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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 박광일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손재 박공 묘갈〔遜齋朴公墓碣〕 - 손재집 묘갈


우암(尤菴) 문정 선생(文正先生)이 돌아가신 뒤, 그의 문인들 대부분이 호서와 호남에 흩어져 살았다. 배우는 자들이 날마다 도의(道義)를 강구하고 연마하였는데, 남방에서는 손재(遜齋) 박공 광일(朴公光一)이 그들의 선망이었다.


공은 본관이 평양(平陽)으로, 대제학(大提學)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이 우리 조선조에서 처음으로 현달하였다. 그 후 훈봉(勳封)을 세습하다가 교위(校尉) 박창신(彰信)이 있었는데, 박이공(朴而恭)이 자취를 감추고 남방에 숨어서 자손들은 마침내 광주(光州) 사람이 되었다. 창신교위로부터 5대를 내려가 우헌(寓軒) 박상현(朴尙玄)에 이르렀으니, 공은 우헌의 아들이다.


어머니 고씨(高氏)가 공을 잉태했을 적에 국화가 뜰에 만개하는 꿈을 꾸었다. 우헌은 평소 《주역》에 조예가 깊었는데, 문정공이 말년의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다. 공은 어려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효제(孝悌)의 도리에 관해 듣는 것을 기뻐하였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 《계몽편(啓蒙篇)》, 《태극도설(太極圖說)》 등과 같은 여러 책들을 모두 읽었다.


문정공이 봉산(蓬山)에 위리안치되었을 적에 공은 나이가 스물 셋이었는데, 부친의 명에 따라 폐백을 갖추어 배알하였다. 선생은 공의 영특함을 기뻐하여 오래도록 힘써서 큰 학문을 이루라고 격려하였다. 공은 이때부터 거경궁리(居敬窮理)가 성문(聖門)의 요결(要訣)임을 알고 부지런히 힘써서, 의심스럽거나 잘 모르는 곳이 있으면 한결같이 선생께 나아가 바로잡아 식견(識見)이 정밀해졌다. 요씨(饒氏)가 이(理)를 본(本)으로 삼고 사(事)를 말(末)로 삼은 잘못을 논함에 이르러서는 선생이 매우 칭찬하며 “물을 담더라도 새지 않겠구나.[置水不漏]”라고 하였고, 선생이 조정의 명을 받아 《주자대전(朱子大典)》을 교열할 적에는 공에게 참석하여 확인하기를 요청하였다.


기사년(1689, 숙종15)에 선생이 탐라로 유배를 갈 때 절간에서 바람을 기다렸는데, 공은 사우들과 함께 송별하는 기회에 호연장(浩然章)의 문답과 괘변설(卦變說)을 질문하여 문득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선생이 초산(楚山)에서 화를 입을 적에 수암(遂菴) 권공(權公 권상하(權尙夏))과 함께 들어가 영결을 고하였는데, 선생은 권공을 돌아보면서 “괘변(卦變)의 뜻은 사원(士元)의 설이 가장 명확하다.”라고 하셨으니, 사원은 공의 자(字)이다.


공은 이후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문을 닫아건 채 학문을 강마하였다. 우헌공이 일찍이 나무틀로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는데, 공이 대바구니를 사용하여 그 제도를 확대시키자, 우헌공이 놀라면서 기뻐하였다.


공은 부친을 여읜 뒤 스스로 분발하여 “내가 불행히도 아버지와 스승을 잃었으니, 공력을 백배로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이 될 수 있으랴?”라고 하고는 심사숙고하고 배움을 실천하느라 먹고 자는 일조차 거의 잊었으니, 호남의 학자들이 우르르 그에게 달려갔다. 당시 수암(遂菴)이 황강(黃江)에 있었는데, 공은 편지를 보내 경전(經傳)의 뜻을 논변하였다. 수암은 그때마다 적확(的確)하고 타당하다고 칭찬하였으며, 가끔은 자신의 견해를 버리고 공의 설을 따르기도 하였다.


신사년(1701, 숙종27)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지만 병 때문에 사양하였으며, 익위사 시직(翊衛司侍直)과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연달아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지리산 문수동(文洙洞)에 터를 잡고 거처하며 산수를 즐기면서 그 사이에서 자적하였다.


