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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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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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인정씨효열비
    광주시 북구 생룡동 136-1 (생룡마을 입구)1951년이 유인정씨효열비(孺人鄭氏孝烈碑)는 범희덕范熙德 짓고 김진현金珍鉉 쓰다. 생룡마을의 범씨 문중 松林 범만식 선생에게 19세에 시집 와서 26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며 어린 두 아들을 키우고 한평생을 수절한 연일정씨 효열비이다.  연일정씨는 19세에 범만식선생과 결혼하여 2남(희일,희주)1녀를 두었으며 26세에 남편을 병으로 떠나 보내게 되었다. 친정아버지는 정하용으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후손이다. 송림 범만식(1873-1902)선생은 문인으로서 지조와 행실이 고결했던 심재 범재준(1822~1857)의 손자이며  향촌의 정신적 지주로서 만년에 서헌정사를 지어 강론에 힘을 썼던 서헌 범윤기(1850~1923)의 아들이다. 조부이신 범재준은 포은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범만식 선생은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운 후 계속 항일운동을 전개한 호남의 의병장 송사 기우만(1846~1916)의 문인으로 문학과 행의가 있었고 언행이 근신하여 향리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범만식 선생이 병이 들어 아프게 되자 연일정씨 부인이 남편을 따라 죽겠다고 했으나 남편의 유언이 시부모님을 누가 봉양 할 것이며 두 아들은 누가 키울 것인가? 당신이 부모님과 자식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해서 행실이 바르고 성품이 온화한 정씨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하고 26세의 젊은 나이에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고 어린 자식들을 잘 키우며 한 평생 수절하면서 글을 안 읽으면 안되고 성인의 가르침을 받들어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마을 사람들과도 화합을 잘하여 귀감이 되는 삶을 사셨음으로 후손인 손자 대규를 비롯한 유림에서 지금으로부터 67년전 마을 입구에 그 뜻을 널리 칭송 하고자 ‘유인정씨 효열비’를 세워 추앙하였다. 그 후 정씨 부인을 일컬어 “삼강 중에 두 가지를 갖추었으니 하나의 몸으로 두 가지 절개를 지켰다. 오호라! 그 행실과 행적이 이에 다 후의 사표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2018-11-13 | NO.65
  • 유인함평이씨효행비
    광주시 서구 화운로23번길 7-81982년서구 화정동 화정힐스테이트아파트 건너편 길로 가면 있다. 1982. 9. 5. 마을사람들이 가륵한 孝行을 찬양하여 세웠다. 나주 吳成烈에게 시집가 啓煥 女息을 父母와 舅姑(구고)를 극진한 효성을 다하고 동리에 施德(시덕)하다..
    2018-07-02 | NO.64
  • 유인행주기씨효열비 효열각
    광주시 서구 용두동 483-2 1977년유인행주기씨효열비(孺人幸州奇氏孝烈碑)이 비는 장흥 고광은이 찬하고 글씨를 썼다. 광복후 첫 정사년이라 한 것을 보면 1977년에 세웠다.비 설립 추진위원장은 박하만朴夏樠이고 부위원장은 기세은이다.
    2018-06-11 | NO.63
  • 유천당장흥고씨귀연여사효열비
    광주시 북구 일곡동 515이 유천당장흥고씨귀연여사효열비(柳川堂長興高氏貴淵女士孝烈碑)는 만주사 옆에 있다.
