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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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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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현동-하은의사박현동표성비
    광주시 광산구 창암길 125-20 (고룡동)1958년 2월이 하은의사박현동표성비(河隱義士朴玄東表誠碑)는 왕심봉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문중에서 건립하였다. 박현동 애국지사의 생가는 광주시 광산구 장수길 33에 있다. 순천박씨 대정파 율수공종문회 현판이 붙어 있다.
    2018-11-11 | NO.95
  • 범기봉-증좌승지성와범공순의비
    광주시 북구 생룡동 산 64(대야제 맞은편)1962년이 증승지성와범공순의비(贈承旨省窩范公殉義碑)는 범기봉(范起鳳)의 비이다. 宋在晟 짓고 奇近燮(대서) 李圭垳(소서) 쓰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에 함께 참여해 순절했다.
    2018-11-13 | NO.94
  • 상산김씨효열기적비
    광주시 광산구 오운동 광암마을 뒷편 구릉지대1977년이 상산김씨효열기적비(常山金氏孝烈紀跡碑)는 상산김씨 문중에서 관리한다. 尹丁鎭이 찬했다.
    2018-12-01 | NO.93
  • 서산류씨오효열정문기
    광주시 광산구1995년瑞山柳氏五孝烈旌門記는 경주 김형욱이 찬하고 장흥 고광렬이 글씨를 썼다.
    2018-12-02 | NO.92
  • 서산유씨효렬정려 / 瑞山柳氏孝烈旌閭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도동 송산2리 1615년(광해군 7) 건립한 정려瑞山柳氏一家의 孝烈行의 뜻을 기리고자 羅州牧使가 천거 조정에서 命旌, 1615년 건립한 정려瑞山 / 柳瑛瑞山 / 柳玹
    2020-03-02 | NO.91
  • 서산정공만재정부인하동정씨쌍효비
    광주시 동구 운림동 5691937년이 가선대부서산정공만재정부인하동정씨 쌍효비(嘉善大夫瑞山鄭公萬在貞夫人河東鄭氏雙孝碑)는 정씨정려각邙氏旌閭閣내에 따로 세워져 있다. 정봉서비鄭鳳瑞碑와 나란히 있다. 비문碑文은 다음과 같다.(정리중)
    2018-11-11 | NO.90
  • 서산정씨이효일렬지려
    광주시 동구 운림동 659 1797년 孝子 鄭鳳瑞와 그의 처 秋城田氏의 烈行을 御史 李承益이 천거하여 命旌되어 건립1937년 旌閭閣은 年久退落되어 石造로 건립서산정씨 이효 일열지려(瑞山鄭氏二孝一烈之閭)는 운림동 옛 운림가든과 학운초등학교 사이의 도로변에 있다. 정려는 석조로 되어 있으며 담장도 화강암제 석재로 되어있다. 내부에는 비각을 갖추지 않은 「孝子贈通訓大夫司僕寺正鄭公德邦之閭」 「孝子通政大夫瑞山鄭公鳳瑞之 烈女淑夫人秋城田氏之閭」와 경외에 「貞夫人河東鄭氏善德碑」「嘉海大夫瑞山鄭公萬在貞夫人河東鄭氏雙孝實蹟碑」가 있다.효자 정봉서鄭鳳瑞(1710~1767)의 자는 현거賢舉, 호는 만오晚悟이며 6세 때 모친상을 당하였고 부친상시 삼년시묘三年侍墓를 살았다. 열녀烈女 추성 전씨秋城田氏(1727~1778)는 효자 정봉서鄭鳳瑞의 처로 남편의 임종 직전에 다섯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3일간을 연명케 하였다. 효자 정덕방鄭德邦(1750~1819)은 정봉서의 삼남三男으로 모친의 임종 시에 다섯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여 어머니를 3일간 더 살게 한 효자로 나라에서 정각旌閣을 내렸다.