정유년(1717)에 시강원 자의(侍講院諮議)에 배수되었지만, 여러 번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문정공이 사당(邪黨)에게 무고와 모욕을 당하자, 공은 상소문 말미에서 통렬히 분변하면서 그들을 토벌하고 복수할 뜻을 드러냈지만, 상소를 올리지는 않았다. 체직되어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었지만 또한 사양하였다.


신축년(1721, 경종1)과 임인년(1722)에 화가 일어나 문정공이 도봉서원(道峯書院)에서 출향(黜享)되자, 공은 애통해하면서 “백성들이 아마도 오랑캐가 되리라.”라고 하였다. 장암(丈菴) 정공 호(鄭公澔)가 남쪽으로 이배(移配)되어 마을을 지나치자 공은 찾아가 뵙고 새벽까지 학문을 논하였다. 간암(艮菴) 이공 희조(李公喜朝)가 낭주(朗州 전라도 영암)에서 서쪽으로 유배지를 옮길 적에 간암이 세상의 앙화를 근심하자, 공은 혀를 차거나 위로하는 말도 없이 다만 “평파왕복(平陂往復)은 하늘의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숭정(崇禎) 을미년(1655, 효종6)에 태어나 계묘년(1723, 경종3) 12월 임신에 세상을 떴는데, 임종 하루 전날까지 친구들에게 손수 답장을 쓸 정도로 정신과 기운이 온전하였다. 병이 깊어져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울자, 공은 그들을 위해 밤과 낮의 이치로 타일렀다. 공이 세상을 뜨자, 광주의 정광산(凈光山)에 장례를 지냈다.


아내는 청천 정씨(菁川鄭氏)로 현감(縣監) 정택주(鄭宅周)의 딸인데, 공보다 4년 먼저 세상을 떴다. 큰아들 중휘(重輝)는 일찍 죽었고, 둘째 중거(重擧)는 생원을 지냈으며, 딸은 진덕유(陳德維)에게 시집갔다.


중거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생원 휘진(徽鎭)은 중휘의 후사가 되었고, 한진(漢鎭)은 진사(進士)이며, 하진(夏鎭)은 생원이다. 중휘의 딸들은 이경일(李慶一)과 양종원(楊宗元)에게 시집갔고, 중거의 딸들은 이진희(李晉禧),조석옥(曺錫玉),서진호(徐震灝)에게 시집갔다.


휘진의 아들은 성호(聖浩),성회(聖淮),생원 성은(聖溵)이고, 딸들은 정술선(鄭述善),이정근(李貞根)에게 시집갔다. 한진의 아들은 성준(聖濬),성온(聖溫),성탁(聖濯)이고,딸은 이원(李烜)에게 시집갔다. 하진의 아들은 성발(聖潑)이고, 딸들은 이성태(李成泰),송영순(宋英淳),김몽석(金夢舃)에게 시집갔다.


공은 수려하고 화락하며 기상과 도량이 편안하고 중후하였다. 남과 어울릴 적에는 온화하고 관대해서, 보기만 해도 군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항상 비바람을 가릴 수 없었지만, 느긋하게 처하였다.


우헌공은 벗들과 강설(講說)하기를 좋아해서 객들이 늘 자리에 가득했는데, 공은 힘을 다해 뒷받침하여 우헌공으로 하여금 그 살림이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모님의 병이 심해졌을 때마다 모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드시게 하고 상중에는 예를 다하였으며, 해마다 먼 조상들의 묘를 수리하여 여러 종친들과 우호를 다졌다. 그의 학문은 가정에 뿌리를 두고 마침내 대현(大賢)을 목표로 삼았기에, 이 때문에 문로(門路)가 바르고 실천이 돈독하였으니, 어진 부형(父兄)과 사우(師友) 없이 덕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드물기 마련이다.


공은 일찍이 《나소변무(羅疏辨誣)》와 《진호문답(晉湖問答)》을 저술하여 사문(斯文)을 위해 시비(是非)를 가렸으며, 또 벽에다 ‘숭정일월(崇禎日月)’이라고 크게 써 놓고 때때로 〈출사표(出師表)〉담암(澹菴)의 상소문을 암송하며 비분(悲憤)한 심정을 달랬다. 문정공이 주자를 독실하게 믿었고 공이 문정공을 독실하게 믿었던 까닭에, 이단을 물리치고 대의를 밝힌 것이 이와 같았다. 또한 그가 베푼 경설(經說)에는 자득(自得)한 뜻이 간간이 있었으나, 요컨대 주자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뒷날 반기를 들며 스스로 깨우쳤다는 사람은 유독 무슨 심보인가? 공과 같은 분은 이 노인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집안에는 명성도(命性道)와 삼재(三才), 태극(太極)에 관한 도설(圖說), 하도(河圖)의 생수(生數)와 성수(成數), 고괘(蠱卦)에 관한 선후의 갑설(甲說)[蠱卦先後甲說], 차기(箚記), 면재(勉齋)의 오행설변(五行說辨) 등 몇 권의 책이 보관되어 있다.