    2018-11-13 | NO.62
  • 윤영기-의병장정재윤영기공적비
     광주시 남구 행암동 92018년의병장정재윤영기공적비는 구남마을 광유재 앞에 2018년 10월에 세웠다.윤영기(1880∼1971) 자 경안(京安), 호 정재(貞齋)이며 조선 말기의 의병장. 독립운동가이다.1907년 1월24일 을미의병에 참가했고 9월17일 호군에 임명, 천여명의 군사를 훈련시켜 30여명 적을 섬멸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선언문을 군중에게 살포, 군자금 모금하였고  3.1운동 일어나자  광주 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1920년 10월 독립자금 모금하더 일경에 체포 광주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고 1954년 광주향교 제3대 전교에 선임되었다.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18-10-26 | NO.61
  • 이경채-독립운동가 이경채선생 공적비
    광주 광산구 (송정동초등학교)광주학생독립운동을 잉태하고, 일본과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 이경채(1910~1978)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2017년 5월 30일 송정동초등학교에서 열렸다. 송정동초는 이 선생의 모교로 그가 타개한 지 39년 만에 공적비가 세워졌다.광주학생운동에 불을 붙이다이경채는 인쇄한 수십 장의 문서를 광주역 앞 경찰관 파출소 게시판, 광주고보를 비롯하여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송정리역이나 송정리 신사 등의 전신주와 판자벽에 붙였다. 그뿐 아니라 전남 각 중등학교, 경찰서에도 발송하였다. 이는 광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광주 지역에 여러 사회주의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른바 ‘불온 문서’가 시내에 뿌려진 것은 처음이었다. 경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지만 단서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였다. 이경채 등이 문서를 인쇄한 등사판이나 남은 문서들을 모두 불태워 없앤 뒤였다.조국 광복을 위해 소설보다 더한 삶을 살았던 선생이 타개한 지 39년 만에 세운 공적비. 참가자들은 때늦음을 송구하게 생각한 만큼 애국지사의 정신을 대대손손 계승할 것을 제막식에서 결의했다.선생은 1910년 4월 6일 전남 광산군 송정리(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서 부친 이성륜(李成倫) 씨의 3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목격한 3·1운동은 선생의 지난한 항일투쟁의 자양분이었다.광주고보 재학 중이던 1926년, 선생은 학우들과 ‘독서회’를 비밀리에 조직해 독립운동을 결의한다. 2년 뒤 그는 ‘광주 조선독립선언문’을 배포해 세상을 뒤흔들었다. “천황은 신성으로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제국주의자의 말”이라고 쓴 유인물을 광주역 앞 파출소 게시판, 송정리역, 송정리 신사(송정공원) 등 사람이 많이 오가는 장소에 붙여놓은 것.이 투쟁으로 선생은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개성소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29년 10월 특사로 풀려났다. 당시 모교 학우들은 선생의 석방을 요구하며 전교생 동맹휴업을 벌였다. 퇴학 47명, 정학 270명에 이를 정도로 동맹휴업은 맹렬했다.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 배후 인물로 또다시 검거된 선생은 일제의 감시로 운신이 어려워지자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전문학교(야간) 법률과에 입학했다. 일본에서도 동경유학생,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과 항일투쟁을 벌인 선생은 ‘임시정부 내통’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6개월 고문에 시달렸다.일본에서 신변 위협에 시달리던 선생은 1933년 4월 고베항에서 중국 상하이로 밀항했다. 이곳에서 선생은 김판수(金判守), 이중환(李中煥) 등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일제와 싸웠다.중국에서 인성학교 교사, 한국독립당 기관지 <진광(震光)> 간행에 간여하던 선생은 1936년 9월 중국군 군관학교(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계기로 일제와 총칼로 맞서며 무장투쟁에 돌입했다. 당시 대륙 침략으로 총력전을 펼치던 일본을 중국에서 무너뜨려야 조국 해방도 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중국군 중교(소령)까지 진급한 선생은 1949년 10월 귀국길에 올랐다.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주변의 정계입문 권유를 모두 물리쳤다고 한다. 그 권유를 피해 1974년 연고도 없는 경남 양산 기장면 석산리로 이사해 양어장을 운영하며 살았던 선생은 4년 뒤 3월 25일 불의의 사고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우리 정부는 1991년 8월 15일 건국 훈장 애국장을 선생에게 추서했다.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은 이경채 선생을 ‘2014년 11월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의 묘소는 대전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있다.
    2018-12-18 | NO.60
  • 이기손-의병대장 금재 이기손장군의적비
    광주시 광산구 신촌동 4-1, 송정공원1975년이 의병대장금재 이기손장군의적비 義兵大將 錦齋李起巽將軍義跡碑는 송정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다. 그 옆에 비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용진산 정기받아 님이 나셨고 구국의 횃불들고 일어나신 곳 함성도 드높았다 그날의 함성 빛나는 오십회의 빛난 전공에 날뛰던 왜적들도 넋을 잃었네 장군의 애국충절 같구나 의적비 세운곳에 영령 계시니 오가는 길손들이 머리숙이네의병장 이기손은 자는 안식, 호를 급재라 했으며 당호는 용섭당이다. 효령대군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농포공 이영의이다. 1895년 민비피살 사건을 비롯 1905년의 을사보호 조약 1907년의 고종황제 폐위 관군해산등 국치의 분함이 거듭되자 평소병서를 연구하여 손자병법에 통달한 공은 광산, 나주 등지 장정을 모아 나라를 구해야 함은 젊은이들의 의무라고 역설 의병을 조직했다. 1908년 의병창의삼대장으로 나주, 광주, 담양, 함평, 무안, 영광, 고흥등지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특히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왜장 요시다의 부대와의 접전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렸다.그 후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망명길에 올랐으며 6년후 귀국하여 충남금산에서 은거,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1930년 금산군 금성면 하신리의 온양이씨 문중에서 고종황제와 융희 황제를 모신 숭봉전, 어필각을 건립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다. 광복후 금산과 향리인 광산을 왕래하면서 1957년 11월 27일 80세로 별세하였다.의적비 옆에는 의적비건립사실기가 1975년 종질인 이강유, 이강재, 이강순 등이 세웠다는 이름이 있다.또 이기손장군의적비는 광산구 본량초등학교 교정에도 있다.
