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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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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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양김공묘갈명비
    광주시 광산구 양동 마암마을1920년이 기양김공묘갈명비(箕陽金公墓碣銘碑)는 천안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기우만이 찬했다.
    2018-12-01 | NO.82
  • 기진-행주기씨기진묘비
    광주시 광산구 임곡용동길 166(오남재 뒤 야산)행주기씨 참봉 기진묘비(奇進墓碑)는 오남재(吾南齋) 뒤에 있다. 행주기씨 낙남선조(落南先祖)인 덕성군 물제(物齊) 기진(奇進)을 제향하는 제각으로 1560년에 건립했다. 물제 기진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부친이며, 기묘명현 기준의 중형이다.
    2018-06-11 | NO.81
  • 김덕령-형조좌랑증좌찬성충장김공신도비명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2004년증 좌찬성 충장 김공 신도비(贈 左贊成 忠壯 金公 神道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우리 선조(宣祖)께서 국운을 어루만지신 지 20여 년 만에 섬나라 왜적이 크게 방자하여 우리 8도의 백성(生靈)들을 짓밟자, 당시의 의사들이 갑옷 입은 말을 타고서 칼날과 살촉을 뚫고 중흥의 공적을 협찬 선양하여 공적이 큰 사람은 기상(旗常)에 표창되고 공적이 적은 사람은 봉록(俸祿)과 관작(官爵)으로 보답하여 수두룩하게 이루 다 셀 수 없다.그런데 고(故) 충용장군으로서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한 김 충장공만은 의병을 일으킨 지 4년 되도록 한 번 명령한 포상도 받지 못하고 또 터무니없이 모함을 당하여 죽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2백년이 되도록 당시를 거슬러 올라가 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탄식하면서 팔뚝을 움켜잡고 맨 먼저 김 장군을 칭찬 이야기하여 비록 아낙네와 어린이, 마부와 가마꾼들일지리도 김 장군이 비로소 의병을 일으켰을 적에 분조(광해군)가 명령한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익호장군이라고 부르다가 시호(諡號)를 충장(忠壯)이라고 내려줌에 이르러서는 사대부들이 모두 충장공이라고 부른다.공의 휘(諱)는 덕령, 자는 경수인데 광주 석저촌 사람이다. 증조의 휘는 후(珝)인데 호조정랑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윤효(允孝)인데 선무랑이며, 아버지의 휘는 붕변(鵬變)인데 습독(習讀)이요. 어머니는 남평반씨인데 직장 계종(季宗)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공은 대대로 예부터 유가(儒家)로서 일찍이 문장 명성을 날리어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였다. 얼마 후에 또 우계 성 선생(성혼)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유자의 학문을 강문(講問)하여 비록 뛰어나게 큰 뜻을 지녔으나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의 형으로 지평에 추증된 덕홍이 앞장서 의병을 일으키자 공도 역시 종군하였는데 지평공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모두 죽으면 늙으신 어머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공을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고, 홀로 고공 경명과 더불어 진군하여 금산에서 전투하다가 죽었다.이듬해 계사년에 왜적들이 서울에서 퇴각하였으나 그래도 영남에 웅거하면서 날마다 병력을 증강하여 재차 침략할 것을 도모하는데도 관군 및 여러 의병들이 대부분 왜적이 먼지만 바라보고도 달아나 피해 버렸다. 이때에 공은 어머니 반부인(潘夫人)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이미 장사를 지냈었다. 관찰사 및 이웃 고을의 수령들이 비로소 차츰 공의 명성을 듣고 서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충정공 이귀(李貴)가 당시에 장성현감이 되어 “공이 대장(大將) 인재이다.”고 말하니, 이에 특별히 형조좌랑 벼슬을 제수하였다.공의 자부(姊夫, 자형) 김응회(金應會)는 호걸스러운 선비였다. 대의로써 공을 개도(開導)하고, 조정의 교지가 또 마침 이르니, 공은 이에 묵최(墨縗, 검은 상복)로써 의병을 일으켜 전답과 집을 팔아서 무기를 마련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달하여 용감하게 싸울 병사 5천여 명을 얻었다. 그러자 도원수 권율은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고 표지해 주고, 임금이 또 사자(使者)를 보내 군호를 충용군(忠勇軍)이라고 내려주셨는데, 때는 갑오년 정월이었다. 공은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영남 지역에 당도하여 격문을 돌려 “곧바로 대판성(大坂城)을 쳐들어가겠다.”하였는데 대판성은 왜적의 수도이다. 왜장 청정(淸正)이 몰래 화가를 보내 공의 용모를 그려 오도록 하여 그 용모를 보고 끌끌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참 장군이다.”라고 하고서, 이에 여러 주둔한 병사들을 철수시켜서 통합하여 큰 진지를 만들어 대비하였다.이때를 당하여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성벽과 보루가 서로 바라보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직 곽재우 장군만이 충성과 지략으로써 특별히 드러났었다. 공은 편지를 보내 힘을 합쳐 왜적들을 섬멸하자고 약속하고서 마침내 함께 정암(鼎巖) 나루터에 진을 쳤다. 왜적이 밤중에 시내를 건너와 장차 군영을 습격하려고 하자, 공은 복병을 설치하였다가 습격하여 그 왜적들을 크게 무찌르니 왜적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공이 진중에 있으면서 일찍이 울부짖는 두 마리 호랑이를 생포하여 왜적들에게 보여주니, 왜적들은 더욱 떨고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면서 익호장군을 피하였다.공은 진주에서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진주가 막 왜적들의 유린한 바가 되어 해골(骸骨)들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공이 병사를 주둔시킨 뒤로는 한 사람이나 한 기마병도 감히 진주 지역에 접근한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왜적을 참수하고 노획한 공은 없어도 영남과 호남의 사이에 백성들이 비로소 안심하고 호미와 쟁기를 잡고 농사지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 품팔이하던 사람들이 차츰 돌아오고, 군대도 역시 남은 군량이 있었다. 그런데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이에 말하기를, “공이 성루를 대치한 지 3년 되도록 지금까지 촌공(寸功)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아! 어찌 모함이 아니겠는가.공은 또 일찍이 곽 장군과 더불어 바다에 배를 타고 동래 앞바다로 향하여 왜적의 성루를 공격하니, 왜적들이 필사적으로 부르짖으며 군영을 닫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이때에 공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 제도의 의병들을 모두 통솔하게 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병사들이 모두 좋아서 뛰며 한 번 분전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천조(天朝, 명나라)가 이미 전쟁을 싫어하여 봉공(封貢)을 논의하고, 조정에서도 역시 여러 장수들에게 경계하여 왜적들과 교전하지 말도록 하여 공이 여러 차례 싸울 것을 주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니, 공은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마침내 감상(感傷) 분개하여 술을 흠뻑 마시고 또 병마저 생겼다.공은 군중에 있을 적에 군리(軍吏)로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참수하였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마침내 체포되어 국문 당하다가, 당시의 재상인 정공 탁(琢)이 힘껏 구제함에 힘입어 석방되었다.그로부터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호서(충청도)의 역적 이몽학이 반역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공과 곽장군 및 홍계남, 고언백, 최담령이 모두 자기와 내통하여 공모하였다.”고 하였는데, 계남․언백도 역시 의병의 여러 장수로서 왜적들이 꺼리는 바가 된 사람들이며 담령은 공의 휘하 병사로서 의용(義勇)이 있었던 사람이다.공은 바야흐로 병사들을 이끌고 몽학을 토벌하려다가 도중에 역적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본진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조정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받아들여 공을 체포하니, 공은 강개하게 국문을 받으면서 말씨가 태연자약하게 말하기를, “신이 친상 중에 있다가 전쟁 일로 종사하였지만, 또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여 충성과 효도가 모두 무너졌으나,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으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원컨대 신의 연고 때문에 죄 없는 최담령을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담령은 마침내 죽임을 모면하였다.이때에 여러 장수들 중에 이따금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충청병사 이시언은 더욱 심하였다. 공이 체포된 것은 시언의 밀계 때문이었다. 충숙공 서성이 당시에 승지가 되어 공이 반역하지 않았다고 힘껏 보호하고, 재상인 정탁과 김응남도 모두 공이 죄가 없다고 극도로 말하였지만, 조정의 의론이 넌지시 이시언의 말을 주장한 사람이 있어 공은 마침내 병신년 8월에 가혹한 형벌을 받아 옥중에서 돌아갔다.공은 이미 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었고, 문청공 정철은 또 공의 고을 사람이었다. 성 선생과 정 공은 모두 바야흐로 동인의 당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죽이려고 하는 대상이 되었고, 공의 위력 있는 명성이 또 독특하게 여러 장수들의 위에 솟아났었다. 때문에 공과 함께 체포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공만 홀로 죽임을 모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서는 여러 의사들이 모두 해산되어 싸울 마음이 없었다.공이 돌아가자 왜적의 진중에서는 술을 따라 마시면서 서로 경축하며 말하기를, “김 모가 죽었으니 양호(전라도와 충청도)는 다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정유년에 마침내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켜 남원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경기 지방을 침범하였으나, 양호의 사이에서는 감히 한 화살이라도 쏘아 서로 방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조가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여 그 왜적들을 꺾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일을 거의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 참소하는 사람의 입이 사람의 나라에 전화(戰禍)를 끼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참혹하구나!공은 날쌘 용력이 무리에서 뛰어나 눈이 10리 밖의 물체도 구별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길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 큰 칼을 가지고 말을 채찍질하며 산비탈을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며 오르내림에 숲의 나무들이 모두 쓰러졌으나 평소에 항상 깊이 스스로 숨기었다.그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용모가 화순(和順)하여 어린 아이의 얼굴빛을 지녔다. 반부인이 병에 걸려 위태로움에 다다르자, 유능한 명의를 찾아 하룻밤에 2백리를 말로 달려 진주에 당도하여서는 뜰아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굳이 왕진(往診)해 달라고 요청하고, 따라서 그 명의를 위하여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집에 당도하니 겨우 반나절이 걸렸었다. 곧바로 약을 올리니 병이 나았었다.공의 형이 이미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순절하였고, 공의 아우 덕보도 역시 일찍이 군중에서 공을 따라다니다가 얼마 뒤에 공을 여의고 서석산 밑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풍암거사라고 호를 지어 부르면서, 정홍명, 안방준과 더불어 벗을 삼았었다. 정묘난에는 안 공에게 편지를 보내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였었는데, 그 수적(手蹟)이 지금까지 아직도 전하면서 격앙(激昻) 감개(感慨)하여 크게 공의 유풍(儒風)이 있다. 공의 배위는 흥양이씨인데, 공이 돌아간 이듬해에 왜적들을 꾸짖으며 추월산 안에서 순절하였다.공이 돌아간 뒤로 65년 만에야 우리 현묘(顯廟, 현종)가 비로소 명령하여 공의 원통함을 씻어준 뒤에 여러 차례 벼슬을 추증하여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정묘(正廟, 정조)는 또 명령하여 시호를 내려주고 좌찬성을 추증하면서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고, 또 공이 살았던 곳을 ‘충효리’라고 명명하고서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그 비석에 글을 새겨 표창하도록 하였다.이 부인은 공을 따라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공의 백형(伯兄)은 특은으로써 지평을 추증하였다. 풍암공은 일찍이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벼슬을 제수하여 별제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역시 특별히 집의를 추증하였다. 공은 후사가 없었고, 풍암공만이 유독 한 아들을 두었는데, 말하자면 거(璩)로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풍암공의 명령으로 공의 제사를 겸하여 받들었다. 정묘 때에는 또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진사의 7세손 홍기(洪基)이다. 진사는 폐조(광해군) 시대를 당하여 상소를 올려 흉악한 무리들을 배척하였고, 그의 아들 경휘(慶輝)는 정공 홍명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여 문행으로써 명성이 드러나 모두 공의 집안의 자손들이 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공의 장지는 광주의 이치에 있으면서 유좌(酉坐)로 봉분돼 있는데, 지평공과 풍암공의 묘소도 모두 한 산등성이에 가까이 있다. 공이 이미 증직이 1품에 이르렀으니 전식(典式)에 있어서 마땅히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워야 하겠기에 마침내 글을 새기어 사실을 기재하고 거기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하늘의 영웅 인물을 탄강시킴에광주 무등산의 영기를 배태(胚胎)하였네.충성과 용맹이 근간이며 울타리였고문과 무를 두루 겸비하였네.시와 예를 차근차근 배워 집안에서 행실을 닦다가휙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는데 국란을 당한 임진왜란이었네.우르쾅하는 우레 번쩍하는 번개이며으르렁거리는 호랑이요 사나운 송골매였네.왜적들이 위풍을 바라보고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들고 버섯처럼 집결하였네.일찍이 정암에서 싸웠는데강물이 몹시도 붉었네.수많은 위병들을 쉽게 지휘하여3년 동안 호남과 영남이 몹시 편안하게 농사를 지었네.국가의 방패와 성이었으며 보루였으니공훈이 나보다 더 큰 사람이 없었네.그런데 춘산의 불꽃을 그 누가 불어 일으켰는가.저 지나친 붕당이 왜적과 한 패거리가 되었네.그러나 천도의 공정함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긋남이 없어공의 원통함은 일시적이었고 신설(伸雪)됨은 영원하네.밝디 밝은 성스러운 임금님이해와 달처럼 나란히 빛나억울한 것을 밝히고 공적을 선양하니화려한 관복이 빛나구나.이치의 신비탈 남쪽에 충신이 짙푸른 피가 황천에 묻혀 있네.굳센 형과 명철한 아우가 좌우에 연이어 잠들어 있네.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칭송되기에이 견고한 빗돌에 새기노라.금궤(金櫃) 속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아울러 영원히 전해지리.-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풍산 홍석주 지음(추기)아! 충장 김공은 우리 해동(우리나라)의 명장이다. 그 귀신같은 무용(武勇)과 책략을 미처 조금도 펴보지도 못하고 무옥에서 원통하게 돌아가 후사(後嗣)가 없었다.그의 아우 풍암공 덕보가 그의 아들 풍계공 거에게 유명(遺命)하여 그로 하여금 공의 제사를 겸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그 뒤에 차 증손인 이촌공 수신(守信)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로 공의 사당을 받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포재(寒圃齋) 이공 건명(健命)이 이조판서가 되어 숙종 38년 임진 11월 27일 병오 도목정(都目政, 6월과 12월에 시행하던 인사행정을 이르는 말)에 이촌공을 채용하여 벼슬이 별검에 이르렀다.이때에 서명우가 장령이 되어 상소를 올려 한포재를 탄핵하기를 “이조판서로 들어온 사람이 자기의 당 사람은 심어주고 다른 당 사람은 배척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사사로움을 따라 공도(公道)를 멸시하여 순전히 한쪽 사람만 채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포재가 상소를 올려 모두 변론하기를, “충용장 김덕령은 바로 임진왜란에 창의하였던 사람인데, 화를 당하여 원통하게 죽어 사적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신이 이조에 들어가서는 그의 봉사손을 채용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나의 족선조(族先祖)인 대사간 수촌공 방(埅)도 역시 상소를 올려 강력히 변론하기를 “의병장 김덕령을 봉사한 사람이 정주(政注, 관원을 임명하는 인사행정)에 채용된 것이 뭐 의심할 것이 있기에 교묘하게 취모멱자(吹毛覓疵,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 남의 결점을 억지로 낱낱이 찾아내는 것을 말함)하였으니 다른 것은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숙종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중한 비답을 내려주어 이르기를 “조목조목 논박한 것이 명쾌하다고 이를 만하다. 