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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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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생-난계 박광생 묘비명
    광주시 남구 노대실로41번길 32-23 1935년난계박광생묘비명은 광주시 남구 노대동 6단지 아파트 뒷쪽 석류재 옆에 있다. 광산 김문옥(1901~1960)이 1935년 을해년에 글을 썼다.
    2018-10-26 | NO.52
  • 박광옥 묘비
    광주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서구 풍암동 벽진서원(운리사) 인근 음성박씨 풍암선산묘에 있는 회재 박광옥의 묘비 뒤에 새겨진 묘비문이 눈에 띈다. 자헌대부 우의정 허목許穆이 엮은 것이라 써있다. 묘비 글씨는 1952년 태인泰仁 박래호朴來鎬가 번역하고 영천永川 이돈흥李敦興이 썼다. 전체적인 내용은 회재의 출생과 성장과정, 효행, 임진왜란 참여, 학문 연마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허목이 박광옥을 평하는 글은 다음과 같다. 영광과 밀양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羅州牧使朴公墓表 先生姓朴氏。諱光玉。字景瑗。其先本陰城人。自四世祖太學生員繼陽。始居光州。子孫遂爲光州人。先生有至性。生七歲。先府君歿。其哭泣持喪。旣以善行聞。及長。事母至孝。居家奉先。禮節甚修。人愈益賢之。二十一。陞上庠。嘉靖中。修鄕學。先生作學規。出其財。增學田。立家塾。敎授生徒。弟子日進。及先夫人歿。旣葬。啜粥哭。幾滅性。牧使崔應龍以禮勉之。令返魂歸。我 昭敬卽位。召用才學之士。有大臣薦之。授內侍敎官。三年陞宗簿主簿。尋補雲峯縣監。未赴。登甲科。因兼記事官。旣到任。修縣學。出羨餘數百斛穀。以供諸生。選縣中子弟。令日居而講學焉。旣去。縣父老刻石。紀其治績。後繼爲湖南,湖西都事。己卯。入爲禮曹正郞兼記注官。一年。移司憲府持平。俄改成均館直講。夏。差行臺賀聖節。還。復拜持平。累轉爲相禮兼編修官。癸未。出守靈光。後年。召爲成均館司藝,知製 敎。辭不就。三年。復出密陽。先生每爲邑。必禮接士大夫。論政要。專以興學爲務。己丑。復入爲司藝,司贍寺正。尋移太常。以病還鄕里。壬辰夏。有倭寇。郡縣皆潰。及賊陷尙州。先生見牧使丁允祐曰。賊若逾嶺。京師急矣。公盍往說方伯。急引兵直趨畿甸。以捍衛京師乎。允祐心然之。卽從其計策。官軍旣連敗陷沒。而賊長驅。五月。 車駕已西幸。又湖南兵敗於公州。人心大亂。先生與金千鎰,高敬命。謀擧兵伐賊。約束旣定。高敬命起兵於潭陽。而先生病不行。召募子弟。治軍食。備器械。以助兵勢。金千鎰遺書先生曰。大軍一出。本根不固。無所可恃也。用兵利鈍。其權專在足下。時權慄爲光州。自隋城不利。常憤恨。日傳檄郡縣。召集義旅。諸散軍稍稍有應者。先生分遣父老。曉諭傍邑。致數千人。權慄大悅。每事必咨於先生。七月。拜判校。俄改羅州牧使。先生曰。雖病力。義不辭難。至州能辛苦。務合人心。收散兵。欲再張伐賊聲勢。計畫已完。病篤。解印綬歸。其十月丙午歿。人皆惜之。臨歿。遺命薄葬。閏月丁酉。不用槨。葬於雲洞。雲洞者。其先墓所在也。先生德器甚厚。和而能嚴。使人愛而可畏。對人未嘗言人之過。而好揚人之善。非其義也。不以取人。亦不以與人。其學晩而尤用心於易禮。亦博學多通。如高峯,玉溪,思庵諸老德所推許云。好節儉。累典州,郡。不飾廚傳。或言之。先生曰。吾不願爲飮食之人。人愧服。常建崇本堂於雲洞。出臧獲以供墳墓之祭。每以朔望。率宗族子弟。講信行禮。與鄕人立約條。一以厚風俗篤人倫爲本。扁其所居室曰懷齋。故學者稱之曰懷齋先生。先生歿後九年。南方學者立祠以享祀不絶也。先生自三世居光州。伯父鵬爲翰林。父鯤爲司藝。先生重於南州。號爲名族。母尹氏。籍海平。慶安道察訪仁孫女也。先生 明世宗嘉靖五年我 恭僖二十一年正月己酉生。 神宗萬曆二十一年我昭敬二十六年歿。年六十八。先生無子。有女婿四人。禮曹正郞柳思敬,士人盧士詹,金隆址,宣敎郞林悏。今盧,柳絶嗣。而外孫前尙州牧使林㙐,前翊衛司侍直林㙔,士人金圻。皆有子孫甚多。기언 별집 제25권 / 구묘문(丘墓文) :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공(朴公) 묘표 선생은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광옥(光玉)이며 자는 경원(景瑗)이다. 그 선조는 본래 음성인(陰城人)이다. 4세조 태학 생원 계양(繼陽)으로부터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자손들이 드디어 광주인이 되었다. 선생은 천성이 지극하였다.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곡읍(哭泣)과 거상(居喪)을 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장성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집에 거처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에 예절을 매우 잘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가정 연간에 향학(鄕學)을 보수할 당시 선생이 학규(學規)를 지었고 재물을 출연하여 학전(學田)을 늘렸으며, 가숙(家塾)을 세워 생도(生徒)를 가르치니 제자가 날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죽만 먹으며 곡을 하여 거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목사(牧使) 최응룡(崔應龍)이 예(禮)를 따르도록 권면하여 반혼(返魂)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우리 선조가 즉위하여 재주와 학식이 있는 선비를 불러 쓸 적에,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다. 3년 만에 종부시 주부에 올랐다가 얼마 뒤 운봉 현감(雲峯縣監)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갑과(甲科)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임소에 도착해서는 고을의 학교를 증수(增修)하여 여분의 곡식 수백 곡(斛)을 내어 제생(諸生)의 비용에 제공하고, 고을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날마다 학교에 거처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떠난 뒤에는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그 치적을 비(碑)에 새겨 세워두고 기념하였다. 뒤에 잇달아 호남과 호서의 도사(都事)가 되었다.