    2018-10-17 | NO.59
  • 이상희 공군대위 호민헌신 추모비
    광주시 서구 덕흥동 23-5 덕흥경로당 앞1992년1991년 12월 13일 3시경 공군 작전 임무수행 중 덕흥부락 상공에서 항공기 사고로 추락하는 순간 관제소로부터 탈출명령을 받았지만 마을에 엄청난 인명과 재산손실이 초래될 것을 우려하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호민살신한 사실을 기록하기 위해 덕흥동천에 추모비를 건립했다.
    2018-06-26 | NO.58
  • 이세환-병마절도사광산이공세환의적비
    광주시 북구 오룡동 808(치촌마을 뒤)1972년이 병마절도사광산이공세환의적비(兵馬節度使光山李公世環義蹟碑)는 이세환의 행정을 李문수 짓고 쓰다.
    2018-11-13 | NO.57
  • 이윤호-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
    광주시 북구 삼각동 254-31968년이 애국지사광산이공윤호공적비(愛國志士光山李公允鎬功蹟碑)는 이윤호의 독립운동을 선양하는 비이다. 金善馹 짓고 李淇休 쓰다. 이윤호(1898∼1931)는 독립운동가이다.
    2018-11-13 | NO.56
  • 일휴당선생최공정려중수기 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日休堂先生崔公旌閭重修記昔在龍蛇之變 伏節死義 前後相望 而其磊磊落落 如青天白日輝映於天下 膾炙於百世 未有如三壮士之爲尤盛也日休堂崔公即三壯士之一 後人爲之棹楔於綾 俎豆於晉盖綾是杖屨之鄉 而晋是殉節之地也 所以寓追幕不㤀之心者 靡有間焉 壬辰秋 晉之士謀修祠字屬斯文成福閠全柱一河龍辰來湖南牧議 因過綾 見旌閭頹敝慨然曰 此行本爲祠宇計 而今旌閭如此 豈重修祠宇而不修旌閭乎 遂停鞭開橐 聚材募工 不幾日而一新之嗚乎 先生所以扶植綱常 倡勵名敎者 其功可以與天壤俱敞非一區棹楔所能輕重 然興物寓情 不可無所 則今日之役亦豈可已者耶 後之人 苟舆斯文同志 繼以修之無失其時 則此屋亦將與先生不朽 竊有望焉 * 일휴당日休堂 최경회崔慶會(1532~1593)조선 중기의 문신. 1567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영해군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이 되어 금산, 무주 등지에서 왜병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듬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승진했으나 6월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9주야를 싸우다가 전사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에 있는 삼충각은 을묘왜변 때 전라남도 해남 지방에 침입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조현 장군과 임진왜란 때 진주성 2자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한 충의공 최경회 장군과 문홍헌 장군 세 충신의 애국 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1685년 능주향교 유림들이 3동의 정려를 건립한 것으로 1985년 2월 25일 전라남도기념물 제77호로 지정되었다.