서명우(徐命遇)는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면 충분히 죄가 징계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그 뒤에 보첩을 편수할 적에 노사(蘆沙), 간재(艮齋), 연재(淵齋) 삼현들에게 예를 질문하여 별검공 이하 봉사 자손들을 2세를 띄워서 충장공 각하(脚下)에 기록하였는데 이 홍상공이 지은 비문 중에 이른바 “지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홍기(洪基)이다.”고 한 것은 바로 별검공의 5개 주손(冑孫)이다.지금 이 봉사 전말이 원비 중에 누락되었다. 때문에 장차 신도비를 세우려고 할 적에 그 후손 충호(忠浩)가 그 사실들을 숙종대왕실록 및 충장공유사와 한포재, 수촌 여러 문집에서 찾아 모아 실기를 지어가지고 나를 영주(寧州, 천안의 옛이름)의 태화산(泰華山) 기슭으로 찾아와 추기의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비록 그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만 돌아보건대 선대의 정의(情誼)에 있어서 그 아름다운 일과 훌륭한 뜻을 감시 저버릴 수 없기에 그 이름 붙이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우(右)와 같이 서술한다.공이 돌아간 뒤로 일곱 번째의 갑신년 첫 봄 중완(仲浣, 중순)에 후학 풍천 임용순 삼가 지음. 후학 족후손 선원은 삼가 전을 쓰고 아울러 해서도 씀공이 돌아간 뒤로 408년(2004)이 된 갑신년 중춘 일에 삼가 세움我宣廟撫運之二十餘載島倭大肆猘躪蹂我八路生靈一時義士服介馬衝鋒鏑用協敭中興績大者表旂常小者疇祿爵磊落不可殫籌唯故忠勇將軍贈議政府左贊成金忠壯公敦義旅四年不獲登一命之賞又横被讒構以死然迄今玆二百歲有尙論當時者必咨嗟扼腕先稱說金將軍雖婦孺皀輿未有不知金將軍名者將軍始起兵受分朝所命翼虎將軍號由是世皆稱翼虎將軍及賜諡忠壯士大夫皆稱忠壯公公諱德齡字景樹光州石底村人也曾祖諱珝戶曹正郞祖諱允孝宣務郞考諱鵬變習讀妣南平潘氏直長季宗女有丈夫子三人公其仲也公世故儒家夙蜚詞藝聲年十七取鄉解既又遊牛溪成先生之門講問儒者之學雖卓犖有大志人莫知也壬辰亂作公兄贈持平德弘首倡義起兵公亦從焉持平公曰吾兄弟皆死奈老母何遂遣公歸養獨與高公敬命偕進戰錦山死之明年癸巳賊退自王京猶據嶺南日益兵圖再逞而官軍及諸義旅率望塵奔避時公丁潘夫人憂己葬矣觀察使及鄰郡宰始稍稍聞公名交薦于朝李忠定貴時爲守長城言公大將才也於是特授官刑曹佐郞公姊夫金應會倜儻士也以大義開公而朝旨又適至公乃以墨縗起斥田宅具器仗傳檄旁邑得敢戰士五千餘人權元帥慄標其軍曰超乘上又遣使賜軍號忠勇時甲午正月也公遂引兵抵嶺南界上移檄言直抵大坂城大坂城倭所都也倭酋淸正潛遣工圖公容貌見之咤曰眞將軍也乃撤諸屯兵合爲大陣以待之當是時諸將士壁壘相望唯郭將軍再祐以忠智特著公移書約戮力殲賊遂偕陣鼎巖津賊夜渉川將刼營公設覆掩擊大創之賊不敢出公在陣嘗生縳兩虓虎以示賊賊愈震龔相戒避翼虎將軍公軍晋州晋州新爲賊所刳積骸如阜自公屯兵後無一人一騎敢近境者以是無斬獲功而嶺湖之間民始得安意操鋤棃流庸漸復軍亦有羡食矣娟公者乃謂公對壘三年迄無寸功嗟乎豈不誣哉公又嘗與郭將軍駕海舶繇東萊前洋直摩倭疊倭死咋閉營不敢動於是公受朝命盡統諸道義兵軍聲大振士皆踴躍思一奮而天朝己厭兵議封貢朝廷亦戒諸將母與倭交兵公屢請戰皆不許公知功不就遂感憤縱酒且成疾公在軍斬軍吏犯罪者或言其殺無辜遂被逮問賴時相鄭公琢力救得釋未幾湖西賊李夢鹤叛流言公與郭將軍及洪季男高彦伯崔聃齡俱與己通謀季男彦伯亦義兵諸將爲賊所憚者而聃齡則公麾下士有義勇者也公方引兵討夢鶴道聞賊己平乃還而朝廷遂用流言逮公公忼慨對薄辭氣自若曰臣居親喪而從金革之事又不能成尺寸功忠孝俱隳罪當死無所惜願無以臣故殺無辜崔聃齡聃齡竟得免時諸將中往往多忌公者而忠淸兵使李時言尤甚公之逮以時言密啓也徐忠肅公渻時爲承旨力保公不及鄭相琢金相應南皆極言公無罪而廟議有陰主時言者公竟以丙申八月受酷刑卒于獄中公旣登成先生之門鄭文淸公澈又公邑人也成先生與鄭公皆方爲黨人所甘心公威聲又獨出諸將上以故與公偕逮者衆而公燭幽揭烈華袞煒煌梨坂之陽碧血在泉毅昆哲季左右連蜷萬口之騰刻此貞石金匱靑簡並詔無斁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豊山 洪奭周 謹撰(追記)嗚呼忠壯金公我海東名將也其神武鬼策未及少展之寃卒誣獄而無後嗣其弟楓巖公德普遺命其子楓溪公璩使之兼奉公祀至次曾孫梨村公守信權奉公廟會寒圃齋李公健命長曹銓肅廟三十八年壬辰十一月二十七日丙午都目政錄用梨村公官至別檢時徐命遇爲掌令上疏彈劾之曰入銓者若非植黨擯異則率是循私蔑公而純用一邊寒圃齋陳疏悉辨之曰忠勇將金德齡卽壬辰倡義之人而被禍寃死事蹟尤著臣之入銓收錄其奉祀孫我族先祖大司諫水村公埅赤陳疏盛辨之曰義兵將金德齡奉祀之人見擬於政注者有何可疑而巧加吹覓他尙何言肅宗頷之而賜優批曰條論可謂明快而削黜徐命遇足以懲罪大哉王言厥後修譜也問禮於蘆艮淵三賢別檢公以下奉祀子孫間二世而錄之於忠壯公脚下此洪相公所撰碑文中所謂今主祀者洪基卽別檢公五代冑孫也今此奉祀顚末原碑中見漏故將竪神道碑也其後孫忠浩搜摭其事實於肅宗大王實錄及忠壯公遺事寒水諸集而撰實記訪余于寧州泰華山鬱而請文之吾雖非其人顧於先誼其美事盛意莫之敢孤而榮其託名叙之如右云爾公歿後四百八年甲申孟春仲浣後學豊川任龍淳謹撰族孫 金善源 謹篆竝書公歿後四百八年甲申仲春日 謹立
    2018-11-12 | NO.80
  • 김문발-부용정 김문발 신도비
    광주시 남구 부용정芙蓉亭 김문발金文發(1358~1418)은 고려말부터 조선초의 무인, 본관은 광산, 칠석동 출신이다.문정공(文正公) 태현(台鉉)의 7세손으로, 아버지는 증참판 거안(巨安)이다. 어려서부터 남다르게 총명하고 학식이 뛰어나 10여세에 제덕을 겸비하였으며, 무예에도 남다르게 뛰어나 문무를 겸전하였다. 고려말 도평의논사(都評議錄事)출신으로서 1386년(우왕12년) 전라도원수를 따라 남원, 보성 등지에서 왜구를 격퇴한 공으로 돌산만호(突山萬戶),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었다. 조선초기 1394년(태조3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김빈길(金賓吉), 만호 김윤검(金允劒)등과 함께 왜적선 세 척을 포획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활, 화살, 은기(銀器)등을 하사 받았다. 1406년(태종6년) 전라도수군단무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왜적선 한 척을 포획하였다. 이듬해에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이추(李推), 대호군(大護軍) 강원길(姜元吉)과 함께 요동의 피망민을 압송하여 돌려보내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1408년에 경기수군도절제사에서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水軍都體追捕使)가 되었다. 1411년에 충청전라도수군체찰추포사(忠청全羅道水軍都體追捕使)를 병으로 인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내려왔다. 고향에 돌아와 부용정(芙蓉亭, 칠석동소재, 문화재 자료 제13호)을 짓고, 여씨 향약과 주자의 백록동규약을 베풀어 풍속교화에 힘썼는데, 이것이 광주 향약 좌목의 유래가 되었다. 따라서 이 정자는 이 지역의 향약 시행장소로 매우 유서가 깊은 곳이다. 1412(태종12년)에 전라도수군절제사가 되었으며, 1418년에 황해도관찰사를 제수받고 부임한지 얼마 아니되어 병으로 사직하고, 그 뒤 바로 졸하였다. 조선 초기 1394년(태조 3)에 왜적의 병선 3척을 포획한 공으로 왕으로부터 하사품(활⋅화살⋅은기銀器)을 받았다. 그 뒤 순천부사順天府使가 되고, 1406년(태종 6) 전라도수군단무사全羅道水軍團撫使로서 안부도安釜島를 수색하여 왜적선 1척을 나포하였는데, 적병 40여명이 모두 바다에 투신하여 죽고 8명을 생포하여 보고하니 포상으로 궁온(宮醞 임금이 신하(臣下)나 백성(百姓)에게 내려 주는 술)을 하사받았다.1407년(태종 7)에 상호군上護軍이 되어 명나라에서 도망쳐 온 여진인 가운데 아직 송환되지 않은 포로 유산성劉山城 등 그 가속家屬 총 4,126명을 요동으로 압송하여 넘겨주었다.1408년(태종 8) 1월 경기수군도절제사京畿水軍都節制使인 공이 충청⋅전라도수군도체찰추포사水軍都體察追捕使가 되어 경기의 병선 15척을 거느리고 체찰體察 추포追捕 업무를 수행하던 중, 1411년(태종 8) 3월에 병환으로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이즈음 공은 광주 칠석동漆石洞에 부용정芙蓉亭을 짓고, 여씨향약呂氏鄕約과 주자朱子의 백녹동규약白鹿洞規約을 따라 풍속교화에 힘썼으며 공의 뒤를 이어 필문蓽門 이선제李先齊 시원始元 부자父子와 대사성大司成 노자형盧自亨 등이 계승 강마講磨하여 후일 광주향약이 시행되어 우리나라 향약의 효시가 되었다. 따라서 부용정은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이 시행된 역사성을 갖는 장소로서 매우 유서 깊은 곳이다. 1412년(태종 12)에 국가의 조곡租穀을 육수陸輸에서 조운漕運으로 하는 문제에 대해 상소하여 해상 운송 제도를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다시 전라도수군절제사全羅道水軍節制使에 임명되었고, 1413년(태종 13)에 경상우도慶尙右道에 수군을 나누어 좌도도절제사左道都節制使가 되었으나, 부임 여부와 퇴임 시기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이 기간에 고향에 돌아와 있었는데, 1418년(태종 18)에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를 제수 받고 부임한 후 병으로 사임하고 고향에 내려와 같은 해 4월 향년 60세로 타계하였다. 조선왕조실록 공의 졸기卒記에 사람됨이 매우 겸손하였으며, 청렴하고 언행이 무거웠으며, 왜구토벌倭寇討伐에 공이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가정대부형조참판嘉靖大夫刑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2018-11-29 | NO.79
  • 김세근-삽봉 김세근 장군 묘역
    광주시 서구 서창동 산 59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의 묘소는 서구 서창동 학산사 입구 왼편에 있다.
    2018-12-07 | NO.78
  • 김이려묘지(金以碼墓誌)
    김이려묘지(金以碼墓誌)는 1552년(명종)의 것으로 강원도 강릉시 장현동에서 출토되었다. 전남대박물관에 있다.김이려의 자는 성지(成之), 본관은 강릉이다. 조부는 찰방을 지낸 김석견(金石堅), 아버지는 교수를 지낸 김보(金黼)이고 어머니는 안동권씨 권신(權伸)의 딸이다. 김이려는 1487년(성종 18)에 출생하였으며, 1552년(명종 7)에 세상을 떠났다. 부인은 참봉 김세달(金世達)의 딸이다. 청자로 만들어진 판에 김이려의 가계가 기술되어 있다. 개자판(蓋磁板)과 저자판(底磁板)으로 만들어졌다. 개자판은 가로 18.5㎝, 세로 25㎝, 두께 2.8㎝, 저자판은 가로 18.5㎝, 세로 25㎝, 두께 3㎝이다.
    2023-07-17 | NO.77
  • 김창환-국창 김창환 묘비
    광주시 광산구1997년國唱金昌煥墓碑는 흥성 장재철 짓고 평택 임형문 쓰다
    2018-12-02 | NO.76
  • 김함-찬성 김공함 신도비
    광주시 북구 금곡동 산 164-1(충장사 주변)1830년이 유명조선국숭정대부판결사의정부예의찬성김공함신도비(有明朝鮮國崇政大夫判決事議政府禮義贊成金公瑊神道碑)는 金致洙 쓰다.<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20리의 거리인 배재(梨峙)마을에 있는 비석이다. 후손 면식(冕植)이 이를 세웠다. *瑊은 올돌 감, 또는 옥돌 함으로 읽는다.충장사 입구에서 충효동 쪽으로 송강로길을 타고 150m 지점의 길 우측에  김성원 순효비와 함께 있다. 김함은 광산 김씨  김문손(金文孫)의 아들이다. 김문손은 김후(金詡)와 김함 두 아들을 두었다. 김후의 장녀 윤덕은 양산보의 부인이 되었고, 둘째 아들이 김윤제다. 양산보의 서자 양자호가 김윤제의 3남 김윤충의 사위가 됨으로써 김, 양 두 집안은 겹사돈 관계를 맺었다. 김함의 차녀는 고경명의 장인 김백균(金百鈞, 1525~1584)에게 출가했고, 김함의 손자가 바로 김성원이다. 김윤제는 양산보의 처남, 송순의 고모는 양산보의 어머니, 양산보의 4종매는 임억령의 부인, 임억령의 둘째 딸은 김성원의 부인, 김성원은 정철의 처외재당숙, 정철은 김윤제의 외손녀사위, 양산보의 2남 양자징(梁子澂)은 김인후의 사위, 고경명은 김윤제의 종생질녀(從甥姪女) 사위였다. 김덕령(金德齡, 1567~1596) 의병장은 김문손의 4대손이다. 이처럼 면앙정과 식영정, 환벽당, 소쇄원, 서하당, 송강정의 주인들은 서로 혈맥(血脈)과 혼맥(婚脈)으로 맺어져 있다. 
    2018-06-18 | NO.75
  •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 최기(崔沂, 1553~1616)
    낙전당집 제10권 / 묘지명(墓誌銘)유명 조선국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통정대부 수 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최공 묘지명병서〔有明朝鮮國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崔公墓誌銘 幷序〕아! 간흉들이 정권을 훔쳐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죽이고 십 년간 덫과 함정을 놓아 충성스럽고 어진 이들을 죽여 원통함을 부르짖는 이들이 나라에 가득했는데, 해주(海州)의 옥사가 그중에서도 가장 억울하다고 하니 지금까지도 해주 옥사를 언급하면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다. 최기(崔沂) 공이 해주 목사가 되어 충성스런 마음을 다하여 재앙의 발단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했는데,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사서 마침내 그의 집안이 전복되었다. 집안이 비록 전복되었지만 정도(正道)를 지키며 동요하지 않고 자기 한 몸으로 한 시대 사류들이 당할 불의의 큰 화를 대신하였으니,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도록 만들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게 하는 이유이다.공은 어릴 때부터 원대한 기국을 지녀 사우(士友)들 사이에서 존중을 받았다. 만력(萬曆) 갑신년(1584, 선조17)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에 성균관에 들어가 곧이어 대과에 합격하고 선발되어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얼마 후에 사국(史局)에 들어가 검열과 대교를 역임했으며, 이정귀(李廷龜) 공을 천거한 일에 연루되어 논핵을 당하고 파직되었다. 얼마 후에 서용되어 다시 봉교가 되었고, 제용감 주부, 형조 좌랑으로 자리를 옮겼다.임진왜란 때는 방어사 이옥(李沃)의 군중에서 종사관으로 있었다. 계사년(1593)에 직위를 옮겨 해운 판관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지평으로 부름을 받고 돌아오다가 도중에 부친의 상을 당했다. 상기를 마치고 나서 호조 정랑에 임명되어 재자관(齎咨官)으로 요동에 갔다. 조정에서 숙천(肅川)이 서쪽 관문의 큰 길목이라 논의하여 공을 추천하여 담당하게 하였다.정유년(1597) 여름에 문학, 헌납, 지제교에 임명되었고, 집의, 겸필선, 종부시 정, 사간, 보덕을 역임하였으며, 홍문록(弘文錄)에 올라 부수찬과 교리를 역임하였다. 선조가 《춘추》에 대한 좌씨(左氏), 정씨(程氏), 호씨(胡氏)의 세 가지 전(傳)을 찬집하도록 명하자, 1부로 만들어 올렸다. 책이 완성되자 공과 동료 관원들이 차자를 올려 《춘추》의 복수(復讐)의 대의(大義)를 밝혔는데, 임금이 가납하고 모두 한 자급씩 올려 주었다. 공 역시 승조관(陞朝官)이 되어 서반(西班)의 부호군에 서용되었다. 공은 예전에 문사낭청(問事郎廳)으로 역적을 국문하는데 참여하여 또 포상으로 가선대부의 자급을 받았으나, 언관(言官)들이 지나치게 빨리 승진한다고 논하여 다시 바뀌었다.임인년(1602)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고, 좌부승지로 승진했다가 체직되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자리를 옮겨 동래 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상신(相臣)이 계청하여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자리를 바꾸었다. 암행 어사가 고과(考課)가 가장 높다고 아뢰자, 교지와 습의(襲衣)를 하사하였다.갑진년(1604)에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가을에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임명되어 하직인사를 올리자, 임금이 직접 쓴 서찰을 하사하여 백성을 어루만지고 폐단을 제거하며, 군량을 비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켜 관서 지역의 보장(保障)으로 만들라고 면려하셨다. 윤음(綸音)이 간곡한데다 표피(豹皮)까지 하사하였으니, 매우 특별한 예우였다.공이 임금의 지우(知遇)에 더욱 감격하여 마음을 닦고 공무를 수행하여 온갖 폐해진 것을 일으켜 기월(期月)의 효과를 이루자, 내구마(內廏馬)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정미년(1607)에 하지사(賀至使)로 연경에 갔을 적에 권귀(權貴)들의 청탁을 물리쳤으며, 행낭이 초라하였으니, 사론(士論)이 훌륭하게 여겼다. 도중에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관찰사의 체모를 잘 갖추었다.무신년(1608, 광해군 즉위년)에 호조 참의로 있다가 경주 부윤에 임명되었는데, 형의 부고를 듣고서 사직을 하고 장례를 치렀다. 형조 참의, 장례원 판결사를 거쳐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는데,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이 막 호조 판서에 부임했을 때라 공을 믿고 의지하였다.계축년(1613)에 박응서(朴應犀)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전조(前朝)의 구신(舊臣)들이 모두 법망에 걸려들었는데, 공 역시 조정에 편안히 있지 못하고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나가게 되었다. 문민공은 이미 옹진(瓮津)으로 유배되었으며, 남이공(南以恭) 역시 송화(松禾)로 유배되었다. 간흉들이 사람을 사주하여 “박치의(朴致毅)가 구월산(九月山)에 숨어 도적들을 불러 모은다.”고 상소를 올리게 하여 큰 옥사를 일으켜 해서(海西)에 유배된 이들을 끌어들여 사림(士林)을 모두 없애고,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에게까지 화가 미치게 하려고 하자, 조정 안팎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였다.해주 사람 박희일(朴希一)과 박이빈(朴以彬)은 고을에서 죄를 얻은 뒤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몰래 간사한 무리와 결탁하여 고변하기로 약속을 하고 밀봉된 글 한 통을 받았다. 글 속에 기록된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었는데, 특히 문민공(文敏公) 황신(黃愼)을 요주의 인물로 삼았다. 일을 고변하기 전에 박희일의 부형과 종족이 크게 두려워 그 글을 태워버렸다. 그러자 흉계를 더욱 심하게 꾸며 고을에서 명망이 있는 자들까지 모두 끌어들여 한 번에 모두 제거하려고 하였다.부형이 박이빈이 예전부터 꾸민 흉계를 적발하여 공에게 고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공이 급하게 그들을 체포하자, 박이빈이 드디어 흉서(凶書)를 꺼내며 위협하였다. 공이 그의 허망(虛妄)한 행동을 꾸짖고는 장을 쳐서 내쫓았는데, 고을에서는 재앙의 근원이 여전히 남아있어 앞일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그 부형과 모의하여 두 사람을 죽였다.간흉(奸凶)이 충복인 유세증(兪世曾)을 보내어 그 정황을 살피고는 해당 도(道)에서 그 일을 아뢰도록 하였다. 공과 해주 사람들이 모두 체포되었는데, 공은 심문을 받으면서 사실대로 답변하며 간흉의 흉계를 모두 밝혀냈다. 당시의 권신이 간적의 우두머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터라, 옥사가 번복되어야 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자, 간적들은 실정이 탄로 날까 두려워 음모를 더욱 치밀하게 꾸며 몰래 사형수 정충남(鄭忠男)에게 박희일 등의 밀봉된 글 속에 있는 사실을 참여하여 들었으며, 공이 역도의 우두머리라고 자백하게 시켰다.간흉이 또 해주 사람 중에 옥에 갇혀있는 자들을 꾀어 자신들을 따르면 복을 받고 따르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라 하여 동요시키자 모두 거짓으로 자백을 하였다. 형방 승지 한찬남(韓纘男)이 평소에 공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는데, 이때에 정조(鄭造), 남근(南瑾)과 함께 날조하여 죄안을 만들어 결국 공을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실로 병진년(1616) 6월 25일의 일이다. 8월에 추론하여 공의 시신을 파내어 시장에 늘어놓았다. 