기묘년(1579, 선조12)에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1년 만에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고, 조금 있다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여름에 종사관에 차임되어 중국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지평에 제배되었다. 여러 번 승진되어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고 편수관을 겸하였다.계미년(1583)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다음 해에 불러서 성균관사예 지제교를 삼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3년 만에 다시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선생은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사대부를 예우하였고, 정사의 요체를 논하여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다시 들어와 사예(司藝)와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고, 조금 있다가 태상시로 옮겨졌는데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침략해 와 군현(郡縣)들이 모두 무너졌다. 왜적이 상주(尙州)를 함락하자, 선생이 목사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말하기를,“적이 만약 새재를 넘으면 서울이 위급하게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 방백(方伯)을 설득하여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기전(畿田)으로 달려가 서울을 호위하지 않습니까.”하니, 정윤우가 옳게 여겨 즉시 선생의 계책을 따랐다. 관군(官軍)이 잇달아 패배하여 함몰되고 왜적이 승승장구하였다. 5월에 임금이 이미 서쪽으로 피난한 데다 또 호남의 군사가 공주(公州)에서 패배하니, 인심이 크게 혼란하였다. 선생이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과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칠 계획을 세우고 약속(約束)을 이미 정했는데, 고경명이 담양(潭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선생은 병환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고 자제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마련하고 무기를 갖추어 병세(兵勢)를 도왔다. 김천일이 선생에게 글을 보내기를,“대군(大軍)이 일단 출병했으나 바탕이 튼튼하지 않으면 믿을 데가 없습니다. 용병(用兵)의 승패는 오로지 족하(足下)에게 달렸습니다.”하였다. 당시에 권율(權慄)이 광주(光州)를 맡고 있었는데, 수성(隋城 수원(水原))에서 패전한 뒤로 항상 분한(憤恨)을 품고 날마다 군현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차츰 호응해 왔다. 선생이 부로들을 나누어 보내 이웃 고을들을 깨우쳐 설득하여 수천 명을 모으니, 권율이 매우 기뻐하였고 일마다 반드시 선생에게 자문하였다. 7월에 판교(判校)에 제배되었고, 조금 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겨졌다. 선생이 말하기를,“비록 신병이 위중하나 의리로 보아 사직할 수는 없다.”하였다. 나주에 이르러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인심을 단합시키는 데에 힘썼다.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 다시 왜적을 공략하려고 계획을 다 세웠는데, 신병이 위독해져서 사직하고 돌아왔다.그해 10월 병오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였다. 윤달 정유일에 곽(槨)을 쓰지 않고 운동(雲洞)에 장사 지냈다. 운동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선생은 덕성과 기량이 매우 두텁고 컸다.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친애하게 하면서도 경외하게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일찍이 남의 허물을 말한 적이 없으며 남의 선행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 옳지 아니하면 남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남에게 주지도 않았다. 그 학문이 늦게 이루어졌는데, 《주역(周易)》과 예경(禮經)에 더욱 마음을 썼고 또한 널리 배워 두루 달통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옥계(玉溪) 노진(盧禛), 사암(思庵) 박순(朴淳)같이 학덕(學德)을 갖춘 여러 원로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검소함을 좋아하여 누차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음식을 잘 차려 먹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말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나는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일찍이 운동에 숭본당(崇本堂)을 건립하고 노복을 그곳에 붙여 분묘의 제사를 돕게 하였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종족의 자제들을 인솔하고 신의(信義)를 강론하고 예(禮)를 행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약조를 세울 때에는 한결같이 풍속을 두텁게 하고 인륜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 거처하는 방의 편액(扁額)을 회재(懷齋)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회재 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남방(南方)의 학도들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계속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선생은 위로 3세 때부터 광주(光州)에 살았다. 