    2018-11-11 | NO.89
  • 서헌거사안공의적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1967년이 서헌거사안공의적비(瑞軒居士安公義蹟碑)는 서헌거사라 불린 안규용(安圭容, 1860-1910)의 의적비이다. 죽산안씨 21세인 그의 자(字)는 공삼(公三)이고, 봉곡(鳳谷, 저불마을 또는 봉곡마을이라 불리웠던 광주시 북구 오치동의 옛이름)은 그가 세거했던 지명이다.1931년 간행된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송사집(松沙集)》6권에 1891~1905년 사이에 안규용에게 보낸 편지글 5통과 1910년에 호상소(護喪所, 초상을 치르는데 관한 모든 일을 맡아 보는 곳)에 보낸 편지글 1통이 남겨져 있다.答安公三 圭容○辛卯(1891) a_345_142b 雪連天。尺地涯角。惠書從何來。仰認情注。滿紙自列。足見用意。別錄尤是碩果消息。豈勝喜悅。第念內修外攘是一串事。吾道日明則邪說自不得肆行。昭明天日。豈久爲雲霧中物而已耶。二絶詩亦珍感。忘拙拚和。俯辴如何。竆陰生一陽。然後見吾道。天運將回泰。彼哉敢潦倒。一天連夜雪。不意見今晴。晛消君識否。白日入牕明。倉卒不成語。答安公三 乙未(1895) a_345_142b 夏秋阻懷。得疏始豁然。示喩縷縷。吾儕旣不能生長老死泰平。則不辰之歎。歎無及矣。祇當如風前葉水上萍。一任其驅去而已。豈有好道理可以豫自區處者乎。但有自處者。不失吾本心。外閒萬變。不與之俱往則可矣。請看車之有軸。磨之有心。此或動撓則不濟事。中庸四素。皆不動乎此者也。如何如何。令胤久後相見。頗覺軒軒。未知裏面事亦如外閒滋長耶。因山前私家練祥退行告由。當曰玆値國哀。不得奉行常事。據禮退行於因山後。敢告事由爲可。答安公三 a_345_142c 令胤來。兼承問疏。其後歲色益遒。仰想孝思罔涯。益復如新。遠爲之悲念。似聞貴邑倅以誓死保髮爲計。此是吉聞。邑邑皆然。則足以挨過。而世多有倭肚洋腸者。柰何。旣無經濟之策。又無剋亂之才。所保者一片丹心。祇守此一心。足以仰答先聖王與先祖父耳。如何如何。答安公三 戊戌(1898) a_345_142d 傷時之歎。此非卒乍可免。磬襄亦豈可遽學。但吾一片靈臺。有東海焉。有西山焉。何必蹈此陟彼而後。始可謂連夷耶。雖然言之甚易而行之甚難。平日高談激論者。耳目旣熟。不以此作大事看。此最寒心。必須日省月察。不與之俱往也。萬伎倆自在。而秋氣寥廓。益切日暮道遠之歎。翰音喈喈。足破山中寂。故人之賜也。遠近知舊數日相守。不無少一之歎。際此一書足可慰也。然終不如促膝劇談。人情苦不知足。乃如此耶。答安公三 乙巳(1905) a_345_143a 大丈夫生此危亂。當以致力中原爲心。而我病如此。君亦宿祟支離。此豈平日所自待。而亦豈望於君者乎。月前夢赴日下。所與偕者賢者。與之覘賊於水標橋邊。還路一緇徒見我長袖大帶。解帶而去。余若無見。始終偕君。驚起傍側無君。未知此何夢也。第竢遄和。趁新正一枉。攄得多少胷懷。向日封章。爲諸賊沮納。蓋自五賊發明投疏之後。雖大臣之言。不得入云耳。勉翁以明日作儒會於魯城闕里。艾山亦在其中。嶺南大動。而吾省最寥寥。已金蓮史,柳後松,趙小山諸公。示以赴會之意。而未知得抵否。此亦送茂松一儒。探其結果耳。與鳳谷安氏護喪所 a_345_143a 嗚呼。吾友瑞軒居士竟至不起耶。月前因子用書。見向蘇二字。喜而不寐。謂當更奉。昨暮疑信聞凶。又憂不能寐。今承果爾。誰知暮春之別。遂成千古永訣耶。匹夫而任當世之責。屹然爲砥柱於頹波者。今日更有多人耶。其逝雖一人之私而實關世運。豈但吾友道之重而已耶。嶺海千里。死生相從。轉眄之閒。已成陳迹。令人抆涕而不能定情。卽當匍匐。撫尸一哭。而臀髀生瘇。起動不得。幸克襄知日。則當以數行文躳誄矣。又聞其哀臨命。血指得延數晷。其誠孝格天。而柰天年何。使之不風。易致完合如何。明紬一疋。此家人爲我身後計者。以助薄襚。主材一部,玉席一立付去。또 《송사집》1권에 기우만이 안규용에게 보내는 시가 한 수 있다.安公三圭容 六詠寄意和呈 a_345_063c  客至猶嫌津世語。萬山何處更深深。身邊自有無情石。應解主翁不語心。鏡裏偏憐白髮新。少年如昨萬花春。空山獨抱離騷恨。腸斷黃昏望美人。逐臭有人少踽涼。莫將琴嘯坐幽篁。杜門謝客非長計。憂樂中間好兩忘。少年千遍讀春秋。日負初心歲月流。歸泊三山風不動。會須水到放吾舟。漢水佇聞靜不波。狂風昨夜又如何。開花啼鳥非時態。偏向山家物色多。二月三山百草茸。檢春筇屐任西東。趁日思君君不見。樂湖水色尙溶溶。《송사집》11권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養苗說。贈安公三。 a_345_258a  養心求其似。其養苗乎。種子無不同。播之時又同。而其有善不善。人力之未至也。蓋深耕也。爲根深而能風旱也。易耨也。爲苗達而去稂莠也。惟心亦然。厥初稟賦。何嘗不同。隨感而見。亦未有不同。