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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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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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구-남곡거사정공효행실적비
    광주시 서구 벽진동 마산마을 입구 1954년이 남곡거사정공효행실적비(南谷居士鄭公孝行實蹟碑)는 서창입구에서 서창동주민센터 방향으로 가는 도로 왼편에 있다. 계사년에 충주 박승주가 글을 지어 세웠다. 이름은 경구(庚九)이다. 철종(재위 1849~1863) 을묘(1855)~ 병진(1856) 연간에 나이 4~5세에 연달아 상을 당하였으나 극진히 상을 치렀다는 내용으로 보인다.2019.1.8. 수정
    2018-10-26 | NO.50
  • 정엄-효자광주정공엄정려
    남구 서서평길 26-4(양림동 157-1), 양림오거리에서 사직공원으로 가는 샛길광산정씨문중 정엄鄭淹의 정려로 1611년 건립되었으나 오랜 기간 닳아져 1975년에 재건했다. '양림동 개비'로 알려진 충견 석상도 함께 있어 더욱 의미가 깊다. 국가에서 1611년 정엄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려이다. 이수는 종 모양에 변형운문을 조식하였다. 정려각 내에는 견석상이 1구 있다.효자 정엄은 명종 무오년(1558)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 부승지 등을 지냈다. 평소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 섬기기에 효성을 다하였고 모친이 병상에 눕게 되자 옷을 벗지 않고 모친을 돌보았으며, 상을 당하여서는 장례절차를 성대히 하였으나 모친의 죽음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정엄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국가에서 정려를 세웠으나 세월이 흘러 정려각이 퇴락하여 1975년에 석조로 재건하였다.비신에는 「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弘文館提學 藝文官提學同知 經筵春秋館義禁府事五衛都摠管 世子左副賓行通政大夫承政院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知製 敎楊村鄭先生 旌閭碑」라고 쓰여 있다. 
    2018-06-13 | NO.49
  • 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
    광주시 북구 문흥동 995-4(느티나무공원 내)1970년이 제주양사근처동복오씨정렬비(濟州梁泗根妻同福吳氏貞烈碑)는 林海玉 쓰다.
    2018-11-12 | NO.48
  • 조선호정려각
    광주시 북구 서하로 48-25(용봉동)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오른편1884년이 조선호정려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 대곡리 조선호(1812∼1870)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조선호는 부모의 병환 때 배설물을 맛보아 병세를 살폈고, 임종 때에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잠시 연명케 하였을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다. 이러한 조선호의 효행이 혼 세상에 널리 퍼져 1883년(고종 20)에 동문교관 조봉대부(童蒙敎官 朝奉大夫)에 추증되었고, 1년 후 정려가 하사되었다. 1968년 4월에 중건되었던 이 정려는 주암댐 건설공사로 수몰되자 광주시립민속박물관에서 기증받아 1989년 10월에 이설 복원하였다.
    2018-11-12 | NO.47
  • 조아라-소심당 조아라 기념비
    광주시 남구 백서로 13, 수피아여자고등학교2008년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조아라는 여성 민주 인권화 운동에 실천적으로 앞장 서온 인물로 광주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였다.