공의 외아들 유석(有石)도 함께 목숨을 잃었으니, 슬프도다.공의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이며, 본관은 해주이다. 고려 문헌공(文獻公) 충(沖)의 후예로, 고조는 예조 좌랑 청(埥)이고, 증조는 사헌부 감찰 운손(雲孫)이며, 조부는 마량진 첨절제사 선(璿)이며, 부친은 선전관 여개(汝漑)인데, 3대가 모두 이조 참판으로 증직되었다. 모친은 양천 허씨(陽川許氏)로, 현감 운(雲)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계축년(1553, 명종8) 3월 병신일에 태어났으니, 향년 64세이다.초취(初娶)는 만호 강탁(姜倬)의 따님이며, 재취(再娶)는 충의위 이희복(李希福)의 따님이다. 슬하에 모두 1남 4녀를 두었다. 장녀는 유찬(柳燦)에게 출가하였는데, 강씨 소생이다. 아들은 유석(有石)이고, 차녀는 현감 윤훈거(尹勛擧)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사부(師傅) 홍우정(洪宇定)에게 출가하였으며, 사녀는 사인 김해(金垓)에게 출가하였는데, 이들은 이씨 소생이다.유석의 아들은 익(瀷)으로, 요절하였다. 익(瀷)은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어리다. 유찬은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도사 시영(時英)이며, 딸은 사인 이석평(李碩平)에게 출가하였다. 윤훈거는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변(抃)이다. 홍우정은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극(克), 윤(允), 욱(旭), 태(兌)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시영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寊)이고, 딸은 안정소(安廷熽)에게 출가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이석평은 3남 1녀를, 홍극은 2녀를, 홍유는 1남을, 윤변은 2남을, 유정은 1녀를, 안정소는 1남 2녀를 두었는데, 어리다.처음에 집안사람들이 공의 유해를 거두어 고향에 묻었는데, 인조반정 초기에 공을 이조 판서로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관청에서 장례를 도와주도록 명하니, 유시영(柳時英)이 공의 관을 받들어 양근(楊根) 서종면(西終面) 모좌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갑자년(1624, 인조2) 이부인(李夫人)이 세상을 떠나자 공의 묘 곁에 장사 지냈다.공은 기국과 도량이 관대하고 후하였으며, 지조와 행실은 순수하고 확고하였다. 천성적으로 효우(孝友)를 타고났으며, 윤리와 법도에 독실하였고, 선대를 받드는 데 더욱 삼가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종손에게 주관하도록 하였다. 아내의 재산을 쪼개어 집을 사서 형에게 주어 살게 하였으며, 가난한 친척들 중에 공의 덕택으로 밥을 지어 먹는 이들이 항상 십여 명이었는데, 가업을 꾸려 자손들을 위한 계책을 마련한 적은 없었다.여러 차례 큰 고을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이로운 일을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함이 각기 조리가 있었고 관청의 창고를 가득 채우니,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게 되어 공이 떠난 뒤에는 반드시 비석을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스스로를 청렴과 고결함으로 단속하여 부임한 관사에서 관례로 나누어 주는 물품은 역시 관사의 창고로 돌려보내고 털끝만큼도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평소에는 엄숙하게 거처하고 의관을 가지런하게 갖추었으며 일체의 사치나 이득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 사람을 대할 적에는 간격을 두지 않아, 공을 바라보면 장덕군자(長德君子)인 줄을 알았다고 한다. 선조(宣祖)를 만나 높은 지위에 등용될 듯하였으나 임금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 운명이 재앙과 함께 찾아왔으니, 천도(天道)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어쩌면 공의 몸과 공의 명성을 바꾸어 무궁토록 전해지게 하여 세상의 이랬다저랬다 변덕을 부리는 사람들을 권면시키려는 것인가.나는 공이 선인과 연고가 있어서 상 곁에서 뵌 적이 있으며, 선인 역시 죄에 걸려 풍파가 닥치던 날에 내 마음이 쪼개진 적이 있으니, 단지 남들을 따라서 비분강개하며 눈물을 흘릴 뿐만이 아니다. 이에 도사군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명을 부탁하니, 공의 묘지명을 짓는 일을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다. 삼가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선악은 뒤섞이지 않지만 / 善惡不紊화복은 간혹 어긋난다네 / 禍福或舛천 년 전 맹박의 말로 / 千載孟博之辭공의 묘지명에 새기노라 / 刻公隧石之篆[주-D001] 유명 …… 묘지명 : 이 글은 최기(崔沂, 1553~1616)에 대한 묘지명이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청원(淸源), 호는 서촌(西村)ㆍ쌍백당(雙栢堂)이다.[주-D002] 해주(海州)의 옥사 : 최기(崔沂)가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있으면서, 이이첨(李爾瞻)의 일파인 박희일(朴希一), 박이빈(朴以彬)을 무고죄로 처형하였다는 이유로 이이첨의 미움을 받아, 이이첨의 일파인 황해도 관찰사 백대형(白大珩), 해주 목사 유세증(兪世曾)에 의해 남형죄(濫刑罪)로 투옥되어 고문을 받고 옥사(獄死)한 사건을 가리킨다.[주-D003] 재앙의 …… 했는데 : 계축년(1613, 광해군5)의 옥사 때 지명수배 하였으나 체포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이를 인하여 이이첨(李爾瞻)과 허균(許筠)이 ‘그자가 해서(海西) 지방의 산골짜기로 도망쳐 있으면서 무리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술책을 꾸며 평상시에 꺼리고 미워하는 자들을 모두 그 속에 몰아넣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몰래 박희일(朴希一)과 박이빈(朴以彬) 등을 사주하여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박희일과 박이빈은 모두 해주 사람으로 평소에 행실을 삼가지 않아 향리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이첨과 허균의 사주를 받고는 특별한 상을 받을 것이라고 여겨 갑자기 스스로 대단한 인물인 양 여기며 향리로 돌아가서 그런 내용을 살짝 누설하였다. 그의 부형들이 그 말을 듣고서는 크게 두려워하여 실상을 폭로하였다. 최기가 이 두 사람을 잡아들이기는 하였으나 중한 죄로 처리하지는 않았다. 《淸陰集 卷24 觀察使崔公神道碑銘》[주-D004] 복수(復讐)의 대의(大義) : 부모의 원수를 반드시 갚는다는 말이다. 제 양공(齊襄公)이 9대 선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紀)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춘추》에서는 그저 “기후가 영원히 그 나라를 떠났다.[紀侯大去其國]”라고만 하였는데, 멸망시킨 제 양공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춘추공양전》에서는 어진 이를 위해서 피휘를 해 준다.[春秋爲賢者諱]”라고 하였고, 또 “양공의 어떤 점을 어질게 여겼는가? 원수를 갚은 것을 말한다.[何賢乎襄公? 復讎也.]”라고 하였다. 《春秋公羊傳 莊公4年》[주-D005] 기월(期月)의 효과 : 교화를 빠른 시일 내에 이룩한다는 뜻이다. 《논어》 〈자로(子路)〉에 “만약 나를 써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단 1년만 정치를 담당하더라도 그런대로 괜찮아질 것이요, 3년이면 업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苟有用我者, 期月而已可也, 三年有成.]”라고 하였다.[주-D006] 맹박(孟博) : 후한 때의 인물인 범방(范滂)으로 맹박은 그의 자(字)이다. 청렴하고 지조 있는 관원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뜻있는 선비들과 친교를 맺고 환관들의 전횡에 반대하였다. 그 뒤 환관들이 이응(李膺) 등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관원을 일망타진하고자 당파를 조장한다는 죄목으로 이른바 ‘당고(黨錮)의 화(禍)’를 일으켰을 때, 당인으로 지목되어 33세의 나이로 옥사하여 태연히 죽음을 맞이하였다. 《後漢書 卷97 黨錮列傳 范滂》
    2023-12-04 | NO.74
  • 노 이천(盧伊川)의 묘갈명
    간이집 제2권 / 묘갈명(墓碣銘) 병서(幷序) ○ 음기(陰記)와 묘표(墓表)를 덧붙임공의 휘는 개(塏)요, 자는 청중(淸仲)이다. 노씨는 광주(光州)에서 나와 고려의 저명한 성씨가 되었는데,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우의정(右議政) 노숭(盧嵩)이 있었으니, 이분이 공에게 6대조가 된다.증조인 노정(盧禎)은 부호군(副護軍)이고, 조부인 노자장(盧自璋)은 부사정(副司正)이고, 부친인 노한문(盧漢文)은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광주 목사(廣州牧使)이다. 모친인 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부사직(副司直) 유숙(柳淑)의 딸로서, 삼한 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유차달(柳車達)의 후예이다.공은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19)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다고 일컬어졌다. 18세에 시부(詩賦)로 향시(鄕試)에 응시한 적도 있었으나, 이윽고 자제(子弟)의 행실을 독실하게 닦는 데에 전념하였을 뿐 다시는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았으므로, 끝내 그 방면에는 소득이 없었다.음관으로 사산 감역(四山監役)에 보임(補任)되었는데, 상(喪)을 당해 그만두었다. 다시 수운 판관(水運判官)으로 근무하던 중 어떤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전설사 별좌(典設司別坐)로 임명되었으며, 여기에서 인의(引儀)로 승진하면서 한성 참군(漢城參軍)을 겸임하였다.그 뒤 얼마 있다가 이천 현감(伊川縣監)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병으로 부임을 하지 못한 채 죽으니, 이때가 만력(萬曆) 정해년(1587, 선조20)으로서 향년 64세였다. 이해 8월 갑신일에 파주(坡州) 두문리(斗文里)에 장사 지냈다.공의 효성과 우애는 지극한 성품에서 발로된 것이었다. 부친을 잃은 뒤로 모부인(母夫人)만을 모시게 되면서는 비통해하고 두려워하는 심정이 더욱 간절하였으며, 형제 다섯 사람과 날마다 함께 모여 맛있는 음식으로 모부인을 기쁘게 해 드렸다. 그리고 상(喪)을 전후로 해서 몸이 극도로 상해서 거의 위태롭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종가(宗家)에 후사(後嗣)가 없는 상황에서 차서(次序)로 볼 때 공이 후사로 들어가는 것이 마땅하였으나 고사(固辭)하며 피하기도 하였다.공은 어느 관직에 있거나 모두 충실하게 그 직책을 수행하였다. 공이 수운 판관에서 파직될 당시, 이졸(吏卒)들이 며칠 동안이나 수백 명씩 대성(臺省)에 몰려와 공의 억울함을 하소연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하나의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하늘이 어찌해서 공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유독 인색하게 했는지 애석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공의 부인인 거창 신씨(居昌愼氏)는 봉사(奉事) 신홍필(愼弘弼)의 딸이요, 우의정 신수근(愼守勤)의 손녀로, 모두 4남 3녀를 낳았다.장남 노수의(盧守誼)는 종실(宗室)인 영가수(永嘉守) 모(某)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노희천(盧希天)을 낳았다. 그다음 노수심(盧守諶)은 만호(萬戶) 유삼(柳參)의 딸에게 장가들어, 이대영(李大榮)의 처가 된 딸과 아들 노희성(盧希聖)ㆍ노희현(盧希賢)을 낳았다. 그다음 노수눌(盧守訥)은 증 판서(贈判書) 김주(金澍)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으며 아들은 어리다. 그다음 노수밀(盧守謐)은 종실(宗室)인 영성영(靈城令) 모(某)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장녀는 신식(申湜)에게 출가하여 아들 신덕자(申德滋)를 낳았으며 그다음 아들과 딸 넷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그다음은 김익현(金翼賢)에게 출가하였다. 그다음은 한율(韓慄)에게 출가하여 아들 둘을 낳았는데 어리다.노수심은 무과(武科) 출신으로 현감(縣監)을 지냈는데 먼저 죽었다. 신식은 문과(文科) 출신으로 장령(掌令)이다. 김익현은 문과 출신으로 도사(都事)이다. 한율은 겸사복(兼司僕)이다. 나머지는 관직이 없다.나는 장령과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기 때문에, 묘갈명을 지어 달라는 요청을 사양할 수가 없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관원의 능력을 어찌 큰 관직에서만 볼 것인가 / 能視官不在大兮가정의 행실을 보면 됐지 어찌 꼭 집 밖을 논하리요 / 行視家何必外兮이러쿵저러쿵 공에 대해 비난이 있기도 하였다만 / 譏歸於時이분이야 책임질 일 무엇이 있었던고 / 斯人何負兮산 사람은 가신 이를 가슴 아파하는데 / 居者傷往가신 이는 산 사람에 고개도 돌리지 않는구려 / 往不回首兮
    2022-04-29 | NO.73
  • 농암집 제28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 오두인
    형조 판서 증 영의정 시호 충정공(忠貞公) 오공(吳公)의 신도비명 병서금상 15년 기사년(1689)에 중궁이 손위(遜位)하자 판서 양곡(陽谷) 오공 두인(吳公斗寅)이 참판 이공 세화(李公世華), 응교 박공 태보(朴公泰輔) 등 80여 인과 함께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 극간(極諫)을 하였는데, 오공이 실로 소두(疏頭)였다. 이에 상이 진노하여 세 사람이 모두 형장을 맞고 먼 곳으로 유배되었는데, 오공은 파주(坡州)에 이르러, 박공은 노량강(露梁江)에 이르러 모두 도중에 별세하였고 오직 이공만이 죽지 않았다. 6년 뒤인 갑술년(1694, 숙종20)에 상이 과거의 일을 크게 뉘우쳐 즉시 중궁(中宮)을 맞이하여 돌아오게 하고 복위시켰다. 그러고는 맨 처음에 두 공의 충성스러운 죽음을 생각하여 각별히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오공에게는 의정부 영의정을 증작(贈爵)하고 충정공(忠貞公)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박공에게는 이조 판서를 증작하고 정려문을 세워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당을 세워 두 공에게 제사를 올리자는 청을 모두 들어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여 베 짜는 여인이나 꼴 베는 남자들까지 하나같이 감탄하고 눈물을 흘리며 천도(天道)가 올바로 정해진 것을 경사로 여겼다.혹자는 두 공이 이공처럼 죽지 않고 살아남아 중궁의 복위를 통쾌하게 보지 못한 것을 슬퍼하자, 군자가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신하가 국모를 위해 죽는 것은 대의이다. 예로부터 그 일을 실천한 자가 거의 없었는데, 두 공이 극간하다가 죽음으로써 그 의리가 비로소 밝아졌다. 간언을 하다가 죽거나 죽지 않는 것은 천명이다. 그러나 죽지 않으면 그 장렬함이 드러나지 않아 사람들을 깊이 감동시키지 못한다. 따라서 두 공의 입장으로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니, 그런 뒤에 당시의 조정 신하들에게 부끄러운 줄을 알게 하고 화를 일으키려는 간인(奸人)의 마음을 막을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당시의 화가 어찌 그 정도에 그쳤겠는가. 그리고 성인(聖人)이 허물을 짓는 것이 비록 일식, 월식과 같다고는 하나 오늘날처럼 속히 고친 경우는 없었으니, 이 또한 두 공의 죽음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켰기 때문이 아니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이 있게 된 것은 실로 두 공이 한번 죽음으로 인한 효과이니, 이제 와서 슬퍼하는 것은 말단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오공의 자는 원징(元徵),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며 대범하고 중후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았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문장력이 있었다. 10세에 황고(皇考) 천파공(天坡公 오숙(吳䎘))을 따라 해서(海西)에 갔었는데, 명나라 부총(副摠) 정룡(程龍)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공을 보고 기특하게 여겨 운(韻)을 명하고 시를 짓게 하였다. 공이 이에 붓을 잡고 즉시 한(漢)나라 명장 정불식(程不識)을 가지고 정공에 빗대자, 정공은 크게 놀라 감탄하고 진기한 재물을 후하게 주었다. 그러나 공이 모두 사양하고 부채 하나만 받으니, 정공은 더욱 공경하고 중하게 여겨 “훗날의 발전을 예측할 수가 없다.”라고 말하고는 그 시를 《황화집(皇華集)》에 실었다. 이리하여 공의 이름이 중국에 알려지게 되었다.무자년(1648, 인조26)에 진사시(進士試) 초시에 장원으로 입격하여 마침내 성균관 유생으로 들어가고, 기축년(1649, 인조27)에는 별시(別試)에 장원하여 규례대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과 병조, 이조 두 조의 낭청에 제수되었으며, 사헌부의 지평(持平)ㆍ장령(掌令)ㆍ집의(執義), 사간원의 정언(正言)ㆍ헌납(獻納)ㆍ사간(司諫), 홍문관의 수찬(修撰)ㆍ교리(校理)에 누차 제수되었다.효묘(孝廟) 때에 각 도에서 노비를 추쇄(推刷)하느라 독찰이 엄중하고 삼남(三南)에 영장(營將)을 두어 훈련을 자주 행하며 또 동조(東朝 효종의 어머니인 조 대비(趙大妃))를 위해 궁전을 수리하려고 하자, 공이 정언으로 있으면서 재앙을 인하여 상소해서 그 폐단을 낱낱이 거론하였다. 이윽고 또 동료와 함께 상차(上箚)하여 노비 추쇄를 늦추고 형옥(刑獄)을 돌보며 간쟁을 받아들이고 신료들을 분발시키라는 뜻으로 요청하자, 상은 공이 충직하여 간신(諫臣)으로서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칭찬하였다. 얼마 뒤에 형옥에 관한 일로 인해 상이 약간 온당치 못하다는 뜻을 보이자 공이 상소하여 자신을 탄핵하였는데, 며칠 뒤에 상이 간관들을 소견(召見)하여 위로함과 동시에 자신이 실언한 데 대해 자책하였다. 공은 즉시 나아가 사례하고 시폐(時弊)를 진술하였는데, 그 내용이 지난번 차자에서 지적한 것과 같았다.그리고 내구마(內廐馬)를 조련하는 장소에 친림(親臨)한 잘못을 말씀드리자 상이 가납하였다. 또한 대사간 유철(兪㯙)의 언사소(言事疏)가 상의 노여움을 사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을 때에, 공은 지평으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간쟁하다가 상의 노여움을 사 직책을 면직당하였다. 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궁노(宮奴)가 형장을 맞다 죽는 일이 있었는데, 내수사(內需司)에서 형조의 관리를 처벌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공이 “내관이 형조의 관리에 대한 처벌을 요청하다니, 이러한 조짐을 키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며 처벌을 계청(啓請)하자 상이 따랐다.