而其有善不善。操舍之未審也。苟操舍之未審。則風旱於吾心者何事。稂莠於吾心者何物。立志之堅固。吾深耕也。外誘之務去。吾易耨也。養苗去其害苗。養心去其害心。則養苗之術。卽吾養心之方也。安君公三。向日寄書來云荷蓑荷笠。隨老農之後。以去莠養苗。吾知公三之苗日以長。公三之心亦日以治。旣以書賀。又衍以爲之說如此。《송사집》23권에는  <안규용(安圭容) 제문>도 남아있다.祭安公三文 a_345_580b 嗚呼。君稟至大至剛。所謂浩然之氣。而天年僅止於五十一而已耶。從逐旣久。君行己大方。吾無不悉。蓋其子職無闕。宗黨樂其睦。朋友稱其信。爲人謀而忠。傳而講習。自省而無不足。吾無用贅。而昔余再度厄運。刀山劒樹。死生相隨。君以何定力。於衆皆危懼而不敢近者。獨不顧念身家而能如是乎。非但此也。義骸㬥野。雖親戚不敢收。而具棺斂埋。無所顧怵。校堂勒逼於蹄跡。無人敢異議。而以藐然七尺。談笑而揮之。左砲右劒。目不一瞬。卒致完璧。向所謂至大至剛之氣。吾言非無證。使朝廷有此等數人。則國計豈至於今日乎。使君少留。見今日氣數。則不東蹈于海。必西登于山。而浩然先逝。未始非於魚得計。顧此杜門竢溘者。安得不介介於中夜乎。昭明之日。必有聞其風而採西山之薇。酌東海之水。致酹於四尺之封。區區雞絮薄奠無謂。嗚呼哀哉。또 《송사집》48권에 안규용의 행장 기록이 있다.서헌안군행장(瑞軒安君行狀) 346_557d 君諱圭容字公三。所居對瑞石。自號瑞軒。竹山之安。本貫順興。同祖文成公晦軒先生。高麗侍中諱元衡。勳封竹城。子孫受貫焉。正郞諱忠達。文章行義。享羅山祠。竹菴諱晩休。淸儉掌諱致禮。並著孝友。俱有襃贈。諱基胤。諱翔魯。諱思喆。諱鳳壽。孝爲家風。克承無替。祖以上也。考諱國煥。妣金海金氏父禮澤。君以從子後焉。本生考暢煥。妣全義李氏。君生哲宗庚申十月十三日。光州之鳳谷其居第。生而樸實無華。言若不出口。身若不勝衣。孝友趾父祖。自五六歲。每食索貯一盂飯。以察父母之或飢。出外得異味。必袖獻之。疾痛疴癢。抑搔必敬。慈夫人常曰。口軆之奉。人或可及吾兒。而志養鮮能及也。人亦曰安某內有慈氏李孺人之賢。外有祖考水橋公之訓。德器早就。十四居外憂。伯氏圭采過毁稱孝子。而君允爲元方之季方。伯氏早嬰貞疾。糜粥藥餌諸奉必躬。常從容於病側。談說古今。欲其忘病。平日叱咜之聲。未嘗及於犬馬。隣閈或有以悖說加其子女。則諄諄招諭。聽者悅服。蝸屋數椽。惡衣惡食。人所不堪。而處之晏然。嘗以慈夫人命。從逐於余。顧余謏寡。不堪副其至意。而自幸其益友有人。丙申。余妄意討復。駐陣光山館。君始終與偕。矢心同死。及僨事。君歸隱故山。而不一日忘君國。或至慷慨泣下。嘗憤國計不振。草疏數千言。語甚剴切。以格禁莫達。丙午。余株連義擧。逮繫光獄。衆所畏避而不敢近。其情近者。密探動靜而去。君數朔於棘門之外。不計夷險。乘間來握。翌年丁未。余又押至京獄。君鯨海風濤。死生相隨。忿賊徒擅命。將疏伸於闕門之外。章旣具。以放還而止。余以何人。得此於君。至今不能忘。奇省齋參衍。討復擧義。被害于光府。雖家人父子。畏不敢收。而君具棺斂埋。時倭焰漲天。衆皆危之。而視之若無。少無懼色。卒亦無問。遠近聞者。莫不掉舌而稱賞。或曰。彼方見影蜮射。殺人如麻。而何獨無畏。君曰。非但世交舊識。以義取禍。忍令骨㬥沙場乎。如有株及。吾當叱之。居無何。彼欲置病院於校堂。衆莫敢異辭。君後聞之。獨排衆論曰。莫重聖廟。許令犬羊接跡乎。昔錢唐請爲孟子死。吾將爲孔子死。發書會儒生於郡衙。自郡守以下。不敢出聲氣。一辭謂買一渠渠。以替校堂。聽不聽在彼。而在我爲一副方便耳。君厲聲曰。替與與直許一閒耳。名不正則言不順。雖一間屋子。不可許也。須臾。彼一隊兵。揮劒放砲。圍坐數匝曰。反對者出。當劒斷而砲殺矣。于時滿座無人色。君顔色不變。從容起立曰。反對者獨書生安圭容。吾在此。任汝也。彼皆愕然相顧曰烈士烈士。遂縛執而出。及到其主管。一場問答。聲色俱厲。彼乃免冠俯首曰。不圖尊國之尊聖廟。若是之重也。請不復敢言校堂矣。令善護出軍門。嗚呼。魯仲連蹈海一言。能卻虎狼之秦。豈獨專美於古也。當時主事諸人。不能作新垣衍之拜。而反致脣舌。抑獨何心哉。後數日。彼又大書病院二字。揭之校堂。時君過余在寒泉寓舍。急奇告君。察君有決死之意。余臨別寬之曰。彼之伎倆。本來如是。佯若不知過數日。以伺動靜可也。君歸卽探其原委。致長書責其背約。語甚切直。彼卽謝服曰。事出他所。吾實不知。卽令撤去。於是校堂始完。唉今各郡校堂。置侏離學所。蹄跡狼藉。而獨光校依舊。伊誰之力。使吾東方在在郡縣。每有如君。則今日事必不至於今日。君積年苦痢。轉爲浮脹。已不可爲。余嘗就訣。旣出曰。斯人也止於斯乎。斯人也止於斯乎。以一人之死生。關重於世風。天乎不憖耶。屢欷而歸。以庚戌七月五日終。先未終。懇懇以先世謁文先山守護讀書爲善等語。使子鍾基書之。略不及家事。葬丹砂洞後卯坐。夫人原州李氏相輝女。二男。長卽鍾基。次鍾烈出後伯父。二房子女皆幼。一女適完山李承庸。嗚呼。君之歿。余病委牀笫。不能撫柩一慟。以數行蕪辭。具雞絮薄奠。送子替告于靈几。一以爲公三賀。賀賀其浩然先逝。不及見滄桑景色。所謂長歌甚於痛哭。二以爲世路慨。慨慨天下事不止於今但已。義士之骨誰收。校堂之浼誰洗。