큰아버지 붕(鵬)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아버지 곤(鯤)은 사예(司藝)를 지냈다. 선생이 남주(南州)에서 중망(重望)을 얻어 명족(名族)으로 이름이 났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며,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 윤인(尹仁)의 손녀이다.선생은 명나라 세종 가정 5년인 우리 중종 21년(1526) 1월 기유일에 태어나 명나라 신종 만력 21년인 우리 선조 26년(1593)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8세였다. 선생은 아들이 없고 사위 네 사람이 있는데, 예조 정랑 유사경(柳思敬), 사인(士人) 노사첨(盧士詹), 김융지(金隆址), 선교랑(宣敎郞) 임협(林悏)이다. 지금 노사첨과 유사경은 후손이 끊어졌고, 외손인 전(前) 상주 목사(尙州牧使) 임타(林㙐), 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임위(林㙔), 사인 김기(金圻)는 모두 많은 자손을 두었다.[주-D001]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 상상은 국가 설치 대학을 가리키며, 상상에 올랐음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음을 뜻한다. 박광옥(朴光玉)은 1546년(명종1) 식년시에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司馬榜目》[주-D002]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음식을 밝히는 자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여긴다. 작은 것〔口腹〕을 기르느라 큰 것〔心志〕을 잃기 때문이다.” 하였다.[주-D003] 3세 : 이 묘표의 앞부분에 “4세조부터 광주에 살았다.”라고 하였으니, 오류이거나 아니면 ‘4세조’를 제외한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2018-05-25 | NO.51
  • 박광옥- 나주 목사(羅州牧使) 박공(朴公) 묘표
    기언 별집 제25권 / 구묘문(丘墓文) 선생은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광옥(光玉)이며 자는 경원(景瑗)이다. 그 선조는 본래 음성인(陰城人)이다. 4세조 태학 생원 계양(繼陽)으로부터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자손들이 드디어 광주인이 되었다.선생은 천성이 지극하였다.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데, 곡읍(哭泣)과 거상(居喪)을 잘하여 이름이 알려졌다. 장성하여서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섬겼고 집에 거처하고 제사를 받드는 일에 예절을 매우 잘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훌륭하게 여겼다.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가정 연간에 향학(鄕學)을 보수할 당시 선생이 학규(學規)를 지었고 재물을 출연하여 학전(學田)을 늘렸으며, 가숙(家塾)을 세워 생도(生徒)를 가르치니 제자가 날로 찾아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장례를 치르고 나서 죽만 먹으며 곡을 하여 거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목사(牧使) 최응룡(崔應龍)이 예(禮)를 따르도록 권면하여 반혼(返魂)하여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우리 선조가 즉위하여 재주와 학식이 있는 선비를 불러 쓸 적에, 대신(大臣)의 천거가 있어 내시 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다. 3년 만에 종부시 주부에 올랐다가 얼마 뒤 운봉 현감(雲峯縣監)에 보임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갑과(甲科)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므로 기사관(記事官)을 겸하였다. 임소에 도착해서는 고을의 학교를 증수(增修)하여 여분의 곡식 수백 곡(斛)을 내어 제생(諸生)의 비용에 제공하고, 고을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날마다 학교에 거처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떠난 뒤에는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그 치적을 비(碑)에 새겨 세워두고 기념하였다. 뒤에 잇달아 호남과 호서의 도사(都事)가 되었다.기묘년(1579, 선조12)에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였다. 1년 만에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고, 조금 있다가 성균관 직강이 되었다. 여름에 종사관에 차임되어 중국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하였으며, 돌아와서는 다시 지평에 제배되었다. 여러 번 승진되어 통례원 상례(通禮院相禮)가 되었고 편수관을 겸하였다.계미년(1583)에 영광 군수(靈光郡守)로 나갔다. 다음 해에 불러서 성균관사예 지제교를 삼았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3년 만에 다시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나갔다. 선생은 고을을 맡아 다스릴 때에는 반드시 사대부를 예우하였고, 정사의 요체를 논하여 오로지 학교를 일으키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기축년(1589, 선조22)에 다시 들어와 사예(司藝)와 사섬시 정(司贍寺正)이 되었고, 조금 있다가 태상시로 옮겨졌는데 병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왔다.