    2020-06-11 | NO.55
  • 장흥고씨삼강문 / 長興高氏三綱門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촌 갑촌리 압촌동 마을 입구1595년 임진왜란 공신인 고경명 일가의 忠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유림들의 천거로 선조가 命旌, 문중에서 목조와가로 건립조선 중기의 문관·의병장인 고경명 일가삼강문옆에 문중 제각인 追遠閣이 있음長興 / 高敬命長興 / 高從厚長興 / 高因厚長興 / 高氏長興 / 高傳金光山 / 鄭氏
    2020-03-02 | NO.54
  • 전부일장군효행비
    광주시 남구 임암동 562-6, 임정마을1970년남구 임정마을 입구 임정마을 복지회관 옆에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웠다.전부일 장군은 20세기 초 일제의 치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이 지역 출신의 장군이다. 장군은 비문 내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여 군 복무 중에도 효행이 지극하여 많은 사람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으며, 충효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장군의 효행비는 임정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는데, 소유 및 관리는 천안전씨 문중에서 하고 있으며 건립시기는 1970년에 해당된다. 전부일(1924~2004)은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여 박정희 4공화국 때 초대 병무청장을 지냈다. 이후 1976~1980년 유신정우회 9, 10대 국회의원을 지냈다.비문의 원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서석산 자락 금당산 앞 임정 마을에 하늘이 내린 효자가 있어 지방선비들이 비를 세워 그 효행을 찬양하니 이 비의 주인공이 바로 전부일 장군이다. 장군의 본관은 천안으로 광주목사인 구생의 후손 방은의 제3자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주가 영특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가세가 궁핍하여 밭을 갈고 땔나무를 해 어버이를 봉양할 제 순종하여 어기는 일이 없었고,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건강을 보살피는 도리에 극진하였으니 장군의 타고난 효행은 옛날 왕상과맹종의 효도에 비기지 않았다. 그는 일찍이 왜정의 강제 징병으로 군에 입대하여 만주에서 복무 중 부친상을당했다는 비보를 들었지만 달려 올 수가 없었다. 땅을 치고 하늘을 부르며 곡을 하였는가 하면 손가락에 피를 흘려 성공보은(成功報恩)이라는 네 글자를 써서 영전에 올리도록 하였다.8·15 광복을 만나 고향에 돌아와 홀어머니를 효성으로 봉양하였으며 부친 묘소를 성묘하는 데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3년을 하루같이 하니 인근 모두가 듣고 칭찬하였다. 그 뒤 어머니의 승낙을 받아 국방경비대에 자원 입대하여 가정에 들어와서는 효도를 하고 부대에서는 충성하라는 교훈을 마음깊이 뼈에 새겼기에 빛나는 전공을 세웠으며 벼슬은 계속 승진되어 육군중장으로 국방부 차관보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고향에 돌아와서는 언제나 노모를 등에 업고 부친의 묘 앞에 나아가 성묘를 하니 부모 남녀노소가 바라보고 감단하여 효자를 낳은 어머니요 충신을 낳은 어머니라고 하며 장군의 어머니를 부러워하였다.모친상을 당하여서는 예절에 의해 장례를 마치고 삭망 때마다 영전에서 녹음해 둔 어머니 생전의 음성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3년상을 마친 뒤에도 어머니 영정을 군에 군무실에서까지 모시면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아뢰어 죽은 어머니를 살아있는 어머니처럼 섬겼고 고향에 돌아올 때는 반드시 부모님 묘소를 성묘한 뒤 마을 어른들을 찾아 뵙고 반찬대금을 제공하니 온 마을이 장군의 효행에 감동을 받았다.아~ 아름답도다. 장군의 효행이여, 순종하는 마음으로 부모님 뜻을 받들었고, 헌신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으니, 장군이야말로 가히 츙효를 겸했다고 하겠다. 부모의 은혜란 하늘과 같아서, 다 갚을 수 없는 것인데, 오늘날 자식들은 오히려 불효가 허다하니, 이 비를 바라보고 뉘우침이 있었으면 한다.고을 선비들이 장군의 효행을 이상과 같이 대략 비에 새겨 포양을 하고 아울러 이 세상 모든 자식에게 어버이 섬기는 도리를 일깨워 주며 권장하는 바이다.1970년 8월 건립추진위원회 짓고, 전면 제자 최한영 쓰고, 후면 비문 이병춘 쓰다.
    2018-06-14 | NO.53
  • 전상의장군정려각
    광주 북구 무등로 1050(화암동) 충민사1684년이 전상의장군정려각(全尙毅將軍旌閭閣)은 충민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전상의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864년 9월 2일 명정되어 그해 광주시 동구 지원동 회산마을 앞에 세웠다. 1982년 충민사가 새로 건립되면서 이곳으로 정려각을 이건하였다.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겹처마로 되어 있다. 내부에는 증 충신자헌대부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행 통훈대부구성도호부사 전상의 지려 숭정 후 갑자 11월(贈 忠臣資憲大夫兵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行 通訓大夫龜城都護府使 全尙毅 之閭 崇禎 後 甲子 11月)의 복원된 정려편액이 걸려 있다.
    2018-11-12 | NO.52
  • 절부광산김씨실행지비
    광주시 북구 용두동 1044-1(거상마을 내)1900년 전후이 절부광산김씨실행지비(節婦光山金氏實行之碑)는 젊어서 남편과 사별한 후 유복자를 낳아서 어렵게 살았으나 타인의 모범이 되어 세웠다.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1851~1931)이 쓰다.
    2018-11-13 | NO.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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