繼以爲私痛。雖余年迫七旬。手腳莫運。而伏櫪老驥。猶有千里之志。其心則以臥死牖下爲深恥。而實心相委。誰復其人。九原不可作。有淚漣洏而已。鍾基曳衰三舍。屬余以狀德。嗚呼。吾何忍辭。1909년 간행된 최익현(崔益鉉,1833~1906)의 시문집 ≪면암집(勉菴集)≫ 11권에 1901년 10월 4일 안규용(安圭容,1860-1910)에게 보낸 편지글이 남아있다.答安公三圭容○辛丑(1901)十月四日 a_325_265b 猥蒙尊慈眷戀賁趾。陋室重垂金玉。此意良勤。雖求之古人而未易得者。感領何可言。謹審伊來省餘佔畢。日有事在。抖擻照檢。想不以幽獨而爲差殊看。爲之健誦。殆不能已也。僕三夏傷炎。餘憊未祛。委頓床席。其狀可憐。重以湖西農形。全數歉荒。大同運數。末由逃遁。只當任之天命而已。奈何。2019.4.9. 수정
    2018-06-28 | NO.88
  • 선거이지려 宣居怡之閭
    광주시 광산구 도호동 600(원도산마을)선거이의 충신정려는 현재 도산동에 있으나 원래는 고내장(지금의 송정동)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립연대는 조선 순조 원년(1801)으로 조정에서 족려(族閭)를 명하여 제실을 포함한 원산사(서원)로 세워졌으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서원은 없어지고 정면 측면 1칸씩의 골기와 8작지붕으로 되어있는충신정려만 이전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선거이의 행적을 보면 본관은 보성이고 자는 사신(思愼) 이중(怡仲), 호는 친친재(親親齋)이다. 적개공신 유성군 선형(宣炯)의 증손이며, 도사 선상(宣祥)의 아들로서 1545년(인종 원년) 7월 보성에서 출생하였다.1569년(선조2)에 겸사복에 임명되어 선전관으로 등용되고 1579년(선조12)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였다. 1586년(선조19)에는 함경도절도사에 이일의 계청군관이 되었고 이듬해 경흥부 녹둔도에서 조산만호(造山萬戶) 이순신과 같이 변방을 침범하는 여진족을 격퇴하였다.1588년 거제현령에 임명되어서는 청백리로서 선정을 베풀어 상주특사로 승진되었고 1590년에 전라우도수군절도사 겸 진도군수가 되었다. 1592년 3월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임명장이 도착하기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겸임하던 진도군수의 자격으로 이순신을 도와 '한산도 대첩'에서 대공을 세웠다. 1593년에는 부원수 겸 전라도 병마절도사로서 도원수 권율와 협력하여 행주대첩의 주역이 되었다.1598년(선조31) 11월 울산성전투에서 명군과 함께 이만여 병력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전후에는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훈록되었다. 대한민국 162보병여단이 '선거이 부대'라는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참고링크기묘문무과방목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U_6JOb_1579_150028&category=dirSer&isEQ=false&kristalSearchArea=P독립기념관 소장 병마절도사 교지 https://search.i815.or.kr/sojang/read.do?isTotalSearch=Y&doc=&adminId=1-002878-000선거이장군 기념사업회https://cafe.daum.net/general-sun2023년 1월 11일 수정
    2018-11-11 | NO.87
  • 송태만-용은 홍주송공태만 효행비