    2018-06-20 | NO.46
  • 조언수-창녕조씨삼강정려각
     광주시 광산구 용진로 219(북산동 450)1887년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8호창녕조씨삼강정려각(昌寧曺氏三綱旌閭閣)은 창녕조씨 일가 4대의 충, 효, 열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정려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한 조언수의 충, 그의 손자 조순악과 증손자 조후건의 효, 며느리 문화유씨의 열을 기리는 정려이다. 이 정려각은 1897년 <광무원정> 에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져 1923년에 건립하였는데 그 안에는 충신과 효자, 열부의 현판이 그 사적과 함께 걸려있다.충신 조언수(1575~1592)는 1592년 임진왜란때 금산전투(錦山戰鬪)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했다.효자 조언수 손자 조무악은 부친 조성복이 젊어서 세상을 뜨자 과부인 모친 문화유씨를 정성껏 섬기고 가난한 살림중에도 단 한번도 심려를 끼치는 일이 없었다. 모친이 병석에 눕자 대변을 혀로 맛보아 병세를 알고 엄동설한에 물고기를 구해드리고 선약(仙藥)을 구해 간호해 드렸으나, 효험이 없어 별세를 하자 여막을 짓고 3년시묘(三年侍墓)하였다.열부 문화유씨는 남편이 병석에 눕자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껏 간호했는데도 병세가 악화되어 손가락을 잘라 피를 공급하였으나 3일은 더 살고 세상을 뜨자 남편의 뒤를 따르려 하였지만 어린 두아들을 위해 수절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1923년 중수하였고 그 안에는 충신과 효사, 열부의 현판이 그 사적과 함께 걸려 있다. 일가의 삼강정려는 흔하지 않은 것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고 건축적 측면에서도 정려 건축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임곡90번 버스를 타고 북성마을에 내리면 바로 만날 수 있다. 김윤식(1835~1922)의 『운양속집』 권3, 기(記), 창녕조씨 삼강 유적기〔昌寧曺氏三綱遺蹟記〕사람에게 삼강(三綱)이 있는 것은 하늘에 해와 달과 별의 삼광(三光)이 있는 것과 같다. 삼광이 어둡고 흐릿하면 천지가 막히고 만물이 질서를 잃는다. 삼강이 무너져 느슨해지면 사람의 기강이 문란해져서 모두 금수의 영역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니 현명한 왕이 다스릴 때 반드시 인륜의 상도(常道)를 세우는 것을 급선무로 삼은 것은 참으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호남 나주(羅州) 고을에 창녕 조씨(昌寧曺氏)의 삼강 유적(三綱遺蹟)이 있다. 나는 그 실기(實紀)를 읽은 적이 있는데, 한 가문 네 사람의 절개가 찬란하게 이어졌으니 얼마나 성대한가? 지난날 선조(宣祖) 임진왜란 당시, 송암(松庵) 조언수(曺彥壽) 공은 포의로서 떨치고 일어나서 대중을 고무시켜 군사를 모집했다. 나중에 조중봉(趙重峰) 선생과 함께 금산(錦山) 전투에서 순국하여, 포상으로 아경(亞卿)에 추증되고 곧 맹부(盟府)에 공훈이 실렸다. 공의 아들 참봉(參奉) 조성복(曺成福)의 부인인 숙부인(淑夫人)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남편이 병들자 손가락을 자르고 넓적다리를 베었으며, 남편이 죽자 맹세하여 스스로 절개를 지켰다. 자식을 가르쳐서 가정을 이루게 하고, 죽은 남편의 뜻을 이루었기에 정려(旌閭)의 포상을 받기에 이르렀다. 부인의 아들 통정(通政) 순악(舜岳)은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는데, 효행에 감응하여 물고기를 얻는 이적(異蹟)이 일어날 정도였기에 고을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일을 칭송한다. 순악의 아들 후건(厚建) 또한 효로 이름났다.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호랑이가 와서 지켜주었다. 