바 죽기가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는 방법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순절한 것이 그 의의(宜義)에 합당함을 안다면 어찌 그 죽음을 아끼리오! 몸을 버림이 만일 그 장소를 얻었다면 열사가 그 존재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아! 아름다운 일이다. 공은 일찍이 시와 예를 통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유고도 있어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이 많다. 무식한 영웅이 없다더니 거짓말이 아니다. 공의 후손인 광태(光兌) 광표(光表) 광로(光魯) 응팔(應八)이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로 내가 일찍부터 공의 사절의 의의를 알고 있고 또 제 손들의 성의에 감격하여 병으로 사양을 못하고 이에 명하노라.슬프다 전공은 남국의 기강이라.시를 잘하고 예법도 잘 설명하여옛날 극곡(郤縠)과 같도다.심산에서 병서를 공부하고궁술에 뜻을 두어서무술로 몸을 닦아 신분을 발휘하여훌륭한 사람이 되었도다.건노가 약속을 위반하고우리 서쪽 변방을 침범하여긴 행렬로 달려드니그 형세가 심히 웅장하다.공이 구성에 병부를 갖고좌영장이 되었더니병기와 식량이 떨어져서어떻게 할 계책이 없으나공은 그 용맹을 다하여계략을 뛰어나게 발휘하여순국할 것을 맹서하고극력 대항할 것을 말하고뚜렷하게 계획을 세워갑옷에 신체를 싸고 죽었다.아름다운 옥은 부서지지 않고굳은 정조가 훼손될 수 없다.곰을 취하고 물고기를 버리는 것은천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하늘과 땅 사이에나의 큰 경륜을 세웠으니응당 정령(精靈)이 있어바람과 번개가 되어재앙을 쓸어버리고일월이 다 밝아졌다.임금의 포창이 더 하여높은 벼슬을 명하고위로의 조사도 있었으니삼충을 충민사에 병향하고경열사에도 추향하였다.여러 사림들이 상의하여제찬(祭餐)도 만족하고제미(祭米)도 풍부하니천세 만세까지무궁한 보은이로다.무등산 묘소에큰 비를 세우고내 명을 깊이 새겨두니길이길이 보전하소서.숭정기원후 4신해(1851) 대사헌 당성 홍직필 짓고 전면 큰 글자는 능성 구철우가 쓰고, 신천 강인환이 쓰다. 단군 서기 4305년(1972) 임자 음력 5월 하순 세우다. 天啓丁卯建虜引反賊姜弘立八寇時龜城府使兼左營將全公諱尙毅死之始公與平安兵使南以興安州牧使金浚同陣于安州南金兩公守中營公留陣百祥樓下賊兵漸邇公下令軍中曰賊勢甚盛而外絶蟻子之援强弱相懸衆寡不敵制勝之具專在軍械而以告乏愼不虚發俄而賊以鐡騎長驅公方整軍以待有不待令而先放銃丸者立斬之一軍警肅乃戢兵以示弱賊勢益驕馳突直扺城下公於是令先鋒一時放砲軍中鱗次繼放砲聲振天虜兵大壤僵尸山積遂乘勝大破之賊兵披靡平壤諸軍皆欲乘鋭遂之公止之曰兵驕則敗賊情難測不可輕進堅壁自守隨時應變是兵家之筭也嚴整行伍戒厥妄動翌日曉望賊兵籠郊絡野自四方流八者又不可勝數我兵單弱饗械俱罄公雪涕誓衆矢心立慬於是南公與虜講和盖欲少緩其鋒以有待也公奮然大怒責南公以大義欲拔劒斬之尋知南公之意不在於和乃止連日督戰忠義自勵將士皆以死自誓戰不旋踵南公欲放火自焚公止之曰若先放火則我軍餘者皆死而軍械消盡無益徒增賊勢未若收捨殘兵獲一醎猶勝於先斃必待兵矢俱盡然後從容就死未晩也南公及金公父子卒死於火軍卒及兵械己灰燼矣公收餘械樓中召將士抆淚而言曰兵食俱竭後援不至而中營己陷天實爲之奈爾將士何爾等速出圖生母用踟蹰官校裴尙增白惟精不忍捨公遲回不去公大叱放出獨挺立樓上張弓射賊一絃三矢發無不中賊矢如雨中其左股拔箭而鏃留在肥拔佩刀給納矢貢生剖肥出鏃連射之日己脯矢竆力盡公望京師四拜遂拔劒自刎墜于樓下而正月十七日也虜動色相語曰忠臣烈士之體不可雜於衆尸之中瘞樓前立表而去返葬于光州無等山酉坐事聞