    광주시 남구 대촌동 상신마을1996년 4월용은홍주송공태만효행비는 상신마을 뒤 내동마을로 가는 길가에 있다. 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효도는 강상의 으뜸이요 백행의 근원으로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를 행해야 할 본분으로 알면서도 언행이 일치해서 세인으로부터 효자라고 칭송받기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므로 한 가문에 한사람의 효자가 나온다는 것은 만에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인데 홍주송씨 청심헌공파 가문에서 효자가 나왔으니 실로 아름답고 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오직 충효세전의 가훈에서 기인됨이라 하겠으나 공자께서 어버이를 공경하는 것은 인덕을 기르는 근본이다 하셨고, 후한세대의 위제가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에서 구하라 하였듯이 그들은 충과 효의 정신이 근본적으로 일치한다는 것을 세상사람들에게 입증시킨 본보기이다. 해광제민의 후예이며 사인수진의 자로서 어려서부터 자품이 온화하고 행의가 공건하였으며 언행이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를 받들지 못했음을 철천의 한으로 여기고 홀로된 어머니를 지성으로 섬기면서 그 뜻에 순응함은 물론이요 어머니의 마음을 항상 기쁘고 편안하도록 받들었다. 살림의 제반사를 어머니에게 맡기고 안팎일을 어머니에게 품의 해서 처리하였다.필요한 용돈은 어머니에게 사유를 말씀드리고 타서 썼으며 의복을 비롯한 가정에 필요한 물품을 살 때는 반드시 어머니 몫을 먼저 샀으며 심지어 동생들의 혼숫감을 살 때도 어머니의 옷을 먼저 사니 상인들까지도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철철이 관광을 시켜드림은 물론이요 명절때마다 가난한 이웃을 구할 때도 반드시 어머니의 명에 따랐다. 어머니가 병환으로 신고할 때 대소변처리와 약달여 드리는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았으며 상을 당해서는 조석상식을 가리지 않고 삼년동안 충우를 가리지 않고 날마다 성묘하여 호곡했다. 어머니가 임종 때 담배를 삼가라 하였으므로 평생 담배를 끊었으며 남은 유언도 착실히 실행하니 향리에서 효자라고 칭송하였다. 선영을 위한 정성이 지극하여 문중의 대소사에 적극 협력하며 선조의 묘역 정화와 석물을 세우는데 앞장서니 종중은 물론 사림에서도 칭송하였다. 1980년 광주향교에서 효자포상이 있었고 정남 호근과 차남 창근이 서울에서 공장을 경영하며 이들을 거느리고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에서 살고 있다.서기 1980년 8월 20일광주향교 전교 고운석 찬영광 강진구 근서서기 1996년 4월 7일 입비
    2018-06-17 | NO.86
  • 송파 김해김공 유인 밀양박씨 효열비
    광주시 남구 진월동(노대동) 노대마을1914년노대마을 앞에 송파 김경두(松坡 金炅斗)의 처 밀양 박씨의 효열(孝烈)을 기념하는 비가 있다.효덕동 노대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송파 김경두와 그의 부인 밀양박씨의 효행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비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오직 효(孝)와 열(烈)은 삼강(三綱) 가운데 첫번째요 두 효자와 열녀(烈女)가 한 가문에서 배출하고 부부(夫婦)가 겸하였다는 것은 옛날부터 매우 드물게 볼 수 있는 일이다. 풍속을 바로 세우는데 일조(一助)가 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할진데 지금까지 효열사례가 어둠에 묻혀 있으니 어찌 이 세상에 개탄스러울 일이 아니겠는가, 김공(金公)의 이름은 영두(霙斗)요 자는 중집(中集)이며 아호는 송파(松波)로 가락국 수로왕의 후손이다. 절효선생(節孝先生)은 그 가문의 중조(中祖)요, 탁영선생(濯纓先生)은 덕업과 문장이 뛰어난 분으로 공의 9세조(九世祖) 되는 분이다. 증참의(贈參議)이신 현상(顯祥)과 증한성판윤이신 재선(再善)과 증사복시정필 등 세 분은 공의 고조, 증조와 조부되는 분들이요 아버지의 이름은 창섭(昌燮)이고 어머니 광산이씨의 아버지는 광식(光植)이다. 