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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계집 제4권 / 묘갈(墓碣); 임훈
    갈천(葛川) 임 선생(林先生) 갈명(碣銘)생의 휘는 훈(薰)이요 자는 중성(仲成)이다. 그 선대는 은진현(恩津縣) 사람이다. 자이당(自怡堂)이라고 자호하였는데, 사람들은 갈천선생(葛川先生)이라고 불렀다. 고사옹(枯査翁)은 최후에 스스로 고친 호이다.고려조 태상박사(太常博士) 휘 성근(成槿)의 후예로, 우리 국조(國朝)에 들어와서 휘 정(梃)은 벼슬이 군사(郡事)에 이르렀으며, 아들 식(湜)은 별장(別將)을 지냈는데 함양(咸陽)으로 옮겨 가서 살았다. 그 아들 휘 천년(千年)은 현감을 지냈고 다시 안음현(安陰縣)으로 옮겼는데 바로 선생의 증왕부(曾王父)이다. 조(祖) 휘 자휴(自庥)는 사용(司勇)을 지냈다. 고(考) 휘 득번(得蕃)은 진사를 지냈는데, 성품이 단정하고 자상하였으며 지조가 고결하여 시골에서 생활하면서 문달(聞達)을 구하지 않았다. 진주 강씨(晉州姜氏)에게 장가들었는데, 구인재(求仁齋) 정우(貞祐)의 후손이자 참봉 수경(壽卿)의 딸이다. 홍치(弘治) 경신년(1500, 연산군6) 7월 15일에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자질이 순수하고 아름다웠으며 착한 행실과 뛰어난 재능이 일찍부터 이루어졌다. 나이 5, 6세 때 큰형이 돌림병을 앓아 진사공(進士公)이 이웃집으로 피해 갔는데 선생이 남아서 병을 구완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밤이면 들어가서 간호를 하고 낮이면 반드시 밖에서 기다리는 등 진사공이 피접(避接)한 곳에는 아예 발길을 돌리지 않고 오직 안부만을 살폈다. 그의 타고난 효성과 우애가 이러하였다. 조금 자라서는 글을 읽을 줄을 알았고 외울 줄도 알았다. 15, 6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글짓기를 공부하게 되었는데 표현하는 언사(言辭)에 이미 문장의 체계가 있었다. 병술년(1526, 중종21)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아래에서 여막살이를 하면서 3년 동안 수질(首絰)과 요대를 벗지 않았으며 부친의 안부를 살피는 일 말고는 발길이 여막에서 떠나지 않았다. 인정과 예문을 다 갖추었으며 정성과 효도도 흠잡을 데가 없었다.가정(嘉靖) 경자년(1540)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나서 부친을 위하여 누차 성균관(成均館)에 몸담았다. 비록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있더라도 항상 깨끗하게 자신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으며, 또한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성균관 안의 유생들이 모두 선생에게 도가 있는 줄을 알고 선생과 가까이할 수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간간이 부박한 무리들이 자신들과 다른 것을 꺼려하여 교묘하게 그 하자를 찾고자 하였으나 끝내 한 점도 찾아내지를 못하였다. 이는 대체로 그 후한 덕과 훌륭한 행실로 파고들 하자가 본디 없었던 것이지 꾸미거나 의도적으로 바로잡아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계축년(1553, 명종8)에 관천(館薦)으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니, 선생이 어버이의 권고로 하는 수 없이 관직에 나아갔다. 이듬해에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으로 옮기고 또 명년에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으로 옮겼으나 선생이 어버이가 늙었다는 이유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가을에 다시 전생서 참봉(典牲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후에 사직하고 돌아왔다. 이때 진사공의 나이가 이미 80세였다.선생이 아우 참봉공(參奉公)과 함께 좌우에서 모시면서 온갖 가지로 봉양을 하였다. 온화한 기상과 좋은 얼굴로 이목(耳目)과 심지(心志)를 즐겁게 해 드리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한갓 음식만 봉양할 뿐이 아니었는데, 신유년(1561) 여름에 진사공이 끝내 별세하고 말았다. 선생의 형제가 반년 동안 시탕(侍湯)을 하면서 슬픈 마음으로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막상 유명을 달리하고 나자 며칠 동안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아 하마터면 위태로울 뻔하였다가 다시 소생하였다. 장사를 지낸 후 묘소 아래에 여막을 짓고 하루에 세 차례 상식(上食)을 하고 곡(哭)은 반드시 애절함을 다하였다. 당시에 선생의 나이가 60세가 넘었지만 꿇어앉아서 절하는 고생을 그만두지 않았다. 비록 심한 추위나 무더운 여름에도 상복(喪服)을 항상 몸에 입고 있었으니, 비록 옛날에 거상(居喪)을 잘한 자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상복을 장차 벗으려 할 때에 현감(縣監)이 선생 형제의 효행에 대하여 고을의 여론을 들어 본도(本道)에 보고하고, 본도에서 고을의 체문(帖文)을 들어서 치계(馳啓)하니, 이듬해인 갑자년에 상이 선생 형제에게 정려문(旌閭門)을 내리도록 명하였다.그 뒤에 상이 경전(經典)에 밝고 행실이 잘 닦인 사람을 선발하여 6품 관직을 초급하여 수여하라고 명하니, 대신이 그 선발을 주관하여 여섯 사람을 얻었는데 선생이 그중 한 사람이었다. 병인년(1566)에 언양 현감(彦陽縣監)을 제수하니, 선생이 은명(恩命)에 감격하여 즉시 사은(謝恩)하러 나섰으나 가을 더위가 극성을 부려 길에서 병이 나는 바람에 가지 못하였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상이 내의(內醫)에게 명하여 약을 지어서 내려 보내도록 하고 또 본도(本道)로 하여금 양식을 지급하도록 하였으며, 또 서늘한 가을이 되거든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9월에 전지(傳旨)를 내려서 여섯 사람 모두 역마를 타고 대궐로 입궐하게 하였다. 상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인견하고 정치하는 도리에 대하여 물으니, 선생이 아뢰기를, “임금이 정치하는 방법은 자신을 수양하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학(大學)》에서는 이것으로 팔조목(八條目)의 근본을 삼고, 《중용(中庸)》에서는 이것으로 구경(九經)의 근본을 삼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수양하는 방법에도 그 근본이 있으니, 진실로 그 근본을 알지 못하면 학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상께서 전적으로 자신을 수양하는 도리에 힘쓰시어 끊임없이 노력하신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도와 학문을 하는 방법을 다른 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물러난 뒤에 상이 아뢴 말을 직접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정무를 마치고 난 한가한 시간에 보기 위한 것이었다. 상이 호초(胡椒)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또 경회문(慶會門)에서 술을 내렸다.부임하고 나서 고을의 잔약함과 백성들의 폐해를 깊이 우려하던 차에 융경(隆慶) 원년(1567)에 재이(災異)에 관한 구언(求言)으로 인하여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삼가 국가의 형편을 보건대 말씀드릴 것이 많습니다. 세자(世子)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어서는 안 되는데 세자를 아직 정하지도 못하였고, 조정(朝廷)을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되는데 탐오하는 풍토가 아직 바로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학교의 교육이 황폐해지고 국경의 방어가 소홀해지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염려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대신(大臣)이 이미 아뢰었고 시종신(侍從臣)이 이미 진달하여 성상께서도 응당 익히 생각하셨을 것이니 소원하고 보잘것없는 신까지 굳이 성상께 아뢸 필요가 없겠습니다마는, 다만 보잘것없는 신이 보고 들었던 것 가운데 잔약한 고을의 절실한 폐단을 우선 아뢰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여섯 가지 폐단을 들어서 제시하고 맨 끝에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에 대하여 언급한 다음 아뢰기를, “신이 진달한 여섯 가지 폐단을 원컨대 성상께서는 유념하시고 대신과 의논하여 잔약한 고을의 백성으로 하여금 죽어 가는 자를 살려 주고 뼈만 남은 자에게 살이 돋게 하신다면 보잘것없는 신은 분수에 맞게 마땅히 시골로 물러가서 평소에 간직했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을 조금은 풀 수가 있을 것이니, 이 역시 세상을 헛되이 산 것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성상께서 특별한 관심 없이 의례적으로 해조에 내리신다면, 해조에서는 필시 국가의 상전(常典)을 한 고을만을 위하여 가볍게 고치는 것은 불가한 일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잔약한 고을이 더 이상 소생할 리가 만무하니, 구제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한 뒤에는 아무리 구제하고 싶어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큰 나무가 넘어질 적에 뿌리가 먼저 뽑혀 넘어진다.’ 하였는데, 신은 아마도 뿌리가 뽑혀 넘어지게 되는 것이 먼저 언양(彦陽)으로부터 시작될까 두렵습니다.” 하였다.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해조와 대신에게 명하여 일일이 거행하게 하고 또 본도 감사에게 전교하기를, “지금 언양 현감 임훈(林薰)이 올린 상소의 내용을 보건대, 자신이 직접 백성을 다스리는 관직에 있으면서 백성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목격하고 조목조목 폐단을 진달하였으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경은 이 뜻을 본현(本縣)에 전달하도록 하라.” 하였다. 얼마 후에 선생은 사직하고 돌아왔고, 그 뒤에 대신이 의논하여 네 가지의 폐단을 혁파하였다.선묘(宣廟) 기사년(1569, 선조2) 겨울에 군자감 주부를 제수하였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비안 현감(比安縣監)에 보임되었는데, 하직하던 날에 상이 편전(便殿)에서 인견하고 묻기를, “수령칠사(守令七事)를 외우게 하는 것은 규례에 불과하다. 그대가 학행(學行)이 있다고 들었으니 말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도록 하라.” 하니, 선생이 먼저 겸손한 말을 올리고 또 이르기를, “선왕조(先王朝) 때에……이황 같은 현자가 좌우에서 떠나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에 퇴계 선생이 고향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아뢴 것이다. 물러난 뒤에 승정원(承政院)에 불러다가 호초(胡椒)를 하사하라고 명하고, 전교하기를, “무더운 날이 머지않아서 호초를 하사하는 것이니 잘 가도록 하라.” 하고, 또 경회문(慶會門)에서 술을 하사하였다. 부임한 이듬해에 사직하고 돌아왔다.만력(萬曆) 원년(1573, 선조6)에 지례 현감(知禮縣監)을 제수하였으나 병 때문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다시 종묘서 영(宗廟署令)을 제수하였으나 또 부임하지 않았다. 얼마 후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승직하고, 수직(守職)으로 장악원 정(掌樂院正)을 제수하니, 마지못해 소명(召命)에 따랐다. 10월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를 제수하니, 선생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피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아 이에 부임하였다. 고을 백성들이 부역이 균등하지 않은 것을 우려하자 선생이 즉시 전부(田簿)를 다시 기록하여 그 부역을 균등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편하게 여겼다. 그 밖에 백성들을 괴롭히는 부역을 줄이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고을에 있던 날에는 관디를 갖추고 관아에 일찍 나가고 늦게 돌아오곤 하였는데, 만약 하루라도 출근하지 않으면 마음이 언제나 편치 않았다. 그 후 2년이 지난 갑술년(1574)에 사직하고 돌아왔다.을해년(1575) 겨울에 상이 양식을 하사하라고 명하니, 선생이 봉사(封事)를 올려 사례하였다. 그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주상전하께서는……종묘사직의 다행이며 신민의 다행입니다.” 하였고, 또 우(禹) 임금의 읍고(泣辜)와 탕(湯) 임금의 축망(祝網)의 고사를 들어서 아뢰기를, “대저 우 임금과 탕 임금이 능히 은혜를 미루어 정치로 확대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음에 근본이 있었기 때문이며, 한(漢)나라와 당(唐)나라가 은혜를 미루지 못하여 구차한 실책을 면하지 못한 것은 역시 마음에 근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 임금과 탕 임금으로 법을 삼고 한나라와 당나라로 경계를 삼아서 근본을 다스리고 은혜를 미루어 확대하도록 하소서.” 하였고, 또 아뢰기를, “신이 선왕조 때에……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는 일입니다.” 하였다. 말미에는 적군(籍軍)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소요의 폐단에 대하여 아뢰기를, “그 폐해의 심하기가 항우(項羽)나 부견(符堅)이 지나간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니, 이는 그 당시 어사들이 저지른 가혹한 참상을 심하게 말한 것으로 사림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상소가 주달되자 상이 매우 칭찬하였다.정축년(1577)에 재차 장악원 정을 제수하였는데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으니, 상이 양식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또 봉소(封疏)를 올려 사례하였는데, 그 대략에,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당시에 마침 양전(量田)에 관한 조치가 있었고, 또 호강(豪强)한 자를 적발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선생이 사안별로 논열하면서 그것이 불가하다는 것을 극력 진달하였다. 그 말에, “국가가 실시하는 일이……이 어찌 고인(古人)이 하신 반구(反裘)의 경계를 알겠습니까.” 하였다. 가을에 또 쌀을 하사하니,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임오년(1582) 여름에 특명으로 통정(通政)을 가자하고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삼으니, 즉시 봉사(封事)를 올려 첫머리에 분수에 넘치는 품계라서 받기가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군민(軍民)의 폐단을 덧붙여 아뢰기를, “삼가 오늘날의 폐단을 보니……도망가거나 흩어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아, 임금의 한마음은……말할 것조차 없습니다.” 하니, 상이 비답을 내리기를, “판결사의 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기 어려우므로 체직하겠지만 가자(加資)한 것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또 덧붙여 헌의(獻議)한 말을 보고는, “내가 그대의 지극한 정성을 아름답게 여긴다.” 하였다.갑신년(1584) 1월 임인일에 병환으로 외침(外寢)에서 임종하니, 향년 85세였다. 이보다 앞서 본도(本道)에서 선생의 병환에 대하여 치계(馳啓)하였는데 별세한 지 며칠이 지나서야 어의(御醫)가 약을 가지고 왔고,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상이 특별히 부의(賻儀)를 하도록 명하였다. 4월 기유일에 집의 북쪽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냈는데, 선영(先塋)을 따른 것이다.아, 선생의 아름다운 덕에 대해서는 선친(先親)이 뇌장(誄狀)에서 남김없이 진술하였으니, 아들이자 후학(後學)인 내가 어찌 감히 그 사이에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다만 선생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이 전해 주는 말을 들어 보면, “하늘이 비단결같이 아름다운 자질을 선생에게 부여하였고, 선생은 그것을 받아서 몸에 간직하여 젊어서부터 늙을 때까지 80여 년을 때묻지 않고 상하지 않게 고이고이 간직하다가 온전한 채로 돌아갔다.” 하니, 이 말은 덕을 아는 자의 말이라 하겠다. 그가 부여받은 것이 중후하고 순수하였으므로 발현되는 것이 순전하고 아름다웠던 것이며, 용모와 언사에 나타난 것이 온후하고 화평하였으며 맑고 여유가 있어 보였다. 평소에 말을 급하게 하거나 조급한 표정을 짓지 않았으며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일찍이 거칠거나 사나운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 앞이라 하여 으스대지 않았으며 혼자 있을 때라 하여 태만하지도 않았다.이를 통해 가정에서는 부모를 섬길 때 정성과 효도를 다하고 형제간에 우애를 돈독히 하였으며 종족에게 인자함을 베풀고 처지가 어려운 자는 돌보아 주었다. 