어사가 포상을 내려주십사 아뢰어준 덕에 특별히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이로써 조씨 집안에는 정려문이 이어져 백 년 동안이나 전해졌으며, 또한 향리의 모범이 되었다. 후에 무신년(1908, 융희1) 난리를 당하여 온 마을이 불타면서 정려문 또한 불속에 사라져 버리니, 종족과 향당이 모두 상심해하며 안타까워했다. 13년이 지난 경진년(1920)에 모여서, 옛 터에 누각을 세우고 잊지 않고자 하는 뜻을 내보이자고 계획하였다. 그해 가을, 공의 11세손 규완(圭浣)이 보따리를 짊어지고 상경하여 내게 글을 지어 기록해 달라고 부탁했으니, 그 일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나는 병들고 늙어 오래도록 필연(筆硯)을 멀리해 왔었다. 그러나 이 일만은 윤상에 관계된 터라, 감히 늙고 병듦을 이유로 사양할 수 없기에, 마침내 그 일을 대략 기록하고서 가지고 돌아가 문미에 걸도록 한다.『雲養續集』 卷3, 記, 昌寧曺氏三綱遺蹟記人之有三綱。猶天之有三光也。三光晻翳則天地閉塞而萬物不得其序。三綱隳弛則人紀紊亂而胥淪於禽獸之域。是以明王之出治也。必以扶植倫常爲先務。良有以也。湖南羅州之鄕。有昌寧曺氏三綱遺蹟。余甞讀其實紀。一門四節。輝赫相承。何其盛哉。昔在宣廟龍蛇之變。松庵曺公諱彥壽奮起布韋。激衆募旅。後與趙重峰先生同殣於錦山之役。褒贈亞卿。勳載盟府。公之子參奉成福之婦淑夫人文化柳氏。夫病斫指刲股。夫死矢志自守。敎子成家。克卒亡夫之志。至蒙旌褒。夫人有子曰通政舜岳。竭誠奉母。致孝感得魚之異。鄕人至今稱之。舜岳之子厚建亦以孝聞。三年居墓。山君來護。因繡衣褒啓。特除童蒙敎官。以是曺氏之門。綽楔相望。傳至百年之久。而爲鄕閭之所矜式。後値戊申之擾。一村燒燬。綽楔亦入其中。宗族鄕黨。莫不傷惜。粤十有三年庚申。相謀建閣于遺墟。以志不忘之義。是歲秋。公之十一世孫圭浣裹足上京。謁余文以記之。盖重其事也。顧余癃耄。久謝筆硯。然惟事關彜倫。不敢以老病辭。遂畧記其事。使歸而揭之楣。
    2018-06-11 | NO.45
  • 주암나주오공유인함평이씨부부효선비
    광주시 광산구 명도동 가마마을이 주암나주오공유인함평이씨부부효선비
    2018-12-01 | NO.44
  • 중추원의관난계김공이상비(창효각)
    남구 군분로77번길 26 (주월2동)조선말기의 한 선비가 벼슬을 등지고 낙향 유유자적하며 난계정이라는 초당을 짓고 지냈다. 정자의 주인인 광산김씨 난계(蘭溪) 김태석(金泰錫, 1872~1933)은 지금의 광주시 남구 주월동 2동 월산부락(명지아파트 뒤)은 부락주변이 소구릉의 야산으로 둘러진 곳에서 자리하고 있다.  광주시의 남구 주월동과 서구 풍암동 사이의 노인(老人)고개라고 부르는 왼편이다.난계정과 창효각을 가는 길은 월산마을이 끝나는 곳에서 짚봉산 등산로와 갈라지는 첫길 왼편으로 오솔길 따라 100여m 가다 보면 뽕나무밭 뒤에 창효각(彰孝閣)을 왼편으로 자리하고 난계정이 있다.그는 당시의 선비로, 특히 효행이 뛰어나 각향각지의 연이은 포천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고종 32년 내각의 자문기관)의 재수된 당시의 효자였다. 중추의관은 지금의 대통령자문위원 격으로 상당한 명예직이었다. 문숙공 김주정의 후예로 조부는 월탄 김기환이며, 아버지는  참봉을 지낸 김재만이다. 이후  아들 김영철(金永喆)이 그의 유지(遺志)를 잇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인 1938년도에 이 정자를 지어 정 이름을 난계라 하고 난계정(蘭溪亭)을 지었다. 원래는 효지면 주월리 지금의 주월동 백운광장 일대에 초당을 짓고 행화촌을 꿈꾸다 떠났다. 1989년도  퇴락되었가 최근에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 지었다.중추원의관난계김공이상비(中樞院議官蘭溪金公彛常碑)는  난계정 정자 경내에 있다.
    2018-06-13 | NO.43
  • 창녕조씨삼강문 / 昌寧曺氏三綱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북산리 1897년 昌寧曺氏 일가의 忠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의 천거로 命旌昌寧 / 曺彦壽文化 / 柳氏昌寧 / 曺舜岳
    2020-03-02 | NO.42
  • 청아당안동김공형근효행비
    광주시 북구 청풍동 209-5 청풍쉼터1974년청아당안동김공형근효행비(淸雅堂金衡根孝行碑)는 무등산 청풍쉼터에 있다. 金潤東 짓고 쓰다. 김형근의 자는 성범(聖範), 호는 청아당(淸雅堂)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고려태사의 선평의 후예로 명문 귀족 출신이다.