임진년(1592) 여름에 왜적이 침략해 와 군현(郡縣)들이 모두 무너졌다. 왜적이 상주(尙州)를 함락하자, 선생이 목사 정윤우(丁允祐)를 만나 말하기를,“적이 만약 새재를 넘으면 서울이 위급하게 될 것입니다. 공은 어찌 방백(方伯)을 설득하여 서둘러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기전(畿田)으로 달려가 서울을 호위하지 않습니까.”하니, 정윤우가 옳게 여겨 즉시 선생의 계책을 따랐다. 관군(官軍)이 잇달아 패배하여 함몰되고 왜적이 승승장구하였다. 5월에 임금이 이미 서쪽으로 피난한 데다 또 호남의 군사가 공주(公州)에서 패배하니, 인심이 크게 혼란하였다. 선생이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과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칠 계획을 세우고 약속(約束)을 이미 정했는데, 고경명이 담양(潭陽)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선생은 병환 때문에 시행하지 못하고 자제들을 모집하고 군량을 마련하고 무기를 갖추어 병세(兵勢)를 도왔다. 김천일이 선생에게 글을 보내기를,“대군(大軍)이 일단 출병했으나 바탕이 튼튼하지 않으면 믿을 데가 없습니다. 용병(用兵)의 승패는 오로지 족하(足下)에게 달렸습니다.”하였다. 당시에 권율(權慄)이 광주(光州)를 맡고 있었는데, 수성(隋城 수원(水原))에서 패전한 뒤로 항상 분한(憤恨)을 품고 날마다 군현에 격문(檄文)을 보내 의병을 모집하니, 흩어졌던 군사들이 차츰 호응해 왔다. 선생이 부로들을 나누어 보내 이웃 고을들을 깨우쳐 설득하여 수천 명을 모으니, 권율이 매우 기뻐하였고 일마다 반드시 선생에게 자문하였다. 7월에 판교(判校)에 제배되었고, 조금 있다가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옮겨졌다. 선생이 말하기를,“비록 신병이 위중하나 의리로 보아 사직할 수는 없다.”하였다. 나주에 이르러 고생을 참고 견디면서 인심을 단합시키는 데에 힘썼다.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아 다시 왜적을 공략하려고 계획을 다 세웠는데, 신병이 위독해져서 사직하고 돌아왔다.그해 10월 병오일에 세상을 떠나니, 사람들이 모두들 애석하게 여겼다. 죽음을 앞에 두고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고 유언하였다. 윤달 정유일에 곽(槨)을 쓰지 않고 운동(雲洞)에 장사 지냈다. 운동은 선대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선생은 덕성과 기량이 매우 두텁고 컸다. 온화하면서도 엄격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친애하게 하면서도 경외하게 하였다. 사람을 대할 때에는 일찍이 남의 허물을 말한 적이 없으며 남의 선행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였다. 옳지 아니하면 남에게서 받지도 않았고 남에게 주지도 않았다. 그 학문이 늦게 이루어졌는데, 《주역(周易)》과 예경(禮經)에 더욱 마음을 썼고 또한 널리 배워 두루 달통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옥계(玉溪) 노진(盧禛), 사암(思庵) 박순(朴淳)같이 학덕(學德)을 갖춘 여러 원로들에게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검소함을 좋아하여 누차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음식을 잘 차려 먹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것에 대해 말했는데, 선생이 말하기를,“나는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하니, 그 사람이 부끄러워하며 감복하였다.일찍이 운동에 숭본당(崇本堂)을 건립하고 노복을 그곳에 붙여 분묘의 제사를 돕게 하였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는 종족의 자제들을 인솔하고 신의(信義)를 강론하고 예(禮)를 행하였다. 고을 사람들과 약조를 세울 때에는 한결같이 풍속을 두텁게 하고 인륜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았다. 그 거처하는 방의 편액(扁額)을 회재(懷齋)라 하였으므로 배우는 이들이 회재 선생이라 불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에 남방(南方)의 학도들이 사당(祠堂)을 세우고 계속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선생은 위로 3세 때부터 광주(光州)에 살았다. 큰아버지 붕(鵬)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아버지 곤(鯤)은 사예(司藝)를 지냈다. 선생이 남주(南州)에서 중망(重望)을 얻어 명족(名族)으로 이름이 났다. 어머니 윤씨(尹氏)는 본관이 해평(海平)이며, 경안도 찰방(慶安道察訪) 윤인(尹仁)의 손녀이다.선생은 명나라 세종 가정 5년인 우리 중종 21년(1526) 1월 기유일에 태어나 명나라 신종 만력 21년인 우리 선조 26년(1593)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 68세였다. 선생은 아들이 없고 사위 네 사람이 있는데, 예조 정랑 유사경(柳思敬), 사인(士人) 노사첨(盧士詹), 김융지(金隆址), 선교랑(宣敎郞) 임협(林悏)이다. 지금 노사첨과 유사경은 후손이 끊어졌고, 외손인 전(前) 상주 목사(尙州牧使) 임타(林㙐), 전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 임위(林㙔), 사인 김기(金圻)는 모두 많은 자손을 두었다.[주-D001] 21세에 상상(上庠)에 올랐다 : 상상은 국가 설치 대학을 가리키며, 상상에 올랐음은 사마시에 합격하였음을 뜻한다. 박광옥(朴光玉)은 1546년(명종1) 식년시에서 사마 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였다. 《司馬榜目》[주-D002] 음식이나 밝히는 사람 :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음식을 밝히는 자는 사람들이 천박하게 여긴다. 작은 것〔口腹〕을 기르느라 큰 것〔心志〕을 잃기 때문이다.” 하였다.[주-D003] 3세 : 이 묘표의 앞부분에 “4세조부터 광주에 살았다.”라고 하였으니, 오류이거나 아니면 ‘4세조’를 제외한 대수(代數)를 말하는 것인 듯하다.