贈資憲大夫兵曹判書遺禮官致侑肅宗甲子命旌其閭曰忠臣之門配享于安州之愍忠祠追享光州景烈祠朝家之褒賞士林之崇報亦至矣公天安人十濟功臣歡城府院君諱聶其初祖也八本朝有諱俱生光州牧使寔公六代祖也曾祖諱琬祖諱漑叅奉考諱蓉贈承旨公生于萬曆乙亥癸卯中式年武科配贈貞夫人豊川任氏墓附有三子伯元仲元季元孫有恆有成公提不敎之卒當虎狼十萬之衆形格勢禁事無奈何而出萬死不顧一生斯已奇矣而出謀發慮罔不中窾竟以身殉曩哲云慷慨殺身易從容取義難公具此兩者是所云非死之難處死之難者也是知殞節苟合其宜義夫豈吝其殉捐軀若得其所烈士不愛其存於呼懿哉公早服詩禮力治文辭有零稿可傳世無不識字英雄云者詎不信哉公後孫光兌光表光魯應八請不佞以牲石之文不佞夙服公死綏之義又感諸孫苦誠靡敢以癃病辭遂爲之銘曰嗟嗟全公南國之紀敦詩說禮郤縠是似竆山讀兵厲志孤矢發身韎韋是爲君子建虜敗盟寇我西陲長蛇封豕其勢騤騤公握龜符爲左營帥兵食俱殲無計可施公奮其勇發謀出奇矢心殉國克抗厥辭定計於鮮衽革裹尸圭璧不碎堅貞靡虧熊魚取舎出自秉彝天地中間立我大經應有精靈化爲風霆掃盪腥氛日月雙明褒寵有嘉命秩斯隆有侐愍詞並祀三忠追侑烈廟詢謀僉同牲牢伊碩黍稷維豊有來永世崇報無窮有山無等石戴螭首我銘深鐫用垂不朽崇禎紀元後四辛亥大司憲 唐城 洪直弼 撰前面大字綾城 具哲祐 書信川 康仁煥 謹書檀君紀元四千三百五年壬子端陽月下浣 竪 충민사는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청(淸)나라 침략군을 맞아 안주성(安州城) 싸움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장렬히 순국한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전상의(全尙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장군은 조선(朝鮮) 선조(宣祖) 8년(1575)에 지금의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서구(西區) 구동(龜洞)에서 전용(全蓉)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력과 무술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36년(1603) 29세 때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첫 벼슬로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광해군(光海君) 9년(1617) 오윤겸(吳允謙)과 함께 회답사(回答使)로 일본(日本)에 건너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끌려간 동포 150여 명을 귀국시키는 데 공을 세우고, 내금위(內禁衛) 예차(豫差) 및 어모장군(御侮將軍)을 봉직하였다. 인조(仁祖) 3년(1625) 구성도호부사(龜城都護府使) 겸 좌영장(左營將)이 되어 흐트러진 관위를 정비하고 변방방어에 극력 대비하였다. 인조 5년(1627) 1월 청의 3만 대군이 쳐들어와 의주(義州)를 점령하고 물밀듯이 남으로 안주(安州), 평양(平壤)을 거쳐 황주(黃州)에 이르렀다. 이때 장군은 안주성(安州城) 싸움 중 남영(南營)인 백상루(百祥樓)에서 5일간 분전하다가 53세를 일기로 장렬히 순절(殉節)하니 적장(敵將)들도 충신(忠臣)의 죽음을 애통해하였다 한다. 난이 끝난 후 2월 7일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추증(追贈)되고, 이어서 안주로부터 그의 출생지인 광주로 시신(屍身)을 옮기어 동년(同年) 7월 26일 이곳에서 서쪽으로 보이는 평두산(平頭山)에 예장(禮葬)하였다. 숙종(肅宗) 8년(1682) 장군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전몰지(戰歿地)인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받들게 하고, 동(同) 10년(1684)에는 충신정려(忠臣旌閭)를 명하였다. 