현종조(顯宗朝)에는 헌납으로 있으면서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몸을 닦고 반성하며 절검하고 학문을 닦고 현자를 예우할 것을 청하고 아울러 시폐 몇 가지를 진술하였는데, 모두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상이 몸소 군대를 사열하려고 하자 공은 옥당에 있으면서 “하늘의 재앙이 거듭 나타나 기근이 들고 역병이 돌고 있으니, 출입하는 일을 삼감으로써 몸을 닦고 반성하는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라고 상소하였는데, 상이 관대한 답을 내렸다. 또한 수감된 죄수를 심리하여 올린 의금부의 죄안(罪案)에 대해 상이 특지(特旨)로 영향력을 행사하자, 당시에 사간(司諫)으로 있던 공이 그것의 불가함을 말씀드림과 동시에 의금부가 불가함을 상주하지 못하여 유사(有司)의 체통을 잃었다고 탄핵하였는데, 상은 이에 노하여 공을 면직시켰다.뒤에 또 집의로 있으면서 무지개가 나타난 변고를 인하여 상소하여 극력 말하기를, “재변이 매우 심한데 상하가 안일하게 지내어 정령(政令)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있으니, 먼저 학문에 힘쓰고 심성을 수양하여 실천함으로써 몸을 닦고 반성하는 근본으로 삼고 신하들을 불러 자문했던 조종조의 부지런함을 본받아 상하의 마음이 통하게 해야 합니다. 노비를 허위로 기록하여 친족과 이웃까지 침탈하는 일이 오늘날 팔도의 가장 큰 폐단이니, 속히 조사하여 바로잡아 백성의 고통을 덜어 주소서. 동조(東朝)의 진연(進宴)과 온천에 거둥하는 일이 비록 모두 부득이한 것이기는 하나 그 또한 일에 따라 줄여 민력(民力)을 돌보소서.”라고 하고, 또 “지체된 옥사를 빨리 처결하여 억울함을 풀어 주고 언로(言路)를 열어 충직한 말이 올라오게 하소서.”라고 청하였는데, 반복하여 간곡하게 올리는 수백 마디의 말에 상도 너그러운 비답을 내렸다.청(淸)나라에서 우리가 약조를 어겼다는 이유로 사신을 보내어 문책하고 마침내 속죄금을 물라고 요구하자, 양사(兩司)는 모두 대신(大臣)이 사력을 다해 그들의 횡포를 막아 내지 못하여 모욕이 상에게 미치게 했다고 탄핵하였다. 상은 이에 대로하여 간언을 올린 자들을 모두 내쫓았는데, 승지가 하명의 부당함을 지적하여 상주하자 그들마저 처벌하게 하였다. 마침 옥당에 입직하고 있던 공은 그날 밤에 당장 상차하여 간쟁하고 이튿날 다시 동료와 함께 청대(請對)하여 극론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그러나 공은 뜻이 사그라지지 않아, 물러나서 다시 상차하여 말하고 뒤에 또 여러 신하들을 복관(復官)할 것을 청하였는데 말이 더욱 간절하였으나 상이 응하지 않았다.공은 전후로 삼사(三司)의 여러 관직에 오랫동안 있었는데, 일을 당하면 임금의 비위를 거스르는 것도 피하지 않고 논열하였으며 그렇다고 남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비난하는 것을 능사로 삼지 않고 오직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데에 주력할 뿐이었다.중간에는 시강원의 사서(司書)ㆍ문학(文學), 성균관의 직강(直講)ㆍ사성(司成), 상의원(尙衣院)과 제용감(濟用監)의 정(正)이 되었고, 다시 사국(史局)의 관직을 겸하여 인묘(仁廟), 효묘(孝廟)의 실록 편수에 참가하였으며,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의 별칭)을 띠고 지방에 나가 경상도 도사(慶尙道都事),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 해운 판관(海運判官), 북청 판관(北靑判官), 홍주 목사(洪州牧使)를 지내고 중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에 다녀오고 또 어사(御史)로 호남에 나가기도 하였다.공이 도사로 나간 것은, 영남 유생이 과거 시험장을 어지럽히는 일이 두 번 발생하자 각별히 공을 보내어 진정시키게 한 것인데, 결국 그로 인해 무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이 고산도 찰방이 된 것은, 일찍이 부화하고 망녕된 고관 한 사람을 배척한 일이 있었는데, 전관(銓官)들이 그 사람을 옹호하고 도리어 공을 내쫓아 공을 억압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또한 공이 북청 판관으로 나간 것은, 사실 공이 장령으로 있을 때의 일이 발단이 된 것이었다. 당시에 서울에서 무뢰배들이 서로 파당을 만들어 칼을 끼고 난투를 벌이자 공이 관리를 시켜 체포하게 하였다. 왕손(王孫) 집안의 종도 그들과 함께 체포할 대상에 들어 있어 공에게 봐 달라고 하였으나 공은 듣지 않고 체포를 더욱 급히 독촉하였다. 하루는 지평 민공 유중(閔公維重)과 함께 조정에서 물러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민공의 어자(御者)를 피가 나도록 구타하였다. 공은 왕손 집안의 종이 공에게 원한을 품고 해코지를 하려다가 엉뚱한 사람을 해친 것임을 알고, 즉시 민공과 함께 부중(府中)에 들어가 그를 신속히 잡아다가 신문하고 다스렸는데 형장을 치다가 그만 죽이고 말았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이 노하여 두 사람 모두에게 체직(遞職)을 명하였다가 이내 승정원의 말을 따라 복직시켰다. 그러나 얼마 뒤에는 또 동료 대관(臺官)이 상의 노여움을 격발한 일로 인하여 두 사람까지 아울러 체직시키고 지방의 고을로 좌천시켰는데, 대신과 삼사가 연달아 극구 간쟁하였으나 어쩔 수가 없었다. 공은 그날 당장 부임해 가서 마음을 다해 봉직하고 좌천된 것을 괘념치 않았다.공이 어사가 되었을 적에는 명을 받들고 여러 진(鎭)의 군수품을 점검하였다. 그때 도신(道臣)이 어떤 한 고을의 수령을 편애해서 전에도 이미 무기에 대한 일로 칭찬하는 보고를 하여 작질(爵秩)을 높여 준 적이 있었는데 공에게도 그를 잘 봐 달라고 청탁하였다. 그러나 공은 고을에 이르러 도리어 심각하게 피폐한 상황을 보고는 즉시 상부에 보고하여 처벌하게 하였다. 간관들이 공이 도신까지 탄핵하지 않은 점을 지적하여 논파(論罷)하였으나 이내 다시 서용되었다.정미년(1667, 현종8) 겨울에는 영녕전(永寧殿)의 수리를 맡은 도청랑(都廳郞)으로 공로를 표창받아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고 즉시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차례로 올라가 우승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소하여, 고을 수령으로 부임하여 어미를 봉양하는 데에 이바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함과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탄핵한 결과 마침내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제수되었다. 공은 부임하여 세력가를 누르고 외로운 사람들을 구휼하고 자제들을 가르치고 학교를 부흥시켰으며, 자신의 생활을 더욱 검약하게 하고 소비를 절약함으로써 고을의 재정을 넉넉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신해년(1671, 현종12)의 큰 기근을 만나자 창고의 재물을 풀어 백성을 진휼하였는데, 백성들이 그 덕에 굶어 죽지 않았다. 또 조정에서는 다른 고을의 유민(流民)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명하였으나 공은 움집을 더욱 많이 설치하고 그들을 먹여 주었는데, 이로써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도신과 어사가 칭찬하는 보고를 하자, 조정에서는 공에게 말을 하사하고 계속 유임할 것을 명하여 백성들의 소원을 따라 주었다.서울로 들어와서는 병조의 참지와 참의, 승지가 되었다가, 병진년(1676, 숙종2)에 명성대비(明聖大妃)의 병이 낫자 약시중을 든 공로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부총관에 승서(陞敍)되고 한성부 우윤, 호조와 형조의 참판, 행 판결사(行判決事)를 거쳤으며, 중간에는 부사(副使)에 충원되어 연경에 가기도 하였다. 경신년(1680, 숙종6)에는 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로서 역옥(逆獄)의 국문에 참여한 공로로 한 자급이 올라 도승지, 병조와 예조의 참판을 거치고 중간에는 경기 감사로 나가기도 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9) 겨울에는 특별히 공조 판서에 제수되고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체직되었으며, 명성왕후의 상에 산릉(山陵) 공사를 감독한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승품되어 한성부판윤 겸 지의금도총관에 제수되었다. 병인년(1686, 숙종12)에는 평안 감사로 나가 부지런히 정사를 보았는데 은혜로우면서도 위엄이 있고 공식적으로 봉납(捧納)하는 것 이외에는 실 한 오라기도 사사로이 더 거두지 않았으니, 평안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공의 청렴함을 칭송하고 있다.이보다 앞서 공의 중자(中子) 태주(泰周)가 현종대왕의 딸 명안공주(明安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 정묘년(1687, 숙종13) 여름에 공주가 별세하자, 상이 공에게 각별히 관직을 벗고 돌아가서 장례를 돌보라고 명하였다. 공은 마침내 지중추부사가 되고 기사년(1689, 숙종15) 봄에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젊을 적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조정에 올라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는데, 평소 성품이 겸손한 데다 붕당을 이루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것을 싫어하여 항상 꼿꼿이 자신을 지켰다. 그리하여 당인(黨人)들과 겨루어 밀고 당기며 명론(名論)을 세워 중요 인사가 되려고 하지 않고, 오직 매일 문을 닫고 들어앉아 글을 볼 따름이었다. 그 때문에 통정대부 이상의 품계에서는 대부분 한산직(閑散職)에 처하였고, 아들이 부마(駙馬)가 되어서는 조정에서 더욱 겸손하게 처신하여, 조정의 정사와 당시의 논의에 관해서는 하나도 간여하는 일이 없었다.이때에 이르러 소인배들이 정권을 잡고 큰 옥사를 연달아 일으켰는데, 지의금부사인 공은 세 번을 불러도 나가지 않는 바람에 옥리(獄吏)에게 내려지고 삭직(削職)되었다. 4월에 상이 하교하여 중궁을 폐위하자 공은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는 네 임금의 후한 은혜를 받아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니,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지금 어찌 죄를 받아 버려졌다는 것을 핑계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글을 띄워 동지 몇 사람을 모아서 함께 상소하자고 논의하였다. 박공(朴公)도 명사들과 모여 이 일에 대해 의논하다가 공이 있는 곳을 듣고는 즉시 와서 참가하였다. 혹자가 염려하기를, “상소의 내용이 너무 준엄하면 이로움은 없고 해만 있을 것입니다.” 하자, 공은, “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죽음을 어찌 돌아볼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고 저녁이 되도록 비답이 내려지지 않자 여러 공들이 모두 궐 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때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파산(罷散) 중에 있기는 하나 그래도 외조정(外朝廷)이라고 할 수 있으니, 한 번의 소로 그칠 수는 없습니다. 기필코 청이 받아들여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자, 공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기를, “아마도 공의 말처럼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밤 2경에 상이 갑자기 보여(步輿)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와 정국(庭鞫)을 설치하라고 재촉하여 명하자, 유사들이 황급히 형틀을 준비하고 궐 내외가 크게 놀랐다. 공과 이공이 먼저 체포되어 들어가고 박공이 그 뒤를 이어 잡혀가자 좌우에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들 놀랍고 두려워 실색하였다. 공은 또 노병으로 몸이 야윈 상태라 사람들이 더욱 위태롭게 여겼으나 공의 동작을 보면 평상시와 다름없이 태연하였다. 당시에 상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조정 신하들은 빙 둘러서서 보면서 묵묵히 입을 다문 채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였고, 대사헌 목창명(睦昌明)은 공의 상소를 도리어 흉측한 것으로 지목하였다. 공은 이때에 문초를 받느라 숨이 거의 끊길 지경이었으나 말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이튿날 사형을 감하여 의주(義州)에 안치시키는 처분을 받고 옥을 나오자 서울의 사녀(士女)들이 시끌시끌 길을 메우고 앞 다투어 가마 앞으로 와서 충신의 면모를 보았다. 그리고 공이 별세하자 공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들 눈물을 흘렸다.공은 신장이 6척이 못되었고 얼굴 모습은 온화하며 입은 마치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같았는데, 하루아침에 변란을 당하자 충절을 세워 신하의 도리를 표방하고 인륜을 부지하였으니, 후손 백대에 전할 만한 분이다. 군자들은 이 일을 보고 공이 평소에 뭔가 지키는 것이 있었다고 믿는다. 상소하는 일을 논의할 때에 혹자는 공에게 처지가 다른 사람과 다르므로 소두(疏頭)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자제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간하였으나 공은 모두 물리치고 듣지 않았다. 세상에서는 간혹 공이 그저 벼슬이 높았기 때문에 앞 대열에 섰던 것뿐이라고 보기도 하니, 어찌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분발하여 스스로 그처럼 죽음을 각오했음을 알 수 있겠는가.공의 증조는 휘 정방(定邦)으로,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를 지냈다. 광해(光海)가 모후(母后)를 폐위하려 할 적에 백관을 위협하여 조정의 논의를 끌어내려 하자, 그가 광해와 대면하여 말하기를, “신은 무부(武夫)라서 《사략(史畧)》 제1권의 ‘순 임금이 끊임없이 선(善)으로 자신을 다스려 어버이로 하여금 간악한 데에 이르지 않게 하였다.’는 한 구절만 읽었습니다.” 하니, 듣는 사람들이 장하게 여겼다.공의 조고는 휘 사겸(士謙)으로, 종친부 전적을 지냈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효성으로 이름이 났다. 천파공(天坡公)은 휘 숙(䎘)으로, 벼슬이 경상 감사에 이르렀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는데, 문장과 정사로 이름이 났으나 젊은 나이에 별세하여 재능이 다 쓰이지 못하였다. 비(妣)는 증 정경부인(貞敬夫人) 고성 이씨(固城李氏)로, 병조 참판 휘 성길(成吉)의 딸이다. 공은 사실 천파공의 아우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 증 이조 판서 휘 상(翔)의 아들인데, 이 부인(李夫人)이 아들이 없어 데려다가 후사로 삼은 것이다.공은 모두 세 번 장가를 들었는데,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판서 성휘(聖徽)의 딸이고, 원주 김씨(原州金氏)는 학생 숭문(崇文)의 딸로 이들은 모두 정경부인에 추증되었고, 상주 황씨(尙州黃氏)는 부사 연(埏)의 딸로 정경부인에 봉작되었다. 5남 6녀를 두었다. 생원으로 재주와 덕행이 있었으나 일찍 죽은 아들 관주(觀周)와 군수 남택하(南宅夏)에게 시집간 딸은 민씨 소생이다. 직장(直長)인 아들 정주(鼎周)와 시집가기 전에 요절한 딸은 김씨 소생이다. 아들 태주(泰周), 진주(晉周), 이주(履周)와 현감 김창열(金昌說), 수찬 최창대(崔昌大), 김영행(金令行), 이재(李縡) 등에게 시집간 딸들은 황씨 소생이다. 남택하는 진사 도규(道揆)와 도진(道振) 등 2남과 민승수(閔承洙)에게 출가한 딸 하나를 두었다. 김창열은 2남 2녀를 두었고, 김영행은 2녀를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공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었고 효성이 돈독하여 대부인(大夫人)을 모시는 50년 동안 조금도 대부인의 뜻을 거스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늙어서는 중부(仲父) 지사공(知事公)을 섬기되 예절을 매우 잘 갖추었다. 공은 평생 가산에 대해 묻지 않았고 뇌물을 받지 않았으며, 집안에 기식(寄食)하는 일가친척이 늘 10여 인에 이르렀고 관직의 규율을 엄격히 지켜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운 일을 청탁하지 못하였다. 공은 늘 국조(國朝)의 전고(典故)와 선배들의 좋은 일을 이야기하길 좋아하였는데, 듣는 사람들은 피곤한 줄도 모른 채 듣곤 하였다.공은 5월 7일에 별세하여 그해 7월 9일에 양성(陽城) 천덕산(天德山)에 있는 선영 안의 손향(巽向 남동향)의 언덕에 묻혔다. 나 창협은 어려서는 공을 알지 못하다가 공이 별세한 뒤에 비로소 딸을 공의 아들 진주(晉周)에게 시집보냈다. 지금 도위공(都尉公)이 묘 앞에 비석을 세우려고 하면서 나에게 이르기를, “평소에 당신이 사람들에게 묘지명을 써 주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일가에 대해서까지 모두 거절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제 아우가 당신의 사위이므로 감히 그 인연을 빙자하여 청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창협은 누차 사양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여 삼가 서문을 쓰고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예로부터 사람을 관찰할 때는 / 惟古觀人반드시 말년 절개 살펴보았네 / 必觀末節선비들이 평소에 지낼 적에는 / 士方平居의기 높지 않은 자 어디 있으랴 / 罔不揭揭허나 변고 갑자기 앞에 닥치면 / 變故臨之지조를 지키는 자 드물고말고 / 鮮能自立공 오직 공손하고 진실했기에 / 公惟恂恂내면의 마음가짐 굳게 지키어 / 內篤操執자랑도 겉치레도 하지를 않고 / 不矜不飾세상길 앞 다투어 아니 달리며 / 不競而馳물러나 겸손하게 지내노라니 / 退然而居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없었네 / 衆莫之知그러나 의를 떨쳐 일어날 적엔 / 及其奮義저 옛날 맹분(孟賁) 전저(專諸) 무색했으니 / 勇奪賁諸세우고자 한 의리 무엇이었나 / 其義伊何국모의 바른 자리 부지함일레 / 坤極之扶조정 안에 가득한 많은 신하들 / 有臣盈庭나라의 화 오히려 다행스러워 / 幸國之禍바로잡지 아니하고 조장을 하니 / 匪匡伊助불에다가 기름을 붓는 격이라 / 如膏於火공은 그 불길 속에 뛰어들어가 / 公犯其焰죽음으로 충절을 세움으로써 / 以死易忠사람 도리 인륜을 높이 드러내 / 揭是彝常저 간흉 무리들을 징계하였네 / 懲彼奸凶이리하여 나라가 유지되었고 / 國與有立하늘 이치 마침내 아니 어긋나 / 理罔終忒성상께서 옛 잘못 뉘우치시자 / 宸心悔悟태양이 찬란하여 세상이 밝듯 / 如日斯爀꿩 그림 왕비 옷이 환히 빛나고 / 煌煌褕翟우리 중궁 위의를 되찾았다네 / 復我壼儀왕께서 감탄하여 이르시기를 / 王曰噫歟내 마음에 충신을 잊지 못하니 / 忠臣予思무엇을 줘야 하나 / 何以贈之상공의 벼슬이요 / 上公之尊어떻게 표창할꼬 / 何以旌之정려문을 세워야지 / 棹楔于門추후에 내린 은전 크게 갖춰져 / 追典大備영광이 구천까지 미쳐갔다네 / 榮施九幽흐른 세월 얼마인고 / 自初幾時목성 운행 반 바퀴라 / 木行半周그 누가 말했는가 밝은 천도는 / 孰云皓天천추에 틀림없이 돌아온다고 / 必千秋反충신이 되려는 자 / 有欲爲忠마땅히 분발하리 / 尙宜知勉적성의 언덕 위에 / 豐碑屹屹큰 비석이 우뚝하니 / 赤城之岡시 짓고 깊이 새겨 / 作詩深刻길이길이 전하노라 / 用昭無疆[주-D001] 흐른 …… 바퀴라 : 오두인(吳斗寅)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다 죽은 1689년부터 갑술정변이 일어나 그가 신원된 1694년까지 햇수로 6년이 지났다는 말이다. 목성은 12년에 천체를 한 바퀴 돈다고 한다.