    2022-05-03 | NO.50
  • 박상-눌재 박상 묘비
    광주시 서구 사동길 101눌재訥齋 묘비에는 有明朝鮮 贈吏曹判書 謚文簡公 訥齋 朴先生之墓 贈貞夫人 晉陽柳氏祔左라고 기록되어 있다. 묘비는 조카인 사암 박순이 중국에서 가져온 백비에 가까운 돌로 알려져 있다. 눌재 박상의 묘소는 내외분을 나란히 안치한 쌍분雙墳이다. 후손에 따르면 박상은 꽃에 대한 시문을 다수 남겼다고 한다. 눌재 박상 기념사업으로 꽃에 관련된 시비 ‘백일홍’을 절골마을 입구에, ‘연상홍’을 봉산재를 지나 봉황정 옆에 세웠다.
    2018-05-25 | NO.49
  • 박지흥-찬성공 박지흥 묘역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산 92 부근(송학산)서창 절골마을의 입향조인 박지흥의 묘소가 있다. 그의 아들이 눌재 박상이며 손자가 사암 박순이다.
    2018-12-07 | NO.48
  • 범기생-죽천 범선생 순의숭모비
    광주시 북구 생용동 136-1(생용마을 앞)1962년광주시 북구 훼미리랜드  앞에는  범씨들의 자가촌  생룡부락이 있다. 마을 깊숙한 314번지 구릉에는  용호사와  복룡사유허비각(伏龍祠遺墟碑閣)과 입구에는 죽천범선생순의숭모비(竹川范先生殉義崇慕碑)가 있다. 이 비는 李丙燾 짓고 金忠顯(대서) 李淳榮 쓰다.죽천(竹川)  범기생(范起生)의 순절을 기리는 비로 그는 1553년(명종 8)∼1593년(선조 26). 조선 중기 의병장. 자는 원보(元甫)이고, 호는 죽천(竹川)이다.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광주 생용(生龍)에서 태어났다.고려 말의 충신이자 학자인 문충공(文忠公) 복애(伏崖) 범세동(范世東)의 9세손이며, 학봉(鶴峰) 범가용(范可容)과 용계(龍溪) 범천배(范天培)의 후손이다. 부친 범홍로(范弘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으로는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 함께 참여했다 순절한 성와(省窩) 범기봉(范起鳳)이 있다.우계(牛溪)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성리학을 배웠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 최경회(崔慶會), 고종후(高從厚) 등의 의병장들과 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 왜군을 물리치는 데 많은 공훈을 세웠다.1593년(선조 26) 6월에는 왜군이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자, 조정에서는 도원사(都元師) 김명원(金明元)과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 등을 의령(宜寧)으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숫자와 기세에 눌려 더 이상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김천일‧최경회‧고종후 그리고 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 황진(黃進)과 6만 명 진주(晉州) 백성들은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치다 결국 역부족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때 그는 동생 범기봉과 함께 임진왜란 최대 격전지인 진주성 싸움에 참가하여 치열하게 싸우다가 김천일‧최경회‧고종후 등의 의병장들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2018-11-13 | NO.47
  • 범세동선생묘范世東先生墓
    범세동선생묘范世東先生墓는 광산구 덕림동 산 94-1에 있다.고려시대의 학자 범세동(范世東)의 묘로 1998년 2월 12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범세동의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이며, 錦城이 본관이다. 증조인 承祖가 南宋의 예부시랑을 지냈는데 남송이 멸망하자 고려에 망명하였고, 조부가 여진 정벌에 공을 세워 錦城君에 책봉됨으로써 금성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고 전한다. 범세동은 정몽주에게서 학문을 익혔으며, 공민왕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德寧府尹·諫議大夫를 역임하였다. 조선왕조의 개창과 함께 세상을 등지고 70여 인과 더불어 두문동(杜門洞)에 숨어들었다가, 태조가 사람을 시켜 불을 지르자 몸을 피해 광주(광산구 본량)에 은거하였다. 후에 태조와 태종이 관직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응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환단고기》에서는 범장(范樟) 혹은 휴애거사 범장(休崖居士 范樟)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그가 〈북부여기〉를 썼다고 언급되어 있다.1825년(순조 25) 범씨들의 집성촌인 광주시 북구 생룡동에 복룡사(伏龍祠)가 세워지면서 그곳에 배향되었다. 범세동은 은거생활 중 경서를 읽으며 저술에 종사하였다. 그가 지었다고 하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및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 《화해사전(華海師全)》이 전해지고 있다. 묘역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문인석·상석·양석·동자석·망주 등의 석물이 있는데, 묘비와 문인석을 제외하고는 최근에 보완한 것이다.  