향당에서는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고 노인을 공경하였으며 돈후하고 질박하기를 힘쓰고 신뢰와 의리를 숭상하여 일찍이 남의 잘못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그의 덕에 심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임금을 섬길 때에는 정성을 다하여 인도하는 말과 조목조목 따져 진달하는 말이 한결같이 올바른 것들이고 공리(功利)나 잡다한 술책에 관한 것은 없었으니, 이는 모두 맹자가 말한 “인(仁)과 의(義)가 아니면 진달하지 않는다.”와 주자(朱子)가 배운 네 글자의 뜻에서 나왔다.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청렴[淸]과 신중[愼]과 인자[慈]와 용서[恕]를 바탕으로 하여 진실만을 추구하고 외형을 꾸미지 않았으며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백성의 환심을 사는 것으로 능사를 삼지 않았으므로 일 년 내내 헤아려도 남을 만큼의 공적이 저절로 쌓였다. 맹자가 이르기를, “근본이 있는 자라야 이와 같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대개 선생은 이미 근본이 있으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척척 들어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그렇기는 하지만 선생이 어찌 명분(名分)에만 집착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분이었겠는가. 선생의 실생활을 보면 비스듬히 기대지 않고 하루 종일 단정히 앉아서 용모를 공손히 하지 않은 적이 없으며 표정도 장중하게 갖지 않은 적이 없다. 모든 행동 하나하나를 단정하고 중후하게 하기를 힘쓰고 예사로운 말이나 행동도 반드시 신중히 하였다. ‘성경(誠敬)’이란 두 글자와 ‘생각에 사특함이 없어야 한다.[思無邪]’와 ‘자신을 기만하지 말아야 한다.[毋自欺]’ 등의 문자를 창가와 책상에 크게 써서 걸어 두고 항상 가슴에 새겼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머리를 빗고 의관을 단정히 한 다음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보다가 피곤하면 잠시 궤안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면 다시 책을 보았다. 언제나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는데 늙을수록 더욱 부지런하였다.항상 참봉공(參奉公)과 밤낮으로 담론(談論)을 벌인 것이 성현(聖賢)의 학문(學問)을 하는 방법이 아닌 것이 없었으며, 옛사람의 시비와 득실에 대한 문제와 세도(世道)가 오르내리고 쇠퇴하거나 융성하는 변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으로 논란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마침내는 모두 의리로 귀결시켰다. 항상 후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려서부터 매번 전날에 한 일을 되돌아 생각해 보고 두렵게 여기지 않은 적이 없었는데 지금 늙어서도 여전히 그렇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사람은 평소에 한 일을 남에게 말하지 못할 것이 없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허물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하고 안으로 자신을 살펴 허물이 없게 하려고 한 공부가 거원(蘧瑗)과 온공(溫公)의 기풍에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겠다. 선생이 지은 문장은 넓은 바다처럼 광범위하여 무궁한 뜻을 담고 있어 참으로 경서(經書)와 같은 글이었고 꾸밈없는 소박한 맛을 느끼게 한다.아, 하늘이 선생을 낸 것이 진실로 의도한 바가 있었으니, 만약 묘당(廟堂)에 앉아서 백관(百官)을 진퇴시키고 임금의 좌우에 출입하면서 임금의 덕을 보좌하도록 하였더라면 어찌 요순과 같은 임금으로 만들지 못하였겠으며 국가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정되게 하지 못하였겠는가. 애석하게도 그 도(道)가 시운(時運)과 서로 맞지 않아서 뜻을 펼칠 수가 없었다. 만년에 이르러 비록 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조그만 백 리 정도의 지역에서 그럭저럭 감서(監署)하는 직임을 맡은 것에 지나지 않았으니, 어찌 그 뜻을 만분의 일이나마 펼칠 수 있었겠는가.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고을 사람들의 덕을 좋아하는 마음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시들지 않아서 선생의 형제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문헌공(文獻公)의 사당에 배향하여 제사를 모셨으니 백세 이후에 반드시 풍교를 듣고 흥기할 자가 있을 것이다.선생은 고양 유씨(高陽兪氏)에게 장가들었는데, 사헌부 장령을 지낸 뇌계(㵢溪) 선생 호인(好仁)의 손녀이다. 부인의 아버지는 진사 휘 환(瑍)이며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인데 망기당(忘機堂) 한보(漢輔)의 딸이다. 부인은 성품이 순후하고 조심성이 있어서 남편을 도와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선생보다 13년 먼저 졸하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위의 두 아들은 모두 일찍 죽었으며, 딸은 군수 이구인(李求仁)에게 시집갔으나 역시 일찍 죽고 후사가 없다. 3남 승조(承祚)는 훈도(訓導) 신준(愼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진상(眞㦂)이며 2남은 진흠(眞????)이며 3남은 진준(眞惷)이다. 진상은 사인(士人) 하세보(河世寶)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사인 주국신(周國新)에게 시집갔다. 진흠은 사인 신희양(愼希讓)의 딸에게 장가들고 진준은 장가들지 않았다. 2녀는 동지 한형(韓詗)에게 시집가서 아들과 딸 약간 명을 두었다. 선생이 별세한 후에 세 손자가 모두 자식이 없이 죽고 진상만 단지 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정홍서(鄭弘緖)와 손작(孫綽)이 그 사위이다. 정홍서의 처가 후사가 없이 일찍 죽고 딸 하나만 두었는데 아무개에게 시집갔다. 손작은 자녀 아무개를 두었다.선생의 총부(冢婦)가 종사(宗祀)를 이어 갈 주인이 없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선생 중씨(仲氏)의 손자인 진무(眞懋)를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다. 진무는 아무개의 딸에게 장가들어 자녀 아무개를 낳았다. 진무가 선생의 묘정에 세울 갈문(碣文)을 나에게 부탁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시일을 끌다 보니 아직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항상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예전에 읽던 글을 정리한다면 아마도 불후(不朽)의 전함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날 국가의 운명이 이미 다하고 도적이 갑자기 쳐들어와 지존하신 임금을 모시고 고립된 성으로 들어가 위급함이 조석에 달려 있으니 한번 죽는 것이야 한스러울 것이 없지만 명현(名賢)이 이룩한 공적을 드러내지 못할까 염려되어 포석(炮石)이 날리는 가운데에 삼가 대략을 위와 같이 간추려 싣고 이어서 명(銘)을 쓴다. 명은 다음과 같다.숭고한 덕의 언덕 / 崇高德岳저 높이 하늘에 닿겠네 / 峻極于天신령한 기운을 빚어내어 / 釀靈毓秀우리 명현을 내셨네 / 生我名賢그리운 우리 선생은 / 我懷伊賢금옥 같은 아름다움과 / 玉潤金精강하 같은 도량에다 / 江河之量난곡과 같은 모습이라 / 鸞鵠之形봄바람이 자리에서 이는 듯 / 春風生席화기가 넘쳐흐르는 듯 / 和氣敦薄효도와 공경으로 / 惟孝惟悌가정을 다스리고 / 居家之政충성과 신뢰는 / 曰忠曰信타고난 성품이었네 / 本然之性정성으로 사물을 접하고 / 誠以接物공경으로 몸을 간직하고 / 敬以持身성리를 연구하고 / 硏窮性理경전을 탐구하고 / 探討典墳잘못을 알아서 고쳐 가기는 / 知非遷改거백옥의 기풍이요 / 伯玉之風남을 대하여 부끄러움이 없기는 / 對人無愧사마군실의 공부였네 / 君實之功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섬길 때는 / 入以事君맹자의 공경과 주자의 학문을 따르고 / 孟敬朱學나가서 백성을 다스릴 때에는 / 出而莅民봄날 우로의 은택을 베풀었네 / 春噓雨澤하늘은 이미 풍부하게 부여하고서 / 天旣富與어찌 크게 시험하지 않았는가 / 胡不大施조그만 백 리 지역이라니 / 栖栖百里그것도 백발이 다 되어서 말이지 / 白髮衰遲난들 어찌 비난할 수 있으랴 / 吾何譏乎시운에다 돌릴 뿐이네 / 歸之於時산이 바다 되고 골짜기가 구름으로 변하더라도 / 山移谷變이름만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 名不可夷[주-D001] 수령칠사(守令七事) : 수령이 수행해야 할 일곱 가지 임무로서, 즉 농상을 활성화하는 것[農桑盛], 호구를 증대시키는 것[戶口增], 학교를 흥기시키는 것[學校興], 군정을 잘 다스리는 것[軍政修], 부역을 균등하게 하는 것[賦役均], 사송을 간소화하는 것[詞訟簡], 간활한 자가 없게 하는 것[奸猾息]을 말한다. 《六典條例 承政院》[주-D002] 이황 …… 선생이 : 이 부분은 원문의 생략으로 인해 전후의 기사 내용이 서로 연계되지 않으므로 《동계집》 초간본에 따라 일부 보충하였다. 보충한 부분의 원문은 아래와 같다. “如滉之賢 不宜去離左右 蓋是時 退溪先生方”[주-D003] 읍고(泣辜) : 우(禹) 임금이 죄인이 많은 것을 보고 불쌍하게 여겨 울었다는 말로, 한(漢)나라 유향(劉向)이 쓴 《설원(說苑)》 〈군도(君道)〉에, “우 임금이 거리에 나갔다가 죄인을 보고 수레에서 내려 위문하며 울었다.” 하였다.[주-D004] 축망(祝網) : 탕(湯) 임금이 들판으로 나가다가 사냥꾼이 그물을 사방으로 쳐 놓고 “모든 새들은 다 내 그물에 걸려라.” 하고 비는 것을 보고 너무 심하다고 여겨, 세 군데를 터 놓고는 “피하기 싫은 새들만 이 그물에 걸리거라.”라고 빌었더니, 제후들이 듣고 그의 성덕을 찬양하였다 한다. 《史記 卷3 殷本紀》[주-D005] 반구(反裘)의 경계 : 경중과 본말을 알지 못한다는 비유에서 온 말이다.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書)》 〈잡사(雜事) 2〉에, “위 문후(魏文侯)가 길에서 모피 옷을 뒤집어 입고 꼴을 지고 가는 사람을 보고 그 이유를 묻자, 털을 아끼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문후가 ‘속가죽이 다 닳고 나면 털이 붙어 있을 데가 없게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처사다.’라고 말하였다.” 하였다.[주-D006] 잘못을 …… 기풍이요 : 거백옥은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로, 이름은 원(瑗)이며, 백옥(伯玉)은 그의 자이다. 그가, “나이 50세에 49년 동안의 언행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라고 하였는데, 임훈 역시 이러한 기풍이 있었다는 뜻으로 인용한 것이다. 《淮南子 原道訓》[주-D007] 남을 …… 공부였네 : 사마군실(司馬君實)은 송(宋)나라의 대학자로, 이름은 광(光), 호는 온공(溫公)이며, 군실은 그의 자이다. 그는 한평생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내가 남보다 나은 것은 없으나, 한평생 해 온 일을 남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은 없었다.”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 여기에서 인용한 뜻은 임훈에게도 그러한 공부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2-05-06 | NO.67
  • 동국이상국전집 제36권 / 묘지(墓誌)ㆍ뇌서(誄書); 채순희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 채공(蔡公)의 뇌사대저 대장부가 세상에 태어나서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가, 70세에 벼슬을 사양하고 정신을 수양하여 천연의 수명을 능히 누린 다음, 죽음을 잘한 자는 고금을 통해 구해 봐도 많지 않은데, 우리 소사(少師) 채공은 그것을 향유하였다.공은 휘가 순희(順禧)인데, 관향이 광주(光州)이다. 부친은 휘가 모(某)인데 벼슬이 모관(某官)에 이르렀다. 공은 의종 때 내정(內廷)에 관적을 두었고, 명종이 선위할 때까지도 오히려 임금의 측근에서 떠나지 않았다.성상이 일찍이 수창궁(壽昌宮)에 있을 때 적신(賊臣) 조원정(曺元正)과 석린(石麟) 등이, 불궤(不軌)를 꾀하여 밤에 담을 넘어 금중(禁中)에 들어와 난을 일으켰다. 이날 밤에 내직(內直)한 근신(近臣)들은 난이 일어난 소식을 듣고는, 놀라고 두려워하여 모두 담을 넘어 도망하였는데, 공은 홀로 궁궐에 입시하여 잠시도 임금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임금이 감탄하기를,“옛사람의 말에 ‘질풍에 굳센 풀을 알아본다.’ 하더니, 바로 그대를 이름이로다.”하였다. 벼슬은 다섯 조정을 통하여 중요한 자리를 거쳤고, 지금 임금의 모년(某年)에 이르러 중서시랑 평장사 태자소사(中書侍郞平章事太子少師)에 올랐더니, 사직하고 물러와서 거문고와 술로써 몇 해 동안을 한가히 노닐다가 세상을 떠났으매, 이른바 애영(哀榮)과 종시(終始)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모두 갖추어졌으니, 이는 대장부라 칭할 만한 분이다.천성이 너그러워 대중을 포용하였으매 일찍이 성내는 기색을 볼 수 없었으니, 비록 옛날 방석에 술을 토한 아전을 용서하고국을 쏟은 종을 용서하던 자라도 어찌 이에서 더했겠는가? 그러나 조원정ㆍ석린의 난에서 ‘난에 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굳센 절개’를 보여준 일이 있으니, 이 어찌 ‘인자(仁者)는 반드시 용맹이 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부음이 전하자, 임금은 애도하여 정사 듣는 일을 폐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명기(明器)와 노부(鹵簿)를 갖추게 하였다. 모산(某山)에 장사지내자, 시호를 모공(某公)이라 내리고 거듭 소신에게 명하여 사실을 모아서 뇌사를 짓게 하였다. 뇌사는 다음과 같다.왕좌(王佐)의 재주라 먼저 큰 책임을 맡을 인물로 점쳤더니, 강직한 우리 공이여 책임을 짐이 진실로 특이하셨다. 조원정ㆍ석린이 난을 꾸며 밤에 금문(禁門)을 치니, 내신(內臣)들은 마치 쥐처럼 담을 넘어 모두 도망하였는데, 공은 홀로 입시하여 신색이 변하지 않았으니, 후조(後凋)의 절개는 날씨가 추운 뒤에야 알겠다. 절개를 지킴이 이와 같으니 마땅히 귀하고 영화하리라. 과연 다섯 임금의 정승이 되어 명망이 태형(台衡)에 높았도다. 급류(急流)처럼 용감하게 벼슬에서 물러나니, 이름이 온전하고 덕이 높았다. 하늘이 돌보지 않으사 나라의 들보가 부러졌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여 죽은 자에게 주는 예가 구비하였다. 누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할 것인가. 소신이 뇌사를 짓는도다.[주-D001] 불궤(不軌) : 여기서는 모반을 가리킨다.[주-D002] 방석에……용서하고 : 한 선제(漢宣帝) 때 병길(邴吉)이 정승으로 있을 당시에, 그의 마차를 술에 취한 관속이 타고 가다가 토하여 방석을 더럽혔다. 그 이유로 관속을 해직시키려 하니, 병길이 “그는 정승의 방석 하나를 더럽힌 데 불과한 일이니, 해직시킬 일이 못 된다.” 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漢書 卷70 邴吉傳》[주-D003] 국을……용서하던 : 후한(後漢) 장제(章帝) 때 유관(劉寬)은 성질이 매우 너그러워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부인이 그가 얼마나 너그러운가를 시험하고자 하여 그가 조회에 들어가려고 관복(官服)을 차려 입었을 적에 종을 시켜서 관복에 국을 엎질렀으나, 다만 “네 손이 데지나 않았느냐?”고 했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한다. 《後漢書 卷25 劉寬傳》[주-D004] 인자(仁者)는……있다 : 이 말은 《중용(中庸)》에 보인다.[주-D005] 후조(後彫)의……알겠다 : 난을 겪어야 절의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뜻. 《논어》자한(子罕)에 “날씨가 추운 뒤에야 송백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하였다.[주-D006] 태형(台衡) : 정승을 가리킨다. 하늘의 삼태성(三台星)은 인간의 정승을 맡은 별이라 하고, 정승은 세상을 저울질하는 권한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2022-05-06 | NO.66
  • 동명집 제18권 / 묘지(墓誌); 조희보 광주목사