벼슬이 통정대부이신 창익(昌益)과 숙부인 밀양박씨는 생가집 부모님이다.1812년 3월 10일에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재주가 총명하여 일찍이 학문을 이루었다. 효심으로 부모님을 봉양하였고 양아들로 들어와 양부모 섬기기를 생가 부모님을 섬기듯 하여 병석에 눕자 늘 간호하였고 양부모님의 똥맛도 보았으며 자신의 손가락 피를 흘려 환을 지어 먹게 할 때 반드시 먼저 맛을 보았다. 초상을 만나서는 간장 등 채소를 먹지 않고 곡성이 끊기지 않았으며 움막에서 3년 복을 마쳤다. 그 뒤에도 성묘를 하고 사당에 절을 하며 자신을 닦아 가정을 바르게 하였다.부인 밀양박씨의 아버지 이름은 세정(世貞)이니 문헌공(文獻公)이신 영균(永均)의 후손이다. 1811년에 태어난 부인은 친정에 있을 때에도 효녀로 알려졌으며 출가하여서는 효성으로 시부모를 섬겼고 예의로 남편을 섬겼다. 남편께서 기이한 병마를 만나자 치료하는데 약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결국 남편이 일어나지 못하고 죽으니 그 뒤를 따라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샘물에 몸을 던지려 하기도 했고 혹은 목을 매려 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가족들의 구원이 있었다.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거두는 일과 장례 치를 일을 몸소 준비하여 가족들에게 믿음을 주었으며 얼굴에 슬픈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시어머니까지도 자기를 잘 봉양해 줄 것을 믿고 부인의 태도 감시가 조금 풀어졌다. 장례를 마친지 7일 뒤에 조용히 침실에 들어가 남편의 옷을 둘러쓰고 남편의 허리띠로 목을 메었다. 뒤늦게야 가족들이 깜짝 놀랬으나 구원할 길이 없었으니, 즉 1840년 5월 15일이며 나이는 겨우 30이요, 노대실 남쪽 석림등에 오좌(午坐)로 남편과 함께 장사하였다.딸 하나를 생산했는데 성장하여 황추인(黃秋仁)에게 시집갔으며 조카 용순(容淳)도 뒤를 이었고 마을 또는 군민 도(道) 유림 등이 서로 교대하여 그 부인의 효열을 천거하였다. 아~ 요즈음 관리들 가운데 글공부를 하여 의리(義理)를 안다고 하는 대신(大臣)이라는 것들이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아먹었다. 여자들은 규방에서 성장하였기에 옛날부터 여인들의 절행(節行)이 간혹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이제 부인의 효열을 표출(表出)하기 위해 모든 가족이 힘을 합해 비석을 세우려고 상기(相基)를 나에게 보내어 비문을 요청하였다. 그의 요청을 거역하지 않았다.기우만(寄宇萬) 엮음, 1914년 9월
    2018-06-13 | NO.85
  • 수원백씨충효정려각 水原白氏忠孝旌閭閣
    광주시 북구 우치로422번길 28(삼각동)1859년이 수원백씨충효정려각은 삼각동 월산마을 입구에 있다. 충신 백홍암(白弘嵒)과 효자 백찬수(白讚洙, 1822~1858)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859년 국가에서 명정(酩酊)하고 1962년 4월 24일 현 장소에 이건하였다. 이 정려각은 콘크리트 바닥에 덤벙주초를 놓고 원주기둥을 세워 일식기와를 얹은 소슬문으로 되어있다.충효를 겸비한 백홍암은 병자호란 때 이흥발(李興?)과 같이 의병을 일으켜 청주까지 진군하였으며 돌아와 부모님을 섬기며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친상(親喪)을 당하여 시묘(侍墓)를 3년 동안 살았는데 범이 항시 호위하였다 하여 그곳을 호계라 하였다 한다.백찬수의 자는 대연(大宴), 호는 곡은(梏隱)으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님 섬기기를 잘하였으며 친상을 당하여는 예(禮)대로 행하는 한편 선대 홍념공의 충효사적을 찾아 정려를 받도록 하였다. 이에 백홍암은 <忠孝贈嘉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剖總官白弘嵒之閭>라 하고 백찬수는 <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白贊洙之閭>라 하려 명정하였다.