    2020-05-16 | NO.46
  • 사암박순선생신도비명
    광주시 광산구박순(1523∼1589)의 신도비인 思庵朴淳先生神道碑銘은 우암 송시열이 지었다고 하는 데 위치를 알 수 없었다. 그동안 기록 착오로 경기도 포천 옥병서원 앞에 있는 것을 광산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순은 후손이 없자 양자를 들이지 않고 외동딸이 시집(군수 이희간에게 출가)간 포천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마쳤다. 1909년 5월에 외십대손 이승회가 전액을 하고 외십일대손 이최수가 글을 써 신도비를 세웠다. 광산구 소촌동의 송호영당에는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2018-12-02 | NO.45
  • 송천선생양공신도비명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32-2송천 양응정 묘역은 1581년(선조 14) 유림들이 세운 묘비와 석물이 있다. 松川先生梁公神道碑銘은 송천 양응정의 비이다. 여흥(驪興) 민병승(閔丙承)이 찬했다.이곳에는 양응정의 아들이며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의 묘와 양응정의 손자인 한림학사(翰林學士) 양만용(梁曼容)의 묘가 있다.조선 조 명종~선조 때의 문장가이자 문신인 송천 양응정의 선비정신을 기리기 위해 그 묘역을 기념물로 지정하였으며, 산 아래(동호동 46)에 제각(祭閣)이 있고 묘 앞에 민병승이 찬(撰)한 신도비(神道碑)가 있으며 묘제일은 음력 10월 10일이다.
    2018-12-02 | NO.44
  • 수촌 고정봉 묘역
    광주시 남구 이장동수촌 고정봉⽔村 ⾼廷鳳(1743∼1822)의 묘역에 묘비는 정원용이 찬했다.髙廷鳳의 자는 鳴國이요, 호는 水村,  부친 髙暎과 모친 서산김씨 麒瑞의 딸 사이에서 1745년에 태어났다. 모친이 태몽에서 상서롭게 떠오르는 해를 안는 꿈을 꾸어 어려서의 이름은 ‘捧日’이라고 불렸다. 고정봉의 집안은 역대로 변란이 있을 때 나라에 충성을 다한 인물이 다수 출현했었다. 가령, 6대조인 髙敬命은 임란 때 의병장으로서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고, 5대조 髙從厚는 부친인 고경명과 동생 髙因厚가 순절하자 復讐義兵將이라 칭하고 진주성에서 金千鎰 등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그런데 고정봉의 부친 때에 이르자 집안의 이러한 명성과는 달리 선조의 위업이 점차 쇠해지고 있었는데, 따라서 고정봉에게 건 기대가 남달랐다. 이로써 고정봉은 주변의 뜻에 부응하기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집안은 비록 쇠미하나 형제간의 우의는 돈독하였고, 지조는 항상 간직하고 있었다. 고정봉의 나이 55세 무렵(1797년)에 정조는 직접 교정한 眞西山의 <대학연의>와 邱瓊山의 <대학연의보>초본을 광주에 보내어 고증과 정정을 하도록 했는데, 고정봉의 것이 가장 나은 것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고경명의 후예라 하여 특별 우대 조치를 내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전라도사라는 벼슬을 하사받게 되었고, 3년이 지난 다음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비인현감 등을 역임하는데,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유고집으로 <水村集>이 있다. 목활자본 7권 3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에는 시문이, 권2에는 書ㆍ家狀ㆍ遺墨書 등이, 권3에는 疏ㆍ賦ㆍ詩義 등이, 권4에는 序ㆍ記ㆍ跋ㆍ說ㆍ銘ㆍ賦ㆍ辭가, 권5에는 雜著ㆍ附錄ㆍ書가, 권6~7까지는 경서에 대한 글이 각각 실려져 있다.2019.1.8. 수정
    2018-12-12 | NO.43
  • 양곡 오공(오두인) 신도비명(陽谷吳公神道碑銘) - 여한십가문초 제5권
    양곡 오공(오두인) 신도비명(陽谷吳公神道碑銘) - 여한십가문초 제5권, 왕성순(王性淳) 집(輯) ○ 이기소(李箕紹) 참정(參訂) ○ 공성학(孔聖學) 참정(參訂) / 한 농암 김창협(1651~1708) 문[韓金農巖文] [주-C001] 김창협(金昌協) :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 안동인(安東人)이다. 숙종 임술년(1682) 문과에 장원, 벼슬은 홍문관 대제학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01] 정불식(程不識) : 한(漢)나라 사람으로 처음에 장락위위(長樂衛尉)를 지냈는데 나중에는 이광(李廣)과 더불어 변군(邊郡)의 태수가 되었다가 호(胡)를 쳐서 일시에 명장이 되었다. 《漢書 卷54 李廣傳》[주-D002] 삼자(三字)의 직함 : 봉조하(奉朝賀)를 말한다. 봉조하는 종이품(從二品)의 관리가 벼슬을 그만둔 뒤에 임명되던 벼슬이다.[주-D003] 그때 나이가 66세였다 : ‘그때 나이가 66세였다[時年六十六]’가 《농암집(農巖集)》에는 빠져 있다.[주-D004] 경상 병사(慶尙兵使) : 《농암집(農巖集)》에는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되어 있다.[주-D005] 감역(監役) : 《농암집(農巖集)》에는 ‘학생(學生)’으로 되어 있다.[주-D006] 맹분과 전저 : 맹분(孟賁)은 전국 시대의 용사(勇士)로 물속에서는 교룡(蛟龍)을 피하지 않았고, 육지에서는 호랑이를 피하지 아니하였으며, 노성(怒聲)을 발하면 하늘까지 울렸다고 한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진 무왕(秦武王)이 용사를 좋아하여 제나라 맹분의 무리가 갔는데 맹분은 소뿔을 산 채로 뽑을 수 있었다.” 하였다. 전저(專諸)는 춘추 시대 오(吳)나라 사람이다. 오의 공자(公子) 광(光)을 위하여 왕료(王僚)를 죽이고자 비수를 고기 뱃속에 숨겨가지고 들어가 그를 찔러 죽였으나 자기도 그 자리에서 잡혀 죽임을 당하였다. 《史記 卷86 刺客列傳》[주-D007] 유적(褕翟) : 유적은 황후(皇后)의 제복(祭服)을 말한다.[주-D008] 곤의(壼儀) : 곤의는 곤전(坤殿)을 말한다.