    동명집 제18권 / 묘지(墓誌)분승지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조공의 묘지〔分承旨贈吏曹判書趙公墓誌〕공의 성은 조씨(趙氏)이고, 휘는 희보(希輔)이고, 자는 백익(伯益)이며, 풍양인(豐壤人)이다. 시조인 휘 맹(孟)은 고려 초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그 뒤에 휘 염휘(炎暉)란 분이 있어 우대언(右代言)을 지냈고, 신(愼)은 사복시 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증조는 휘가 익상(益祥)으로, 장령(掌令)을 지냈다. 할아버지 휘 세적(世勣)은 정국 공신(靖國功臣)으로서 자헌대부(資憲大夫) 풍양군(豐壤君)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휘 기(磯)는 감찰(監察)을 지내고 승지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현령을 지낸 이숙(李淑)의 딸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이다.공은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에 탄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빼어나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장성하자 명성이 더욱 퍼져 나갔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고, 무자년(1588)에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소속되었다가 천거되어 한림(翰林)에 제수되었다. 신묘년(1591)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상복을 벗자마자 또다시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을미년(1595, 선조28)에 예조ㆍ형조ㆍ호조의 낭관에 제수되었다. 정유년(1597)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다. 당시에는 군사를 일으키는 일이 있어 사무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공은 순찰사를 보좌하면서 잘 조처하니, 순찰사로 있던 유근(柳根)이 매우 칭찬하였다. 기해년(1599)에 예천 군수(醴泉郡守)에 제수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인해 체차되었다. 경자년(1600)에 시강원 필선, 사헌부 장령ㆍ집의, 사간원 사간 등의 직을 역임하였다. 대간으로 있을 적에는 풍채가 늠연하였다.임인년(1602)에 북방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조정에서 공을 어사(御史)로 삼아 진휼하여 구하게 하였는데, 살려낸 사람이 많았다. 당시에 시사(時事)가 크게 변해 청류(淸流)들이 모두 배척당하였다. 공 역시 사간으로 있다가 외직으로 나가 대동 찰방(大同察訪)이 되었는데, 마정(馬政)을 돌보는 데 온 힘을 다하여 역로(驛路)를 소생시켰으며, 병란에 불탄 우사(郵舍) 역시 새로 지어 말끔하게 하였다. 그러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기문(記文)을 지어 찬미하였다.을사년(1605)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인해 부임하지 못하였다. 병오년(1606)에 사도시 정(司䆃寺正)을 거쳐서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정사를 엄하게 하면서도 은혜를 베풀어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으므로, 어사가 표창하라고 아룀에 따라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또 감사가 잘 다스린 상황에 대해 보고함으로써 통정대부로 승진하였다. 떠나온 뒤에는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기렸다.그 뒤에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고을 안에 정인홍(鄭仁弘)의 인척들이 많이 살면서 제멋대로 굴었는데, 공은 법으로 이들을 다스리면서 청탁하는 것이 있어도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정인홍이 유감을 품고는 다른 사람을 사주하여 탄핵함에 따라 파직되었다. 한참 뒤에 승지 및 병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모두 분사(分司)의 직이었다.당시에 권간(權奸)들이 정권을 잡아서 조정의 정사가 크게 어지러웠으므로, 공은 벼슬길에 뜻이 없었다. 이에 임술년(1622, 광해군14)에 집안사람들을 다 거느리고 원주(原州)로 돌아갔다. 얼마 뒤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은 70세였다. 아들 형(珩)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됨으로 해서 공에게 이조 판서와 그에 따른 겸직을 추증하였다. 다음 해에 양주(楊州) 해등촌(海等村)에 있는 손향(巽向)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공은 혼조(昏朝) 때에 살아서 끝내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였으며, 계해년에 반정(反正)이 일어났을 때에는 공은 이미 서거한 뒤여서 미처 등용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식자들이 한스러워하였다.공의 초취(初娶)는 판서 노직(盧稙)의 딸이다. 계실(繼室)은 감찰 최황(崔韹)의 딸이며, 대사헌 최진(崔璡)의 후손이다. 최씨 부인은 어질고 부도(婦道)가 있어 규문 안이 엄숙하면서도 화락하여 다른 사람이 이간하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공보다 27년 늦게 졸하여 향년이 71세였으며, 공과 같은 혈(穴)에 함께 폄(窆)하였다.노씨 부인은 1녀 1남을 두었는데, 딸은 참봉 최정해(崔挺海)에게 시집갔으며, 아들 민(珉)은 감역(監役)이다. 최씨 부인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바로 형(珩)으로, 의정부 좌참찬이며, 딸은 사인(士人) 유창한(柳昌漢)에게 시집갔다. 또 측실에게서 낳은 아들인 침(琛)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이고, 장(璋)은 현감이며, 딸은 첨지중추부사 조철(趙澈)에게 시집갔고, 나머지는 모두 다른 사람의 첩이 되었다.참봉은 2남을 두었는데, 최석후(崔碩後)와 최석연(崔碩衍)이다. 감역은 목사(牧使) 민정명(閔定命)의 딸에게 장가들어 2녀를 두었는데, 정랑 최만길(崔晩吉)과 교리 이주(李裯)가 사위이다. 참찬은 참판 목장흠(睦長欽)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상변(相抃)은 현감이고, 상정(相鼎)은 진사인데, 감역(監役)의 후사가 되었다. 삼남 상개(相槩)는 현감이고, 사남 상우(相愚)는 진사이다. 장녀는 도사(都事) 이두징(李斗徵), 차녀는 군수 심추(沈樞), 삼녀는 정자 이선원(李善源)에게 시집갔다.공은 사람됨이 단정하고 엄숙하고 말수가 적었으며, 함부로 웃거나 떠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허여하는 바가 드물었으며, 벗으로 삼은 사람들은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었다. 특히 오상 윤겸(吳相允謙)과 더불어 친하게 지냈다. 이이첨(李爾瞻)은 공과 어려서 서로 알던 사이였으며 사는 집도 가까웠으나, 공은 그가 악한 짓을 하는 것을 미워하여 절대로 통교하지 않았다. 이이첨이 아는 사람을 통하여 만나 보기를 요청하자, 공은 통렬히 거부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지킴이 확고하기가 이와 같았다.공이 명을 받아 북로(北路)에서 진구(賑救)할 적에 온 힘을 다하고 온 생각을 다하여 살려낸 사람이 아주 많았다. 그러자 방백으로 있던 한효순(韓孝純)이 말하기를 “한 사람만 살려내어도 오히려 음덕(陰德)이 있는 법인데, 더구나 수만 명을 살려낸 데이겠는가. 반드시 남은 경사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참찬공이 과연 문과에 급제하여 팔좌(八座)의 지위에 올라 정부(政府)에 참여하였으니, 이는 그에 대한 보답인 것이다.명은 다음과 같다.옛사람이 일찍이 한 말이 있으니 / 古人有言만년 절개 보존 실로 어렵다 했네 / 晩節實難공께서는 선묘 때에 벼슬 살면서 / 公在宣廟朝하신 일에 볼만한 게 많이 있었네 / 事多可觀그 뒤 국사 아주 크게 어그러지자 / 國事大謬물러나서 향리로 가 거처하였네 / 退居鄕里그랬으니 어찌 아니 어진 것이랴 / 豈不賢哉처음 있고 끝이 있다 할 만하다네 / 亦可謂有始有終者矣후대에서 거울삼기 충분하기에 / 後其鑒그런 사실 묘지 속에 담아 두었네 / 此其誌[주-D001] 분사(分司) : 나라에 일이 있을 경우에 조정 외의 다른 지방에 설치하는 관사(官司)를 말한다.[주-D002] 팔좌(八座) : 재신급(宰臣級)의 8명의 고위 관료로, 각 시대마다 지칭하는 바가 약간씩 다른데, 동한 시대 때에는 육조(六曹)의 상서와 영(令), 복야(僕射)를 말하였다. 여기서는 아들 조형(趙珩)이 의정부 좌참찬을 지낸 것을 가리킨다.*조희보(趙希輔, 1553~1622) 1606.1. 광주목사로 제수됐고, 조형(趙珩, 1606~1679)을낳음
    2022-05-06 | NO.65
  • 동문선 제120권 / 비명(碑銘);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동문선 제120권 / 비명(碑銘)유명조선국 추증추충직절 수문병의 보조공신 특진보국숭록대부 문하우정승 판도평의사사사 병조사 수문전대학사 영예문춘추관사 서원백 시 문간공 행 광록대부 형부상서 집현전학사 이공 신도비명 병서 (有明朝鮮國追贈推忠直節守文秉義輔祚功臣特進輔國崇祿大夫門下右政丞判都評議使司事兵曹事修文殿大學士領藝文春秋館事西原伯諡文簡公行光祿大夫刑部尙書集賢殿學士李公神道碑銘 幷序)권근(權近)영락(永樂) 원년 가을 8월에 영사평부사 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 이공(李公)이 선군(先君)의 묘비명을 나에게 부탁하여 말하기를, “우리 선군자(先君子)께서 덕을 심고 그 열매는 먹지 아니하여 우리 후인에게 끼치셨습니다. 인하여 부자(父子)가 임금의 총애와 영광을 입어 지위는 높고 봉록은 두터워서 선세(先世)에까지 작(爵)을 추봉하게 되었습니다. 분황(焚黃)하고 제사를 올려 은총을 밝힌 일은 있었으나, 그 묘도(墓道)에 아직 비석이 없어서 뒷세상에 보일 길이 없습니다. 또 나는 불행하게도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으며 세 형도 또한 다 먼저 세상을 떠났으므로, 선인(先人)의 덕행을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인멸하여 전하지 못하게 될까 두렵습니다. 그대는 세계(世系)와 선인이 경력한 관작(官爵)을 상고하여 명(銘)을 지어 주십시오.” 하기에, 나는 사양할 수 없었다.삼가 상고하건대, 이씨(李氏)는 청주(靑州)가 관향(貫鄕)이니, 나라의 명망있는 가문으로 가장 드러났으며 또 오래 되었다.고려 태조가 창업할 때, 휘가 능희(能希)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태조를 잘 도와서 공(功)이 있었으므로 국공(國公)을 봉하고, 공신으로서 벽상(壁上)에 화상(畵像)을 그리게 되었다. 그의 6대 손에 이르러 휘를 공승(公升)이라고 하는 이가 있었는데, 행실이 단정하였으며, 인종(仁宗)과 의종(毅宗)을 도왔다. 일찍이 봉명사신으로 금(金)나라에 갔으나 한 닢의 돈도 받지 아니하니 맑은 덕이 더욱 드러났다. 의종이 추석에 달 구경을 하는데, 하늘이 밝고 구름도 없었다. 오랫동안 감탄하며 아름다워하다가 이르기를, “오늘 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구나.” 하였다. 졸하매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하였다. 상하(上下) 수백 년 동안에 자손들은 조상의 업을 이어 받들어 아름다움을 이룩하여 대대로 덕 있는 이가 서로 이어 오더니, 문간공(文簡公)에 이르러서는 더욱 스스로 경계하고 신칙하여 후손에게 경사(慶事)를 끼치게 하였다. 사평공(司平公)은 그의 아들 상당군(上黨君)과 마음을 합하고 힘을 다하여 우리 이씨 조선에 거듭 정사좌명(定社佐命)의 공훈이 있어서 공신으로서 훈맹(勳盟)에 함께 피를 마셨으며, 모두 정승의 높은 벼슬에 올랐다. 상당군(上黨君)과 그의 아우 청평군(淸平君)은 모두 공주에게 장가들었는데, 적선(積善)이 남긴 경사가 더욱 크고 창성하다. 아, 성대하도다. 문간공(文簡公)의 휘는 정(梃)이니 그전 이름은 춘길(春吉)이다. 태정(泰定) 을축년에 공이 29세로 처음에 문음(門蔭)으로 팔관보 판관(八關寶判官)이 되었고, 다음해에 과거의 병과(丙科) 제2등으로 급제하였다. 봉거 직장(奉車直長)에서부터 전법 좌랑(典法佐郞)을 역임하였으며, 치화(致和) 원년에는 판도정랑(版圖正郞)으로 나가서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가 되었는데 어진 정치를 한 바 있다. 그 뒤에 감찰ㆍ장령ㆍ전법 총랑ㆍ경상도 찰방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는 10년 동안을 한가롭게 살면서 조용히 노닐며 편안하게 지내다가 지정(至正) 계사년에 다시 중정(中正)ㆍ성균 좨주(成均祭酒)에 임명되고, 봉순대부 판전교시사 진현관제학(奉順大夫判典校寺事進賢館提學)으로 추자(追資)되었다. 갑오년에는 정순대부 판통례문사(貞順大夫判通禮門事)가 되었으며, 을미년에는 판위위시사 보문각제학(判尉衛寺事寶文閣提學)이 되고, 위계(位階)는 봉익대부(奉翊大夫)로 높아졌다. 조금 뒤에 우상시(右常侍)로 전임하였고, 정유년에는 영록대부 우산기상시 집현전학사(榮祿大夫右散騎常侍集賢殿學士)로 고쳐 임명되었다. 무술년에는 광록대부 형부상서(光祿大夫刑部尙書)가 되었으며 관직은 전과 같았다. 이것이 그가 역임한 벼슬이다. 공은 일찍이 청렴하고 검소한 것으로써 스스로 다스리며 예법을 따라 실천하고, 세속에 따라 굽히고 펴고 하는 일을 하지 아니하니, 세속 사람들이 그의 바르고 곧음에 탄복하였다. 진주(鎭州)의 상산(常山)에 물러가 살면서 벼슬과 영달을 구하지 아니하였다. 공민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오래 그의 어짐을 들었으므로 왕위에 오르자 공을 불러 서울에 오게 하고, 그의 맑고 삼가는 것을 가상히 여겨 내불당(內佛堂)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문정공(文貞公)의 절조와 행적의 대강과, 의종(毅宗) 임금이 달을 보고, ‘오늘밤의 밝은 달은 공승(公升)의 가슴속 같아서 한 점의 티끌도 없다.’고 탄상한 말을 친필로 쓰고, 이어 공의 뜻이 선조를 사모하여, 또한 세상 살이의 욕망을 담박하게 하는 일 등, 수백 가지의 말을 써서 내려 주고, 이제 곧 크게 등용하려 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전에 은거하던 곳으로 돌아가 신축년 6월 19일에 병으로 졸하니, 춘추가 63세였다. 상산(常山)의 남쪽 기슭에 장사하였다.아버지의 휘는 계감(季瑊)이다. 중대광 낭성군(重大匡琅城君)인데, 시호는 정헌(正憲)이다. 조(祖)의 휘는 창우(昌祐)이니, 판도총랑 증밀직사사(版圖惣郞贈密直司使)이다. 증조의 휘는 장(粧)이니, 전중감 증지문하성사(殿中監贈知門下省事)이다. 바로 문정공(文貞公)의 아들인 참지정사(叅知政事) 휘 춘로(椿老)의 아들이다. 김변(金胼)이니, 외조(外祖)는 시호를 문신공(文愼公)이라 하는데 모주(某州)의 사람이다. 부인(夫人)은 명주 김씨(溟州金氏)니, 모관(某官) 계초(繼貂)의 딸이다. 향년이 70세로서 공보다 15년 뒤인 홍무(洪武) 을묘년 4월 21일에 졸하여 공의 무덤 곁에 장사하였다. 또 그 뒤 20여 년 뒤에 사평 부사(司平府事)의 공(功)으로 공에게 문하우정승서원백(門下右政丞西原伯)을 추증하고, 부인에게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을 봉하였으니, 공신의 조상에게 미루어 주는 은전(恩典)이다. 아들 넷과 딸 둘이 있다. 맏아들의 이름은 유신(由伸)이니, 임오년 과거에 급제하고 형부 낭중(刑部郞中)으로 경상도 안찰사로 나갔는데 공보다 먼저 몰(歿)하였다. 차남의 이름은 거인(居仁)이니, 검교 좌정승(檢校左政丞)으로 죽어서 시호를 공절(恭節)이라 하였다. 다음 삼남의 이름은 거의(居義)니, 공조 전서(工曹典書)로 일찍이 몰하였다. 다음 사남은 이름을 거이(居易)라고 한다. 문하 좌정승(門下左政丞)으로 지금 영사 평부사서원부원군(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이 되었다. 맏딸은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이숭(李崇)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공안 부윤(恭安府尹) 민경생(閔慶生)에게 시집갔다. 손자와 손녀 약간 명이 있다. 장남인 낭중(郞中)이 상서(尙書) 홍승조(洪承祚)의 딸에게 장가 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큰아들 이름을 덕윤(德閏)이라고 하며 호군(護軍)의 벼슬에 있고, 다음은 이름을 부윤(富閏)이라고 하며 전중경(殿中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정당문학 겸 사헌부대사헌 이지(李至)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대호군(大護軍) 김소(金紹)에게 시집갔다. 차남인 공절(恭節)은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 조익청(曹益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으나 다 어리다. 한산군(漢山君) 이광우(李光雨)의 딸에게 후취(後娶)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굉도(宏道)라고 하며 사수 감승(司水監丞)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사(判事) 박전의(朴專誼)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군자 주부(軍資注夫) 양중관(梁仲寬)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삼녀는 공조 의랑(工曹議郞) 노경(盧敬)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도염 서승(都染署丞) 심총(沈聰)에게 시집갔다. 삼남인 공조전서는 호군 김인회(金仁晦)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곤륜(崐崙)이라고 하며 사헌부 감찰의 벼슬에 있다. 4남인 영사평부사는 형부 상서(刑部尙書) 최연(崔堧)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저(佇)라고 하며, 의정부 찬성사 상당군(議政府贊成事上黨君)이다. 태상왕(太上王)의 딸 경신궁주(慶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차남은 이름을 백관(伯寬)이라고 하며,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언(伯言)이라고 하며, 대호군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백강(伯剛)이라고 하니 청평군(淸平君)이다. 지금 임금의 딸 정신궁주(貞愼宮主)에게 장가들었다. 다음은 이름을 현(儇)이라고 하는데 어리다. 맏딸은 전농정(典農正) 신중선(辛中善)에게 시집 갔다. 차녀는 종부 부령(宗簿剖令) 경지(慶智)에게 시집갔다.외손자와 외손녀 약간 명이 있다. 이 시중(李侍中 이숭)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민(岷)이라고 하며,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인(嶙)이라고 하며, 사재 소감(司宰少監)의 벼슬에 있다. 다음은 이름을 치(峙)라고 하며, 연안 부사(延安府使)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최안준(崔安濬)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유경(崔有慶)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에게 시집갔다. 