헌종(憲宗) 15년(1849) 광주의 경렬사(景烈祠)와 제주(濟州)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도 배향(配享)되었었으나 고종(高宗) 5년(1868)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의하여 헐리게 되었다. 본 사당(祠堂) 건물은 유적정화사업으로 1982년 6월 28일에 착공하여 1985년에 완공하였다.  
    2018-06-11 | NO.24
  • 전중판사사 건천 정광신도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1916년전중판사사(殿中判寺事) 건천(巾川) 정광(程廣) 신도비(神道碑)주(州)의 서쪽 5리의 거리인 금당산(金堂山)에 있는 비석으로 이천(伊川)의 사손(祀孫) 오경박사(五經博士) 광인(廣仁)의 전서(篆書) 및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명사(銘詞)가 있다.<명 문(銘文)>한산정씨(韓山程氏) 선조이신 이천(伊川)선생* 그분께서이기철학(理氣哲學)의 깊은 듯을 이 세상에 권했도다우리 후학(後學) 깨우치는 그의 뜻이 간절하여천억만억(千億萬億) 여러 사람 많은 교훈 얻었도다그 당시의 여러 후손(後孫) 동쪽으로 내려와서그지없는 번창(繁昌)으로 이 나라를 빛냈도다이 가운데 한사람인 건천(巾川)이란 이 어른이그의 조덕(祖德) 이어받아 많은 행적(行蹟) 남겼도다숭불(崇佛)하는 그 당시에 삼년독상(三年獨喪) 지키면서척불(斥佛)하는 그 신념을 가훈(家訓)으로 남겼도다포은(圃隱) 야은(冶隱) 두 동지와 서로 뜻을 모아임금 앞에 나아가서 많은 간언(諫言) 올렸도다.어지러운 나랏일(國事)을 그지없이 걱정하여ユ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눈물 흘렸도다.모든 일을 단념하고 전원(田園)으로 돌아가니고려(高麗)라는 이 나라가 뒤를 따라 망했도다망복(罔僕)** 하는 그의 뜻을 시를 지어 읊으면서여러 자손 불러모아 엄한 훈계(訓戒) 내렸도다죽지 않은 그 자체(自體)를 부끄럽게 여기면서사립문(柴扉)을 굳게 닫아 그의 몸을 숨겼도다바른 언사(言辭) 옳은 의리 어김없이 지키면서위아래의 순서 따라 모든 정(情)을 다했도다이와 같은 높은 행의(行義) 어느 누가 따를손가이 세상의 바른 윤리(倫理) 일으키어 세웠도다조그마한 언덕 위에 가는 샛길(間路) 이어지니사척(四尺) 높이 그의 무덤 어렴풋이 보였도다아름다운 그의 유덕(遺德) 그지없이 추모하매나도 모른 그 사이에 나의 몸을 굽혔도다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지음*이기(理氣)의 철학을 제창하여 유교의 도덕적 기초를 다진 중국 북송(北宋) 때 유학자 정이(程顧)의 호(號).**고려의 신하로써 절개를 지키어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1916년에 건립된 정광(程廣) 신도비는 진월동 마 국도1호선 LG서비스센터 옆에 위치한다. 하남정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는데 풍우에 의한 마모가 심한 편이다.617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은 하남(河南) 정씨(程氏)의 시조, 정사조(程思祖)의 2세인 정광(程廣)이 은거했고, 묻힌 땅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사조는 원나라 사람으로 1351년 12월에 고려 공민왕의 왕비인 노국공주를 모시고 개경에 들어온 인물이다. 