    2020-09-24 | NO.42
  • 양림동 선교사묘지
    광주시 남구 제중로 77 호남신학대양림동 선교사 묘지는 광주에 최초로 기독교를 전파하고 개화의 새 물결과 일제 치하에서 구국 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던 22인의 선교사가 묻혀 있는 곳이다. 광주광역시 양림동은 전라남도 최초의 선교사로 광주에서 활동하던 배유지 목사와 클레멘트 오웬의 주된 선교지였다. 오웬(c.c.Owen, 1867~1909)은 목포, 광주에서 선교활동을 했고 1904년 양림교회를 세웠다. 당시 사람들은 오웬을 ‘오 목사(吳 牧師)’라 불렀고, 그의 묘비에도 ‘님’이라는 존칭 없이 ‘吳牧師’라고만 새겨져 있다. 뒤에 함께 활동했던 유진 벨(Eugene Bell, 배유지, 1868-1925)의 묘비도 있다.지금은 묘비가 44기로 늘었다. 새로 들어선 검은색 묘비는 대부분 가묘이다. 이 지역의 근·현대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묘지에는 지금까지 23인의 선교사가 묻혀 있으나 묘비명이 있는 21인을 소개한다.ⓐ Paul Crane (1889-1919) ⓑ Owen(吳牧師)(1867-1909)ⓒ Eual Granam (1889.5.27-1930) ⓓ Louis G. Brand (1894-1938)ⓔ Homd Koox Dodson (1884-1924) ⓕ Eugene Bell(1868-1925)ⓖ Marguret W. Bell. Norfolk VA. Nov, 26, 1873 Kwang ju. Korea march. 26. 1919 till he Kcomeⓗ Lillian Andrus, Southall, nov, 4. 1938ⓘ Roberta GeGile Goit, Entered This life, Sept 7th 1911 entered eternal life April 26th 1913ⓙ Thomas Hall woods Goil entered This life Sept 14th 1909 entered eternal life April 27th 1913ⓚ Tholma-Thumm feb. 7. 1902 may 25 1931ⓛ Elizabeth Lehtia Crane (1917-1918)ⓜ 미국인 로제세 의사 장모 롯스부인 묘 (1927.4)ⓝ Tohn Curtis Crane Jr Har-DCT 1921ⓞ Philpt Codington AUG 13 1960 - AUG 9. 1967ⓟ Jessie S, levie born may 30. 1896. Died SEPT 28. 1931ⓠ Elisabeth. J. Shepping Born SEPT 26. 1980 - died June 26 1934ⓡ kathry Newman-G Limet Born December 12. 1987 - died march 27. 1926ⓢ Gertrude p. Chapman, nov. I 1869 - march 24 1928ⓣ Elisabeth D. Nicbet oct 23 1922 - Jan 8. 1923ⓤ 校長 뉴애나지묘(生年月日 1869.1.19 - 逝年月日 1920.2.2) 主后 1923年 四月日 貞明女學校 同窓會立碑 墓主 柳瑞伯
    2018-06-20 | NO.41
  • 양만용선생 묘역
    주시 광산구 동호동 산 32-21986년한림학사翰林學士 양공만용梁公曼容  숙부인淑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 墓 양만용(1598∼1651)의 본관은 제주. 양산축梁山軸의 아들이며, 강항姜沆ㆍ박동열朴東說의 문인이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역임하고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據梧齋梁曼容先生墓碑는 愼天翊이 짓다. 묘비명을 지은 신천익(1592~1661)은 1612년 문과을과에 들어 정자 이조참의를 지내다 영암에 은거했다가 효종 때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 이조참판 한성부윤 등을 지냈다.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의 같은 제자이다. 據梧梁曼容[주:字長卿山軸子松川應鼎孫仁祖朝科歷翰林官止應敎] 거오(거오재) 양만용 선생 묘는 광산구 동호동 장산재 인근에 있다.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장경長卿이며 1633년(인조11 계유) 증광시增廣試에 乙科7 로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을 거쳐 사복시 정에 이르렀다.