다음은 봉례랑(奉禮郞) 김지(金祉)에게 시집갔다. 민공안(閔恭安) 부윤이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설(渫)이라고 하며, 직예문관(直藝文館)의 벼슬에 있다. 맏딸은 지곡 주사(知谷州事) 홍제(洪濟)에게 시집 갔다. 다음은 평원군(平原君) 조박(趙璞)에게 시집갔다. 증손자와 증손녀 약간 명이 있다. 평녕군(平寧君) 대림(大臨)은 지금 임금의 딸 경정궁주(慶貞宮主)에게 장가들었으니, 정승 조준(趙浚)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다 어리다. 예전부터 공훈이 있는 가문이 두어 대를 못 가서 한미한 가문이 되는 것은, 대체로 선조의 공덕을 거듭 쌓음이 비록 부지런하였더라도 자손된 자가 대개 교만하고 사치함이 많아서 지키는 데 삼가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지금 공께서는 선대에서 쌓은 덕이 두터워 그 흘러오는 광채가 발달함이 이미 성대한데, 사평(司平)의 부자도 능히 모두 공경하고 근신하여 뜻과 절조를 더욱 가다듬어 귀한체 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며, 선을 즐겨 게을리 함이 없다. 이는 그 지킴을 더욱 삼가서 선대의 빛을 드날리는 것이니, 후손에게 경사가 흘러감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명(銘)에 써야 하겠다. 그 명은 이러하다.기름진 서원 땅 / 膴膴西原그 근원을 누가 열었는가 / 孰濬其源국공이 터를 잡아 / 國公肇緖그 근본을 잘 굳혔네 / 克固其根그 뿌리 굳건하여 / 其根旣固가지와 잎 번성하구나 / 枝葉是繁높고 큰 문정공 / 烈烈文貞몸가짐이 맑아서 / 操履之淸가슴속 티끌 없음이 / 胸中無累가을달의 밝음일세 / 秋月之明밝고도 정성스러운 형부상서 문간공 / 顯允刑部덕행이 있어 / 維德之行예로써 처신하며 / 身以禮持세속에 영합하지 않았네 / 不與俗隨청렴하고 검소함 더욱 돈독하여 / 淸儉彌篤그 터전에 후하게 덕을 쌓았으니 / 厚積厥基공경도 될 수 있고, 정승에도 알맞건만 / 宜卿宜相마침내 시용하지 아니하고 / 訖莫以施경사를 뒤로 물려 / 遺慶于後넉넉함을 끼치었네 / 以垂其裕사평을 계도하니 / 迺啓司平준엄하고 씩씩하여 / 旣峻且武충성은 사직에 있고 / 忠在社稷공로는 맹부에 간직하였네 / 功藏盟府부자가 두 번이나 맹세하여 / 父子再啑임금의 큰 사업을 함께 도우셨네 / 同獎王業형제 모두 훌륭하여 / 兄弟竝美임금의 딸 맞이하니 / 王姬是室광채나는 은총의 빛 / 赫赫寵光옛날에도 짝 없구나 / 雖古罕匹모두 법을 잘 지키고 / 咸能守法더욱 지조를 삼가니 / 愈謹秉節복록은 끊임 없고 / 福未有艾전렬 더욱 빛이나 / 增光前烈면면한 그 후손 / 繩繩來裔길이길이 이어가리 / 引之無替이 사연을 비석에 새겨 / 刻辭于碑영원한 후세에 밝게 보이노라 / 昭示永世*광주목사 이민
    2022-05-06 | NO.64
  •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 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김광식)
    동문선 제127권 / 묘지(墓誌)송당 선생 김공 묘지명 병서 (松堂先生金公墓誌銘 幷序)이색(李穡)지정(至正) 신사년에 내 나이 14세에 성균시에 응시했다. 고시장에 나아가 뜰 가운데 선생을 바라보니 포(袍)와 홀(笏)을 갖추고 단정히 앉아 있는데, 엄숙한 모습이 마치 태산교악(泰山喬嶽)과도 같아서 여러 선비들이 숨소리를 죽이고 감히 떠들지 못하였다. 문생이 되어서는 왕래하면서 가르침을 들으니 따뜻한 말씨와 부드러운 낯빛으로 국법을 설명해 밝히고, 인재를 부지런히 권면하고 또 거듭 말하면서 나라의 풍속이 날로 쇠퇴하여 가고 있다고 개탄하였다. 집에서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좌우에 거문고와 서적이 있어 담담하다. 동산 산마루에 솔을 재배하고 서재 남쪽 못 가운데 연꽃을 심었으며, 해마다 뜰에 모란이 활짝 피면 술과 음식을 갖추어 문생들을 불러놓고 대부인(大夫人)께 헌수(獻壽)하니, 그 형제와 자손들이 항상 화기애애하여 효제(孝悌)의 지극함은 신명까지 통하였다. 대부인이 91세의 장수를 누렸으니, 아, 참으로 성대한 일이 아닌가. 병신년 3월에 대부인이 병환으로 돌아가니, 황고(皇考) 문정공(文正公)의 묘소 아래에 장사 지내고, 그 곁에서 살면서 복제(服制)를 마쳤다. 선생은 본래 병으로 걷기가 어려웠으나 아침저녁으로 전(奠) 올릴 때에 반드시 몸소 쓸고 닦기를 잠시도 그만둔 적이 없었다. 우리나라 풍속에 부모의 분묘를 지킬 때에, 흔히 종을 대신시키고 사사로이 노복의 부역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차마 어버이에게 섭섭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몸소 이를 행하였으니, 이는 근래 재상 중에 일찍이 없던 일이다. 선생의 성은 김씨요, 이름은 광식(光軾)이고, 자(字)는 자여(子輿)이며, 호는 송당거사(松堂居士)이니, 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사공이 고려의 태조를 도와서 공로가 있었고, 그 후예에 이름은 광서(匡瑞)요,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인 사람이 있었다. 중랑장이 휘(諱) 위(偉)를 낳았는데 벼슬은 삼사사(三司使)였으며, 삼사사가 휘 경량(鏡亮)을 낳았는데 대장군이며, 대장군이 감찰어사 휘 수원(須元)을 낳았는데, 처음에 삼별초(三別抄)가 순수히 귀순하지 않고 반심(叛心)을 품고 바다 섬 속으로 들어갔었는데, 어사공이 영광(靈光)의 원으로 있다가 이들에게 죽었다. 어사공이 국자좨주(國子祭酒) 휘 고영중(高瑩中)의 손자 모관(某官)을 지낸 휘 몽경(夢卿)의 딸과 결혼하였는데, 고씨는 나이 1백 2세가 되도록 살았다. 예전에 고씨의 꿈에 밝은 별이 품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는데, 쾌헌 선생(快軒先生) 문정공(文正公) 휘 태현(台鉉)을 낳았다. 문정공은 4대의 왕조의 원로로 일국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고문적인 존재로 정승에 이르고 치사(致仕)하였다. 일찍이 국초 이래의 문장을 모아 《해동문감(海東文鑑)》이라 이름하여 간행한 적이 있고, 성균시를 관장하고 다시 지공거가 되어 공이 선발한 선비에 유명한 사람이 많았으니, 죽계(竹溪)의 안근재(安謹齋)와 최졸옹(崔拙翁)은 그 중에서도 더욱 뛰어난 분이었다. 먼저 행수낭장(行首郞將) 김의(金義)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광식(光軾)이요, 벼슬은 선부 의랑(選部議郞)에 이르렀고, 계실(繼室)은 태조의 아들 효은(孝隱)의 후손인 시랑(侍郞) 정단(丁旦)의 딸로서 3남 2녀를 낳았는데, 장남 광철(光轍)은 급제하여 벼슬이 밀직사에 이르렀고, 다음이 선생이요, 다음은 광로(光輅) 급제하였다. 맏딸은 정당문학 안목(安牧)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밀양군(密陽君) 박윤문(朴允文)에게 시집갔다. 공의 삼형제가 이미 과거에 올라 대부인이 나라에서 주는 녹으로 그 몸을 마쳤다. 박씨의 아들 4명과 안씨의 손자 3명이 또 모두 과거에 오르니, 당시 사람들이 부러워하였다.공은 지원(至元) 갑자년 정월 갑자일에 출생하자, 이미 신장이 2척(尺)이 넘어 부모가 기특하게 여겨 몹시 사랑하였다. 관례 후 황경(皇慶) 계축년에 과거에 급제하니, 좌주(座主) 일재선생(一齋先生) 권정승(權政丞)이 예법을 아는 것을 사랑하여 후히 대하고 성균학관(成均學官)에 보직하였다. 지순(至順) 경오년에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 서울로 갔는데, 그 공로로 사복시 승(司僕寺丞)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도관 정랑(都官正郞)으로 옮겼다. 그 뒤 지원(至元) 기묘년에 충혜왕이 조적(曹頔)에 의해 거의 폐위될 뻔했다가 다행히 이겼으나, 그의 일당이 원나라 권력층에 많이 붙어서 기필코 자신들의 음모를 성취시키려고 하였다. 왕이 북경으로 갈 때에 공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이 위태로우실 것이니 나만 어찌 차마 여기서 혼자 면하겠느냐.” 하고 수종해 갔다가 천자의 성명(聖明)하심에 힘입어 다시 작위를 회복하고 돌아오니, 때는 경진년 가을 7월이었다. 군부총랑(軍簿摠郞)으로 참전선사(參銓選事)가 되고, 성균 좨주(成均祭酒)ㆍ삼사 좌윤(三司左尹)ㆍ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등 관직을 여러 번 전전하였으나, 모두 관직(館職)과 지제교를 겸임하였다. 다음해 가을에 성균시(成均試)를 주관하여 지금의 지밀직사사 성사달(成士達) 등 99명을 선발하니, 당시에 선비를 많이 얻었다고 일컬었다. 충혜왕이 평소에 공의 엄중함을 꺼렸고, 좌우의 사람들도 대부분 꺼렸는데, 다만 구실로 삼을 것이 없었다가 드디어 말하기를, “김공은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고 벼슬길에 나오는 것은 그의 본래의 뜻이 아니다.” 하니, 임금이 차차 이 말을 믿게 되어 드디어 공의 직임을 갈아버리니, 여러 소인들이 더욱 기세를 폈다. 계미년 겨울에 악양의 화[岳陽之禍 충선왕이 귀양간 것]가 일어나고, 갑신년에 충목왕(忠穆王)이 왕위에 서면서 공을 기용하여 우부대언(右副代言)으로 삼고 다시 지신사(知申事)로 옮기니, 권력을 잡은 대신이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제수하였다. 얼마 안 되어 임금이 이를 후회하고 밀직부사 제조전선사(密直副使提調銓選事)에 임명하였다가 곧 지사(知司)로 승진되었다. 기축년에 충정왕(忠定王)이 왕위에 오르자 서연(書筵)을 열어 공을 스승으로 삼으니, 공이 굳게 사양하였고, 첨의(僉議)로 들어가서 평리(評理)가 되고, 광정대부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상호군이 되어, 이어 제조전선사(提調銓選事)를 겸하고 있다가 바로 삼사우사(三司右使)로 고쳐 주니, 들어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문인에 대한 선발은 이조에서 관장하고 무신에 대한 선발은 병조(兵曹)에서 관장하는데, 정방(政房)에서 총괄하는 것은 권신(權臣)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니 아름다운 법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신의 말씀을 들어 주시어 옛 제도대로 하시는 것이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나 반드시 공정해야 한다고 하며 공에게 명하여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겸임하게 하였다. 신묘년 10월에 현릉(玄陵)이 왕위에 오르자, 공은 두문불출하고 대부인을 봉양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예절을 다하였다. 대부인이 돌아가시자 여묘(廬墓)를 마칠 때에 이르러서는 시중(侍中) 홍양파(洪陽坡)선생이 당대 이름 있는 경과 재상들과 같이 찾아가서 그 노고를 위로하자, 공은 말하기를, “내가 나이 63세로 처음 여기 와서 살 때에는 항상 하루아침으로 어머니보다 먼저 죽어 종족의 수치나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더니,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은 나의 고비(考妣 돌아가신 부모)의 덕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위문갔던 사람도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탄복하였다. 여묘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집 북쪽 모퉁이에 판위(版位)를 마련해 놓고, 행사할 때마다 곡읍(哭泣)을 그치지 않았다. 숙병으로 인하여 문밖을 나가지 않으니, 현릉(玄陵)이 그 명성을 듣고 사자를 보내어 공에게 유시하기를, “공과 더불어 말하고자 생각해 온 지 오래되었소. 과인으로 하여금 한 번 만나볼 수 있게 해 주지 아니하겠는가.”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자식과 조카에게 부축하게 하여 조정에 들어가니, 임금이 이르기를, “연령과 안색은 그다지 쇠하지 않았는데도 병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한참 동안 탄식하고 애석해하였다. 그리고는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공이 사는 마을에 영창방(靈昌坊) 효자리(孝子里)라고 정문(旌門)을 세워 표시하고, 또 그 마을의 몇 호(戶)의 부세를 면제해 주어 공을 받들게 하였다. 신축년 겨울 11월에 홍건적을 피하여 고창현(高昌縣)에 이르러, 그곳에 머물러 살던 중 계묘년 3월에 경미한 병증을 느꼈으나 행동과 언어가 조금도 변함이 없더니, 14일에 날이 저문 후에 부인에게 말하기를, “내가 올해 나이가 70이니 죽은들 다시 무슨 여한이 있겠소. 남자가 부인 앞에 숨을 거두지 않는 것이 옛 예이니, 여러 여종과 더불어 물러가 있으시오.” 하고, 또 경계하기를, “음성을 높이거나 급한 말로서 나를 동요시키지 말라.” 하더니, 조금 있다가 숨이 끊어지니 평소 수양의 깊이를 알 수 있다. 아들과 사위들이 영구를 받들고 서울로 돌아와서 모월 모일에 덕수(德水)에 있는 선영 아래에 안장하였다.공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시호 양간공(良簡公) 김승택(金承澤)의 딸을 아내로 맞아 자녀 둘을 낳았는데, 아들의 이름은 흥조(興祖)로 성격이 쾌활하며 큰 뜻이 있었고, 벼슬이 중현대부 군기감(中顯大夫軍器監)에 이르렀으며, 수원(水原)ㆍ해주(海州)의 부사(府使)를 역임하여 치적이 매우 현저하였으나, 취성(鷲城 신돈)의 손에 죽어 사람들이 지금까지 이를 불쌍히 여기고 있다. 딸은 봉선대부 내부부령(奉善大夫內府副令) 박문수(朴門壽)에게 출가하였으니, 신라의 시조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다. 손자는 남녀 몇이 있으니, 군기는 감찰대부 신중전(申仲全)의 딸과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았는데, 낭장 송의번(宋義番)에게 출가하였다. 내부(內府)는 2남을 낳았는데 장남 총(樷)은 학문을 좋아하고 뜻이 고상하였으며, 전(前) 봉선대부 좌우위 보승호군(奉善大夫左右衛保勝護軍)이었고, 다음 포(苞)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전의녹사(典儀錄事)를 역임하였다. 외증손 몇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호군(護軍)이 공의 행장으로 한산(韓山) 이색(李穡)에게 묘비명을 청하며 말하기를, “자네가 마땅히 명을 지어야 하네.” 하니, 이에 받아 가지고 서술하는 바이다. 아, 선생의 덕행과 정사가 이처럼 현저하니, 자손이 많아야 마땅하거늘 군기감의 후손이 없으니 이는 하늘이 정하지 않은 것이요, 또 이것이 하늘의 좋아하고 미워함이 사람과 다른 바이다. 아, 슬프도다. 하지만 다행한 일은 박씨가 있다는 것이다. 선비가 공을 세워 그 외조부를 드러내는 자가 역사서에 끊이지 않았으니, 박씨는 힘쓰고 또 힘쓰라. 다음과 같이 명을 쓴다.동쪽 언덕 / 惟東有岡푸른 저 솔숲은 / 有松蒼蒼군자의 저택이요 / 君子之宅못물 가득히 차고 / 池水之盈연꽃 향기 맑음은 / 蓮香之淸군자의 덕이로다 / 君子之德나아가 임금을 섬길 적엔 / 出以事君정사가 있고 문채가 있어 / 有政有文우리의 왕국을 바로잡았고 / 正我王國들어와 어버이를 모실 적엔 / 入以事親늙을수록 더욱 참되어 / 愈老愈眞백성의 풍속을 변화시켰네 / 化我民俗선생의 높은 풍모 / 先生之風널리 해동을 덮어 / 被于海東길이길이 법받을 것이로다 / 永世攸則내 이 명을 지음은 / 我作斯銘선생을 사적으로 좋아함이 아니요 / 匪私先生사필의 곧음이로다 / 史筆之直*광주(光州) 사람인 사공(司空) 김길(金吉)의 후손이다
    2022-05-06 | NO.63
  •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시문충 하공 묘지명(하윤, 하륜) 광주 귀양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유명조선국 분충장의 동덕정사 좌명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산부원군 수문전대제학 영경연 춘추관서 운관사 세자사 시문충 하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奮忠仗義同德定社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晉山府院君修文殿大提學領經筵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諡文忠河公墓誌銘 幷序)윤회(尹淮)하씨(河氏)의 조상은 진주(晉州)에서 나와 한 고을의 명망 있는 집안이 되었다. 좌사낭중(左司郞中) 휘 공진(拱辰)으로부터 고려에 벼슬하여 현왕조(顯王朝)에 공을 세워 오랑캐를 평화롭게 하고 적을 물리쳐 일대의 명신이 되었다. 그 뒤에 탁회(卓回)라는 분은 고왕조(高王朝)에 벼슬하여 사문박사(四門博士)가 되었고, 박사로부터 사대(四代)가 잇달아 과거에 올라 대대로 명망 있는 사람이 있어 경사를 심고 선행을 쌓아서 공에 이르러 가문이 더욱 번창하였다.공의 휘는 윤(崙)이요, 자는 대림(大臨)이다. 증조는 휘 식(湜)이니, 박사의 5대손으로, 징사랑 선관서승(徵仕郞膳官署丞) 증 순충보조공신 보국숭록대부 판사평부사 진강군(贈純忠輔祚功臣輔國崇祿大夫判司平府事晉康君)이요, 조부 휘 시원(恃源)은 식목녹사(式目錄事) 증 순충적덕병의 보조공신(贈純忠積德秉義輔祚功臣)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정승 판병조사 진강부원군(判兵曺事晉康府院君)이요, 아버지 윤린(允潾)은 봉익대부 순흥원사(順興院使) 증 충근익대신덕수의협찬공신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부사 진양부원군(贈忠勤翊戴愼德守義協賛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晉陽府院君)이고, 어머니 강씨(姜氏)는 증 진한국대부인(贈辰韓國大夫人)이니, 검교예빈경 증 숭록대부 의정부찬성사 판호조사 휘 승우(承祐)의 딸이며 모두 공의 귀함으로 증직을 얻었던 것이었다. 지정(至正) 정해년 봄에 강씨가 길몽을 꾸고 태기가 있어 그 해 12월 기축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렸을 때부터 우뚝이 보통 아이와 같지 않고 10세에 배우기 시작하여 전수받으면 대번에 외웠다. 나이 14세에 경자년 국자감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행촌(杏村) 이 대부(李大夫)가 바로 그때 시관이었고, 19세에 을사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초은(樵隱) 이문충공(李文忠公)과 목은(牧隱) 이문정공이 그 좌주였다. 