    2022-05-06 | NO.72
  •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 이장영
    덕촌집 제10권 / 비장(碑狀)-죽곡 묘지명〔竹谷墓誌銘〕옛날 중종 때 호남에 죽곡(竹谷) 이 선생 형제가 있었다. 덕행(德行)과 문장(文章)으로 일세 유림의 긍식(矜式)이 되었으나, 매양 낭서(郞署)와 주군(州郡)을 전전하다가 끝내 그 뜻과 공업을 밝은 시대에 펼치지 못하고 은둔하다가 세상을 떠나 길이 당세에 애석해 하는 바 되었고 후인들이 송모(誦慕)하는 바 되었다. 지금 선생이 작고하신 지 백여 년이 되어가고 병란을 겪은 나머지 집에 소장된 문적(文籍)이 거의 다 산실되었다. 지난번에 선생의 5세손 병(苪)이 유당(幽堂)에 묘지가 없어 세월이 오래될수록 징험할 길이 없음을 매우 두렵게 여겨 용암(龍庵) 처사 박공 태구(台耈)가 쓴 행장을 가지고 내게 와서 묘지명을 간청하므로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선생 형제는 실로 우리 집안의 선대와 정의가 매우 두터워 이미 그 유풍(流風)을 익숙히 듣고 있었다. 이에 감히 그 행장을 보고 사실을 차례로 서술하였다.삼가 살펴보니 선생의 휘는 장영(長榮), 자는 수경(壽卿), 세계(世系)는 함풍(咸豐)에서 나왔다. 고려 광종(光宗) 때 상호군(上護軍) 언(彦)이 바로 비조(鼻祖)이며 5세를 지나 휘 광봉(光逢)은 벽상삼중좌명(壁上三重佐命)에 책훈(策勳)되고 함풍군(咸豐君)에 봉해져 자손은 이로 인하여 관향을 삼아 대대로 벼슬하였다. 또 6세를 지나 휘 희림(煕林)에 이르러 본조에 들어와 청주 판관(淸州判官)이 되었는데 선생의 5세조이다. 고조의 휘는 유(瑈)로, 경복궁 제거(景福宮提擧)였고, 증조의 휘는 안(岸)으로 참봉(參奉)을 지냈으며, 조부 계형(桂亨)은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하였고, 아버지 석(碩)은 생원(生員)이었다. 어머니는 나주 나씨(羅州羅氏)인 진사 윤(贇)의 딸이다. 선생의 형제는 7명으로, 장남 대영(大榮)은 문재(文才)가 있었으나 일찍 작고하고, 차남 백영(百榮)은 참봉, 그 다음은 천영(千榮)으로 생원, 그 다음은 만영(萬榮)으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시(臺侍)를 역임하였고 호는 죽음(竹陰)이며, 그 다음 억영(億榮)은 진사이고, 그 다음은 조영(兆榮)으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고, 형제 중 막내가 바로 선생이다.선생은 나주(羅州) 죽곡(竹谷)에서 태어나 이로 인하여 호를 죽곡(竹谷)이라 하였다. 이에 세상에서는 죽음(竹陰)과 죽곡 두 선생을 난형난제(難兄難弟)라 칭하였다. 선생은 정덕(正德) 신사년(1521, 중종16) 11월 30일에 태어났다. 나이 20세인 가정(嘉靖) 경자년(1540, 중종35)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고 무오년(1558, 명종13)에 명경(明經)으로 을과(乙科)에 발탁되었다. 경신년(1560, 명종15)에는 승문원에 선발되어 들어가 정자(正字)가 되었고, 신유년(1561, 명종16)에 북평사(北評事)에 제수되었으나 모부인이 연로하여 사직하고 돌아와 뵈었고, 임술년(1562, 명종17)에는 모친의 봉양을 위하여 수령으로 나가기를 청하여 함평(咸平) 현감(縣監)에 제수되었다. 계해년(癸亥年)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여묘(廬墓)살이 하였고, 정묘년(丁卯年)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 무진년(戊辰年)에는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에 제수되고, 기사년(己巳年)에는 장흥 부사(長興府使)로 제수되었다가 임기가 차서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되었으며, 임오년(壬午年)에는 함평 군수(咸陽郡守)로 제수되고 갑신년(甲申年)에는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제수되었으며, 을유년(乙酉年) 관직을 버리고 귀가(歸家)하였다. 병술년(丙戌年)에는 중시(重試)에 장원으로 발탁되어 전례에 따라 통정(通政)의 품계를 더해주고 승정원 우부승지(承政院右副承旨)에 제수되었다. 정해년(丁亥年)에는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에 제수되었으며, 무자년(戊子年)에는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다. 기축년(1589, 선조22) 4월 21일 관직에 있을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9세였다.대개 조정에 계신 지 32년 동안 내외직을 역임한 이력이 마땅히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나 오직 남아있는 교지(敎旨)에 의거하여 그 경개(梗槩)를 볼 수 있는 것이 이와 같을 뿐이다. 생원공(生員公)은 타고난 자질이 매우 높아 이미 성균관에 올랐으나 과거 공부를 폐하고 학문 탐구에 전념하여 예학(禮學)을 강명(講明)하고 자제들을 가르침에 한결같이 옳은 방도로 하였다. 모부인 나씨(羅氏)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후원(後園)에 세 개의 작은 서재를 나란히 두고 자제들을 나누어 거처하게 하면서 경학(經學)을 과업(課業)으로 하였다.하루는 선생 형제가 앞개울에 나가 목욕을 하고 돌아와서 잡은 물고기를 드리니 모부인이 좋아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물고기는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고, 물리치고 회초리로 쳤으니 그 가법(家法)의 바름과 교도(敎導)의 엄함이 이와 같았다. 선생은 이미 예법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서 훈도에 젖어 습관이 본성과 더불어 이루어졌고 타고난 자질이 수연(粹然)하고 총명함이 남달라 막 말을 배울 때에 이미 스스로 말을 뱉으면 문장이 이루어졌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왕발(王勃)이라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효는 지성(至性)에서 나와서, 8세에 부친의 상을 당하여 능히 몸을 상할 정도로 슬퍼하고 정성을 다하였으니 대개 나이는 아직 성동(成童)이 되지 않았으나 문행(文行)이 병진(並進)하여 또래들이 따르고 복종하였다. 방백(方伯)이 그 명성을 듣고 본읍을 순행하다가 그 집을 방문하여 그 행동거지가 공순(恭順)하고 응대함이 예절에 맞아 엄연히 노숙한 성인과 같음을 보고 크게 칭탄(稱歎)하며 신동(神童)이라 지목하여 이로부터 성예(聲譽)가 더욱 파다하였다. 매일 새벽이면 모부인의 안부를 살피고 나와서는 서실로 나아가 종일 단정히 앉아 우러러 생각하고 고개 숙여 책을 읽되 힘써 노력하여 게으름을 잊었으니, 대개 일찍부터 양지(養志)의 효에서 스스로 터득하고 덕과 학문을 갈고 닦는 방도에 실제로 힘을 쓴 것이다.성품는 본래 담박(淡泊)하여 사물에 대하여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옛 서적을 탐독하기를 맛있는 음식이 입을 즐겁게 하는 것처럼 하였다. 평생 질병이나 사고가 아니면 일찍이 잠시라도 흘려보내지 않고 깊이 사색하고 탐구하느라 혹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모르기까지 하였다. 비록 관직에 있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때라도 조금의 여가가 있으면 그때마다 책상을 대하여 송독(誦讀)하였다. 역학(易學)에 더욱 정밀하여 상수(象數)의 변화와 소장(消長)의 운행을 연구하여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초연히 밝고 드넓은 근원을 홀로 보았고, 여사로 익힌 문장은 전중(典重)ㆍ온아(溫雅)하여 우뚝하게 일대의 통유(通儒)가 되었다. 일시의 선류(善類)들이 추중(推重)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조남명(曺南冥)ㆍ유미암(柳眉巖)ㆍ기고봉(奇高峯)ㆍ오덕계(吳德溪)ㆍ양송천(梁松川) 등 여러 선생들이 서로 따르며 강마(講劘)하여 늙도록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연원(淵源)과 이택(麗澤)의 성대함이 이와 같았다.성품이 꼿꼿하여 세상과 어울리지 않고 도(道)와 더불어 이웃하여 즐기며 근심을 잊고 단표누공(簞瓢屢空)의 상황에서도 대처함이 태연하였다. 전후로 역임하였던 주읍(州邑)은 웅부(雄府)와 대읍(大邑)이 아닌 경우가 없었으나 집에는 조금의 양식도 없었고 상자에는 여벌의 옷이 없었다. 평생의 저술은 겨우 시문(詩文) 각 수십 편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필법은 또 힘이 굳세어 고인의 경지에 핍진하였으나 전해진 것은 더욱 많지 않다.아, 이것은 모두 여러 명현가(名賢家)에 대대로 전해진 말과 본군(本郡)의 선행록(善行錄)에서 근근이 주워 모은 것이다. 언론과 사업은 그 상세함을 알 수 없지만 그 입심(立心)과 제행(制行)에 대해서는 그 본말을 볼 수 있다. 계해년 여묘살이 하던 시절에 원근에서 학문에 뜻을 둔 선비들이 모여들어 수업을 청하니 선생은 과업을 엄히 하여 가르치고 차근차근 잘 이끌어주었다. 또 학계(學誡)를 써서 일깨웠으니 대략 이르기를, “크게는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도이며, 세세하게는 일사일물(一事一物)의 은미함이 모두 내 마음 속에 갖춰지지 않음이 없으니, 곧 《대학》에서 말한 명덕(明德)이며, 《중용》에서 말한 천명(天命)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한 가지라도 혹 은미한 중에 삼가지 않으면 한 터럭만큼의 차이가 끝내 천 리나 어그러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부자(程夫子)가 말한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는 그 요체가 다만 근독(謹獨)에 있다는 뜻이니 그 말의 뜻을 완미(玩味)하면 그것이 깊은 경지에 나아가 스스로 터득한 나머지에서 나온 것이며 전인(前人)의 말을 도습(蹈襲)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함양(咸陽)을 다스릴 때 방백(方伯)이 그 평가에 쓰기를, “청백은 백이(伯夷)와 같다.”고 하였고, 성주(星州)를 다스릴 때는 “추호도 어김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전례를 따라 칭찬하여 등한(等閑)하게 품평한 것이 아니었다.또 제봉(霽峯) 고 선생(高先生)이 그 장례에 지은 만사에 이르기를, “문자는 장산공(藏山公)의 후세요, 아손(兒孫)에게 남은 재물을 기탁할 곳이 없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덕에 훈도되었던 이 생애 어찌 그런 날이 다시 올까, 노산(魯山)의 용모는 그림으로 그리기 어렵네.”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또한 그 마음으로 기뻐하여 진심으로 복종하는 뜻을 볼 수 있다. 이 몇 가지 일로 논하면 바로 이른바 한 점의 고기로 솥 안의 고기 전부의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며, 봉의 깃털 하나로 오색의 갖춤을 안다는 것이니, 또한 족히 이것으로 후세에게 믿음을 주어 의심이 없을 것이다.부인은 해주 오씨(海州吳氏)로 습독(習讀) 윤필(允弼)의 딸이며, 병조 참지(兵曹參知) 보(堡)의 손녀이다. 선생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영광(靈光) 오개산(筽開山) □향의 자리에 부장(祔葬)하였다.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곤(琨), 차남은 유(瑜), 그 다음은 선(璇)과 진(瑨)이다. 맏딸은 현감 정운룡(鄭雲龍)에게 출가하고, 둘째 딸은 생원 김경일(金敬一)에게 출가하였다. 곤은 아들이 둘인데 장남은 홍심(弘諶), 차남은 홍겸(弘謙)이다. 유는 3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 홍순(弘詢)은 생원이고, 차남은 홍의(弘誼), 막내는 홍원(弘謜)이다. 첫째딸은 이형(李逈)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딸은 생원 송후옥(宋後玉)에게 출가하였다. 선은 아들이 둘인데, 홍기(弘記)와 홍식(弘識)이다. 진은 자식이 없어서 홍원을 후사로 삼았다. 정운룡은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성일(聖一), 첫째 사위는 군수 정홍록(丁弘祿)이고 둘째 사위는 김극순(金克純)이다. 김경일은 1남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기갑(奇甲)이며 딸은 김정길(金鼎吉)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증현손(內外曾玄孫)이 몇 백 명 된다. 선생에게는 젊은 첩이 있었는데, 선생이 세상을 떠난 후 정신자수(貞信自守)하였다. 국상을 만나 이에 말하기를, “첩은 일찍이 대부(大夫)를 섬겨 늠록(廩祿)을 외람되이 먹었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소복(素服)과 소식(素食)으로 석 달을 마쳤다. 측실에서 둔 딸이 하나 있는데 또 절행(節行)으로 정려(㫌閭)를 하사받았다. 이것으로 선생이 집안을 다스리는 일단을 볼 수 있을 것이다.다음과 같이 명(銘)한다.“행(行)을 근본으로 삼고, 문(文)은 화려한 외식으로 여겼으며, 위(位)는 덕에 어울리지 않았으니, 하늘이 하는 것을 어찌할까. 높은 산과 큰 길과 같으니 불후(不朽)함이 이미 많았다. 오직 이 좋은 언덕의 진택(眞宅)은 길이 후인들의 찬탄을 받으리라.”[주-D001] 옳은 방도 : 의방(義方)은 일을 행함에 응당 준수해야 할 규범과 도리를 말한다. 《춘추좌씨전》은공(隱公) 3년 기사에 “석작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신이 듣건대 ‘아들을 사랑함에는 바른 길을 가르치어 나쁜 데로 들지 않게 하는 것이다.’고 합니다.〔石碏諫曰 臣聞愛子教之以義方 弗納於邪〕”라고 하였다.[주-D002] 습관이 …… 이루어졌고 : 《서경》 〈태갑 상(太甲上)〉에 “이 의롭지 못함은 습관이 본성과 더불어 이루어진 것이니, 나는 의리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가까이 하지 않겠다.〔茲乃不義 習與性成 予弗狎于弗順〕”라고 하였다.[주-D003] 왕발(王勃) : 650~676. 중국 당나라 초기의 시인으로, 자는 자안(子安)이다. 수나라 말의 유학자 왕통(王通)의 손자이다. 6세 때부터 문장을 짓는데 뛰어났으며, 9세 때에는 안사고(顔師古)가 주를 단 《한서(漢書)》를 읽고 그 오류를 지적하였다고 한다. 양형(楊炯)ㆍ노조린(盧照隣)ㆍ낙빈왕(駱賓王)과 함께 초당사걸(初唐四傑)로 일컬어진다. 저서로 《왕자안집(王子安集)》이 있다.[주-D004]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 인심(因心)은 마음에서 우러나와 억지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시경》 〈황의(皇矣)〉에 “이 왕계가 마음으로부터 우애하시다.〔維此王季 因心則友〕”라고 하였다.[주-D005] 양지(養志) : 부모를 봉양함에 그 뜻에 순종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효를 행한다는 말이다.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증자와 같이 하면 뜻을 봉양한다고 이를 만하다. 어버이 섬김을 증자와 같이 해야 한다.〔若曾子 則可謂養志也 事親若曾子者 可也〕”라고 하였다.[주-D006] 옛 서적을 : 분전(墳典)은 삼분오전(三墳五典)으로, 고대 전적을 통칭하는 말이다.[주-D007] 맛있는 …… 것 : 추환(芻豢)은 소ㆍ양ㆍ돼지 따위의 가축으로, 육류 식품을 두루 이른다.《맹자》 〈고자 상(告子上)〉에 “이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마치 고기 음식이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口〕”라고 하였다.[주-D008] 상수(象數) : 《주역》의 상(象)과 수(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천(天)ㆍ일(日)ㆍ산(山)ㆍ택(澤) 등을 상이라 하고, 초(初)ㆍ상(上)ㆍ구(九)ㆍ육(六) 등을 수라 한다. 《춘추좌씨전》희공(僖公) 15년 기사에, “거북점은 형상으로 길흉을 나타내고 시초점은 수로 나타낸다. 만물이 생겨난 뒤에 형상이 있고, 형상이 있은 뒤에 점점 많아지고, 많아진 이후에 수가 있게 되었다.〔龜 象也 筮 數也 物生而後有象 象而後有滋 滋而後有數〕”라고 하였다.[주-D009] 통유(通儒) : 고금에 통달하여 학식이 깊고 넓은 유자를 말한다.[주-D010] 조남명(曺南冥) : 조식(曺植, 1501~1572)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健中), 호는 남명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구하여 대학자로 추앙받았으며 벼슬을 거절하고 은둔하며 학문에만 힘썼다. 그의 문하에서 정구(鄭逑)ㆍ정인홍(鄭仁弘)ㆍ곽재우(郭再祐) 등이 배출되었다. 대사간에 추증되고, 1615년(광해군7) 영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진주의 덕천서원(德川書院), 김해의 신산서원(新山書院), 삼가의 용암서원(龍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남명집》ㆍ《남명학기유편(南冥學記類編)》 등이 있다.[주-D011] 유미암(柳眉巖) : 유희춘(柳希春, 1513~1577)으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중(仁仲), 호는 미암이다. 경전에 널리 통했고 제자(諸子)와 역사에도 능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전라도 관찰사, 대사헌, 형조ㆍ예조ㆍ공조ㆍ이조 참판 등 청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의암서원(義巖書院), 무장의 충현사(忠賢祠), 종성의 종산서원(鍾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미암집》ㆍ《속몽구(續蒙求)》ㆍ《주자어류전해(朱子語類箋解)》 등이 있다.[주-D012] 기고봉(奇高峯) : 기대승(奇大升, 1527~1572)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ㆍ존재(存齋)이다. 이황과의 서신 교환을 통하여 사칠논변(四七論辨)을 전개하였다. 성균관 대사성, 대사간, 공조 참의를 역임하였다. 광주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 되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저서로는 《고봉집》ㆍ《논사록(論思錄)》ㆍ《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 등이 있다.[주-D013] 오덕계(吳德溪) : 오건(吳健, 1521~1574)으로,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강(子强), 호는 덕계이다. 조식이 덕산동(德山洞)에서 강론하자 문인으로 수학했으며, 이황도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함을 칭찬하였다. 정언, 교리, 이조 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산천의 서계서원(西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덕계문집》ㆍ《정묘일기(丁卯日記)》 등이 있다.[주-D014] 양송천(梁松川) : 양응정(梁應鼎, 1519~1581)으로,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이다.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공조 좌랑, 진주 목사, 공조 참판,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송천집》ㆍ《용성창수록(龍城唱酬錄)》 등이 있다.[주-D015] 이택(麗澤) : 두 못이 서로 붙어 있어 서로 불어나는 것처럼, 붕우 간에 서로 절차탁마한다는 말이다. 《주역》 〈태괘(兌卦) 상(象)〉에 “못이 연결된 것이 태이니 군자가 그 이치를 살펴 붕우들과 강습한다.〔麗澤兌 君子以朋友講習〕”라고 하였다.[주-D016] 단표누공(簞瓢屢空) : 《논어》 〈옹야(雍也)〉에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추한 시골에 사는 것을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디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이 변치 않으니 어질구나, 안회여.〔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라고 하였다. 《논어》 〈선진(先進)〉에 “안회는 도에 가까웠으나, 자주 끼니를 굶었다.〔回也其庶乎 屢空〕”라고 하였다.[주-D017] 제행(制行) : 도덕에 맞는 행위. 도덕과 행위의 준칙을 규정한다는 말이다. 《예기》 〈표기(表記)〉에 “성인이 백성들의 행동을 제어함에 자기가 능한 바로써 하지 않고, 백성으로 하여금 권면하고 부끄러워하는 바가 있게 하여 그 말을 행하게 한다.〔聖人之制行也 不制以己 使民有所勸勉愧恥 以行其言〕”라고 하였다.[주-D018] 한 …… 된다 : 《예기》 〈경해(經解)〉에 “역에 이르기를 ‘군자는 처음을 삼가야 하니, 처음에 호리의 차이가 나면 어그러지는 것은 천 리가 된다.’고 하였다.〔易曰 君子愼始 差若毫釐 繆以千里〕”라고 하였다.[주-D019] 노산(魯山) : 노산은 당나라 때 노산 영(魯山令)을 지낸 원덕수(元德秀, 696~754)를 말한다. 자는 자지(紫芝)이며 하남(河南) 사람이다. 사람됨이 청결하고 순박하며 청빈하게 삶을 살았다. 만년에 육혼산(陸渾山)에 은거하다 세상을 떠났다.[주-D020] 마음으로 …… 복종하는 :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기뻐하여 진실로 복종하는 것이니, 70제자가 공자에게 심복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以德服人者 中心悅而誠服也 如七十子之服孔子也〕”라고 하였다.[주-D021] 한 …… 있다 : 《회남자(淮南子)》 〈설림훈(說林訓)〉에 “한 점의 고기를 맛보면 솥 안의 고기 전부의 맛을 알 수 있다.〔嘗一臠肉而知一鑊之味〕”라고 하였다.[주-D022] 봉의 …… 안다 : 《주자어류(朱子語類)》 권48에 “봉의 깃털 하나만 보면 그 오색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觀鳳一羽 則知五色之備〕”라고 하였다.[주-D023] 높은 …… 길 : 《시경》 〈거할(車舝)〉에 “높은 산을 바라보며 큰 길을 가는구나.〔高山仰止 景行行止〕”라고 하였다.[주-D024] 진택(眞宅) : 사람이 죽은 뒤에 돌아가는 진정한 집이라는 말이다.