그는 노국공주를 보필하면서 어사대부(御使大夫, 관리의 감찰 업무를 맡는 관청의 정삼품 벼슬)를 지냈고, 훗날 공신으로 책봉되어 정일품인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다. 정사조를 따라온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 정도(程度)는 오부부사(五部副使)를 지냈지만 후손이 없어 대가 끊겼고, 둘째 아들 정광은 아버지를 따라온 직후인 135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중성(殿中省, 왕실 살림을 관장하던 부서) 판사(判事)에 이르렀다.  고려 땅에 순조롭게 안착하는가 싶던 정씨 집안은 공민왕이 살해되고, 우왕·창왕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다시 한번 변화를 겪었다. 정광이 벼슬을 버리고 광주에서 서남쪽으로 10리쯤 떨어진 금당산 자락(지금의 진월동)으로 숨었다. 정광은 이미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충실한 고려의 신하가 되어 있었다.그는 “일찍이 고려가 번성한 날 엔/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였는데/ 어찌 고려가 쇠잔할 줄 알았으랴/ 온 세상이 고려의 신하가 아니네”라고 세상을 한탄했다.  정광이 광주까지 내려오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아내가 광산(光山, 광주광역시 광산구) 이씨여서, 처가 동네 근처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물가에 터를 잡고 띠를 베어 산수간에 집을 짓고” 살면서, 때로 무등산 정상 서석대에 올라 송도를 그리워했다.  등서석음(登瑞石吟)이라는 시이다.瑞石靑春也自好  서석대의 푸른 봄을 좋아하네雖將松岳舊顔來   송악에 있던 나를 누가 데려왔나一回含淚一回哭   한 번 눈물에 또 한 번 통곡하네 水咽出溪鬱此懷   물과 산골짜기 우울한 회포를 삼키네백제 가요 무등산가(無等山歌)는 가사가 전해오지 않으니, 무등산을 소재로 한 시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걸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정광은 역성혁명에 편승하여 조선 왕조로 스며들지 않고, 외진 산간으로 스며들어 버렸을까? 더욱이 연고도 없는 자식들에게까지 훈계하는 계자시(戒子詩)를 남겨, “너 또한 고려조의 신하이거늘/ 어찌 새 임금을 섬기랴/ 만약 신하 된 도리를 안다면/ 전조의 임금 은혜를 잊지 마라”고 했다. 이 유언 때문인지 하남 정씨 집안에서는 국가적인 변란인 임진왜란 때 화순 향리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순국한 정득운(程得雲), 정득원(程得元) 형제가 공신으로 책봉될 때까지 크게 이름을 얻은 이가 없었다.  정광이 의리를 지킬 수 있었던 힘은 그의 집안 내력에서 나왔다. 하남 정씨인 정광은 본관이 중국의 하남성으로, 송나라 수도였던 낙양(洛陽, 하남의 옛 이름)에 그의 선조가 살았다. 정광의 10대조가 바로 이천부자(伊川夫子)인 정이(程)인데, 정이는 그의 형 명도부자(明道夫子) 정호(程顥)와 함께 성리학을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주자가 뒤이어 정호와 정이의 학설을 집대성하면서 성리학이 완성되는데, 이들의 성(姓)을 따서 성리학을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부른다. 