문충공이 한 번 보고는 큰 그릇으로 여겨 곧 그 아우 예의판서(禮儀判書) 인미(仁美)의 딸로서 아내를 삼았다. 그 때 두 공이 사문(斯文)의 종주가 되어 학사(學士) 대부(大夫)가 모두 그 문하에서 나오게 되었다. 공이 사우(師友) 사이에 주선하면서 강론을 연마하여 학문이 날로 전진되었다. 정미년에 춘추관에 뽑혀서 겸열(檢閱)과 공봉(供奉)이 되었다. 홍무(洪武) 원년 무신에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고시하고, 기유년에 수사(收司)가 양전한 것을 조사하면서 신돈(辛旽)의 문객으로 수사 부사(收司副使)로 있는 자를 탄핵하였다가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다. 신해년에 신돈이 처형된 뒤에 지영주안렴사(知榮州按廉使)로 기용되자 김주(金湊)가 그 정사와 행실이 제일이라고 아뢰었다. 임자년에 고공좌랑(考功佐郞)으로 불러 제수하고, 계축년에 판도좌랑(版圖佐郞)으로써 교주 강릉도 찰방(交州江陵道察訪)이 되었고, 갑인년에 제릉서령(諸陵署令)이 되고, 을묘년에 사헌부 지평과 전리 정랑(典理正郞)이 되었다. 병진년에 전교부령 지제교에 올랐다가, 전의부령(典儀府令)으로 옮겼고, 정사년에 전법총랑 보문각 직제학에 올랐으나, 전례대로 지제교를 맡았다. 이로부터 제직(除職)이 되었으나, 모두 관직(館職)을 띄었고, 또 판도총랑으로 교주도안렴(交州道按廉)이 되었다. 무오년 전리총랑이 되고 기미년에 전교령 성균대사성에 오르고, 경신년 9월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고, 신유년에 기복(起復)되어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가 되었으나, 상을 끝낼 수 있도록 청하니, 허락하였다. 임술년에 삼복이 끝나자 우부대언(右副代言)이 되고, 계해년에 우대언(右代言)에 옮기고 얼마 안 되어 전리판서(典理判書)가 되었고, 갑자년에 밀직제학(密直提學)이 되고, 을축년에 첨서(僉書)에 오르고, 그 가을에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국자전부(國子典簿) 주탁(周倬) 등을 보내니, 공이 서북면(西北面)에 영접하였으며, 돌아갈때에 공이 사표(謝表)를 받들고 함께 가니, 주탁 등이 매우 예우하였다.정묘년에 동지(同知)에 오르고, 무진년 봄에 무신 최영(崔塋)이 군대를 일으켜 요양(遼陽)을 범하려 할 때, 공이 힘껏 불가함을 진술하였더니, 최영이 노하여 양주(襄州)로 추방하였다. 여름에 최영이 패하자, 공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을사년 봄에 다시 동지(同知)가 되었고, 가을에 영흥군(永興君) 왕환(王環)이란 자가 일본에서 오니 공이 인척(姻戚)으로 평소에 왕환의 얼굴을 알았기에 그가 왕환이 아님을 말하였다가 광주(光州)에 귀양갔다. 경오년 봄에 울주(蔚州)에 옮겼다가 여름에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모든 귀양살이하던 사람을 청주에 모아 둘 적에 공이 사면되어 진주로 돌아왔다. 신미년 여름에 전라도 도관찰사에 기용되었고, 임신년 여름에 돌아오니 우리 태조가 이미 임금이 되었다. 계유년 가을에 다시 공을 기용하여 경기좌도 관찰사가 되었었다. 공이 비로소 민호(民戶)의 농토 개간의 정도여부에 따라 부역을 정하니 토호들은 싫어하였으나, 백성들은 그 공평함에 복종하였다. 여러 도가 모두 본받아 드디어 제도로 정해지게 되었다.그 때에 태조가 계룡산으로 서울을 옮기려고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을 때, 공이 힘껏 간언하였기 때문에 따랐다. 갑술년 3월에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가 되었고, 을해년 4월에 중추사(中樞使)에 옮기고, 7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병자년 4월에 기복되어 예문춘추관 학사가 되어 사퇴를 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고황제가 사표(謝表)한 글이 불공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서 그 문장을 주관한 자인 정도전을 입조(入朝)하게 하였다. 또 우우(牛牛) 등을 보내어 독촉을 하니, 공이 관반(館伴)이 되었는데, 태조가 은밀히 조신들에게 보내는 문제를 물었다. 모두들 관망만하고 굳이 보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나, 공만이 보내는 것이 편리하다고 하여 정도전이 크게 감정을 품었다. 7월에 태조가 이지(李至)를 보내어 일을 주달하려 하였을 때, 사신이 아뢰기를, “오직 하관반(河館伴)이라야 사명을 다 할 것입니다.” 하고 함께 가기를 청하였다. 공이 명나라 조정에 이르러 상세하고 분명하게 아뢰어 일이 풀리게 되었다. 정축년 정월에 정도전이 군대를 일으켜 국경을 나갈 것을 의논하려 하면서, 공을 꺼려 계림부윤으로 내보냈더니, 그 해 봄에 왜추(倭酋) 몇 명이 무리를 거느리고 경상도에 와서 항복할 것을 청하므로 4월에 공이 관찰(觀察)ㆍ절제(節制) 제공과 더불어 이 일을 처리할 것을 의논하였더니, 의논을 주장한 자가 실책하여 왜추가 도망갔다. 6월에 공 등을 체포하여 순군(巡軍)에 치대(置對)하였고, 7월에 수원부에 안치되었고, 10월에 풀려 나고, 무인년 7월에 충청도 도관찰사가 되었다.9월에 상황(上王)이 왕위를 계승하자, 불러 정당문학이 되고, 10월에 정사공(定社功)을 책정하여 공이 1등으로 진산군(晉山君)의 봉작을 받고 들어가서 건문황제(建文皇帝)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기묘년 12월 참찬문하부사가 되었다. 경진년 4월에 찬성사에 오르고, 5월에 판의흥삼군부사 겸 판상서사사(判義興三軍府事兼判尙瑞司事)가 되고, 9월에 문하우정승 판병조사(門下右政丞判兵曹事)에서 관작이 승진하여 백(伯)이 되고, 11월에 금상이 즉위하였고, 신사년 정월에 좌명공(佐命功)을 녹하매 공이 또 1등에 있었고, 윤 3월에 병으로 사퇴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고, 4월에 지공거가 되어 지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 등 33명을 뽑았고, 7월에 관제(官制)가 고쳐지매 영사평부사 겸 판호조사(領司平府事兼判戶曹事)가 되어 비로소 국내에 통행하는 저폐(楮幣)를 만들어서 나라의 용도를 풍부하게 할 것을 청하였다. 임오년 6월에 명나라 조정에 가서 명명(明命) 악장(樂章) 두 편을 받을 때에 교서를 내려 권장하였다.10월에 의정부 좌정승 판이조사(議政府左政丞判吏曹事)로 지금 황제의 등극을 축하할 적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이첨(李詹)이 부사(副使)가 되었다. 공이 명나라 서울에 도착하자 이공(李公)과 더불어 예부(禮部)에 글을 올리기를, “새 천자께서 등극하여 천하가 더불어 새롭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의 벼슬도 고쳐 주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황제가 아름답게 여겼다. 영락(永樂) 원년 계미 4월에 명나라 사신 도지휘사(都指揮使) 고득(高得) 등과 함께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들어 오니, 임금이 더욱 귀하게 여겨 하사한 물건이 실로 후하였다. 갑신년 6월에 가뭄으로 면직할 것을 빌었고, 을유년 정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어 세자사(世子師)를 더하였고, 병술년에는 공이 각 종파의 절 주지(主持)들이 전토와 노비를 많이 점유하여 돈놀이를 하고, 여색에 빠져 재물을 좀먹고 대중을 미혹시킨다고 건의하여 각도의 주(州)와 군(郡)에 한두 절만 남기고 모두 철거하였으며, 그 전토와 노비는 나라에 귀속시키게 하니 임금이 이 의견을 따르자 식자들이 통쾌한 일이라고 칭찬하였다.정해년 4월에 문사들이 중시(重試)를 치룰 때, 공에게 명하여 시권을 읽도록 하여 지금 예문관 제학 변계량(卞季良) 등 10명을 뽑고, 7월에는 가뭄으로 임금의 처소를 옮기기를 청하였었다. 무자년 2월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고, 신묘년 3월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지금 평양판관 권극중(權克中) 등 33명을 뽑았고, 임진년 8월에 좌정승에 복직되었으니, 공이 이 때에 네 차례나 국권을 잡았다.갑오년 4월에 국가에서 주관(周官)을 모방하여 정부의 모든 사무를 나누어 육조(六曺)에 귀속시키고 공을 영의정부사로 삼았으며, 을미년 10월에 또 좌의정이 되었다. 병신년 봄에 공의 나이가 70이 되었으므로 옛 일에 의거하여 치사(致仕)하기를 요청하였으나 임금이 오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수차례 여쭈니, 임금이 특별히 우대하여 조회에는 참여하지 않게 하더니, 4월에 이르러 허락하고는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으로 사제(私第)로 나아가도록 하였는데,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자문을 하였다.그 해 10월에 임금이 함길도(咸吉道)에 사신을 보내어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두루 살피려 하자 공이 스스로 갈 것을 청하였더니, 임금이 늙었다고 민망히 여겼으나 그 뜻을 가상히 여겨 친히 교외에 나가서 전송을 하였다. 공이 이미 일을 끝내고 돌아오려 할 때, 병이 나자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내의(內醫)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고, 내주(內廚)에서 반찬을 제공하니 문병하는 중관(中官)이 길에 잇달았다. 11월 6일 계사에 정평(定平) 관사에서 졸하였다.부고가 이르자 임금이 심히 애도하여 눈물을 흘리고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고, 예관을 보내어 교서를 가지고 가서 치제하였다. 또 유사에게 명하여 호상(護喪)하여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본제에 빈소를 차리고는 임금과 세자가 친림하여 조문과 제전을 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하였다. 관아에서 장례식을 맡고 특별히 하였으니, 공에 대한 사후의 영예가 참으로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있었다. 명년 정유 3월 11일 정유에 사자(嗣子) 도총제공(都摠制公)이 관을 모시고 진주(晉州) 동방등(桐房洞) 감산(坎山) 언덕에 있는 선영 동쪽에 부장(附葬)하였으니, 공의 유언을 따른 것이었다.공은 천품이 중후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넓으며, 조용하고도 간소하여 평생에 빠른 말과 급한 얼굴빛이 없었으나, 단정히 묘당(廟堂)에 있다가 의심나는 것을 판결하고 계책을 정할 때에는 그 기운이 씩씩하여 조금이라도 훼방과 찬양으로써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었다. 정승이 되었을 때는 대체(大體)만을 힘쓰고 까다롭게 살피지 않았으며, 아름다운 정책과 은밀한 의견으로 임금에게 도움이 컸으며, 물러나서는 일찍이 남에게 누설을 한 일이 없었다. 자기 몸가짐이나 사람들을 만날 때에 한결같이 정성으로 하되 거짓이 없고, 종족에는 어질고, 벗에는 믿음 있고, 아래로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은혜에 감복하고, 인재를 추천함에 늘 부족하게 여기고, 지극히 작은 착함도 반드시 취하되 그 작은 허물은 덮어 주었다. 집에 거처할 때는 살림살이를 다스리지 않고 사치를 좋아하지 않으며, 잔치 놀이를 즐겨하지 않았다. 성품이 글읽기를 좋아하여 손에는 책을 놓지 않고 여유있게 휘파람과 시를 읊으면서 침식을 잊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는 음양(陰陽)ㆍ의술(醫術)ㆍ성경(星經)ㆍ지리(地理) 등에 이르기까지도 극히 정밀하였으며, 예악과 여러 제도는 모두 공이 상정(詳定)한 것이었다. 후생을 권면하고 의리를 토론함에 매우 부지런히 하였으며, 국정을 담당한 이래로 오로지 문한(文翰)을 맡아서 외교의 사명(辭命)과 문사(文士)의 작품이라도 반드시 공의 윤색(潤色)과 인가(印可)를 거친 뒤에 정하였다. 일찍이 어명을 받아 《태조실록(太祖實錄)》 15권을 수찬해서 올리었다. 스스로 호를 호정(浩亭)이라 하였는데 문집 약간 권이 있다. 미리 유서(遺書)를 써서 상자 속에 간직하여 자손에게 교훈을 하였으되 자세하여 빠진 것이 없었고, 또 상장(喪葬)에는 한결같이《주자가례》에 의거하고 불교 의식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그 집에서 유서가 발견되어 모두 그 말을 따랐다.부인 이씨(李氏)는 지금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작을 받았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구(久)이며 중군도총제부총제(中軍都摠制府摠制)이다. 딸 둘이 있는데 맏딸은 한성부윤 홍섭(洪涉)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경상좌도 도절제사 이승간(李承幹)에게 시집 갔다. 손자 복생(福生)은 어리고, 외손, 다섯은 모두 도절제사의 아들인데 첨전(忝全)은 전(前) 공정고 부사(供正庫副使)요, 신전(愼全)은 사재직장(司宰直長)이요, 다음은 성전(誠全)ㆍ안전(安全)ㆍ항전(恒全)이다. 서자 셋이 있는데 장(長)과 연(延)은 모두 어리고, 영의(永義)는 흥시위사대호군(興侍衛司大護軍)이다. 서녀(庶女) 셋이 있는데 맏딸은 곡산부사(谷山府使) 김질(金秩)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중군사직(中軍司直) 장희걸(張希傑)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진산은 푸르고 / 晉山蒼蒼진수는 넘실넘실 / 晉水泱泱아, 아름다운 땅의 신령스러움 / 猗歟地靈호정을 낳았구나 / 生我浩亭선생의 자질 / 先生之質옥처럼 윤택있고 엄준하네 / 玉潤而栗시원스러운 흉금은 / 洒落胷中개인 달과 맑은 바람이라 / 霽月光風하늘이 동방을 도우시어 / 天眷東方우리 임금을 돕게 하시네 / 俾輔我王여러 말과 계책을 들어 주시니 / 言聽計從천년에 한번 나는 기회로다 / 千載一逢공을 정승으로 삼아 / 爰立作相백관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니 / 百僚是長공로가 종묘사직에 있고 / 功在廟社은택은 어려운 백성에 미쳤다오 / 澤被鰥寡이단을 배격하여 / 觝排異端도학을 밝히시니 / 唱鳴道學공이 이 때에 / 公於是時당나라의 한유가 되고 / 唐之昌黎두 조정에 계책을 정하여 / 定策兩朝친히 국사를 도왔으니 / 親扶日轂공이 이 때에 / 公扵是時송나라 치규라네 / 宋之稚圭미연에 밝게 알아 / 明炳幾先계책이 헛됨이 없었으니 / 筭無遺策누구와 비슷한가 / 誰其似之장막 속의 장자방이라오 / 帷幄子房충의와 정성이 / 忠義精誠위로 흰 해를 꿰었으니 / 上貫白日누구와 같은가 / 誰其似之한 평생 분양이라오 / 終始汾陽사업이 넓고 덕이 높아 / 業廣德崇나라의 원로이네 / 宜國黃耇칠순에 마치시니 / 七旬而終어찌 장수라 이르리오 / 孰云其壽팔 다리가 없어진 듯 / 股肱之虧임금께서 슬퍼하고 / 元首傷悲철인이 돌아가시니 / 哲人之萎길가는 나그네도 눈물지었다 / 行路涕洟아, 선생이시여 / 嗚呼先生이제 돌아가시다니 / 今也卽亡이름을 솥에 남기고 / 名留鼎彞신은 고향으로 돌아갔오 / 神返故鄕울창한 선영에 / 有欝先塋길이길이 간직하고 / 其永于藏돌 다듬어 글을 새겨 / 鑱石銘辭먼 장래에 보이리 / 用示攸長
    2022-05-06 | NO.62
  •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 흥녕부원군 시양도 안공 묘지명 (안경공), 이숙야 광주목사
    동문선 제129권 / 묘지명(墓誌銘)유명조선국 추충익대 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흥녕부원군 시양도 안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推忠翊戴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興寧府院君諡良度安公墓誌銘 幷序)윤회(尹淮)안씨(安氏)의 조상은 (順興)의 명망있는 가문이었다. 급제(及第) 휘 석(碩)이 학문에 힘을 써서 집안을 일으키더니, 얼마 안 되어 깊이 숨어 자취를 감추어 시골의 착한 선비가 되었다.그가 문정공(文貞公) 휘 축(軸)을 낳았는데 원조(元朝)의 제과(制科)에 합격되어 고려를 도와 벼슬이 첨의찬성사 흥녕부원군 영예문관사(僉議贊成事興寧府院君領藝文館事)에 이르렀고, 문장과 정사로 일대의 명경(明卿)이 되었다. 그가 문간공(文簡公) 휘 종원(宗源)을 낳았는데, 약관에 과거에 올라 청요직을 역임하고 드디어 대정(大政)에 참여하였고, 개국(開國) 초년에 나라의 원로로서 덕을 쌓아 판문하부사 집현전대학사(判門下府事集賢殿大學士)가 되었다가, 그 지위에서 졸하였다. 그가 우상시(右常侍) 김휘남(金輝南)의 딸에게 장가들어 세 아들이 과거에 올랐으므로 경혜택주(慶惠宅主)를 봉하였으니, 바로 공의 아버지와 어머니였다.공의 휘는 경공(景恭)이요, 자는 손보(遜甫)이니, 일찍이 가정의 교훈을 받아 조금도 부호가의 화려한 습속이 없고, 온화하고 어질고 효도롭고 경건함이 천성에 근본하였다. 지정(至正) 25년 을사에 사마시에 올랐고, 홍무(洪武) 5년 임자에 산원(散員)에 보직되었고, 명년에 낭장(郞將)에 특진되어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겸하였고, 병진년에 의영고 부사(義盈庫副使)로서 동진사(同進事)에 합격하여 전리(典理)ㆍ전법(典法)ㆍ좌랑(佐郞)ㆍ사헌지평(司憲持平) 등을 역임하였고, 예의정랑(禮儀正郞)에서 다섯 차례 전임되어 삼사좌윤(三司左尹)에 이르렀고, 비순위 상호군(備巡衛上護軍)으로 판통례문사 진현관 제학(判通禮門事進賢館提學)을 겸했다가, 얼마 안 되어 판전교시사 지제교예의판서(判典校寺事知製敎禮儀判書)로 전법(典法)에 옮기었는데, 죄수를 불쌍히 여겨 기뻐하지 않아 공평하게 판결하여 죄를 가볍게 처리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황주목(黃州牧)이 되어서는 백성을 자식처럼 어루만지니 백성들은 그가 떠난 뒤에도 사모하였다. 임신년 4월에 밀직사(密直司)에 들어와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었고, 7월에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아 혁명하였을 때, 공이 천명이 태조에게 돌아가는 것임을 알고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추대하여 좌대언(左代言)에 올랐다. 관제가 새로 실시되어 익대개국공신(翊戴開國功臣) 중추원 도승지(中樞院都丞旨)에 승진되었으니, 이 때는 정사를 처음 시작할 시기여서 공이 제일 먼저 승지로 있으면서 왕명출납이 밝고 적당하여 아름다운 계획과 비밀스러운 의논으로써 도움이 크고 많았다. 