    2023-12-04 | NO.71
  •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 - 상촌선생집 제28권
    도원수 권공 신도비명(都元帥權公神道碑銘) - 상촌선생집 제28권 :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1628) 증 효충장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자헌대부 의정부우참찬 팔도도원수 권공(權公)의 묘도에 비석이 갖추어지자 우의정 신흠은 말을 다듬어 다음과 같이 새긴다.공이 적을 쳐부순 공적은 간이(簡易) 최공 입(崔公岦)이 행주(幸州)의 비석에다 기록하였고 공의 아름다운 사적은 공의 사위 오성 상국(鰲城相國) 이공 항복(李公恒福)이 묘지(墓誌)에다 기록하였으므로 더 이상 추가할 것은 없겠으나, 옛날의 제도를 상고해 볼 때 공과 같이 위대한 분에 대해서는 신도비명을 짓는 것이 합당하니 마땅히 대로변에 세워 후세 사람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는가. 공의 휘는 율(慄), 자는 언신(彦愼)이다. 시조는 행(幸)으로 신라의 종성(宗姓)인데 견훤(甄萱)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고려 태조가 권씨 성을 하사하고 안동(安東)에다 봉해주어 그대로 본관이 되었다. 13대를 내려와 부(溥)는 정승을 지내고 수복(壽福)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한 가문에서 군(君)에 봉해진 자가 아홉 사람이나 되었다. 3대를 지나 근(近)은 벼슬이 찬성인데 곧 공의 6대조이다. 증조 교(僑)는 양근군수(楊根郡守)이고 조부 적(勣)은 강화 부사(江華府使)이고 선조 철(轍)은 의정부 영의정을 지냈는데 네 조정을 내리섬겨 태평 시대의 재상이 되었다. 선비 조씨(曹氏)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승현(承睍)의 따님으로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 익청(益淸)의 후손이다.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에 공을 낳았는데 공은 어릴 적에 소꿉놀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장성해서도 부귀 자제의 호사를 즐기는 버릇이 없자 의정공이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인재가 나왔다.” 하였다. 경학(經學)을 열심히 공부하였으나 어릴 적에 불운하여 과거에 급제를 못하다가 만력 임오년(1582, 선조15)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당시 나이는 46세로서 식자들 중에는 혹 장상(將相)의 그릇임을 아는 자도 있었다. 승문원의 정자ㆍ저작ㆍ박사로부터 성균관 전적으로 오른 뒤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호조 정랑, 전라도사(全羅道事),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옮겼다. 신묘년에 다시 호조 정랑에 제수되고 승진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임진년 봄에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그해 여름에 일본 괴수 수길(秀吉)이 우리나라를 정복할 심산으로 수가(秀嘉)와 행장(行長)등을 위시한 60만 대군을 보내 침략을 감행하여 온 나라가 안절부절 혼란에 빠졌다.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권율의 재주는 시험해 볼 만하다 하였다.” 하고,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제수하니, 공은 그날로 임금을 하직하였다. 적이 문경 새재를 넘어 충주(忠州)를 함몰시키고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 전사하였다. 적이 승승장구하여 경성에 바싹 다가오자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하였다. 전라도 관찰사 이광(李洸)이 충청도 관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 관찰사 김수(金睟)와 함께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진위(振威)에 당도하여 장수들에게 계책을 묻자, 공이 말하기를 “주공(主公)께서 온 지방의 군사들을 다 쓸어 거느리고 왔으니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렸습니다. 이제 마땅히 대군을 거느리고 곧장 수원(水原)으로 가 통진(通津)을 거쳐서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臨津)을 차단하고 행재소에서 왕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 세력을 얻어 큰 공을 꾀할 수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광은 그 말을 따르지 않아 적의 꼴을 보기도 전에 무너지고 말았다.공은 광주(光州)로 돌아가 의기에 넘쳐 말하기를 “종묘사직이 폐허가 되고 주상께서 파천한 마당에 신하된 자로서 어찌 나라가 망하는 것을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 하고, 주변의 고을에 격문을 돌려 군사 1천 5백 명을 모아 이치(梨峙)로 나아가 진을 치고 양남(兩南)의 목을 쥐었다. 영남의 적이 금산(錦山)의 적과 힘을 합쳐 공격해오자 공은 장검을 빼들고 뛰쳐나가 앞장서서 적의 칼날과 대항하니, 제장(諸將)이 서로 말하기를 “유자(儒者)도 이럴 수있단 말인가.” 하고, 사기가 백배하여 그들을 산기슭에서 무찔렀다.조정에서는 공에게 거진(巨鎭)을 맡겨볼 생각으로 가을에 벼슬을 옮겨 나주(羅州)를 지키게 하였다가 임소에 부임하기 전에 승진시켜 전라관찰사 겸 순찰사를 제수하니, 공은 명을 받고 통곡하였다. 전주(全州)에서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아 1만 명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올라갈 계책을 세우고서 수원(水原) 독성(禿城)을 점거, 근거지로 삼아 경성의 적을 위협하고 곧장 서로(西路)를 노리자 수가(秀嘉)는 빈틈을 찔릴까 두려워하고 행장(行長)은 후방을 공격받을까 염려하였으니, 마치 제방이 물을 막는 것처럼 앉아서 관서의 인심을 결집시켰다. 선묘께서는 상방검(尙方劍)을 풀어 보내주며 이르기를 “장수들 가운데 군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것으로 처단하라.” 하고, 또 여러 진영의 의병을 전부 공의 통솔을 받도록 하였다. 경성의 적은 공의 위세에 눌려 예봉이 꺾였으며 수만 명의 군사를 출동하여 세 진영으로 짜 계속 싸움을 걸었으나 공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응전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기병(奇兵)을 내보내 무찔렀다.계사년에 독성으로부터 양천(陽川)으로 진영을 옮기고 군사를 나누어 각 지방을 지원하였으며, 곧장 양천강(陽川江)을 건너 성 서쪽 안현(鞍峴)으로 나아가 진을 치려고 하였으나 제장들이 극력 반대하여 고양(高陽) 행주산(幸州山)에 진을 쳤다. 경성의 적은 이때 세력이 한창 불어났는데 공이 적은 군사로 깊이 들어간 것을 보고 2월 12일에 그들의 정병을 전부 동원하여 두 길로 나누어서 밤중에 행주성을 공격해왔다. 공이 일어나 내려다 보니, 적의 총칼이 온 들판을 뒤덮고 성을 몇 겹으로 포의한 상황이었다. 공은 즉시 사졸들에게 주먹밥을 돌려 먹게 한 뒤에 활을 잘 쏘는 자를 뽑아 성가퀴에 배치시켜 화살을 빗발처럼 쏟아붓고 또 힘센 사람을 뽑아 돌을 던져 내리치며 뒤이어 차자화(車子火)를 쏘았다.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적은 아홉 번 진격해 들어왔다가 아홉 번 퇴각하였다. 급기야는 적이 풀단[束草] 가지고 불을 지르며 크게 소리치면서 성을 올라오자, 공은 상방검을 뽑아들고 서서 장수들을 독려하니 장수들이 앞을 다투어 접전하여 적이 마침내 물러갔다. 적의 장졸은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군수 물자를 버려두고 도망갔으며 적의 머리 1백 30여 급을 거두어 베었다.조정에 승전보가 들어가자 특지로 자헌대부에 가자하고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황조의 유격대장 사대수(査大受)가 찾아와 공을 보고 감탄하기를 “외국에도 진짜 장수가 있구나.” 하였으며,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은 이자(移咨)하여 칭찬하기를 “권 포정(權佈政)은 국난 속의 충신이요 중흥을 이룩한 명장이라 이를 만하다.” 하고, 채단과 백금 등 물품을 상으로 주었다. 병부 상서 석성(石星)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배신(陪臣) 권율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막강한 적과 대항하였다.” 하였고, 천자도 가상히 여겨 말하기를 “전라도에서 적을 참획한 수효가 많아 그 나라의 인민이 그런대로 진작될 수 있었다.” 하였다.공은 행주의 적을 무찌른 뒤에 진영을 파주(坡州)로 옮겼다. 파주는 곧 서쪽으로 뻗은 큰길이 있어 적이 꺼려하였다. 다시 행주에서의 패배를 갚기 위해 피를 뽑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공을 공격하려 계획하였다가 끝내 감히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갔다. 4월에 경성의 적이 도망갈 때 공은 경무장한 군사로 그 뒤를 추격하려 했는데 때마침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계책을 써 적의 퇴각을 추진하는 중이라서 공으로 하여금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게 하였다.6월에 제도 도원수(諸道都元帥)로 제배되어 영남에 머물러 있다가 겨울에 형조 판서가 되고 의정부 우참찬으로 전임되었다. 갑오년 봄에 신병으로 사직을 청하니, 선묘께서 염려한 나머지 의원을 잇달아 내보냈다. 무사 하나가 전장에 나가는 것을 피해 전주(全州)에 숨어 있으므로 공이 그를 참수하였는데 체찰사가 그 가족의 하소연을 곧이듣고 공을 문책할 것을 청하여 파직되자, 웃으며 말하기를 “몇 년 동안 장수로 있던 내가 군법으로 병졸 하나를 참수할 수 없단 말인가.” 하고서, 모든 일을 사절하고 고향 강화(江華)로 돌아갔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한성 판윤(漢城判尹), 호조 판서, 지의금부사에 제수되고 비변사 당상관을 겸임하였다. 어전에 입시하였을 때 선묘께서 하교하기를 “경이 아니었더라면 국가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하고,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병신년에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는데 선묘께서 다시 특명으로 도원수를 삼고 이르기를 “경은 충성과 공로가 크게 드러나고 용맹과 지략이 세상에 뛰어나 이름이 천하에 자자하고 위세가 적국을 떨게 하였으니, 경을 놓아두고 원수의 직책을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하였다. 조정을 하직할 때 임금은 공을 불러 접견하고 술을 내려 마음을 달래줬으며 또다시 내구마를 하사하였다.7월에 호서(湖西)의 사인(士人) 이몽학(李夢鶴)이 모반하여 다섯 고을을 잇달아 함몰시키자 조정에서 공에게 그들을 토벌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군사를 거느리고 급히 달려가 보니 적은 이미 홍주(洪州)에서 잡혀 죽은 뒤였는데, 그 도당의 죄를 다스리고 억울한 자는 재심하는 일을 매우 분명히 하여 호서 지방이 안정을 되찾았다.겨울에 일본에서 돌아온 우리나라 사람이, 청정(淸正)이 재차 침략하려 한다고 말을 전하여 조야가 술렁거리자 공은 말하기를 “설사 청정이 다시 쳐들어온다 하더라도 그에 대처할 방도가 있게 마련인데 머리를 맞대고서 걱정만 하고 있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고 진영을 나누어 배치하여 적을 제압할 계책을 상주하였다. 정유년 가을에 과연 다시 침입하여 진주(晉州)와 남원(南原)을 함몰시키고 곧장 경기로 향해 올라오자 공은 일변 싸우고 일변 행군을 하면서 적의 수급을 베어 조정에 보고하였다. 그러다가 임금의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들어갔는데 공의 힘에 의해 한강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조정으로 돌아온 그 이튿날 중국의 장관(將官) 팽우덕(彭友德)과 한강을 도로 건너가 직산(稷山)에서 접전하여 크게 무찔렀다.겨울에 중국이 대군을 출동하여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경리(經理) 양호(楊鎬)를 보내 울산(蔚山)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공은 본국의 토병을 거느리고 선봉에 서서 맨 앞에 돌진하며 뒤처진 자를 참수하여 조리돌리자, 모든 군사가 사기 충천하여 적의 성벽을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올라가 그 외성(外城)을 함락하니, 제독과 경리가 입을 모아 칭찬하였다. 무술년 봄에 신병으로 면직을 청하자 선묘께서 위로하는 말로 달래주고 애써 만류하였다. 중국이 병부 상서 형개(邢玠)를 보내 세 제독을 독려하여 길을 나누어서 적을 칠 때 공은 유정(劉綎)을 따라 순천(順天)의 적을 공격하였는데, 유정은 심중에 싸울 뜻이 없어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으므로 공이 여러 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적들은 수군도독(水軍都督) 진인(陳璘)에게 대패하고 또 그들의 괴수 수길이 죽었기 때문에 각도의 적이 모두 철수하여 돌아갔다.기해년(1599, 선조32) 여름에 공은 병세가 위독해져 사직하니 선묘께서 윤허하여 체직되었으며 7월 6일에 마침내 일어나지 못했으니, 향년 62세였다. 선묘는 크게 슬퍼하여 조회를 일시 중지하고 부의를 많이 내렸으며 관원을 보내 치제하고 찬성을 증직할 것을 명하였다. 9월에 양주(楊州) 홍복산(洪福山) 술좌(戌坐)의 자리에 장사지냈는데 선영이 있는 곳이다. 이듬해 을사년에 논공(論功)할 때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영의정과 부원군에 추증되었다.공의 전부인은 창녕 조씨(昌寧曹氏)로 첨정(僉正) 휘원(輝遠)의 따님인데 따뜻하고 정중하며 부드럽고 후덕하여 내간의 규범이 있었다. 향년 24세에 별세하고 정경부인에 추증되었으며 딸 하나를 두었는데 곧 오성공(鰲城公)의 부인이다. 2남 1녀를 낳아 장남은 성남(星男)이고 차남은 정남(井男)인데 다 음직으로 벼슬하여 군수가 되었으며, 딸은 윤인옥(尹仁沃)에게 시집갔다. 성남은 처음에 판서 권징(權徵)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뒤에 주부 김계남(金繼男)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4녀를 낳았으며, 정남은 승지 윤의(尹顗)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고, 윤인옥은 1남 1녀를 낳았다. 후부인 박씨(朴氏)는 죽산(竹山) 거족으로 현령 세형(世炯)의 따님인데 총명하고 자애로워 법도를 지켰으며 시어머니와 공을 잘 받들어 일체 뜻을 어기는 일이 없었다. 공이 별세한 뒤에는 미망인으로 자처하고 명절과 세시(歲時)의 제사를 예법대로 하지 않은 일이 없었으며, 이따금 의복을 지어 제물을 차리고서 태워드렸다. 공보다 10년 뒤에 별세하였으니 무신년 2월이었으며 향년은 62세였고 정경부인에 봉해졌다. 4월에 공의 묘역에 부장(祔葬)하였다.아들이 없어 공은 중씨(仲氏)의 아들 익경(益慶)을 데려다가 후사로 삼았는데 익경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현감이 되었다. 처음에 이광륜(李光輪)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아 집(㠎)은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고, 다음은 입(岦)과 업(嶪)이며, 뒤에 이정(李淨)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아 아들은 헌(巘)이고 딸은 이도기(李道基)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집은 2남 1녀를 두고, 업은 1남을 두고, 도기는 1남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공은 팔척 장신으로 용모가 준수하였으며 풍채가 엄중하고 행실이 충직하였다. 부모 형제에 대해서는 유쾌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너그러웠는가 하면 초상 때 슬퍼하고 제사 때 정성을 드리는 것이 한결같이 진정으로부터 우러나왔으며, 종족을 잘 대우하여 모두에게 환심을 얻었다. 천성이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집안에 귀한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주밀하고 신중히 처리하여 하는 일마다 반드시 만전을 기하였다. 적진과 대치하고 있을 때는 언행이 여유만만하였으며, 원수의 깃발을 세우고 원수부를 열고서는 재차 진영을 총괄할 때는 사졸의 선봉이 되어 위험을 무릅썼고 호령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장사(將士)가 잘 따라주어 계책이 행해지고 공이 뒤따랐다. 큰 적을 섬멸하여 적은 군사로 수많은 적을 대적한 것은 옛날의 명장이라도 미치지 못할 정도였다. 황조의 상서 석성(石星)은 우리나라의 사자를 만나 공의 안부를 물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나라에 권공과 같은 사람이 몇 명만 더 있다면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하였으며, 왜인도 우리나라 사람을 보면 반드시 권 원수는 지금 어디에 계시냐고 물었으니, 중국과 오랑캐가 다같이 이처럼 탄복하였다. 군중에 있을때 손수 성지(聖旨) 및 천조의 자문과 게첩을 베끼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 의정(李議政 이항복을 말함)이 반드시 내 묘지명을 지을 것인데 그 자료는 이것이면 충분하다.” 하였다. 큰 짐을 벗은 뒤에는 고향 강화도에 집 한 칸을 짓고 만취헌(晩翠軒)이라 자호하였으니, 은연중 자신의 뜻을 가탁한 것이다.아, 흠은 공이 원수로 계실 때 막좌(幕佐)로 있었는데 우경(虞卿)의 백벽(白璧) 같은 사랑을 받았으나 중랑(中郞)의 황견(黃絹) 같은 문장이 없다. 삼가 공에 대해 일찍이 평하기를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龍虎)가 변화무쌍하다는 말이 공에게 적격이다. 분양(汾陽)의 공을 이루고서도 중서(中書)의 벼슬을 하지 못하고 진공(晉公)의 덕을 지니고서도 녹야(綠野)의 낙을 누리지 못했으니 이 점이 한탄스럽다. 충절을 지키며 심신을 다 바쳐 한 몸에 나라의 안위를 짊어지고 단서(丹書) 철권(鐵券)에 이름이 올라 그 명성이 영원히 전해지는 점에 있어서는 충분히 저 두 공과 짝을 이룰 만하다.” 하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지난 과거 임진년에 / 若昔壬辰미련한 저 생물들이 / 蠢彼介鱗흉한 마음 지니고서 / 鞠頑裒兇침략하여 미쳐 뛰니 / 奔突跳躑무찌를 자 누구인가 / 孰獮孰剔널린 것이 적들일레 / 遍我箕封우리 임금 하문하길 / 惟上曰咨아군을 뉘 지휘할꼬 / 疇董我師적임자 곧 그대로다 / 繄爾其才공은 중책 받고나서 / 公膺其重조선 팔도 총괄하니 / 八路是總꺼진 재에 불붙었네 / 再燃于灰행주에서 적을 이겨 / 熸之于幸큰 세력을 깨부수며 / 大鋤其梗직산 울산 누비었고 / 于稷于蔚좌우 수륙 거침없이 / 左水右陸목을 잡고 등때리니 / 扼項批脊우릴 감히 넘볼쏘냐 / 莫我敢越북두 다시 높아지고 / 斗極更恢황도 또한 트였으니 / 黃道褰開이는 공의 업적이요 / 伊公之烈사람 모두 동조하고 / 人謀畢凝신도 재능 인정하니 / 鬼神與能이는 공의 계책이요 / 伊公之籌밝디 밝은 위광에다 / 赫赫厥靈높디 높은 명성이란 / 巍巍其名바로 공의 경사이고 / 伊公之休까마득히 솟은 산과 / 有山嶻峛헌거롭게 놓인 비석 / 有碑嵽嵲바로 공의 무덤일세 / 伊公之藏나는 공의 막좌로서 / 公有幕佐공의 사적 선양하여 / 載揚載播무덤 앞에 새긴다오 / 銘于墓陽[주-D001] 우경(虞卿)의 …… 없다 : 상촌 자신이 권율 생전에 권율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인정을 받았으나 권율이 작고하여 그 비문을 짓는 지금 평생의 사적을 훌륭하게 묘사할 문장을 지니지 못했다는 것임. 전국 시대 변설가 우경이 미천한 신분으로 조 효성왕(趙孝成王)을 유세하자, 왕은 한번 만나보고 황금 백 근과 백벽 한 쌍을 하사하였다고 함. 황견은 색사(色絲)로 절(絶)자의 은어임. 한 나라 채옹(蔡邕)이 효녀 조아(曹娥)의 비문을 잘 지어 어떤 사람이 그 비문을 읽고 비석 뒷면에 ‘황견유부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齏臼)’라고 기록해 두었는데 재사(才士)인 조조(曹操)의 주부(主簿) 양수(楊修)에 의해 그곳이 ‘절묘호사(絶妙好辭)’의 은어임이 밝혀졌음.《史記 卷76 虞卿傳》《世說新語 捷悟》[주-D002] 높은 산 …… 말 : 《五百家注昌黎文集 卷33 唐故殿中少監 馬君 墓誌》에 “그 당시에 장무왕(莊武王 성명은 마수(馬燧))을 북정(北亭)에서 만났는데 마치 높은 산 깊은 숲에 용호가 변화무쌍한 듯하였으니, 걸출한 인물이었다.” 하였음.[주-D003] 분양(汾陽)의 …… 못하고 : 분양은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장 곽자의(郭子儀)의 봉호. 삭방절도사(蒴方節度使)로 안록산(安祿山)과 사사명(史思明)의 난리를 평정하였고 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의 잦은 침입을 막아 20여 년간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으며, 벼슬이 중서령(中書令)에 이르고 분양군왕(汾陽郡王)에 봉해졌다. 권율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보전한 공이 곽자의의 그것에 비해 손색이 없는데도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는 것임. 《新唐書 卷137 郭子儀傳》[주-D004] 진공(晉公) …… 못했으니 : 진공은 당 헌종(唐憲宗) 때의 재상 배도(裵度)의 봉호. 회주(淮州)ㆍ채주(蔡州)가 조정에 반기를 들었을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각군을 지휘해 진군하여 채주 자사(蔡州刺史) 오원제(吳元濟)를 사로잡아 그 공으로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지고 재상이 되었으나 항상 겸손하였다. 문종(文宗) 때 동도 유수(東都留守)가 되어 녹야당(綠野堂)이란 별장을 세우고 백거이(白居易)ㆍ유우석(劉禹錫) 등 명사들과 즐겁게 나날을 보냈음.《新唐書 卷173 裵度傳》