성리학, 즉 정주학은 한반도에서 고려 말부터 통치이념으로 뿌리내리게 되는데, 하남 정씨는 정주학과 더불어 한반도에 뿌리내린 집안인 셈이다.  정광은 당시 불교를 숭상하고 복(福)을 구하는 시대 풍조를 보고 “나의 가문은 이천부자와 선조(先祖)로부터 불도(佛道)를 쓰지 않거늘 내 어찌 저 무리를 존숭하고 믿겠는가”라고 비판할 정도였다. 그는 예(禮)와 윤리, 도덕을 중시하는 정주학의 근본에 충실하여 고려 충신으로 남고자 한 것이다.  (여행작가 허시명의 글 중에서)안쪽에는 재실(永慕齋, 1960년 건립)과 묘소와 묘비가 있다. 기우만(奇宇萬, 1846~1916)이 비문을 지어 1916년(崇禎5周 병진)에 세웠다. 저서는 정광인(程廣仁), 비문 글씨는 18세손 정남진(程南鎭)과 정의진(程義鎭)이 썼다. 원문은 《송사선생문집》권24(한국문집총간 345집 587쪽)에 실려 있다.⾼麗殿中判寺事⼱川先⽣程公神道碑中州聖賢之裔。多舍中⼟⽽居褊邦。若孔孟周朱⽒是⽿。⽽河南程{⽒伊川先⽣之後。亦其⼀也。蓋箕聖東出。⼋條敎⺠。禮樂⽂物。⾮復舊時之陋。⽽夫⼦⼜欲居之。故⽅五胡亂華。避地⽽來者。不於他⽽必於此歟。抑東⽅⽂敎將興。菀然有⼩中華之稱。⽽爲吾道東來之兆眹歟。程{⽒以有宋太⼦少師⽻爲肇祖。尙書員外希振。開府儀三司遹。太中⼤夫珦。少師後三世。太中公⽣明道伊川兩夫⼦。伊川三⼦。季端彥郊社齋郞。五傳⾄翰林學⼠庇,樞密院事在⼼。六傳⽽衛尉校丞思祖。與翰林孔紹等陪魯公主東來。官殿中侍御史。卽⼱川先⽣考也。妣貢⽒。⽗錢塘太守載。公諱廣字德魯。⽣卒年⽉。世久無徵。⽣⽽純孝有氣節。養兼志軆。⽣致樂喪致哀。時麗季短喪。獨⾏三年。⽴家廟。祭盡誠敬。俗尙祈佛。獨慨然⽈。吾家⾃伊川先祖。不⽤浮屠。斥之甚嚴。恭愍朝。爲殿中判寺事。與鄭圃隱,吉冶隱。志同道合。與論國計。輒⾄流涕。嘗登滿⽉臺賦聯句。若閔{農隱,安富,直提學安省,鄭圃隱,掌令徐}甄,籠巖⾦澍,樞密李鍾學,沙川伯南⼄珍。皆⼀時淸流。遣意悽切。亦⾒交遊之盛。知國事不可爲。棄官歸⼭。散錄隱淪之蹟。題其⾸⽈。忠節⼈⾂之⼤寶。古之君⼦奉以周旋於蕩板之⽇。苟⼀失之。⾮⼈⾂道理。余亦亡國⼤夫。不勝⽲⿆之懷。摭記若干⼈。以愧後世爲⼈⾂懷⼆⼼者。⼜以詩⾒志⽈。我以⼈間無似⼈。肯作泉下有罪⾂。如將今⽇出新國。後世其柰辱及⾝。亦以戒⼦⽈。汝亦麗朝⾂。何可事新君。若知⼈⾂道。不忘前⺩恩。太祖屢徵。以書辭⽈上不負⺩⽒。下不負鄭夢周。屛居以終。墓在光州⾦塘⼭程郞洞⼦坐。夫⼈光州李⽒。掌令彥章⼥。雙封。三⼦有連判尹,有達進⼠,有通府使。判尹⼦儒。進⼠⼦任。府使⼦仁。鄭侍郞鴻慶序公遺集云孟⽒⾃國初。已爲顯族。孔⽒始著于中廟。屢登淸顯。朱⽒始著於正廟。雲漢昭回。譜牒增光。⽽夫何伊川之裔。淪落草野。深致慨惜之意。第念程{⽒克守先祖勿仕之訓。五百年鞱光鏟跡。此則程{⽒⽽已。久屈}必⼤伸。以先⽣⾼⾵偉節。兼爲⼤賢之後。闡揚必有其⽇。旣刊集矣。⼜將昭刻矣。昌⼤其⾨。將⾃今伊始矣。⼜有私慨于⼼者。遺⽂久爲⼱衍之藏。使其早⾏于世。使今⽇爲親⾂世⾂者讀之。則必有所感激于衷。⽽圖所以善後者矣。今於神道之刻。程{⽣炳鉉致其⾨⻑⽼之命⽽徵爲銘。⼤賢之裔。兼有扶植之義。不敢以⽼且病辭。銘⽈。所祖伊川。傳不傳學。啓我後⼈。彌萬彌億。遺孫東來。光華在國。矧是⾀修。克念祖德。獨喪三年。家訓斥佛。圃冶同志。出⼊禁闥。傷⼼國⾮。潸然霑臆。筮遯歸隱。麗社隨屋。以詩⾒志。戒⼦罔僕。不死爲恥。杜⾨屛跡。上下不負。辭嚴義直。萬世倫綱。賴以扶植。程{郞之阡。是公四尺。⾼⼭景⾏。疇敢不式。嶽崇五周丙辰 八月幸州 奇宇萬 撰中等河南伊川祀翰林院五經博士程廣仁篆十八世孫 南鎭 謹書번역고려 전중판시사 건천선생 정공 신도비명 [서문을 함께 씀]중주 성현의 많은 후예들이 살기 좋은 땅을 버리고 편방으로 옮겨 살고 계시는 분들은 공맹정주씨이니 하남정씨 이천선생의 후예도 또한 그 한분이시다. 그 당시 기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팔조지교로 백성을 가르치니 예악과 문물이 구시대와는 달리 많이 향상되었으나 그때 중화에서는 오호가 난립하여 세상이 어지러울 때 명도 이천 두 부자도 살고자 함에 그 난을 피하여 편방으로 옮기게 되었다.