계유년에 사헌부 대사헌 도평의사사 사보문각학사(都評議使司使寶文閣學士)에 승진되었다. 공이 두 차례나 사헌부에 들어가 바름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으며 풍채가 엄숙하였다. 갑술년에 문간공의 상사를 당하였고, 상복이 끝나자 자헌대부로 흥녕군(興寧君)에 봉하였고, 공훈과 관직(館職)은 전과 같았다.영락(永樂) 4년 병술에 판공안부(判恭安府)로서 정헌대부에 가자되고, 판한성부(判漢城府)로서 두 차례 더하여 숭정대부가 되었다. 무자년에 아버지 상을 만났는데, 약물의 봉양과 상장(喪葬)의 예식에 극히 정성과 효도를 다하니 보는 자가 공경하고 우러렀다. 경인년에 태종이 송도에 거동할 때, 공에게 명하여 개성유후(開城留後)를 삼았고, 병신년에 보국숭록대부 집현전 대제학에 특진되어 부원군의 봉작을 받았다.공이 조정에 있을 때는 국사에 대한 걱정에 전념하여 여러 사무를 다스리고, 대신이 되어서는 안정스럽게 장중한 모습으로 조정의 표준이 되었다. 공이 일찍이 경상도 안렴사와 전라ㆍ황해도의 관찰사가 되어 흐름을 따라 교화를 펼쳐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와 유지시키며 너그럽고 간소하여 까다롭지 않았기 때문에 부(部) 안이 잘 다스려졌다. 신축년 정월 10일에 정침(正寢)에서 졸하니, 나이 75세였다. 공이 병에 걸렸을 때, 태종과 지금 전하께서 급히 국의(國醫)를 보내어 치료하고 중사(中使)를 시켜 병을 보살폈다. 부고가 이르자, 양궁(兩宮)이 애도하여 조문과 치제를 후하게 하고 유사로 하여금 대장(大葬)을 하게 하고 시호를 양도(良度)라 하며 2월 27일 경신에 금천(衿川) 백사동(栢寺洞) 언덕에 장사하였다.공은 마음가짐이 곧고 미더우며, 몸가짐을 삼가히 하여 일찍이 추세에 따라 이리저리 하지 않았으며, 또한 특이한 행동을 하여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접대할 때 정성과 믿음으로 대하여 거짓이 없었으며, 마음속에 잘잘못을 모르는 것이 아니로되 입으로 절대로 남의 잘잘못을 논하지 않았다. 그 겸손한 덕은 벼슬이 높을수록 더욱 나타났으며, 본래부터 화려함을 싫어하여 검소에 힘썼다. 만년에 한가히 거처하여 잘 나가지를 않았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대접하여 기쁨을 취하되 사치를 숭상하지 않고 흉금이 담담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다. 공의 형제 셋이 모두 명성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고 오직 공만이 천복을 누려 나라의 원로가 되었으며, 손자와 증손이 번영하여 문호가 더욱 창성하였으니, 적선한 보답이 참으로 헛되지 않도다.부인 오천 정씨(烏川鄭氏)는 문정공(文貞公) 사도(思道)의 딸이었는데, 공신의 맏며느리라고 하여 의정택주(懿靜宅主)에 봉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이름은 순(純)이니, 현재 숭정대부 호조판서 보문각 대제학으로서 정당문학 정공권(鄭公權)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낳았다. 맏아들 숭직(崇直)은 용양사 상호군이요, 다음 숭선(崇善)은 승정원 도승지이니, 경자년 과거에 장원이요, 다음 숭신(崇信)은 웅무사 호군 중추원경력(雄武司護軍中樞院經歷)이요, 다음 숭효(崇孝)는 중군사직(中軍司直)이다. 맏딸은 사헌부 대사헌 이숙치(李叔畤)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조혜(趙惠)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사헌부 감찰 김준례(金遵禮)에게 시집갔는데, 증손은 남녀 약간 명이 있다. 상호군은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조견(趙狷)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는데 사직(司直) 박강(朴薑)에게 시집가고, 도승지는 상호군 송천우(宋千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는데 맏아들은 훈(訓)이요, 다음은 의(誼)요, 맏딸은 경창부승(慶昌府丞) 김숙(金潚)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세자좌사경(世子左司經) 조석문(曺石門)에게 시집갔다. 호군은 광주 목사(光州牧使) 이숙야(李叔野)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전(詮)이요, 맏딸은 도염녹사(都染錄事) 최민(崔旼)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어리다. 사직은 동지충추원사 이숙묘(李叔畝)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겸(謙)이요, 다음은 눌(訥)이요, 딸은 모두 어리다. 대사헌은 딸 하나를 낳았는데, 인순부승(仁順府丞) 이계현(李繼賢)에게 시집갔다. 판통례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지당(之唐)은 종묘서승(宗廟署丞)이요, 다음 지은(之殷)은 부사정이요, 다음은 지하(之夏)요, 다음은 지한(之漢)이요, 다음은 지주(之周)요, 맏딸은 유학 조계번(趙季蕃)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감찰은 4남 4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맹절(孟節)이요, 다음은 맹의(孟義)요, 다음은 맹렴(孟廉)이요, 다음은 맹치(孟恥)요, 맏딸은 유학 홍도상(洪道常)에게 시집가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며, 현손(玄孫)은 약간명이 있다. 박사직(朴司直)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고, 김부승(金府丞)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어리고, 전(詮)은 2녀를 두었고, 녹사는 1녀를 두었는데 어리고, 서승(署丞)은 1남을 두었으나 어리고, 부사정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아, 번성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높은 소백산 / 小白之山위로 푸른 하늘에 닿아있고 / 上磨蒼穹기이한 기운이 모여 빼어난 사람을 잉태하여 / 鍾奇孕秀칠상 오공을 낳았구나 / 七相五公후히 양도공을 낳았으니 / 篤生良度대대로 가업을 전하였도다 / 箕裘是承오직 충과 효로 / 惟忠惟孝전전긍긍하였소 / 戰戰兢兢공훈이 종과 솥에 새겨지고 / 勳銘鍾鼎명망이 사대부에 무거웠고 / 望重簪紳노성하신 덕 / 老成之德시초나 거북처럼 신묘하였오 / 蓍龜其神생시엔 특별한 은혜 높았고 / 生被殊遇죽으니 법도가 있다오 / 沒有典章슬픔과 영화로움의 시종이 / 哀榮終始청사에 빛이 더하였고 / 靑史增光자손이 연이어져 / 子孫繩繩복록이 다하지 않았다오 / 福祿未央돌을 다듬어 글을 묻어 / 鑱石埋辭먼 미래에 보이노라 / 用示攸長*광주목사 이숙야
    2022-05-06 | NO.61
  • 류평-서산류씨송암선생휘평묘갈명
    광주시 광산구瑞山柳氏松庵先生諱玶墓碣銘은 남학교수 이재순 짓다.유평(柳玶, 1577∼1645)은 1577년 광주시 광산구 본덕동 창교에서 태어났다. 자는 화보(和甫)이고 호는 송암(松庵)이며, 서산인(瑞山人)으로 을사명신(乙巳名臣)인 광주 호가정 주인 설강(雪江) 유사(柳泗)의 손자이며, 금호(錦湖) 임형수(林亨秀)의 외손이다. 재주가 뛰어나고 체구가 건장하였으며, 용력이 남달라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과 이름이 나란히 하였다. 사계 김장생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거인장덕(鋸人長德)이라며 칭하였다. 그는 정유재란 때에는 선생을 따라서 황주(黃州)와 봉산(鳳山) 사이에서 피난하여 3년 동안 머물다가 돌아왔다. 선생이 일찍이 효우(孝友)가 독실하다고 허여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헐뜯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광해군 때에는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서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폐한 채 학문을 강마하였는데, 이때 그의 스승 김장생은 이 편지를 보내어 장려하면서 ‘그대의 높은 의기는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였다. 장원봉 줄기를 따라 북쪽으로 약4km 제4수원지 아래쪽에 펼쳐지는 협곡에 분토마을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 뒷산에 고려말의 용장 정지장군을 모신 경렬사가 있다. 이곳은 처음에는 경렬공만을 모셨다가 후에 설강 유사, 송설정 고중영, 구성 전상의, 송암 유평, 충무공 정충신, 고중영의 아들 구암 고경조, 시은 유성익 등 7인을 더 모셔 팔현사라고도 부른다. 『송암유고(松庵遺稿)』는 유평(柳玶)의 시문집으로 1929년 유평의 후손 유영보(柳永甫), 병로(秉魯) 등의 노력으로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서문은 송증헌(宋曾憲)이 작성하였다. 유평이 사계김장생(沙溪金長生)의 문인으로 난을 당하여서 충효를 다한 인물이며, 그의 용기와 지략은 호남에서 김덕령과 쌍벽을 이룬다고 칭송하고 후손들이 문집을 간행하려고 서문을 부탁한 경위를 적고 있다. 권1은 시이다. 오언절구 29제 36수, 칠언절구 63제 98수, 오언사율 21제 25수, 칠언사율 30제 32수, 오언배율 8제 8수가 시체(詩體) 별로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유평 자신이 일상생활 속에 마주치는 사물이나 경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병(病), 춘하추동의 계절의 변화, 친구들을 방문하거나 헤어질 때 일어나는 감흥, 밤늦게까지 독서하면서 일어나는 느낌, 친구들이나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 의병을 일으키던 때의 감회, 친구나 문인들의 죽음을 애도한 만사(輓詞) 등 다양한 소재의 시가 작성되었다. 특히 1632년 가을 지은 창화시는 임담(林墰)이 동복현의 수령으로 있었던 때 임탄(林坦), 임토위(林土韋), 임담(林墰), 고전민(高傳敏) 등 저자의 친구들이 동복의 협선루(狹仙樓)를 찾아가 함께 술을 마시면서 시를 짓고 즐겁게 노니는 모습을 잘 묘사하였다. 시를 주고 받은 인물로는 기의헌(奇義憲), 나응숙(羅應淑), 정홍명(鄭弘溟), 오희도(吳希道), 송제민(宋濟民), 권필(權鞸), 원두표(元斗表) 등 인조 연간의 서인출신의 중앙 정계 및 호남에서 활약한 정치가 및 학자들이다. 권2는 격문(檄文), 상량문(上樑文), 서문(序文) 등 3장의 짧은 내용으로 되어 있다. 격문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유평이 광주 절양루(折楊樓)에 모의청(募義廳)을 설치하였을 때 지은 격문과 1637년 태인에서 다시 지은 두 개의 격문으로 되어 있다. 광주에서 지은 격문은 선비는 충효를 다해야 하는데 임금의 교서가 내려와서 열읍(列邑)에 알리니 한 마음으로 일어서서 의병과 군량을 모아 국가를 구하는 대의를 다하고 공명을 세우라는 글이다. 태인에서 지은 격문은 와전된 소식으로 의병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사실대로 내용을 알려주어 군정(軍情)을 안정시키게 해 달라고 요구한 글인데, 내용상 격문보다는 관청에 올린 글에 가깝다. 상량문은 유평이 사는 마을의 정자를 지을 때 지은 상량문으로 종족이나 이웃 간에 화목하고 강학하는 바탕이 될 수 있도록 축원하는 내용이다. 서문은 유평 자신이 모은 시문집의 자서(自序)로서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중년에 잦은 병으로 학문에 힘쓰지 못해 자신의 글이 보잘 것이 없으나 일에 따라 자신의 회포를 서술한 약간의 글을 모아 「송암한사(松庵閒事)」라고 한다는 글이다. 부록은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권1은 유평의 일생을 연대별로 요약한 「행록략(行錄畧)」과 박종(朴琮)이 지은 만장(挽章), 유청의 현손 유련보(柳璉甫)의 부탁으로 1700년에 오대경(吳大經)이 찬한 행장(行狀), 유청의 9대손 유찬근(柳贊根)과 상근(庠根)의 부탁으로 1869년(고종9)에 이재순(李載純)이 찬한 묘갈명(墓碣銘), 1872년 외손의 후예인 박이휴(朴頤休)가 찬한 묘지명(墓誌銘)이 있다. 권2는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과 전라감사에게 유평의 증직을 청원하는 세통의 상서로 되어 있다. 전주향교에 보낸 통문은 1762년(영조38) 9월 광주와 나주, 장성, 화순 일대의 유생들이 연명으로 통보한 것이며, 전라감사에게 청원하는 첫 번째 상서는 1762년 9월 나주와 광주, 화순 일대의 유생 375인이 연명으로 청원한 것이고, 두 번째 상서는 1762년 10월에 전주, 고부, 부안 일대의 유생 140인이 연명으로 청원한 것이고, 세 번째 상서는 1763년 2월에 광주와 나주, 전주, 남평 일대의 유생 393인이 증직을 청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라감사는 각각 ‘사실을 더 수집하라.’ ‘영문에서 참작해 보겠다.’ ‘행적이 뛰어나니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다.’는 제사(題辭)를 차례로 내렸다. 권3은「제가잡지(諸家雜誌)」이다. 제가잡지에는 『여지승람(輿地勝覽)』,『정묘양호거의록(丁卯兩湖擧義錄)』,『사계전서(沙溪全書)』에서 유평 관련 기사를 뽑아서 수록한 것이다. 권미에는 1929년 유평의 충효를 기리는 양계묵(梁啓黙)의 발문과 유평의 문집 편찬 과정을 서술한 유평의 11세손 유병로(柳秉魯)의 발문이 있다. 유병로는 백부 송파공(松坡公)이 유평의 시문을 책으로 간행하기 위해서 1권으로 모아두었는데, 책을 간행하기 위해 종제 병순(秉洵)과 함께 문중에 건의하였고, 이어 족숙 영택(永澤)이 보관한 초고(草稿) 1책을 더 합하여 문집을 간행하게 되었으며, 문집 간행 과정은 족조오 영오(永五)가 간행을 감독하였다고 서술하였다.
    2018-12-02 | NO.60
  • 류희달-농포류선생 신도비
    광주시 광산구 동호동 신촌마을 우산각 옆, 경위도좌표: N 35˚11´04.3″, E 126°41′05.2″  1947년이 농포류선생신도비(農圃柳先生神道碑)는 농포(弄圃) 류희달을 칭송하기 위해 1947년에 건립했다.  문화류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광산구 덕림동 산 37-2 수성마을 덕림사德林祠에 일당(逸堂) 유절(柳節, 1517~1580)과 그의 둘째 아들 농포(弄圃) 유희달(柳希達), 농포의 아들 고암(高巖) 유시필(柳時必), 농포의 9세손 경은(耕隱) 유인옥(柳寅玉) 등을 배향하고 있다. 농포 유희달은 정유재란 때 왜병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신도비를 세웠다. 유희달은 1571년에 태어 났으며 죽산부사를 거쳐 동지중구부사를 지냈다. 그 당시 왕으로부터 선무 원종훈(宣武 原從勳)이 주어졌고 지금은 덕림사에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농포유선생의 신도비는 신촌마을 우산각옆 경사면에 세워져있다. 고위관직에 계셨던 분들만이 세 울수 있는 신도비로 이 마을에 신도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후손들이 더욱 더 계승 발전 시켜주길 류씨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조선 단종 때 단종의 세력파인 류씨들이 세조가 왕으로 집권하면서 세력에 밀려  경기도에서 나주를 거쳐 이곳 신촌까지 내려오게 되었다는 문화류씨들의 집성촌이다. 지금으로부터 400년전 죽산부사 유희달공이 벼슬을 그만 두고 이 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생성 되었는데 그 뒤 문화류씨가 세거번창하여 지금에 이른다.이 마을은 형성되어 신촌(莘村)이라 하였다가 여러 마을이 합하여 지고 그것이 와전되어 신촌(新村)으로 되었다.이 마을은 풍수지리학상 부자일신(父子一身)을 잉태하게 만든 곳으로 만월괘서의 명당이라 하여 이주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번창 지금에 이른다. 신도비 앞에 있는 연불암산이 유희달공의 선산이며, 그 분의 묘가 있다.弄圃 柳先生 神道碑  (정리중)嘉善大夫摠戎將竹山府使弄圃柳先生神道碑銘幷序穆陵壬辰倭寇猖獗 承輿?番越宗社危如一髮弄圃柳公以濟世之材從戚姻健金先生聞性命業弓馬以文武全才稱朝野擧公拜宣傳官爲應時之聞時明將宋大贊以游擊將提兵東援性驕悍人難接應特公特拜摠戎命接伴使?荇擊禮遇甚重?擊宅倭累捷歸京言干 上日累戰累勝皆以柳接伴智勇可壬大將 上納其言除竹山府使增秩嘉善同樞仍丁酉再亂與兄同倡義族草?布告前日同義金億秋林?等四十餘人召募響應所向無敵賊平錄豈○源從勳賜鐵券公讓功諸賢乞骸歸鄕晝而治圃夜而弄月逍遙自適世稱弄圃先生諱希達字仲顯號弄圃始祖諱車達統合三韓拜大丞諡文貞歷文簡亥正八○本朝諱曼殊開國功臣左議自湄號西山文科監察 端廟遜位自靖于首陽山咸日東方伯夷享淸節祠諱軒號西坡文科兩館提學大司憲燕山戊午宜練言守濟州受命贈議政諡文簡錄淸白諱繼先生文科歷三司四道觀察使諱琬縣令郞公之高曾祖也祖諱順長文科監察考諱節文科參議?淑夫人陽城李氏別坐光弼女始居羅州三男長希榮習讀次郞公李希培郡守皆以人物之隣豪稱湖南三柳公生於 明宗辛未於 宣朝辛未葬于距家五里九龍洞念佛山丙坐原元配固城李氏光育繼配咸平李氏主簿夢麟女俱 贈貞夫人五男四女曰時潤時必時淸時源時??皆隱德不仕女適晉州鄭來昌羅州鄭麟瑞高興柳載瑞陽城李櫓餘不盡錄嗚呼公以參議公之仲子世龍文蔭出身秋號非公素志天旣爲躬亂而命世何敢辭武職事君之道文武一也次才兼文武眞身戎馬扶存社稷讓功身退不亦偉哉然而爲外勳所掩世莫知公聞道於健香其節義之高由於公雖無損其如後學所矜式何後孫洪烈神其實記諸文於無文不得辭遂爲之銘曰龍蛇之亂天地蛇?覆忠臣義士應時而作 任其責弄圃先生氣湧山河志功掃淸明將未援人難接抑薦公接伴見卽心○游擊屯倭殲彼讐仇豈功偉烈誰與爲侍志同金趙名齊李權及其凱還讓功諸聚還山弄月豈無所以如可得也忠公復起遺墟隣近維梓與桑堅碑于玆陟降洋洋我銘斯刻用詔千億瞻彼念佛過者必式隆熙四十一年丁亥二月日通訓大夫前成均館博士 完山 李光秀 謹撰十代 孫庠烈 謹書冠山 林萬洙 敬篆
    2018-12-01 | NO.59
  • 몽심헌선생김공홍련지비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 망월마을1928년이 몽심헌선생김공홍련지비夢心軒先生金公洪련之碑는 몽심헌 김홍련의 비로 내산동 망월마을 뒤편 구릉지대에 고인돌 3기와 몽심헌 김홍련의 비가 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李炳壽가 찬했다.내산동은 원래 나주군(羅州郡) 삼가면에 속한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내동리(內洞里)·쌍계리(雙溪里), 도림면(道林面) 용산리(龍山里)· 망월리(望月里) 등의 일부를 합하여 삼도면(三道面) 내산리가 되었다. 1949년 광산군에 편입되었으며, 1988년 광산구가 신설되면서 광산구 내산동이 되었다. 내산동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인 삼도동(三道洞) 관할하에 있다.