    2020-09-21 | NO.70
  •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묘표〔墓表〕 [이민서(李敏敍)]동강(東江) 신공(申公)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이다. 계보는 고려 장절공(壯節公) 숭겸(崇謙)에게서 나왔다. 신씨(申氏)는 처음에 곡성(谷城)을 본적으로 삼았는데 장절공부터 평산(平山)으로 옮겼다.6대조 효(曉)는 우정언(右正言)을 지냈는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물러나 행주(幸州)에 은거하여 서호산인(西湖散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 고조 휘 세경(世卿)은 명망과 덕행이 있었는데 관직은 사직서 영에 그쳤다. 증조 휘 영(瑛)은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으며 시호는 이간(夷簡)이다. 조부 휘 승서(承緖)는 문장과 덕행이 있었으나 단명하였다. 관직은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에 그쳤는데, 훗날 공의 선친 문정공(文貞公)이 귀하게 되자 규례대로 추은(推恩)하여 증직되었다.문정공 휘 흠(欽)은 문장과 덕업으로 세상에 이름난 재상이 되어 인조(仁祖)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절도사 제신(濟臣)의 따님으로,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8월 3일에 공을 낳았다.공은 자질이 돈후하고 기운이 순수하여 어려서부터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겨우 10세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이 문정공의 자리 곁에 있는 공을 보고서 평범한 아이와 다르다고 칭찬하였다. 공 역시 이때부터 더욱 힘써 평소 반드시 몸가짐을 바로하고 강독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한번은 〈태극도(太極圖)〉의 두 번째 동그라미를 보고,“이것은 음(陰) 가운데 양(陽)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는 것이다.”하니, 문정공이 대단히 기특하게 여겼다. 조금 성장하자 여러 책을 널리 섭렵하고 문장을 지었다. 당시 세상이 갈수록 어지러워져 공은 과거를 단념하고 한가하게 지내면서 더욱 학업을 닦았다.병인년(1626, 인조4) 가을, 별시에 급제하였는데 대간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논핵하여 파방(罷榜)하자 공론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하였다.병자년(1636), 천거를 받아 참봉에 의망되었다. 예전에 공이 상소를 올려 장릉(章陵) 추숭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이 공의 지난 일로 진노하여 이조(吏曹)를 문책하였다. 당시 이조 판서였던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공에게 문재와 식견이 있다고 대답하였다. 겨울에 다시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이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이듬해 가을에 비로소 창방(唱榜)하여 승문원을 거쳐 추천을 받아 사국에 들어갔다.무인년(1638), 전적에 오르고 차례로 정언, 병조 좌랑, 지평에 임명되었다. 당시 큰 난리를 겪고 겨우 안정을 찾았는데 소인배가 이 틈을 타서 청음 김공을 거꾸러뜨리고자 자기편을 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축출하였다. 인사권을 쥔 자가 몰래 그 논의를 주도하였는데 그가 끌어들여 기용한 자는 대부분 교활하고 간사한 사람들이었다. 공이 처음 대각에 들어가자 제일 먼저 전조가 거리낌없이 사심을 따르는 실상을 논열하니 사론이 통쾌하게 여겼다.곧 옥당에 들어가 수찬이 되었다. 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驛卒)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병으로 죽었다. 전관(銓官)의 당파에 속한 헌관(憲官)이 중상모략할 의도로 탄핵하여 심리를 받게 되었으나 진상을 조사해 보니 사실이 아니므로 주상이 용서하라고 명하였다.기묘년(1639), 교리에 임명되어 지제교를 겸하고 헌납으로 옮겼다. 겨울에 서장관이 되어 금지한 물품을 사사로이 소지한 자를 대대적으로 수색하여 처벌하니 일행이 모두 숙연해졌다. 사행의 일에 주상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었으므로 심리에 회부되어 도배(徒配)를 당했다가 이내 풀려났다.신사년(1641), 문학이 되었다. 겨울에 전관이 지난날의 유감 때문에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에 보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공이 평소 이계(李烓)가 간사하다고 말하였는데, 이계가 변방 수령으로 있다가 청나라에 구속되자 우리나라의 비밀을 말해주고 살 길을 찾으려 하였다. 그래서 재신(宰臣) 5, 6명이 명나라를 보존하려는 뜻을 품고 있다고 무고하여 공의 형제와 여러 공들이 모두 심양으로 잡혀갔는데, 앞으로의 화를 예측할 수 없었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계미년(1643) 봄, 비로소 돌아왔다. 그 뒤 계속 옥당에 있으면서 응교로 승진하였으며, 사인, 사간, 겸필선을 역임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자 궁료(宮僚)들과 함께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으며, 원묘(園墓)의 일을 처리한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겨울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는데 공은 외직이야말로 역량을 발휘하여 공헌할 수 있다고 여겨 누락된 군액을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채웠으며, 저축을 확대하고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며 유생들에게 강학을 권하니 온 경내가 잘 다스려졌다.무자년(1648), 체차되어 돌아와서 형조, 예조, 병조의 참의를 역임하였다.기축년(1649), 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쓰고 가선대부로 가자되었다. 승정원에서는 동부승지에서 도승지까지 지냈다.경인년(1650, 효종1), 부사로 청나라에 갔다. 그간 호조, 예조, 형조의 참판 및 한성부 좌윤과 우윤에 임명된 것이 두세 번에 이르기도 하였고, 금오와 총관을 겸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신묘년(1651), 《인조실록(仁祖實錄)》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여름에 개성 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었다. 개성은 서로(西路)의 요충지에 있는데, 오랑캐 사신이 오면 요구하는 것이 다른 고을보다 갑절이나 되어 백성이 감당하지 못하였다. 공은 누적된 포흠을 탕감해 주고 밑천을 빌려주어 백성을 넉넉하게 해 주었다.돈이 쌓여 제때 유통되지 않아 백성이 몹시 고통스럽게 여기자 공은 세금으로 돈을 받아 쌓인 돈을 흩었다. 녹봉 외에는 관청의 물품을 하나도 손대지 않으니 몇 개월 만에 쌓이고 남아서 백성의 요역을 여러차례 대신하였다. 그리고 송사를 부지런히 판결하여 적체된 문서를 모두 없애니 백성이 몹시 기뻐하였다. 공이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돌아가게 되자 백성이 조정에 천금을 바치면서 유임시켜 달라고 청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비석에 사모하는 마음을 새겼다.이후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임명되자 오로지 청정(淸靜)하기를 힘썼는데,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다. 몇 년 동안 한직에서 한가롭게 지내다가 다시 개성 유수가 되었는데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고을 백성이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영접하였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더욱 잘 다스려졌으므로 공이 개성에 선정을 베푼 것이 유독 많았다.병신년(1656), 체차되어 돌아왔다.기해년(1659), 효종대왕의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에 올랐다. 공은 평소 병에 걸려 허약했는데, 국상을 당해 놀라고 애통해하며 소식(素食)하느라 더욱 초췌해졌다.경자년(1660, 현종1) 봄, 주상에게 환후가 있어 공은 대궐에 유숙하면서 문안하였는데, 귀가해서 감기에 걸려 2월 27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56세이다. 훗날 자녀들이 귀해지고 공신이 되어 여러 차례 추증을 받아 영의정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 갑신일에 충주(忠州) 중방리(中房里) 유좌(酉坐)의 언덕에 안장했다.부인 조씨(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딸이다. 14세에 공에게 시집왔는데 단정하고 순결하여 옛적 어진 여인의 지조가 있었다. 공을 섬기면서 절도를 어기지 않았고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 법도가 있었다. 또 성품이 현명하고 감식안이 있어 온 집안 부녀자들이 모두 본받았다. 공이 세상을 떠나자 슬퍼하다가 몸을 상하여 신축년(1661, 현종2) 7월 24일에 뒤따라 돌아가셨다. 양주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무신년(1668) 8월에 공과 합장하였다.공은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다. 장남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 판서를 지냈다. 차남 섬(暹)은 빙고 별검을 지냈다. 삼남은 창(㫤)이다. 사남 엽(曅)은 문과에 급제하여 응교를 지냈다. 오남 앙(昂)은 요절했다.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 차녀는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삼녀는 사인(士人)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 서출 아들 하나가 있는데 온(昷)이다.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다. 장남은 징화(徵華)이다. 차남 서화(瑞華)는 현감을 지냈다. 삼남 계화(啓華)는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를 지냈다. 장녀는 요절했고, 차녀는 참봉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6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진화(鎭華), 상화(尙華), 석화(錫華), 택화(宅華), 종화(從華), 우화(遇華)이다. 딸은 사인 이익하(李翊夏)와 진사 홍중익(洪重益)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다. 장남은 지화(志華), 차남은 처화(處華), 삼남은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섬의 아들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2녀를 낳았다. 아들은 채화(采華)이며, 딸은 사인 홍중성(洪重聖)에게 출가했고 나머지는 어리다. 이혜는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희유(喜濡)이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낳았다. 장남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杭)이고 차남은 어리다. 딸은 사인 윤세정(尹世鼎), 윤정호(尹廷虎), 안수정(安壽鼎), 조명봉(趙鳴鳳)에게 출가했다. 온은 5남 1녀를 두었다.징화는 좌윤 이상(李翔)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서화는 봉사 권회(權誨)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계화는 목사 이민장(李敏章)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3녀를 낳았다. 진화는 시정(寺正) 김수증(金壽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지화는 참의 유헌(兪櫶)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후사가 없다. 처화는 현감 송광순(宋光洵)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몽화는 유원(柳瑗)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희유는 서탄리(徐坦履)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동평군은 군수 박세장(朴世樟)의 딸에게 장가들어 딸 하나를 낳았다.공은 효도와 우애가 돈독하였다. 어려서부터 항상 문정공의 곁에 있으면서 공손하고 신중하였기에 문정공이 매양 효성스럽다고 칭찬하였다. 거상할 때 곡하고 울며 전(奠)을 올렸는데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형님 동양공을 섬기는 데 있어서 마치 문정공을 섬기는 것처럼 하여 매사를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막내 누이가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리자 당시 공은 이미 연로했는데도 날마다 가서 살펴보고 손수 약을 조제하였다.평소 몸가짐이 의젓하여 차근차근 법도를 따랐으며, 말을 삼가고 과묵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다. 외물에 욕심이 없어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어진 이와 간사한 이를 분별해야 할 때는 반드시 신중하였다. 관직을 맡았을 때는 조금도 물러나거나 피하지 않아 우뚝 솟은 산과 같았다. 항상 독서를 낙으로 삼아 퇴청하면 반드시 일과를 정해놓고 읽었다.평소 성품이 욕심없고 겸손하여 관직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이르기를,“전조(銓曹)가 인사권을 쥐고 있어서 권세를 좋아하고 관작을 탐하는 세상 사람들이 몰려간다.”하였다. 비단 자신이 피했을 뿐만 아니라 자제들에게도 훈계하였으므로 공의 두 아들도 그 경계를 삼가 지켜서 전조의 관직을 받을 때마다 선친의 훈계를 이유로 사양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이 스스로 지킨 원칙을 알 수 있다.공은 왕실과 인척을 맺었는데, 신묘년(1651, 효종2)의 옥사 때 화가 집안에 미치자 어느 곳이나 모두 지극히 위태로웠다. 그렇지만 공은 홀로 초연히 벗어나 사람들이 감히 터럭만큼도 공에게 조금도 누를 끼치지 못하여 마침내 스스로 명성을 지켰으니, 여기서 공의 충성과 신의가 평소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문장은 간결하고 자연히 규범에 맞아 어렸을 때 이미 문정공에게 칭찬을 받았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공과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모두 누차 칭찬하여,“관각(館閣)에 있어야 마땅하다.”하였다.세상의 대갓집 자제들을 보건대, 교만하면 낭패를 당하고 겸손하면 가문을 유지하는데 항상 그러하다. 공의 경우는 지조와 행실이 돈독하고 확고하니 원칙으로 세울 만하고, 절개를 지키고 겸손하였으니 퇴폐한 습속을 진작시킬 만하다. 문장과 행동은 대대로 지켜오던 것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나 지위가 그 덕에 걸맞지 않았다. 다 누리지 못한 것을 후손에게 영원히 물려줄 것이니 이 또한 도를 지녔던 옛사람에 가깝지 않겠는가.나는 공과 삼대에 걸친 우호가 있어 그런대로 공의 의리를 사모할 줄 알기에 마침내 그 유사(遺事)를 편차하여 묘표를 짓는다.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이민서가 짓다.[주-D001] 추은(推恩) : 관원의 선조에게 관직을 추증(追贈)하는 것을 말한다. 신승서는 아들 신흠이 1품 관원이자 선조조(宣祖朝)의 원종공신(原從功臣)이라는 이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象村稿 卷25 先府君墓表》[주-D002]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 구씨(具氏)의 능호(陵號)이다.[주-D003] 이계가 …… 잡혀갔는데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주-D004]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5] 양손을 이마에 얹고서 : 두 손을 이마에 대는 것〔加額〕은 상대방에게 경의를 표하거나 축원하는 의식의 하나이다.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이 낙양에 사는 15년 동안 입궐할 때마다 백성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공경스럽게 바라보면서 “이분이 사마 상공(司馬相公)이시다.”라고 하였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주-D006] 신묘년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2023-12-04 | NO.69
  •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 신익전
    동강유집 제18권 / 부록 2(附錄二)유명 조선국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춘추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신공 묘지명 병서 〔有明朝鮮國嘉義大夫禮曹參判兼同知義禁府春秋館事五衛都摠府副摠管申公墓誌銘 幷序〕 [김만기(金萬基)]인조조(仁祖朝)에 현헌(玄軒) 신 문정공(申文貞公)은 덕업과 문장으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는데, 그분의 두 아들이 가르침을 받고 미덕을 계승하여 가문의 명성을 떨쳤다. 막내아들 참판공은 조용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여 마침내 역경에 굴하지 않고 가주(家主)를 보호하였다고 한다.참판공의 휘는 익전(翊全), 자는 여만(汝萬), 자호(自號)는 동강(東江)이다. 시조 신숭겸(申崇謙)은 고려 태조를 도와 원훈(元勳)이 되어 평산(平山)을 본적으로 하사받았다. 그 후 본조(本朝 조선)에 들어와서 휘 효(曉)가 우정언을 지내고 용퇴(勇退)하였는데 조정에서 불러도 나아가지 않았다. 휘 세경(世卿)은 사직서 영을 지냈는데, 덕행으로 기묘 제현(己卯諸賢)에게 존중을 받았다. 이 분이 휘 영(瑛)을 낳았는데 의정부 우참찬을 지냈고 시호는 이간공(夷簡公)이다. 이 분이 휘 승서(承緖)를 낳았는데 개성부 도사(開城府都事)를 지냈다. 이 분이 휘 흠(欽)을 낳았는데 영의정을 지냈으니 바로 현헌 문정공이다.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청강(淸江) 선생 제신(濟臣)의 따님인데,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에 공을 낳았다.공은 어려서부터 온순하고 삼가서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학문을 배우자 문장에 대한 이해력이 날로 진전되어 겨우 10세를 넘겼을 때 주자(周子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를 보고 두 번째 동그라미를 가리키며,“이것은 양(陽) 가운데 음(陰)이 있고 음 가운데 양이 있는 것이다.”하니, 문정공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약관의 나이에 많은 책을 널리 섭렵하여 글재주가 뛰어났다.병인년(1626), 별시에 급제했는데 창방(唱榜)하기 전에 헌관(憲官)이 근거 없는 논의를 가지고 파방(罷榜)하니 사람들이 모두 공에 대해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오직 몸을 삼가고 학문을 닦는데 더욱 힘썼다.병자년(1636), 조정의 신하들에게 어진 선비를 천거하도록 명하였는데 천거하는 문서에 공의 이름이 올랐다. 당시 청음(淸陰) 김 문정공(金文正公)이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참봉의 첫 번째 후보자로 의망하였다. 그런데 주상께서 공이 예전 성균관에 있을 때 장릉(章陵)을 추숭(追崇)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상소하였다는 이유로 진노하여 김공을 문책하자, 김공은 문재(文才)와 식견으로는 후배들 중에서 얻기 어려운 인재라고 대답하였다.이해 다시 과거에 급제하고 이듬해 승문원에 보임되었으며, 곧 사국에 들어가 규례대로 봉교로 전임되고 성균관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사간원 정언, 병조 좌랑에 누차 임명되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다.이때 청음 김공이 간신들의 시기를 받아 심한 중상모략을 당하였다. 인사권을 장악한 자가 그 논의를 주도하고 기회를 틈타 독단하여 조금이라도 정도를 지키는 선비는 모두 배척하고 자기편 사람을 기용하는 데 혈안이 되어 친척조차 버젓이 피혐(避嫌)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기세에 눌려 감히 말하지 못했지만 공은 사은숙배하는 날에 즉시 전관(銓官)이 거리낌없이 사정(私情)을 따르는 실상을 탄핵하자 주상이 가납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인사를 담당하는 자리가 점점 깨끗해지고 공론이 다시 시행되었으니 공은 참으로 군자와 소인이 나아가고 물러나는 데 기여한 것이다. 체차되어 전적에 임명되었다가 옥당에 들어가 부수찬이 되었다.공이 병조에 있을 때 한 역졸에게 장(杖)을 쳤는데 오랜 뒤에 그가 다른 병으로 죽었다. 이때 전관에게 붙은 헌관이 공에게 앙심을 품고 중상하였는데 심리에 부쳐 진상을 조사하자 결백이 밝혀져 주상이 온전히 석방하라고 특명을 내렸다. 패초에 나아가지 않아 파직되었다가 서용되어 직강에 임명되었다. 