이때 동방의 문교가 점점 흥하여 융성하여지니 소중화라는 칭이 있었음은 유교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징조이며 정씨는 송태자 소사 우로 중시조를 삼으니 상서 원외랑 희진과 개부의삼사 휼과 태중대부 향은 소사후의 3세이다. 태중공이 명도 이천 양부자를 생하였고 이천의 자 단중은 관농 영전사요 한림학사는 비요 추밀원사는 응발이며 위위교승은 사조니 한림 공소등과 함께 노국공주를 모시고 고려에 처음으로 나와 그 벼슬이 전중시어사가 되니 건천선생의 고이며 비는 공씨이니 부는 전당태수의 재이다. 공의 휘는 광이요 자는 덕노이며 벼슬은 전중성판사이니 돌아가신 년월은 오래되어 알길 없으나 공의 천성이 순효하고 기절이 뛰어나 부모를 봉양함에 지체를 겸하였으며 상사에 있어서는 애를 극진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단상을 행하였으나 공께서는 꼭 3년을 행하시고 가묘를 세워 지성과 공경심을 다하니 당시의 풍속이 불교를 숭상함에 이를 개탄하며 이르시기를 우리 가문은 이천선조로부터 부처를 믿지 아니하였으며 배척하기를 심히 엄하게 하였다. 공민왕 4년 1355년 을미에 그 벼슬이 전중성판사가 되어 정포은 길야은과는 뜻이 같고 도가 같아 서로 국사를 논의할 때에는 어지러운 고려를 생각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일찍이 만월대에 올라 연구를 읊으시는데 농은 민안부와 직제학 안성과 정포은과 장령 서견과 농암 김수와 추밀이종학과 사천백 남을진은 당시의 손꼽는 청풍류로서 그 절친한 친교의 뜻을 가히 알 수 있었으며 고려가 망하자 다함께 은거 망복하니 벼슬을 버리고 광주 금당산에 돌아와 지금까지 행적을 산록하니 그 서문에 쓰기를 충절은 신하의 대보이며 옛 군자도 모든 국정이 문란해지면 바로잡도록 주선을 하였으니 진실한 충절은 한번 잃으면 신하의도리가 아니라 하였으며 이제 망국대부로서 고려국의 회포를 이기지 못하나 후세 사람으로서 신하가 되어두 마음을 품은 자는 부끄럽게 여겨왔다. 공의 뜻을 시로써 나타내기를 ‘나라는 인간이 무사한 사람으로서 지하에 가서도 죄 있는 신하가 될 것인가 만일 이제 새 나라에 나가 벼슬을 한다면 후세에 그 욕이 내 몸에 미쳐오는 것을 어찌하리오’ 하였다. 또한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 시에서 ‘너도 또한 고려의 신하로서 어찌 새 임금을 섬길 것인가 만일 신하로서 그 도리를 안다면 전왕의 은혜를 잊지 못하리라 하였다. 황익성공이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갈 때 고시를 써서 중하기를 그대는 청운을 타고 가는데 나는 청산을 바라보며 돌아가도다. 구름과 산이 이를 좇아 이별하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도다‘라 하였고 이태조께서 벼슬길에 나오라고 여러번 부르니 글로써 나타내기를 위로는 고려 왕씨를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정몽주를 저버릴 수 없으니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라 거절하였다.그 뒤 영영 은거하여 조용한 일생을 마치니 묘는 광주 금당산 정랑동 자좌에 있으며 부인은 광산이씨이니 장령 언장의 딸이며 묘는 쌍봉하였다. 세 아들 가운데 유련은 판윤이요 유달은 진사요 유통은 부사이다. 판윤의 자 유는 진사요 임도 진사이며 인은 부사이다. 