    2018-11-18 | NO.58
  • 문간박선생눌재신도비명
    광주시 서구 사동길 60 박상신도비에는 ‘문간박선생눌재신도비명文簡朴先生訥齋神道碑銘’이라 적혀 있다. 주州의 서쪽 30리 의 사동寺洞에 있는 비석으로 김병주金炳㴤)의 전서篆書 및 금곡錦谷 송래희宋來熙이 찬문撰文이 있다.박상신도비는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 성균관成均館 제주 祭酒를 지낸 경연관經筵官 송래희宋來熙가 글을 짓고 규장각奎章閣 직제학直提學 시강원侍講院 우빈안용右賓安容 김병주金炳㴤가 글씨를 썼다. 한 시대를 풍미한 눌재 박상은 1530년에 56세의 일기로 별세했다. 그 후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됐다. 광주 서구 서창동(절골마을)에는 생가터와 재실인 봉산재, 묘소가 있다. 광산구 소촌동의 송호영당에는 눌재 박상과 사암 박순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비문(碑文)금곡(錦谷) 송래회(宋來煕) 지음선생께서는 평소 그의 뜻이 강개(慷慨)하여 높은 기절(氣節)을 가지었다. 젊은 시절부터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등의 편안함을 구하지 않았고 또 벼슬에 나아간 이후에 있어서도 더욱 그의 몸을 가다듬어 비록 임금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다 할지라도 조금도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선생께서 을해(乙亥)년의 상소를 올리면서 거의 죽음을 각오한 극도의 항언(抗言)을 하였다.선생의 이러한 일은 오로지 이세상의 옳은 도리를 지키고 우리 인간의 바른 윤리를 세우려는 깊은 충정(忠情)의 발로라는 의미에서 이에 대한 많은 흠앙(欽仰)이 없지 않다. 어찌 이를 가리켜 산악(山岳) 양두(量斗)의 높은 기개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선생이 비록 그 당시에 이러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할지라도 옳고 곧은 당직(讜直)의 선비라는 그의 이름이 온 세상에 떨치어 비록 선생과의 의견을 달리한 소인의 무리라 할지라도 모두 스스로의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흠복(欽服)의 마음을 가지었다.슬프다, 아무리 많은 재력이 있다 할지라도 어찌 이처럼 여러 대중의 자발적 감응(感應)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는 다름 아닌 본래의 소양을 바탕으로 많은 학문을 쌓아 그의 국량(局量)을 확충하는 이러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항시 엄숙한 자세로 그의 행동을 바로하고 단정한 마음으로 그의 언소(言笑)를 삼가며 온화한 마음으로 사람을 접대하고 강직(剛直)한 모습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며 또 직장 및 가정 등의 어느 장소를 막론하고 항시 단정히 앉아 조금 도 게으르고 흐트러짐의 기색이 없기 때문에 어는 사람을 막론하고 저절로 업신여길 수 없는 존경의 마음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시문관계(詩文關係)에 있어서는 너무 익숙하거나 부드러운 문체(文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케케묵은 진언(陳言)이 아닌 새로운 말을 창작하여 홀로 옛날 작가의 규범을 지키었다.정조께서 말씀하신 "기특하고 씩씩하고 짙고 아름다운 옛날 삼백편(三百篇)의 깊은 유의(遺意)를 잃지 않았다."(奇壯濃郁不失三百篇之遺意》라는 이 말이 이러한 경우를 가리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2018-05-25 | NO.57
  • 문헌공(文憲公) 고봉(高峯) 기 선생(奇先生) 신도비명 병서(幷序)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 조순(趙淳)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란을 초래하였다. 다행히 근년에 국운이 다소 진작되고 있으나 남북통일은 아직 되지 못한 채 이륜(彛倫)이 거의 상실되고 풍속도 갈수록 퇴패(退敗)하고 있다.이때를 당하여 선생의 16대 주손(冑孫)인 성근(聖根) 씨가 선생의 묘도에 비를 세우려 하여 나를 찾아와 “비석을 세우는 일은 비단 선조의 학덕을 현창(顯彰)하기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유학의 유풍을 발양(發揚)하고자 하는 뜻도 있으니, 그것은 곧 유림들의 소망입니다.”라고 하면서 나에게 비명(碑銘)과 서(序)를 청하였다. 나는 천학이라 굳이 사양하였으나 청하는 뜻이 간곡하였고, 또 퇴계 선생의 주손 이동우(李東愚) 옹도 사양하지 말라고 권하기에 마침내 봉행하기로 결심하였다.삼가 살피건대 선생의 휘(諱)는 대승(大升), 자는 명언(明彦), 성은 기씨(奇氏)이니 행주(幸州) 사람이다. 행주에 고봉(高峯)이라는 속현이 있어 선생이 고봉으로 자호한 것이다. 기씨는 고려조에 무예로써 장상(將相)이 된 분들이 많았고, 조선조에 와서는 문필과 덕행으로 당시에 저명한 분들이 더욱 많았다. 선생의 고조 휘 건(虔)은 벼슬이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로 세조(世祖) 때 청백리였으며,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증조 휘 축(軸)은 풍저창 부사(豐儲倉副使)로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되었고, 조부 휘 찬(襸)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부친 휘 진(進)은 그 아우 준(遵)과 함께 성리학으로 당세에 저명하였다. 아우가 기묘사화(1519, 중종14)에 화를 당하자 세상일에 뜻을 끊고 광주(光州) 고룡리(古龍里)로 물러나 거처하였다.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은(謝恩)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덕성군(德城君)에 추증되었다. 비(妣) 진주 강씨(晉州姜氏)는 사과(司果) 휘 영수(永壽)의 따님이며 문량공(文良公) 희맹(希孟)의 증손을 배필로 맞이하였다. 중종(中宗) 22년 정해년(1527) 11월 18일에 고룡리 송현동(松峴洞)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선생은 천품이 영민하고 비범하였으며 총명함이 월등하게 뛰어났다. 겨우 7, 8세의 나이 때부터 가정에서 수학하면서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매일 새벽에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글 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금 장성해서는 가정에서 공부하는 데에 지장이 많아 마침내 향리 서당에 나아가 더욱 부지런히 연구함으로써 이미 육갑과 사물의 쇠왕(衰旺)의 이치를 대략 통하였다. 12세가 되던 무술년(1538)부터 17세가 되던 계묘년(1543)에 이르기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 《전한서(前漢書)》, 《후한서(後漢書)》, 《통감강목(通鑑綱目)》 등의 책을 두루 통하였고, 틈나는 대로 당송 고문(唐宋古文)도 읽었으며, 또 국조(國朝)의 전적을 널리 살펴보았는데 한 번 보기만 하면 통하여 막힘이 없었다.선생은 평소에 자신을 수양하기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뜻을 두었으며 명성이 실제를 능가하는 것을 몹시 꺼렸다. 〈과정기훈(過庭記訓)〉을 지어 부과(赴科)의 해를 논하여 이르기를 “벼슬길의 풍파는 참 두렵고도 두려운 것이니 자기의 뜻을 시행하기도 전에 화가 이미 따른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주자는 조정에 벼슬한 기간이 겨우 40여 일이었으니, 학자들은 또한 반드시 이것을 알아야 한다. 진실로 뜻을 행하고자 한다면 한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하였다. 숙부 덕양공(德陽公)이 이미 기묘사화를 당하고 또 계속하여 을사사화가 이어져 선생은 더욱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마침내 노산(蘆山)에 서실을 짓고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며 성명(性命)의 묘리에 침잠하고 천리와 인간의 이치를 연구하여 격물치지(格物致知)ㆍ성의정심(誠意正心)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논한 《대학(大學)》의 도리와 천명솔성(天命率性)ㆍ무성무취(無聲無臭)의 경지를 밝힌 《중용(中庸)》의 이치를 정밀히 분석하며 빈틈없이 힘씀으로써 스스로를 수양하고 사람을 다스리는 방도를 이미 몸에 갖추었다.23세이던 기유년(1549, 명종4)에 비로소 과거에 응시하여 사마시(司馬試)를 보아 진사(進士)ㆍ생원(生員) 양시에 입격하였고, 32세이던 무오년(1558)에 문과(文科) 을과(乙科) 제1인(第一人)으로 입격하였다. 이때부터 14년간 허다한 관직을 두루 지냈는데 당시 조신들의 임명과 승진이 자주 변경되고 고관과 말직의 임기도 너무 짧아서 관리들이 뜻을 펴기가 어려웠다. 선생도 관직을 제수받고 체직됨이 역시 많았으니, 36세이던 임술년(1562, 명종17)에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가 휴가를 얻어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고, 37세이던 계해년(1563)에는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로 호당(湖堂)에 들어갔고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弘文館副修撰兼經筵檢討官)이 되었으며, 38세이던 갑자년(1564)에는 경연에 입시하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며, 39세이던 을축년(1565)에는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40세이던 병인년(1566, 명종21)에는 예조 정랑(禮曹正郞)과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역임하였으며, 41세이던 정묘년(1567)에는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과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역임하였고, 원접사(遠接使)의 시종관(侍從官)으로 관서(關西)에 가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였다. 42세이던 무진년(1568, 선조1)에는 홍문관(弘文館)ㆍ직제학(直提學)ㆍ좌승지(左承旨)ㆍ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44세이던 경오년(1570)에는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45세이던 신미년(1571)에는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과 이조 참의(吏曹參議)를 역임하였다. 46세이던 임신년(1572)에는 대사성ㆍ대사간(大司諫)ㆍ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올랐으나 병으로 체직되었다. 10월 3일에 사직하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오다가 천안(天安)에 도착하여 발병하였는데, 태인(泰仁)에 도착하여 병이 더욱 심해졌다. 매당(梅堂) 김점(金坫)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국왕이 선생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어의를 보내 약을 가지고 달려가 구원하게 하고, 또 어찰(御札)을 보내 위문하게 하였으나 어의가 미처 도달하지 못하였다. 10월 30일에 장자 효증(孝曾)에게 유언을 남기고 11월 1일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부음이 조정에 보고되자 국왕은 몹시 슬퍼하였으며 수의(襚衣)를 추가로 보냈으며, 경사(京師)의 사대부들은 모두들 슬퍼하고 애통해하며 종남산(終南山)의 선생의 우사(寓舍)로 가서 신위(神位)를 설치하고 곡하였다. 이듬해 2월 8일에 나주(羅州) 치소(治所) 북쪽 오산리(烏山里) 통현산(通峴山) 광곡(廣谷) 묘좌유향(卯坐酉向)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선조 23년인 경인년(1590)에 광국 공신(光國功臣)에 책록되고, 수충익모광국 공신(輸忠翼謨光國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에 추증되었으며, 덕원군(德原君)에 봉해지고, 문헌(文憲)이란 시호를 받았다.선생은 조정에서 벼슬할 때 항상 근본에 힘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강상(綱常)을 세우고 어진 이를 높이고 사악함을 물리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삼았다. 경연 석상에서 아뢴 말씀의 대요(大要)는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후일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읽고서 감탄하여 “지금 이 글을 탐독하면서 밤이 이미 깊어지고 촛불이 누차 바뀌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였으니, 야대(夜對)를 10번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하였다.명종(明宗) 갑자년(1564) 2월 13일에 선생이 아뢰기를 “국가의 안위는 재상(宰相)에게 달려 있고 임금의 덕이 성취되는 것은 경연(經筵)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덕이 성취된 후에야 어진 재상을 알아서 임용할 수 있으니, 경연의 역할이 재상보다도 더 중요합니다.” 하였고, 또 언로(言路)를 열고 직간(直諫)을 받아들이는 대방(大方)을 반복하여 설명하였다.41세이던 정묘년(1567)에 조강에 입시하였을 때 상주(上奏)하였는데, 그 대략에 “조광조(趙光祖)와 이언적(李彦迪)에게 일체(一體) 표창한다면 시비가 분명해지고 인심이 흥기할 것입니다.” 하였고, 또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정황(丁熿)은 모두 학문이 높은 유신(儒臣)으로 오랫동안 적소(謫所)에 있었으니 지금 비록 방면되어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나이가 이미 6, 7십 대에 이르렀으니 의당 기용(起用)ㆍ발탁(拔擢)하여 어진 이를 등용하는 도를 다해야 합니다.”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조석(朝夕)으로 시강(侍講)하면서 아는 것은 모두 말하지 않음이 없었고 말을 하면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어, 반드시 임금을 요순(堯舜)처럼 만들어 이상 정치를 만회하고자 하였다. 사도(邪道)를 물리치고 정도(正道)를 부지하는 데 있어서는 말이 더욱 적절하였으며 그 고심과 지극한 정성은 군주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하였다.경연의 강의는 경사(經史) 일반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역대 사론(史論)에 이르기까지 그 논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명쾌하여 천인성명(天人性命)의 이치와 국가흥망(國家興亡)의 귀감을 설파하였다. 당시 많은 인재들이 진출하여 경국제세(經國濟世)에 급급하여 논의가 분분하였으나 선생은 뜻을 세우고 현신(賢臣)을 구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함을 주청하였으니, 그 뜻은 근본을 바르게 세우는 데 두고 교화를 먼저 하고 법제를 뒤로 하는 것이었으므로 개혁의 의논과는 별로 뜻이 맞지 않았다.선생은 일찍이 세상 물정에 어두운 학자라고 자평(自評)하였으나 그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의 절도를 살펴보면 모두가 성현(聖賢)의 법도에 맞았다.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남쪽 고향으로 돌아갈 때 한강의 배 안에서 어느 선비가 묻기를 “사대부로서 조정에 들어가 행동하는데 평생토록 지켜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하고 묻자, 선생이 답하기를 “기(幾)ㆍ세(勢)ㆍ사(死) 세 글자면 충분히 해 나갈 수 있습니다.” 하였다. 그 뜻은 군자의 출처는 먼저 그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남이 없어야 하고, 때를 알고 형세를 살펴서 구차한 일이 없어야 하고, 목숨을 걸고 도(道)를 잘 행하기를 기약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고금의 인인(仁人)과 지사(志士)가 관직에 임하는 대방(大方)이요, 오활한 유자(儒者)의 말이 아니다.선생의 학문의 연원을 살펴보면 등과(登科)하던 해인 무오년(1558, 명종13)에 서울로 가던 도중 태인(泰仁)을 지나면서 일재(一齋) 이공(李公 이항(李恒) )을 배알하고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당시 선생의 학문은 거의 대성(大成)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지만 선생으로 하여금 진일보하여 승당입실(升堂入室)의 경지에까지 올라 일세(一世)의 유종(儒宗)이 되게 하신 분은 실로 퇴계(退溪) 선생이었다. 두 선생은 그해 경사(京師)에서 만났는데 한 번 보고도 십년지기(十年知己)와 같았다. 퇴계가 고봉에게 준 편지에 “무오년(1558, 명종13)에 도성에 간 일은 극히 낭패스러운 일이었으나, 다행스러웠던 것은 우리 명언(明彦)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였다. 그 후로 두 선생은 겨우 두 차례 상면하였지만 사제(師弟)의 예는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고봉은 탁월하고 명확한 자질로 행동거지는 오직 도산(陶山)을 본보기로 삼았고, 조정에서 경륜을 펼 때도 역시 오직 퇴계를 준칙으로 삼았다. 그 천품은 간결하고 사람을 쉽게 용납하지는 않았으나 오직 퇴도(退陶)에게는 성심(誠心)으로 열복(悅服)하였으며, 퇴계 역시 선생에게는 극진히 추허(推許)하고 항상 사석(師席)을 사양하였다. 