교리, 헌납, 수찬, 부교리를 두루 거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갔는데 당시는 겨우 난리를 겪은 뒤라 국법이 무너져 사행을 수행하는 하례(下隷)들이 공공연히 금지 물품을 소지하여 왕왕 큰소리로 다투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공이 개인 소지품을 샅샅이 뒤져 범법자를 다스렸는데, 오랑캐 정명수(鄭命壽)와 사이가 가까운 역관이 자기 죄를 알고 노관(虜館)으로 달아나 나오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결박해 와서 처벌하니 일행이 두려워하며 숙연해졌다. 정명수가 깊은 원한을 품었지만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복명하고 나서 부사(副使)와 함께 심리를 받고 평구역(平丘驛)에 유배되었다. 이는 주상이 명을 내려 주선하게 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고, 세자가 돌아가 주상을 뵙는 것을 허락받았는데 사신이 왕명을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청했기 때문이라고 주상이 의심해서였다. 세자가 서울에 들어오자 즉시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서용되어 교리에 임명되고, 헌납을 거쳐 시강원 문학에 임명되었다.심양에 들어가게 되자, 조정에서 공이 정명수와 원한을 맺었다는 이유로 체차하도록 명하였다. 평소 공을 시기하던 자가 갑자기 이조에 들어갔는데 공을 배척하여 거산도 찰방(居山道察訪)으로 삼았지만 공은 조금도 표정이나 말로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임지로 가서 못가에 작은 집을 짓고 그곳에 거처하면서 글읽기를 그치지 않았다. 때때로 혼자 바닷가나 산골짜기에 가서 노래하고 읊조리며 스스로 즐겼다.임오년(1642), 청나라에 있던 적신(賊臣) 이계(李烓)가 공의 형제와 두세 재신(宰臣)이 명나라를 부지하려는 뜻을 품었다고 무고하였다. 그리하여 모두 심양관(瀋陽館)에 구류되어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공은 동요하지 않고 태연자약하였다. 다행히 세자가 구명해 준 덕분에 석방되었다. 이에 앞서 공이 이계와 시험장에 들어갔다가 그의 부정행위를 발견하고는 그와 말을 섞지 않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이 작자는 장차 못할 짓이 없을 것이다.”하니, 이계가 이 말을 듣고 앙심을 품었다. 공이 명을 받들고 심양에 갈 때 기자묘(箕子廟)에 들러 제사 지냈는데 강개한 말을 많이 하였다. 이계가 마침내 오랑캐에게 고자질하여 사지(死地)에 빠뜨리려 한 것이니, 사람들이 공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다시 옥당에 들어갔다가 천거를 받아 의정부 사인에 임명되고, 부응교, 사간으로 누차 옮기고 시강원 필선을 겸하였으며, 다시 사인에 임명되었다. 소현세자가 죽자 춘방의 동료들과 글을 올려 기년복을 입도록 청하였다. 묘소도감 도청(墓所都監都廳)으로 묘소의 일을 감독하고 일을 마치자 통정대부로 가자되었다.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가서는 외로운 충심으로 분발하여 누락된 군오(軍伍)를 보충하고 포흠(逋欠)난 환곡을 해결하였으며, 불필요한 비용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요역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학교를 정비하고 유생들을 시험하니 고을 사람들이 추모하여 비석을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체차되어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예조, 병조, 호조로 전임되었다. 중간에 다시 승정원에 들어가 차례대로 승진하여 우승지로 옮겼다.인조가 승하하자 시책문(諡冊文)을 써서 올려 가자를 받고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이때부터 기해년(1659, 효종10)까지 차례로 예조, 병조, 형조 등의 참판 및 한성부의 당상에 임명된 것이 많게는 서너 번이었고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된 것도 세 번이었으며, 조정에 들어와서 도총부와 금오의 직임을 겸임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경인년(1650, 효종1), 부사(副使)로 연경에 갔다. 돌아온 뒤에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인조실록》의 찬수에 참여하였다. 우윤을 지낼 적에 권세 있는 집안의 종이 법을 어기고는 숨어서 나오지 않는 일이 일어났는데, 공이 나졸을 풀어서 잡아 왔다. 그런데 중재하는 자가 공이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를 들어 위태로운 말로 충동질하였다. 공은 분개하여,“법관이 범법자를 다스리는데 어찌 혐의를 논하는가.”하고, 마침내 법대로 논죄하였다.송도 유수(松都留守)로 나갔는데, 백성이 청나라 사신의 요구로 고생하여 몹시 피폐한 데다 많은 폐단이 잇따라 생겼다. 공은 가장 먼저 노인들을 불러 고충을 물은 다음 완화하거나 없앴다. 그리고 호조의 동과 철을 지급해달라고 조정에 요청하여 시전 상인들의 밑천으로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비용을 충당하니,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모두 도움이 되었다.개성부는 공납이 과중했는데 요행으로 면제받는 자가 많았다. 그러자 공이 모두 적발하여 균등하게 부과하였다. 마침 조정에서 화폐 사용을 돌연 폐지하자 개성부로 돈이 모이기만 하고 쓸 곳이 없어 많은 상인들이 생업을 잃었다. 공이 조와 쌀을 내는 자에게 돈으로 대납하게 하니 백성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훗날까지 바꾸지 않고 법으로 삼고 있다.예로부터 고을 관원의 사적인 비용이 공납에서 지출되었는데, 공이 말하기를,“이 법이 어찌 사적인 수요를 위해 만든 제도이겠는가.”하고, 털끝만큼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창고가 가득차서 백성의 공납을 여러 번 감면해주었는데도 관청의 비용은 풍족하였다. 풍속이 이익을 다투고 소송을 좋아하여 고을 관원이 시비곡직을 혼동하고 송사가 적체되어 비방을 초래하였다. 그런데 공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소송 문서가 씻은 듯 사라지고 모두 실정에 맞으니 백성들이 칭송하여,“합하께서 재직하시는 동안에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을 요구할 수 없다.”하였다. 관직을 그만두고 돌아가게 되자 온 성의 백성이 수레를 붙잡고 차마 놓지 못하였으며, 비석에 새겨 떠난 분에 대한 그리움을 담았다.다시 힘써 외직을 구하여 밀양 부사(密陽府使)가 되었는데, 다스림이 청정하여 어지럽지 않았다. 날마다 고을의 자제들을 불러서 직접 가르치고, 읍내의 충신, 효자, 열녀들의 사적을 찾아서 새로 정표하고 그 후손들에게 양식을 지급하여 고을 백성을 진작하고 권면하였다. 그런데 관찰사가 친척이라는 이유로 피혐하여 체차되었다.을미년(1655), 다시 개성 유수로 부임하자 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모두 환영하였고, 공 또한 백성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선정이 더욱 현저하였는데 백성들이 지금까지 잊지 못하고 있다. 공의 자손이 개성부를 지나게 되면 백성들이 너도나도 만나보러 와서는 공이 재직할 때의 일을 말하는데 간혹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이듬해에 체차되어 돌아갔다. 효종이 승하하자 명을 받들어 애책문(哀冊文)을 쓰고 가의대부의 품계에 올랐다.공은 몇 년 전부터 이미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는데, 경자년(1660, 현종1) 봄에 주상이 편찮으시다는 소식을 듣고 병든 몸을 이끌고 대궐에 나아가 유숙하면서 하루에 세 번 문안하는 반열에 나아갔다. 이때부터 몸이 더욱 좋지 않았는데, 얼마 안 되어 감기에 걸려 2월 27일 자택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6세였다. 주상이 예법대로 조문하고 치제하며 부의하라고 명하였다. 처음에는 영평(永平) 거사동(居士洞)에 장사 지냈는데 묏자리가 좋지 않아 양주(楊州) 덕연(德淵) 가로 이장하였다가 무신년(1668) 8월에 충주(忠州) 관청 서쪽 앙암(仰巖) 중방동(中房洞) 묘향(卯向)에 안장하였다.공은 성품과 행실이 순수하고 돈독하였다. 문정공을 섬기면서 온화하고 기쁜 안색으로 뜻을 다르니, 문정공이 매양 칭찬하여,“우리 집안의 효자이다.”하였다. 거상할 때 몸이 수척해지자 보는 사람들이 측은하게 여겼지만 그럴수록 더욱 게을리 않고 예법을 지켰다. 제사 때는 마치 돌아가신 분을 뵐 듯이 오열하였으며, 간혹 지방으로 가서 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면 영위(靈位)를 설치하여 곡하였는데 늙어서까지 처음처럼 하였다. 효종의 대상(大喪) 때는 이미 연로하고 병들었는데도 6일 동안 죽을 먹고 몇 달 동안 소식(素食)을 했으며 선왕에 대해 언급하면 반드시 흐느끼며 눈물을 떨구었다.문정공을 섬기듯이 한결같이 형님 동양공(東陽公)을 섬겼는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여쭌 뒤에 하였으며 날마다 찾아 뵙고 유시(酉時)가 지난 뒤에 물러나왔다. 동양공의 상을 당하자 빈소 곁에서 거상하고 졸곡 뒤에야 돌아왔다.막내 누이가 중병에 걸려 일 년 내내 투병할 때는 날마다 몸소 보살피며 직접 약을 조제하였다. 어떤 사람이 노쇠한 나이에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만류하자 공이 말하기를,“내 형제자매가 여덟 명이었는데 누이만 살아 있다. 내가 어찌 차마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였다.공은 가정에서 훈도를 받아 평소 행동이 몹시 조심스러웠다. 예전 옥당에 입직하였을 때 설문청(薛文淸 설선(薛瑄))의 《독서록(讀書錄)》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이때부터 선유(先儒)들의 성리학 서적들을 모두 가져다가 집중하여 사색하였다. 특히 《주역》 읽기를 좋아하여,“이것보다 즐거운 것은 없다.”하였다. 독서하는 데 날마다 일정한 분량을 정해 두어 외물이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니, 집에 양식이 떨어져도 몰랐다. 낙정(樂靜) 조석윤(趙錫胤) 공이 항상 공경하며,“침착하고 고요하며 선을 좋아하기로는 아무 공만한 사람이 없다.”하였다. 온화하고 자애로와 남을 대할 적에는 그저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여 잘못을 저지른 자제가 있어도 꾸짖지 않고 차근차근 타일렀다. 그러나 벼슬하여 직무를 맡았을 때는 의지가 확고하여 꺾을 수 없었다.어린 나이에 글을 지어 문정공의 칭찬을 받았는데 노년에도 더욱 부지런히 힘써 시는 당(唐)나라 두보(杜甫)를 배우고 문은 반고(班固)와 한유(韓愈)를 본받았으며 간간이 명(明)나라 대가들의 글을 참고하였는데, 오랫동안 힘을 기울여 조예가 깊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수창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문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었다. 다만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상국(相國) 홍서봉(洪瑞鳳)은 대단히 칭찬하였는데, 이공이 한번은 동양공(東陽公)에게 말하기를,“아우님의 문장으로 말하자면 기력은 비록 공보다 조금 못하지만 전아하기로는 더 나은 듯하오.”하였다. 서법도 단정하고 굳세어 옛사람의 필법을 터득하였는데, 조정의 전례에 관련된 책문과 이름난 인물들의 묘도문자는 대부분 공이 썼다.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국구(國舅)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 창원(昌遠)의 따님이자 지돈녕부사 소민공(昭敏公) 존성(存性)의 손녀이다. 단정하고 정숙하여 어려서부터 법도를 따르니 소민공이 어질다고 칭찬하며 다른 손자들보다 특별히 사랑하였다. 공의 집안에 시집와서는 정성을 다하고 예의를 갖추어 시부모를 받드니, 문정공이 항상 훌륭한 며느리라고 칭찬하였다.공이 조정에 벼슬하여 현달한 뒤에도 더욱 청렴하고 검약하여 가산을 불리는 일을 하지 않았다. 부인은 가난한 상황에서 힘써 가정을 꾸려나갔는데 살림에 법도가 있어 공으로 하여금 가정 형편이 어떠한지 모르게 하였다. 성품이 검소하여 화려하고 사치스런 물건을 몸에 걸치지 않았으며 사양하고 받는 일을 조심하여 터럭만큼도 구차하지 않았다. 감식안이 있고 사리에 통달하여 공이 미덕을 이루도록 도운 일이 많았다.자의대비(慈懿大妃)가 중전이 되고 부인의 딸이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시집가자 부인은 더욱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극히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알아서 잘 처리하였다. 미망인이 되어서는 졸곡한 뒤에도 묽은 죽만 들었으며, 아침저녁으로 올리는 제전(祭奠)은 반드시 손수 차렸다. 슬픔으로 몸을 상하고 고생하다 병이 나서 공이 돌아가신 이듬해 7월에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이다. 공의 무덤에 부장(祔葬)하였다.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정(晸)은 문과에 급제하고 병조 참판을 지냈다. 섬(暹)은 진사에 급제하고 빙고 별검을 지냈다. 창(㫤)은 요절했다. 엽(曅)은 진사시에 장원급제했다. 앙(昂)은 장가들기 전에 요절했다. 딸 셋을 두었는데, 장녀는 대사간 이혜(李嵇)에게 시집갔고, 둘째 딸은 바로 숭선군의 부인이며, 셋째 딸은 선비 윤지빈(尹之贇)에게 출가했다.정은 먼저 교리 심희세(沈煕世)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징화(徵華), 서화(瑞華), 진사 계화(啓華)이다. 딸은 사인(士人) 이석형(李碩亨)에게 출가했다. 나중에 판관 허섬(許暹)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4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화(鎭華)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섬은 현감 유성오(柳誠吾)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지화(志華)는 요절했고, 다음은 처화(處華), 몽화(夢華)이다. 창은 시정(寺正) 이선(李䆄)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자식이 없어서 처화를 후사로 삼았다. 엽은 생원 임후(任垕)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이혜는 희유(喜濡)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요절했다. 숭선군은 2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동평군(東平君) 이항(李杭)이고 딸은 선비 윤세정(尹世鼎)에게 시집갔으며 나머지는 어리다.나는 예전에 선배와 어른들에게 다음과 같이 들었다. 공은 문정공을 아버지로, 동양위를 형으로 두었으니 그 가문이 든든한 배경이 될 만하였고, 훌륭한 재주도 남보다 뛰어났다. 하지만 도리어 겸손하여 이런 배경을 믿지 않았기에 과시하는 자들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사기까지 했지만 이 역시 개의치 않았다. 권세를 추종하고 출세하는 데 안달하는 사람을 보면 반드시 이마를 찡그렸으며, 요직을 맡더라도 항상 핑계를 대고 물러날 생각만 하였다.인조 말엽에 조정의 논의가 갈라지자 더욱 조정에 있고 싶지 않아 외직을 구하여 광주 목사에 보임되었는데,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次陶淵明歸去來辭〕〉라는 글에가장 좋은 것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고 / 太上避世그 다음은 땅을 피하는 것이다 / 其次避地하였으니, 그 말에 깊은 뜻이 있었다. 광주에서 돌아온 뒤에는 세상이 더욱 험악해지고 공의 처지가 더욱 위태로워 말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다. 이에 두문불출하여 사람들과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으며 항상 괄낭지계(括囊之戒)를 지켰다.신묘년(1651, 효종2), 역적의 옥사가 일어나자 공의 일가에게까지 화가 미쳤지만 오직 공은 평소 사람들에게 충성스럽고 미덥기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초연히 비방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명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상국 정태화(鄭太和)가 지은 공의 만시(輓詩)에위태로운 처지에서 몸과 명예를 보존하고 / 身名自保危疑地공손과 신중이 결국 복록의 바탕이 되었네 / 恭謹終爲福祿基하였는데, 사람들이 공에 대해 잘 말하였다고 하였다.옛날 우리 선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이 적소(謫所)에 있는 문정공을 방문하였을 때 공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열 살의 나이에 어른처럼 응대하자 우리 문원공께서 감탄하고 기특하게 여겨 훗날 큰 인물이 되리라 기대하였다. 우리 종대부(從大父) 문경공(文敬公 김집(金集))이 효묘(孝廟 효종) 초에 어떤 사람의 말 때문에 조정을 떠나게 되었는데, 태학의 유생들이 주상께 글을 올려 만류하도록 청하였다. 그때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었는데, 공이 말하기를,“선군께서 예전에 ‘사강(士剛 김집)은 군자다운 사람이다’라고 하셨다. 군자다운 사람을 만류하도록 청하는 일이 옳지 않겠는가.”하고, 자제들에게 가서 참여하라고 명하였다.나는 공의 행실을 행실을 흠모하였으며 또 소싯적에 공에게 한마디 칭찬을 받은 적이 있다. 지금 공의 아들이 와서 묘지명을 청하는데 감히 글재주가 없다는 이유로 사양할 수 있겠는가. 마침내 선배들에게 들은 것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몸은 옷을 이기지 못하는 듯 유약하였고 / 退然身若不勝衣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 듯 어눌하였네 / 吶吶然言若不出諸口옛날에 그런 사람 있었는데 / 蓋古有其人공이 실로 옛사람 벗하였네 / 而公實尙友저 아첨하는 소인들은 / 彼夸毗子앞다투어 너도나도 달리지만 / 爭騖竝驟수레바퀴 부서진 적 없다가 / 曾不敝輪곧바로 기울어 전복된다네 / 旋卽傾踣공은 겸손한 덕에 힘써 / 公懋謙德홀로 하늘의 도움을 받아 / 獨受其祐명성 지켜 생을 마치고 / 旣克令終자손도 많이 두었다네 / 而孫子多有내가 공의 묘지명을 써서 / 我銘公之藏후세에 알리노라 / 維以詔後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김만기가 짓다.[주-D001] 두 아들 : 장남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차남 신익전(申翊全)을 가리킨다.[주-D002] 기묘 제현(己卯諸賢) : 기묘사화 때 희생을 당한 조광조 등 신진 사류를 가리킨다. 1519년(중종14)에 유교의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다 남곤(南袞), 심정(沈貞)을 위시한 훈구 대신 일파에 의해 뜻이 좌절되어 참화를 입은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신진 학자이자 정치가를 통틀어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하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정통 성리학의 계승자로 일컬어지고 있다.[주-D003] 장릉(章陵) : 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생부인 원종(元宗)과 그의 부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의 능호(陵號)이다.[주-D004] 오랑캐 정명수(鄭命壽) : 오랑캐에게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한 정명수(鄭命壽, ?~1653)를 폄하하여 ‘정로(鄭虜)’라고 한 것이다. 평안도 은산(殷山)에서 태어난 천인 출신이다.[주-D005] 노관(虜館) : 청나라 사신이 머무는 객관(客館)을 가리킨다.[주-D006] 임오년 …… 무고하였다 : 1641년(인조19) 이계가 선천 부사(宣川府使)로 있을 때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의주에 구금되었다. 청나라 장군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을 받고 처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그는 최명길(崔鳴吉), 이경여(李敬輿), 신익성(申翊聖), 이명한(李明漢) 등이 명나라와 밀통한다고 무고하였다.[주-D007] 경인년 …… 갔다 : 당시 저자는 의순공주(義順公主)의 호행 부사(護行副使)로 연경에 갔다. 《東江遺集 卷17 附錄1 家狀》[주-D008] 왕실과 인척이라는 혐의 : 신익전의 둘째 딸이 왕자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에게 출가했다.[주-D009] 가장 …… 것이다 : 본서의 권1에 실려 있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차운하다〉에는 “최선은 세상을 피하는 것이요, 차선은 땅을 피하는 것이라〔太上避世次避地〕”로 되어 있다. 《東江遺集 卷1 次陶淵明歸去來辭》[주-D010] 괄낭지계(括囊之戒) : 괄낭의 경계라는 뜻으로, 괄낭은 주머니를 묶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주역》 〈건괘(乾卦) 육사(六四)〉에 “주머니를 묶듯이 하면 허물도 없으며 칭찬도 없으리라.〔括囊, 无咎无譽.〕” 하였다.[주-D011] 역적의 옥사 : 김자점의 옥(獄)과 조귀인(趙貴人)의 옥사(獄事)를 말한다. 이때에 사위인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조카 신면(申冕)이 연루되었으나 신익전은 화를 면하였다. 신면은 김자점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국문 도중 장형을 받다가 쓰러져 죽었다. 김자점은 숭선군의 누이인 효명옹주(孝明翁主)의 시할아버지인데, 김자점의 역모사건이 일어나자 숭선군의 어머니인 조귀인(趙貴人)과 누이가 역모에 관련되었다 하여 조귀인은 사사되고 효명옹주는 서인이 되었고, 숭선군도 이에 연좌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2023-12-04 | NO.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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