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판서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의 사우(祠宇)에 현액(顯額)을 내려 주기를 청하는 나주(羅州)의 유학 최규(崔珪) 등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2월 20일(무자) 맑음 나주(羅州)의 유학 최규(崔珪) 등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들이 제현(諸賢)을 제사 지내
전 교리 김홍석(金弘錫)과 같은 관사의 동료가 될 수 없는 혐의 등을 이유로 체직해 줄 것을 청하는 부수찬 강박의 상소 -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1월 24일(갑자) 맑음 부수찬 강박(姜樸)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은 맡은 직임에 대하여 참으로 몹시 외람되이
희정당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영의정 김자점 등이 입시하여 사역원 역관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 인조 26년 무자(1648) 10월 13일(갑진) 맑음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좌의정 이경석(李景奭), 병조 판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정조 22년 무오(1798) 11월 30일(기축)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옥과 현감 송명흠이 올린 김인후ㆍ유팽로 등의 사액을 청하는 상소 - 영조 32년 병자(1756) 4월 14일(신해) 옥과 현감(玉果縣監) 송명흠(宋明欽)이 상서(上書)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중략>신은 삼가 생각하건대, 김 인후는 높은 자질과 바른 학문으로서 효릉(孝陵)
인경 왕후의 지문 - 숙종 7년 신유(1681) 2월 22일(병오)지문(誌文)에 이르기를,“삼가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을 생각하건대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깊이 생각하셔서 미리 우리의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세워 세자(世子)를 삼으시고, 이미 또 옛 제왕(帝王)의 흥망 성쇠(興亡盛衰)가 비필(妃匹)로 말미암지 않는 바
박 도사 광원 가 광주에서 왔다가 돌아갈 적에 절구 두 수를 지어 작별하면서 주다〔朴都事 光元 自光州來其還歸作二絶贈別〕 - 한포재집 제2권 / 시(詩) : 이건명(1663~1722)1.절해고도엔 찾는 발길 없어 / 絶海無人問온종일 사립문 닫혔었는데 / 荊扉盡日關고맙게도 그대가 멀리서 방문하니 / 感君勞遠訪마주 대하곤 얼
《손재집》 발문〔遜齋集跋〕 [이민보(李敏輔)] 호남(湖南)의 학문은 하서(河西)와 고봉(高峯)에게서 말미암아 백여 년이 되었는데, 고(故) 징사(徵士) 손재(遜齋) 박공(朴公, 박광일朴光一 : ?~?)이 일어났다. 공은 우헌공(寓軒公)의 아들로 나이 겨우 약관의 나이에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호(號)) 노선생을 사사(師
손재 박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묘갈 우암(尤菴) 문정 선생(文正先生)이 돌아가신 뒤, 그의 문인들 대부분이 호서와 호남에 흩어져 살았다. 배우는 자들이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남방에서는 손재(遜齋) 박공 광일(朴公光一)이 그들의 선망이었다.공은 본관이 평양(平陽)으로, 대제학(大提學
백련사 어록〔白蓮社語錄〕 - 손재집 제9권 / 어록(語錄) : 박광일(朴光一, 1655~1723)○ 기사년(1689, 숙종15) 2월에 선생께서 세자(世子) 세우는 일로 상소하였다. 사헌부(司憲府) 관원이 논계하여, 선생을 제주도에 안치(安置)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달 18일 선생께서 선암(仙巖)에 도착하였다. 광일이 미리 여기서
화양동 어록〔華陽洞語錄〕 -손재집 제9권 / 어록(語錄) : 박광일(朴光一, 1655~1723)○ 을축년(1685, 숙종11) 2월에 화양정사(華陽精舍)에 가서 선생을 뵈었다. 선생께서 “해를 이어 방문하니 극히 다행이네만, 이번에는 또 무슨 까닭에 궁벽한 산속 적막한 곳을 찾아왔는가?”라고 하고, 이어 부모 모시고 지내기 편한지 물
소은 박공 중회 에 대한 제문〔祭素隱朴公 重繪 文〕 -손재집 제8권 / 제문(祭文)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숭정(崇禎) 세차(歲次) 임신년(1692, 숙종18) 10월 병자삭(丙子朔) 21일에 족숙(族叔) 광일(光一)이 술과 과일을 올리고 소은(素隱) 박수여(朴受汝)의 영연(靈筵)에 고합니다.아, 수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인
삼연 김공 창흡 의 〈소쇄원〉에 차운해서 능주 사또 조 정이에게 부치다〔次三淵金公 昌翕 蕭灑園韵 寄竹樹使君趙定而〕- 손재집 제1권 / 시(詩) : 박광일(朴光一, 1655~1723)중국 땅은 어둡고 악취가 진동해서 / 九有冥蒙腥臭鄙칠 척의 이 내 몸이 갈 수 없지만 / 七尺身無可往矣우리나라에도 산수가 있어 / 惟我箕封山
문곡 김상국에게 보내는 편지〔與文谷金相國書〕 - 서하집 제17권 / 서독(書牘)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봄날이 아직도 찬데, 삼가 이 시기에 대감의 조섭이 계절에 맞게 편안하시리라 생각하며, 구구한 마음에 지극히 우러러 사모합니다. 저는 집안의 우환이 잇달았는데, 지난달에 또 서매(庶妹)의 상을 당하였습
김 장군 전[金將軍傳] - 서하집 제14권 / 전(傳)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장군의 이름은 덕령(德齡)이고, 자는 경수(景樹)로,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의 사람이다. 아버지 붕섭(鵬燮)과 조부 익(翊)은 재행(才行)이 있었으나 모두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업(儒業)에 종사하였으니, 장군도 어릴 적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직무 수행 기록 - 미산집 제8권 / 기(記) : 한장석(韓章錫, 1832~1894)갑술년(1874) 2월에 나라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어 증광시를 시행하였으므로 내가 왕명을 받고 호남좌도에 가게 되었다. 3월 상순 임자일에 대궐에 이르러 하직인사를 올리고 계판(啓板) 앞에서 별도로 분부를
우재 선생께 올리는 편지〔上尤齋〕 -문곡집 제27권 / 서독(書牘): 김수항(金壽恒, 1629~1689)늦가을, 어르신께 문안을 가는 광주(光州)와 나주(羅州) 유생들이 있어서, 삼가 편지 한 장을 써서 문후를 여쭈었고 아울러 《차의(劄疑)》 한 책을 보냈는데, 과연 지체되지 않고 제대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식이 뜸
기우용문현 에게 답함 신축년(1841, 헌종7) 2월〔答奇羽用 文鉉○辛丑二月〕 - 매산집 제16권 / 서(書) :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 1776~1852)학궁(學宮)은 수선(首善)하는 곳이므로 사양함을 예(禮)로 여기는데, 사양함은 나이가 많은 이를 높이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른바 “연향(宴享)할 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