    2018-10-22 | NO.41
  • 청주한씨 쌍효비각(쌍효각)
    광주시 남구 진월동 진제마을1862년 韓弼五, 韓弼龍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命旌되어 청주 한씨 쌍효비(淸州韓氏雙孝碑)를 1864년에 건립했다.1979년 번역비를 옆에 건립 1995년 화순군 도곡면 천태산리로 이건청주한씨 문중에서 한필오韓弼五, 한필룡韓弼龍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62년에 命旌되어 1864년에 건립된 비석이다. 비명은 한정교가 썼으며, 비문 말미에는「大明崇禎後五周甲子三月曾孫 生員基佑竪」이란 글귀는 이 비석의 건립시기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한필오(1715~1789)와 한필룡은 형제 사이로서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1760년 부친상을 당하자 두 형제는 묘소에 시묘를 하여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머님이 노망을 하게 되었다. 두 형제는 어머님의 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는데 겨울철에 산비둘기 고기를 원하는지라 산천을 두루 헤메었으나 산비둘기를 구하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산비둘기가 방으로 들어와 어머님의 소원을 풀어 주었다. 이는 두 형제의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것이라 하여 동리 사람들의 치하를 받았다. 그러나 어머님의 임종에 이르러 두 형제는 손가락을 잘라 어머님의 입속에 피를 흘리면서 차도를 빌었으나 타계하자 상례를 맞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에 국가에서 1862년 에 정려를 명하여 1864년에 쌍효비를 세웠다.*2020.3.2. 수정
    2018-06-13 | NO.40
  • 청주한씨부인효열비
    청주한씨부인효열비(淸州韓氏夫人孝烈碑)는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486-1 도로변에 있다.윤상원 열사 생가 입구에서 오남재 입구로 가는 길 오른편이다.원래 비석은 공부자 탄강 2487년(1936년) 전 참판 이병관(이병관)이 모성공회장을 맡아 찬하여  세웠는 데 비바람에 글씨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자 2001년 5월에 새로 건립했다. 재당질인 권오(權五)가 부지를 희사하고 한오(漢五)가 비석을 세웠다.
    2021-04-01 | NO.39
  • 청주한씨효열비
    광주시 광산구 신룡동 천동마을1890년 이 청주한씨효열비(청주한씨효열비)는 정매영씨 소유로 李炳觀이 찬했다. 임곡 지역이다.
    2018-12-01 | NO.38
  • 최봉거-탐진최공봉거효자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4441948년이 탐진최공봉거효자비(耽津崔公鳳巨孝子碑)는 주남마을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열녀창녕조씨지비烈女昌寧曺氏之碑와 함께 있다 건비 연대建碑年代는 단기4281년 무자戊子 2월로 보아 1948년에 해당된다.
    2018-11-11 | NO.37
  • 최언광-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 비
    광주시 동구 선교동 218-111774년이 탐진최씨사효이열정려(耽津崔氏四孝二烈旌閭)는 1774년 국가에서 사효일렬의 정려를 내려 산수동에 건립되었다가 도시개발에 의해 1917년 현지로 이건하면서 일렬을 추가하였다. 孝子 崔彦光, 孝子 崔世孝, 孝子 崔雄傑, 孝子 崔斗傑, 烈女 崔世孝의 처 咸豊李氏, 烈女 崔弘淳의 처 平山申氏등 四孝二烈의 정려비이다.건물은 정면 6간 측면1간의 일식기와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다듬 주초 위에 엔타시스식 원주기둥을 세웠고 겹처마로 되어있다. 참고: <鄉土史大系 孝烈行誌> 全羅南道, 1985효열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이하 정리중)書孝烈婦金氏張實蹟부충효열爲三綱而民生用彝倫也慰人有孝烈則可移而爲忠無孝烈不可以爲忠故有일於此삼綱皆可以描矣 人鮮能有 鄕人榮行而又有二人焉者則尤不可任其泯也歟今觀孝烈婦金氏張氏二夫人家狀則氏錄 絡後 紝不待姆敎 烈 等 有三之義年十九諦利川徐璘洙故判書孝0後事舅姑甘旨無闕癠而侍湯憂虜當不有其身逮其夫病救治百方凡藥餌椅忒靡不用極而竟至不淑之際以事親立後不絶杞事託而歿焉初欲自裁旋念亡夫之託在耳不敢忘-遵遺数而終能成立家道能繼夫後其子婦張氏籍沃城年十七爲徐相厚妻殿直咳後自入徐門事始如其姑之事其姑事夫若其姑之事其夫而昭今時裂。灌血廷數之命又其姑所無豈不益爲難者乎鳴庠世之論孝以水鯉慕雀爲責論烈以倉卒辦命爲難此則不知 钱爲孝死易生難之義者也今二夫人之孝烈00行爲難顧倫理斁傷之始姑婦而連世而趾之雖徐氏之家運甚替而道則有裨aj勝欽哉天日宜得苴處之典而芒芒長夜不知何日得見清明若因循而待則恐至湮沒使卓絶二夫人之行晦昧而不顯故其族聖鉉現洙欲爲不朽榧力國之俾朴斯文魯宣介於余然不朽人者實態其二婦之若節而亦感其二徐氏之心而書状後而歸之丙子閏月下澣 錦城 吳東洙 書
    2018-11-11 | NO.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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