據梧歌 梁曼容 字長卿 학포선생은 나의 증조부요 복수장 고종후 장군의 외손이라 어미가 왜적을 피해 유복자를 않고서 마을 뒤 숲 언덕에 옮기니 한 마리 큰 뱀이 그를 에워싸자 문득 새가 날개로 울타리를 만들어 보호한다 어머니는 몸을 못 움직인 채 뱀을 경계하니 양씨의 혈맥은 오직 유복자 뿐이라 네가 나를 해치고자 하는 것도 하늘의 운인데 아니라면 어찌 양씨 가문 위해 피하지 않느냐 뱀이 에워쌈을 풀고 연못 가운데로 들어가자 연못 물이 끓는 것처럼 용의 비늘 번득이는 구나 열 세살에 강항 수은 선생을 찾아가 배우니 성현 백가의 근원을 통하고 스물 일곱에 이괄의 난리 당해서 포의로 의병 일으켜 격문을 보냈다 서른에 또 오랑캐 난을 만나 사계 김장생선생과 의병을 모아 종사관이 되었다. 서른 여섯에 과거장에서 생원과 진사 문과에 양과에 합격하여 붉은 기를 꽂았구나 한림원의 춘방거쳐 호당과 옥서에도 참여하며 자리는 높았지만 스스로 높은 체 아니 하였다 중략~~~~~~~~ 서른 아홉에 병자호란 난리를 만나 다섯 현인과 힘을 합쳐 청주에 진을 치니 성 아래의 맹세를 차마 말하지 못하는 구나 강개하여 시 이루니 이하는 거오제의 충주에서 남한산성을 바라보고 지은 시 강상은 긴 세월 하늘과 땅에 뻐쳐 있네 오랑캐를 평정할 계책은 없고 갓 끈만 늘어져 있으니 칼을 어루만지나 한밤의 마음은 평온치 못하구나 남한산성 머리의 달을 바라보지만 달빛은 외로운 신하의 한 조각 정성을 비출 뿐이다.
    2018-12-02 | NO.40
  • 양송천묘역梁松川墓域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 32-2에 있는 조선 중기의 문신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의 묘. 1978년 9월 22일 광주광역시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양응정(1519~1581)의 자는 공섭(公燮), 호가 송천(松川)으로 본관이 濟州이며, 홍문 관 교리를 역임한 학포 양팽손(學圃 梁彭孫)의 아들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 가, 청요직을 두루 거쳐 성균관 대사성·대사간·이조참의에까지 올랐다. 때로 모함을 입 어 外職을 전전하기 여러 차례였으며, 후에 박산마을(光山區 博湖洞)로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몰두하기도 하였다. 그의 훈도를 받은 제자들 중에는 송강 정철을 위시하여 옥 봉 백광훈(玉峰 白光勳)·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등 훗날 이름을 날린 인물들이 많았다.송천은 문장에 앞서 경학을 익히고 심성을 함양할 것을 내세우던, 도학자로서의 풍모를 강하게 풍기던 선비였다. 그것은 문장으로 이름이 있는 문인 송강과 백광성(白光城)·홍 련(洪蓮) 등에게, ‘글로 헛이름을 얻어 비방거리가 되는 것은 儒者의 수치이니 행여 문 장가가 되려 애쓰지 말라’거나, 혹은 ‘窮理의 뿌리 없이 문장에 능한 자는 있을 수 없다’ 고 경계하였던 데서 알 수가 있다. 또한 자녀들에게, ‘크게는 三綱五常에서부터 작게는 一事一物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으니, 修養의 길에는 男女의 다름 이 없다’면서, ‘忠信·愼獨·無自欺야말로 학문의 요체’이며, 朱子가 말한 대로 ‘모든 것은 忠과 孝의 밖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梁氏三綱門(광주시 기념물 제11호)에서 드러나듯이 훗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그의 자녀들이 忠·孝·烈로 이름을 떨 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송천의 그와 같은 가정에서부터의 교육이 있었기에 가 능한 일이었다고 하여 좋을 것이다.묘 앞에 민병승(閔丙承)이 찬한 神道碑가 서 있으며, 묘역의 산 아래에는 제각이 있다.
    2020-05-16 | NO.39
  • 양진여 양상기 의병장 묘역
    광주시 서구 매월동 산151-9(백마산)*양진여-양상기 의병장 묘역*양진여-의병장제주양공진여배밀양박씨지묘*양상기-의병장제주양공상기지묘
    2018-12-10 | NO.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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