    2018-11-12 | NO.84
  • 심남일-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의병장남일심공순절비(義兵將南一沈公殉節碑)이 비는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과를 거두고 순국한 심남일(沈南一, 1871~1910) 의병장의 뜻을 길이 전하기 위해1972년 건립되었다. 찬자(撰者)는 이은상(李殷相)이고, 서자(書者)는 신호열(辛鎬烈)이다. 앞에 순절비건립에 찬조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방명비(芳名碑)가 있다. 한말 대표적인 의병장인 심남일은 1871년 2월10일(음력) 전라남도 함평군 해보면 금덕리(고모리)에서 심의봉과 진주 강씨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고, 호는 덕홍(德弘)이다. 남일은 별명이다. 어려서부터 담력이 크고 사서삼경에 능통하였으며, 고전을 섭렵하고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동양철학에도 능통하였다. 성장하여 서당의 훈장과 향교의 전교를 지냈으며 전형적인 유생의 모습이었다.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의병을 일으켜 강진, 퇴계원, 남평, 나주 등지의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며,1907년에 창설된 기삼연의 연합부대가 해체되자 1908년 2월 남평에서 봉기하여 의병투쟁의 장을 열었다. 심남일 부대는 빠른 시기에 대규모 병력을 형성하여 함평을 근거지로 나주, 영암, 무안, 강진 등 전남 서부 지역과 남부지역 일대를 장악하여 일제를 위협하였다. 호남창의 회맹소의 부장으로 활동 하다가 김태원 형제가 죽자 잔여의병을 수습하고 전남제일의 의병장이라는 의미로 스스로 남일이라 불렀다. 이 부대는 권택, 안규홍,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펴기도 하였다.심남일 의병장은 1907년 11월1일 전남 각 지역에 격고문을 붙이고 향교에 통문을 돌리며 의병을 일으켜, 이후 1909년 7월 21일까지 3년여에 걸쳐 전남 남서부 지역에서 일본 헌병대, 주재소, 수비대, 순사대, 토벌대, 헌병보조원들을 척결대상으로 삼고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으며, 20여 전투에서 약 300여명의 적을 사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광주주재 경무사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또한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일본군과 경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며, 일제의 앞잡이로 양민을 괴롭히거나 수탈한 사람들을 응징하였다. 1909년 5월에는 의병해산의 조칙이 내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는 1909년 7월21일 전남 영암군 금마면 고인동에서 의병을 해산하고 일제의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으로 체포될 때까지 1909년 9월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의 바윗굴에서 선봉장 강무경과 같이 은거하던 중 그해 8월26일 일본군에 체포되었다.광주로 갔다가 12월15일 1910년 대구감옥으로 이감되어 이듬해 7월23일 39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으며, 지금은 동작동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8번)에 안장되었으며 광주공원에는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순절비가 세워져 있다.
