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 북구 충효샘길 7(충효동)1789년충장공 김덕령 충효리비(忠孝里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주(州)의 동쪽 30리에 있다. 광주 석저면(石底面)의 고비(古碑名)로 朝鮮國 贈左贊成 忠壯公 金德齡 贈貞敬夫人 興陽李氏 忠孝之里충효동 정려비忠孝洞旌閭碑는 김덕령金德齡(1567-1596)과 그의 가족의 충효와 절개를 기
전남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 204번지1739년신라왕자유허비(新羅王子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평장동(平章洞)에 있다. 김진상(金鎭商)의 음기(陰記)에 "광주의 서북쪽에 불대산(佛臺山)을 등지고 서석산(瑞石山)을 바라본 곳에 이른바 평장동(平章洞)이 있는데, 즉 옛날의 서일동(西一洞)으로서 나의 시조 신라왕
광주시 북구 효령동 636(우곡마을)1957년장렬사유적비(壯烈祠遺蹟碑)는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대로변에 있다. 金亨在 짓고 具哲祐 쓰다이 비는 1957년 광주광역시 북구 효령동 우곡마을 입구 큰길가에 세워 놓은 유적비이다. 장렬사는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06년 유림들에 의해 현재의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행주산성 전투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의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는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갚진 비다. 권율 장군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육지는 권율, 바다는
광주시 서구 용두동 산 79(봉산정사)이 조선유민현와고선생묘비명(朝鮮遺民弦窩高先生墓碑銘)은 현와 고광선 선생의 묘비명이다. 봉산정사 건너편 왼쪽의 산록에 있다.고광선은 광산구 안청동 석음 박노술의 풍천대를 1920년 세울 당시에 도유사를 맡는 등 지역의 중추적인 인물이었다. 영식재와 만취정의 상량
보성보寶城洑는 옛날에 보성군수를 지냈던 정화鄭和 군수가 지금의 광주 화정동 일대에 만들어놓은 보를 말하지요. 서구 화정2동 광주은행 화정지점 옆 자리는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조그만 수문이 있었습니다. 이곳을 가로질러 보성보라 불리는 일종의 방죽이 있어 인근에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물을 공급해주는 중요한
예로부터 광주에는 왕조대王祖臺라 명명하던 곳이 있었지요. 왕조대는 왕이 머문 곳 또는 왕이 군진軍陣을 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왕이란 다름 아닌 고려 왕조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을 말합니다. 이 왕조대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어느 해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 왕건과 견휜의
『세종실록』에는 광주의 나루터로 북구 용두동의 거진巨津과 함께 서구의 벽진碧津을 이야기한다. 벽진나루가 『세종실록』151권 지리지 편에 광주 옛 무진군을 설명하는 내용 중에 무등산은 진산이며 벽진도와 거진도가 있다고 했다.군의 서쪽에 있는 벽진나루는 영산강을 기준으로 그 동쪽에 위치한 광주 관아와 그 서쪽
광주에 다리가 언제부터 놓여 졌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나 강을 건너게 하는 다리는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옛 다리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광주의 옛 다리는 광주의 교통로를 따라 만들어졌다. 광주는 옛 길이 별로 크지 않았고, 타 지역으로 가는 데는 광주읍성의 4대문을 통
서구 매월동 519-1옛날에는 개산, 회산마을 사이로 하천이 흘렀다. 각시봉과 백마산에서 내려온 작은 물줄기가 개산을 지나 개산제로 모여 세하천으로 흘러갔는데 개금산의 작은 물줄기도 회산을 거쳐 개산제로 흘러들었고, 학산사 뒷산과 화방산花芳山 물도 매월제에 모여 개산제로 흘러들었다. 이곳 들판의 야트막한 산에
서구 서쪽 30리영모재永慕齋는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30리인 조교동造橋洞에 있다고 했다. 진사 둔암遯庵 김덕일金德鎰 및 참의 소천素泉 김성도金成道가 건립했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1836~1905)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의 기문을 비롯하여 교리 이병관李炳觀(1858~ ?), 진사 임원철林源喆의 차운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광주지하철 화정역 4번 출구로 나와 하동정씨 추선회관 쪽으로 내려오다 왼쪽 골목으로 꺾어 조금 걸어 들어가면 도심과는 낯선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사당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아파트를 담벼락과 병풍 삼아 자리하고 있는 화담사花潭祠가 그곳으로, 하동 정씨 사당이다. 1776년(영조5
문헌상 가장 이른 광주권 누정은 고려 말기인 14세기 후반의 경렴정景濂亭이다. 주인은 경렴 탁광무卓光茂(1330∼1410)로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에게 배우고 이색, 정몽주, 문익점, 이숭인 등과 교류했다. 탁광무는 고려 공민왕 때 우사의右司儀로서 신돈에 아부하여 행패를 부리는 홍영통洪永通을 탄핵했다가 파
서구 유촌동 (옛 극락면)한말 효자였던 정석동鄭碩東이 지었다는 계정溪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고 여러 사람의 제영이 있다고 했다. 정석동은 하동정씨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鄭守忠(1401~1496)의 후손이다. 주역, 소학 등의 경서와 산수를 좋아하여 찾아다니며 시를 읊었
서구 서창동『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광산현에는 극락원極樂院이라고 하고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대에는 앞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왼쪽에는 서창교 일대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조선 중엽까지 한양길 중 하나였다.극락원은 조선 중엽 이후에는 사라진 역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일대에서는
서구 주월동농은정農隱亭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다.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제자인 참판 농은農隱 이돈식李敦植(1847~1920)이 세웠고 춘담 기동준(1860~1918)의 기문과 현와 고광선(1855~1934)의 명문이 있다. 옛 광주은행 화정동지점과 보성보寶城堡 인근 주월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정
서구 매월동 (동산부락)만취정(晩翠亭)은 1925년에 김용희(金容希, 1860.5.27~1927.7.21)가 매월동 화개산 기슭에 처소로 지었다. 김용희의 호는 송암(松菴) 또는 만취정이다. 유고가 2권 있다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현와 고광선이 행장을 썼다. 삽봉 김세근 장군의 후손이다.만취정은 『광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술헌述軒은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북쪽 20리의 회산마을에 있다.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五衛將(조선때 종2품 벼슬, 후에 정3품)을 지낸 강길회姜吉會가 건립했다. 사복시정司僕寺正 강주귀姜柱貴의 증손이고, 강재문姜在文의 아들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나 많은 훼손이 생겨나자 그의 아
서구 세하동 (세동마을) 영이정咏而亭은 겸와謙窩 김재호金在護의 정자로 자신이 지은 영이정기와 원운시가 전하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광주읍지』(1924)와 광주향교의 『광주읍지』(1925)에는 서쪽 20리에 있다고 했다. 100여년 전에 지어진 정자였을 것으로 보인다.영이咏而는 논어 선진先進에 나오는데 처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