가만히 돌아 보건데 정시랑 홍경이 유업을 서술한 글에서 말하기를 맹씨는 조선 국초로부터 이미 관직에 나가 벼슬을 하였고 공씨는 비로소 중종 때에 와서 학식과 문벌이 높아 규장각 홍문관 선원관의 벼슬에 올랐으며 주씨는 비로소 정조 때에 이르러 운막이 나타나 빛을 보게 되어 보첩이 증광되었는데 어찌하여 이천의 후손은 고려가 망하자 초야에 묻혀 벼슬을 아니 하셨는지! 후손들은 이를 깊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 당시 정씨는 선조의 말씀대로 벼슬을 하지 말라는 훈계를 굳게 지켜 조선 오백년에 그 훌륭한 공적이 나타나지 않고 감추어져 흔적이 없어졌으니 이는 오직 정씨 뿐이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버리고 이조에 나가 벼슬을 했었다면 정씨가문은 대성하였을 것이다.선생의 고풍위절이 겸지하여 대현의 후예가 틀림없으며 이 뒷날 그 훌륭한 공적과 행적이 크게 나타나 반드시 밝게 빛나는 그날이 꼭 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선조들의 문집을 간행하여 이를 세상에 널리 알렸으면 정씨 가문이 더욱 밝게 대창 하였으련만 은거생활로 초야에 묻혀 그 빛을 잃게 되었으니 오직 마음에 개탄할 일이나 건천선생께서 남긴 유문이라도 오래도록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으니 이를 세상에 널리 간행하여 친신 또는 세록신들이 그 문집을 읽고 정씨 가문을 알게 되었더라면 과연 충절은 신하의 대보로서 진실로 그 충절을 한 번 잃으면 신하의 도리가 아니라고 느끼게 되었을 것이며 ‘긍작유죄신 기나욕급신’과 그 ‘여역여조신 하가사신군’과 그 ‘상불부왕씨 하부정모씨’라 말씀하신 것을 보면 충절의 근본이 무엇인가를 후예들에게 꼭 전하고자 함이다. 이제 공의 모든 사실을 신도비에 낱낱이 새겨 후인으로 하여금 이를 보고 느끼도록 함이니 이미 비석이 갖추어져 정생 병현이 그 문중 어른의 명을 받아 비에 새기도록 대현의 후예가 이를 부탁하니 감히 늙었으나 이를 사양하지 못하노라.이천선생은 전치 못한 성리학을 후세에 전하여 어두웠던 당시의 후인들을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여 깨우쳐 주었으니 그 뒷날 그 광화가 우리나라에 까지 미쳐왔으며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큰 덕을 쌓아 삼년상을 홀로 행하고 가훈으로 불교를 배척하니 정포은과 길야은은 동지로서 금지된 대궐에 출입하고 국란과 국정의 어지러움에 상심하니 감추려했던 눈물이 문득 가슴에 적시도다.처음부터 은거생활로 돌아와 송도개경을 바라보며 시로써 모든 뜻을 나타내어 아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는 경계를 하였으나 죽지 못함이 부끄러울 뿐이며 두문불출 은거로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니 위로는 충절을 저버릴 수 없고 아래로는 친교의 도의를 저버릴 수 없었으나 오직 만세의 윤상이 깊이 뿌리내려 영원히 빛나리라. 금당산 정랑동에서 공이 평생을 조용히 마치시니 고산같이 우러러보며 스스로 고개가숙여지도다.1916년 병진 8월 기우만이 짓고 중등 하남 이천사 한림원 오경박사 정광인이 전서를 쓰고 십팔세 손 남진과 의진이 글씨를 쓰다.
    2018-06-13 | NO.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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