    2018-06-11 | NO.83
  • 양건당황공정려중수기 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
    정의림 일신재집 권14鄭義林(1845~1910) 《日新齋集》兩蹇堂黃公旌閭重修記嗚乎此故 宣廟朝名臣兩蹇堂黃公忠孝褒旌之閭也公事親至孝 事君盡忠 始以孝蹇 後以忠蹇 卒能殞身立慬於帶方城陷之日 至行大節 貞忠偉烈 足以扶綱常於天下起懦頑於百世 若其事蹟梗槩 野史國乘 昭載備錄此不必架疉焉 至正崇乙卯棹楔成 命七世孫鎭奎與諸宗創始之 後九十七年 今上甲午 承贈貤之典因以改題揭板及新丹雘之飾 盖九世孫柬之戶也後十四年丁未 以歲久材朽 慮有頹圯之患 將改建而一新之盖十世孫慶炫十二世孫悅周 倡諸宗而經營之也 嗚乎 世衰道徵 九野閉塞 未知公之忠魂義魄 其亦有以鑑此耶 今日之重建 未始非裨補世敎之一助云爾*양건당 황대중黃大中(1551~1597) 양건당충효정려각은 전라남도 강진군 작천면에 있다. 2004년 11월 1일 강진군의 향토문화유산 제19호로 지정되었다.1795년(정조19년)에 장군 양건당 황대중(1551-1597)의 충효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고, 1894년(고종31) 중수, 1907년 중건되었다.
    2020-06-12 | NO.82
  • 양산숙-양씨삼강문
    광주시 광산구 박호동 산131-1 박뫼마을광주 기념물 제11호, 1985년 02월 25일 지정광주광역시 광산구 박호동에 있는 조선의 문신이며 임진왜란 때 활약한 양산숙과 일가 6명의 충효열 삼강문이다. 제주양씨삼강정려비가 있다.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忠愍公) 양산숙(梁山璹) 일가 7인의 충(忠)·효(孝)·열(烈)·행(行)을 기리기 위하여 인조 13년(1635)에 건립한 정려(旌閭)이다. 이곳에는 충신 양산숙 외에 효자·열녀·절부 각 두 명씩이다. 양산숙은 건재(健齋)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양산룡(梁山龍)은 양산숙의 형(兄)으로 군량미(軍糧米)를 모아 의병을 돕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피란하다가 삼양포(三洋浦)에서 왜적을 만나 어머니 죽산박씨(竹山朴氏)와 함께 바다에 투신, 순절하였다. 양산수(梁山岫)는 삼양포(三洋浦)에서 형(兄) 산룡과 더불어 어머니를 구하려다 같이 순절하였다. 죽산박씨(竹山朴氏)는 부제학(副提學) 양응정(梁應鼎)의 처이자 양산숙(梁山璹)의 어머니로 삼양포(三洋浦)에서 아들딸들과 함께 순절하였다. 양산숙의 누이인 김광운(金光運)의 처 양씨는 정유재란때 삼향포에서 왜군을 만나 바닷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양산숙(梁山璹)의 처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에서 왜적을 만나 항거하다가 자결하였다. 제주양씨(濟州梁氏)는 양산룡의 딸로 나주(羅州) 회진(會津)에서 왜적에게 붙잡혀 압송중 영산강(榮山江)에 투신, 순절하였다. 나주의 회진 임씨 문중에 출가하여 순절한 양산룡의 딸은 임씨 문중에서 따로 정려를 모시고 있어 현재는 6위의 정려만 모셔져 있다. 이곳은 생장지인 박뫼(博山)마을 앞 산기슭으로 삼강문은 정면 5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각 기둥 사이에 홍살문을 달았고 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다. 1803년에 이헌중(李憲中)이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이란 현판을 썼다. 양산숙은 양응정(梁應鼎)의 아들로 진주성 싸움에서 성이 무너지자 김천일·최경회·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양산룡도 김천일을 도와 의병에 가담하였고 정유재란 때 가족들을 피난시키고자 나주 삼향포(三鄕浦, 현재의 무안)에서 뱃길로 떠나려고 할 때 왜적들이 나타나자 그와 어머니 박씨부인을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바닷물에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정려는 여러 차례 상소 끝에 인조 13년 생원 홍탁의 상소로 세워지게 되었다.
    2018-11-11 | NO.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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