매번 은미한 말이나 깊은 뜻이 담긴 글을 만날 때마다 항상 선생에게 질문하였으니, 다른 문인들은 여기에 참여할 수 없었다. 예법(禮法)과 사단칠정이기(四端七情理氣)의 논설에 관해서는 선생이 전인미답(前人未踏)의 심오한 경지에 나아갔으니, 퇴계도 누차 자기의 의견을 버리고 선생을 따랐으며 독보적인 관점과 이론을 가졌다고 허여하였다.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 선조가 묻기를 “조신(朝臣)들 중에 누가 학문으로 저명한가?” 하였다. 그 당시 많은 영재들이 조정에 가득하였으므로 실로 거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퇴계는 아뢰기를 “기모(奇某)는 글을 박람하였고 성리학에도 뛰어난 조예를 가졌으니 참으로 달통한 선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선생의 수명은 지명(知命)인 50세에 이르지 못하였으나 그 학문과 행적의 대요는 문집에 실려 있다. 《시문집(詩文集)》6권과 《주자문록(朱子文錄)》4권, 《논사록(論思錄)》 상ㆍ하권, 《양 선생 왕복서(兩先生往復書)》3권, 《사칠ㆍ이기 왕복서(四七理氣往復書)》 상ㆍ하편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그 문장은 수식을 일삼지 않고 기력이 웅장하고 법칙이 준엄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발분망식(發憤忘食)하게 한다. 달통한 선비의 학풍이 생기 있고 약동하여 볼만하였기에 당세의 명사와 후학들의 저술 중에 선생에 관련된 것이 극히 많았으니, 율곡(栗谷) 이 문성공(李文成公 이이(李珥) )은 선생의 대하(大河)가 흐르는 듯한 문장과 구름을 넘는 듯한 기상을 찬양하였으며, 사암(思庵) 박 문충공(朴文忠公 박순(朴淳) ), 택당(澤堂) 이 문정공(李文靖公 이식(李植) ), 계곡(谿谷) 장 문충공(張文忠公 장유(張維) ), 우암(尤庵) 송 문정공(宋文正公 송시열(宋時烈) )은 모두들 선생이 이 나라의 대유(大儒)요 세상의 사표(師表)임을 칭송하였다.배위 정부인 함풍 이씨(咸豐李氏)는 보공장군(保功將軍) 휘(諱) 임(任)의 따님으로 19세에 선생에게 시집와서 선생을 받드는 데 시종 어김이 없었고, 홀로된 25년 동안 자녀들에게 이록을 구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경계하였다. 병신년(1596, 선조29) 8월 18일에 집에서 별세하시니, 향년 67세였다. 선생의 좌측에 안장하였다.3남 1녀를 낳았으니, 장남 효증(孝曾)은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이고, 차남 효민(孝閔)은 전력부위 충좌위 부사과(展力副尉忠佐衛副司果)이고, 삼남은 효맹(孝孟)이며, 딸은 울산(蔚山)의 김남중(金南重)에게 출가하였다. 효증은 연은전 참봉(延恩殿參奉) 김점(金坫)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 정헌(廷獻)은 현감이며, 장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지낸 한양(漢陽)의 조찬한(趙纘韓)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낸 청주(淸州)의 한이겸(韓履謙)에게 출가하였다. 효민은 참봉(參奉)의 남원(南原) 양홍도(梁弘度)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2녀를 낳았으니, 장남은 영헌(齡獻)이고, 차남은 동헌(東獻)이며, 장녀는 생원(生員)의 고령(高靈) 박동휘(朴東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함양(咸陽)의 여공준(呂貢俊)에게 출가하였다. 효맹은 승지인 광주(光州) 정엄(鄭淹)의 딸에게 장가들어 후사가 없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효민과 효맹은 중도에서 적을 만나 죽었고, 김씨에게 출가한 딸과 며느리 양씨와 정씨는 적에게 겁박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모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선생의 후예들은 호남(湖南)에서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는데, 문학으로 국가의 원기(元氣)가 되기도 하고 무관으로 국가의 보장(保障)이 되기도 하였다.선생께서 별세하신 지 7년 되던 해에 호남의 유림들이 고마봉(顧馬峯) 아래에 사우(祠宇)를 지었는데, 효종(孝宗) 5년에 월봉서원(月峯書院)으로 사액되었고, 고종(高宗) 5년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서기 1991년에 광주시(光州市) 광산구(光山區) 광산동(光山洞)에 복원되었다. 아, 길고 아득한 500년 세월 동안 선생의 학덕(學德)은 우리나라에 견줄 이가 없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뛰어난 자질은 / 超詣之資생이지지에 가까웠도다 / 近於生知잠심하여 고요히 생각함은 / 沈潛幽思칠팔 세 아이 적부터였도다 / 自髫齔時나이 십오 세에 / 志學之年이미 대성을 기약하였으며 / 已期大成경학의 뜻과 역사의 관점 / 經義史觀달통하고 분명하였도다 / 達通分明격물치지 수신제가의 수양을 / 格致修齊일신에 두루 갖추었고 / 備於一身치국평천하의 큰 뜻은 / 治平大志시종 순일하고 진실하였다 / 始終純眞조정에서 직임을 맡아서는 / 立朝莅職그 모습이 훌륭하고 영특하고 / 羽儀俊英경연에서 강론할 때는 / 經筵侍講그 논설이 종횡무진하였도다 / 論說縱橫만조의 신료들은 / 滿朝臣僚갱장에 뜻이 있었지만 / 意在更張공의 대본은 / 公之大本항상 강상을 중히 여기셨으니 / 恒重綱常어진 이를 추천하고 사악한 이를 물리치며 / 推賢斥邪극히 공명정대하셨다 / 至正大中세상에 나갈 때나 물러날 때나 말할 때나 침묵할 때나 / 出處語默한결같이 퇴옹을 준행하였고 / 一遵退翁서신의 왕복은 / 書信往復그 정의가 평생 변함이 없었다 / 情誼平生성리의 학설은 / 性理學說독보적 발명이었고 / 獨步發明사단과 칠정에 대한 논변도 / 四七論辯한편으로는 넓고 한편으로는 치밀하였으니 / 淹博精緻통유의 풍치와 인격을 / 通儒風標조야가 모두 우러렀으며 / 朝野仰止오직 기세사만을 / 惟幾勢死행신의 대방으로 삼으셨도다 / 行己大方창졸의 순간이라도 / 造次顚沛몸가짐과 행실을 엄중하게 지켰으니 / 操履嚴守사림의 아망은 / 士林雅望별 중에 북두성과 같았다 / 如星有斗맹자의 말씀대로 천명을 순하게 받으셨으며 / 順受天命백세에 향기를 남기셨도다 / 百世遺香서기 2003년 계미 4월 일,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학술원 회원(學術院會員)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서울특별시장 후학(後學) 풍양(豊壤) 조순(趙淳)은 삼가 짓다.후학 진원(珍原) 박경래(朴景來)는 삼가 번역하다.[주-D001] 승당입실(升堂入室) : 실(室)은 방이고 당(堂)은 대청마루이다. 도의 심오한 경지에 들어감을 뜻한다. 공자가 제자 자로(子路)의 경지를 두고 말하기를 “당에는 올랐고 아직 실에는 들어가지 못했다.〔升堂矣 未入於室也〕” 한 데에서 유래하였다. 《論語 先進》[주-D002] 생이지지(生而知之) : 태어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말한다. 애공(哀公)이 정사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하기를 “혹은 태어나면서 이것을 알고,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애를 써서 이것을 아는데, 그 앎에 이르러서는 똑같습니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서 이것을 행하는데, 그 성공함에 미쳐서는 똑같습니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 一也 或安而行之 或利而行之 或勉强而行之 及其成功 一也〕” 하였다. 《中庸章句 第20章》
    2022-04-30 | NO.56
  • 문헌공고봉기대승선생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동文憲公高峯奇大升先生碑는 아들 기효증이 찬했다.
    2018-12-02 | NO.55
  • 밀양 부사 이공 묘갈명 병서〔密陽府使李公墓碣銘 幷序〕 - 이유달
    동주집 문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밀양 부사 이공 묘갈명 병서〔密陽府使李公墓碣銘 幷序〕이유달(李惟達) 공의 자는 겸선(兼善)이다. 나와 함께 임자년(1612, 광해군4)에 과거에 급제하여 평소 서로 흠모하며 매우 즐겁게 지냈다. 일찍이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성종(成宗)을 섬기면서 직언(直言)을 잘했고 연산군 때에 억울하게 죽은 헌납(獻納) 박한주(朴漢柱)가 본래 밀양 사람이었다. 공이 부임한 뒤에, 서신으로 나의 글을 요청해 박한주가 살던 마을을 표시함으로써 무너진 풍속을 진작시키려고 하였다. 대개 공의 생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좋은 글을 나에게 맡길 만하다고 잘못 여겼던 것인데, 나는 그 후의에 매우 부끄러워 글은 완성하였으나 돌에 새겨 넣지 못하였다. 그런데 공이 이듬해 숭정(崇禎) 을해년(1635, 인조13)에 병으로 운명하니, 향년 겨우 57세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공의 아들이 행장(行狀)을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와서, 나에게 묘갈명(墓碣銘)을 요청하며 말하기를 “이것이 아니면 제 선친(先親)을 영원히 전할 수 없습니다. 또 선생께서 그 남은 자손을 감싸 주고 돕는 것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아아, 이 말은 곧 공의 뜻이었을 것이다.공은 지극한 성품을 소유하여 단정하고 성실하였으니, 사귀기는 쉬웠으나 허물없이 가까워지기는 어려웠다. 평소 일찍이 크게 소리치거나 성난 낯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지나치게 겸손하여 의관조차 견뎌내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일을 만나면 스스로 주도하여 능히 그 정도를 잃지 않았다. 벗들과 어울리는 곳에서 오래 있어도 더욱 엄격하였으니, 일찍이 고결한 체 꾸며서 남들과 영합하기를 구하지 않았다.집안에서의 행실이 잘 갖추어져서, 계모 황씨(黃氏)를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며 백발이 되도록 한결같았다. 맛난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가지고 돌아가서 올렸으며, 일찍이 계모의 뜻을 미리 헤아려 기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므로, 황씨가 편안히 여겼다. 제사가 돌아오면 제물을 갖추고 공경을 다하여 몸소 제수 준비를 살폈는데, 일찍이 풍성하면서도 깨끗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족형(族兄) 유종(惟宗)과 한집에서 10년을 같이 살며 의복과 음식을 서로 주고받으며 지냈는데, 종들이 일찍이 흠잡는 말을 하지 않았다. 관직을 맡아서는 청렴하고 결백하며 삼가고 부지런하였을 뿐 명예를 취하지 않았다. 고을살이할 때마다 번번이 기록할 만한 공적이 있었으므로 여러 번 임금의 칭찬을 받았고, 임지를 떠난 뒤에는 일찍이 백성들의 사모함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공은 젊어서 사부(詞賦)를 공부하여 향시(鄕試)에서 장원하였고, 병오년(1606, 선조39)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에 뽑히고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와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를 역임하였는데, 어떤 일로 인하여 권세 있는 관리에게 밉보여 해미 현감(海美縣監)이 되었다.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과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인조(仁祖)께서 즉위하시자, 어사(御史)에 충원되어 호남에 선유(宣諭)하였다. 그 뒤로 조정에서 13년 동안 벼슬하면서, 제조(諸曹)의 경우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정랑(正郞)을, 사유(師儒 성균관)의 경우 직강(直講)과 사예(司藝)를, 각사(各司)의 경우 제용감(濟用監)ㆍ예빈시(禮賓寺)ㆍ군자감(軍資監)ㆍ군기시(軍器寺)ㆍ종부시(宗簿寺)ㆍ사도시(司䆃寺)의 정(正)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경우 사서(司書)ㆍ문학(文學)ㆍ필선(弼善)을, 사헌부(司憲府)의 경우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를 역임하였다. 겸관(兼官)은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이었다. 외직(外職)의 경우 경기 도사(京畿都事), 광주 목사(光州牧使), 밀양 부사(密陽府使)를 지냈으니, 이상이 공의 이력이다.처음 성종(成宗) 강정대왕(康靖大王)에게 지자(支子) 휘(諱) 수(????)가 있었는데, 작호(爵號)는 완원군(完原君), 시호(諡號)는 소도공(昭悼公)이다. 이성군(伊城君) 휘 수강(壽剛)과 의원군(義原君) 휘 억(億)과 신흥 군수(莘興郡守) 휘 몽윤(夢尹)으로 전해졌다. 충의위(忠義衛) 휘 찬(璨)에 이르러 밀양 박씨(密陽朴氏) 사의(司議) 효원(效元)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니, 이분들이 공의 선고(先考)와 선비(先妣)이다.공의 부인 숙부인(淑夫人) 진천 송씨(鎭川宋氏)는 출가 전에도 출가 후에도 공손하고 또한 온화하였으며, 공보다 앞서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운명하였다. 아들은 담(????)이며, 두 딸은 관찰사(觀察使) 윤명은(尹鳴殷)과 사인(士人) 김경주(金慶胄)에게 출가하였다.공은 너그럽고 온화하며 순수하고 독실하였다. 안으로 기량을 지녔지만 밖으로 드러내어 꾸미고 과장하는 행실이 없었는데, 나이와 지위가 그 덕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식자(識者)들이 천도(天道)를 의심하였다. 오직 공의 아들 담(????)이 삼가고 조심하며 그 가문을 이어가고 또 자손이 끊이지 않았으니, 아마도 이른바 천도가 여기에 있는 것인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질박하면 저속하고 / 質則近俚꾸미면 방자해지니 / 或文而肆휩쓸리는 것과 오기 부리는 것은 / 惟隨與敖둘 다 같은 문제점이 있기 마련이지 / 弊一于二온화하고 공손한 사람 / 溫溫恭人뽐내지도 않고 자만하지도 않아 / 不矜不盈말할 때는 어눌한 것처럼 했고 / 出言若吶종요로움을 잡아 바름에 거하였네 / 操約居貞처음에 외로운 몸 떨쳐 일으켜 / 始奮孤身바른 자취 물들여 / 漸厥矩武조정에 모범 되니 / 儀于朝署그 위의 드날렸네 / 有翽其羽심은 덕 도타우니 / 有樹其惇높은 지위 올라 끝내 명예롭게 되어야 하는데 / 歷敭終譽어찌 장수도 누리지 못하고 / 胡不臷茂지위는 대부에 그치고 말았던가 / 而止大夫저 둥근 무덤에 / 彼睪之丘이 빗돌 세우니 / 有揭斯石내가 내 글을 새겨 / 我銘我辭삼가 그 무덤 표시하노라 / 式表窀穸[주-D001] 박한주(朴漢柱) : 1459~1504.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천지(天支), 호는 우졸재(迂拙齋)이다.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 때 평안북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당하였다.[주-D002] 조정에 …… 드날렸네 : 이유달이 조정 관리로서 모범적인 인물이었다는 말이다. 《시경》 〈권아(卷阿)〉에 “봉황이 나니, 그 깃이 퍼덕인다.[鳳凰于飛, 翽翽其羽.]”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이유달의 아름다운 위의를 표현한 말이다
    2023-12-04 | NO.54
  • 박강수 묘지(朴康壽墓誌)
    박강수 묘지朴康壽墓誌는 고려 중기의 무신이었던 박강수(朴康壽, 1115-1200)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지석이다. 제작 연대는 1200년(신종 3)이다. 묘지는 피장자의 생애와 행장을 새겨 무덤 가운데 남기는 글로, 지誌와 명銘이 함께 기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강수 묘지는 박강수의 행장과 명을 기록한 것으로, 그 내용을 통하여 고려시대 상장례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박강수의 본관本貫은 함안咸安, 초명初名은 박강용朴康用이다. 부친은 호장군윤戶長軍尹으로 추증된 박덕(朴德)이고, 모친은 호장戶長 박씨朴氏의 딸이다. 박강수는 두 명의 부인과 차례로 혼인하였는데, 두 사람 모두 오씨吳氏이다. 이 중 첫 번째 부인에게서 좌우위 보승 낭장左右衛保勝郎將에 오른 아들 박낭중朴郎中을 두었다. 박강수는 1152년(의종 6) 처음 녹사祿事에 제수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70세에 이르자 감문위 대장군監門衛大將軍을 마지막으로 사직하였고, 향년 86세에 세상을 떠났다.지문은 총 22행으로, 1행부터 2행까지는 ‘유세차승안오년경신사월일고려국고감문대장군維歲次承安五年庚申四月日髙麗國故監門大將軍/치사박공묘지명致仕朴公墓誌銘’이라는 제명이 있다. 3행부터는 박강수의 혼인과 가계 등 행장이 수록되어 있다. 18행부터 22행까지는 명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을 지은 이의 이름은 미상이나, 박강수의 외아들인 박낭중의 요청으로 묘지명을 지었다고 밝혀져 있다. 글씨를 쓴 이와 각자 역시 알 수 없다. 서체는 해서이다.묘지는 보통 도자기나 돌로 제작되는데, 박강수 묘지의 재질은 점판암이다. 판석을 사각형으로 다듬고 오목새김으로 글씨를 새겼다. 글 외에 별다른 무늬는 없다. 무른 석재로 제작된 탓에 면이 고르지 못하다. 글자의 행과 유사한 방향으로 일정한 부식이 있어, 이로 인해 판독이 어려운 글자들이 다수 존재한다.박강수 묘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33(용봉동 300)의 전남대학교박물관 내 수장고에 있다*자료 : 문화재청.대한불교조계종총무원(2020), 전라북도.전라남도.광주광역시2020 금석문 탁본 조사 보고서
    2023-07-17 | NO.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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