중거(重擧)가 와서 명(銘)을 지어 달라고 청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스승은 자양(紫陽)의 뒤를 이었도다.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는 해와 달인데, 아! 사설(邪說)이 홍수보다 심하여라. 내가 들은 말 있으니 하늘은 잊지 않아서, 힘쓰고 부지런하면 비색한 운이 형통하게 되리라. 주작영(朱雀影) 가운데 우뚝 솟은 한 기둥이라 하였으니, 수옹의 이 말로 명을 삼을 수 있으리라.


삼주(三州) 이재(李縡)는 삼가 짓다.


[주-D001] 문정 선생(文正先生)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가리키는데, 그의 시호가 문정이다.
[주-D002] 박석명(朴錫命) : 
1370~1406. 여말선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이고 호는 이헌(頤軒)이다. 1385년(우왕11)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판서를 지냈고, 태종 때에 좌명 공신(佐命功臣)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주-D003] 봉산(蓬山) : 
1675년(숙종1) 6월 이후에 송시열이 유배 가 있던 경상도 장기(長鬐)의 이칭이다.
[주-D004] 요씨(饒氏) : 
송나라 말기의 이학가(理學家)인 요노(饒魯)를 가리킨다. 그는 여간(餘干) 사람으로, 자가 백여(伯與), 중니(仲尼)이며, 황간(黃幹)의 문하(門下)로서 석동서원(石洞書院)을 세우고 강학하였다. 그의 학문은 주희를 근본으로 하였으나, 주희의 학설을 그대로 고수하지만은 않았다. 《오경강의(五經講義)》, 《어맹기문(語孟紀聞)》, 《근사록주(近思錄注)》 등을 저술하였다.
[주-D005] 초산(楚山) : 
정읍(井邑)의 옛 이름으로, 1689년에 송시열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6월에 나국(拿鞫)의 명을 받고 상경하다가 그달 8일에 정읍에서 사사(賜死)되었다.
[주-D006] 황강(黃江) : 
충청북도 청풍(淸風) 일대의 남한강 유역에 있었던 고을 이름이다. 지금은 충주(忠州)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는데, 권상하(權尙夏)가 이곳에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주-D007] 문수동(文洙洞) : 
지리산에 있는 골짝 이름으로, 구례군(求禮郡) 토지면(吐指面) 오미리(鰲尾里)에서 문수사(文洙寺)까지 이르는 계곡을 가리킨다.
[주-D008] 장암(丈菴) …… 이배(移配)되어 : 
정호는 1722년(경종2)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耈)를 논척하다가 이산(理山)으로 귀양을 갔는데, 그해 10월에 다시 강진(康津)의 신지도(薪智島)로 옮겨 갔다. 《陶菴集 卷49 領議政丈巖鄭公行狀》
[주-D009] 간암(艮菴) …… 적에 : 
이희조는 1722년에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노론 사대신(老論四大臣)이 주살되자, 이들과 결탁했다는 죄로 문외출송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영암(靈巖)으로 정배되었다가, 11월에 철산(鐵山)으로 이배되었다. 《黎湖集 권29 芝村李先生行狀》
[주-D010] 평파왕복(平陂往復) : 
필연적인 세상의 변천을 뜻한다. 《주역》 〈태괘(泰卦) 구삼효(九三爻)〉에 “평탄한 것은 반드시 기울어질 때가 있고,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올 때가 있다.[無平不陂, 無往不復.]”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주-D011] 출사표(出師表) : 
제갈량(諸葛亮)이 출정하기에 앞서 한(漢)나라 유선(劉禪)에게 올린 글인데, 전후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전출사표〉는 선제(先帝)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국가에 대한 충성 및 후주(後主)에 대한 간절한 부탁을 담고 있으며, 〈후출사표〉는 위(魏)와 촉(蜀)이 양립할 수 없음을 피력하고 중원(中原)으로 진출하여 싸워야 함을 주장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三國志 卷30 蜀書5 諸葛亮傳》
[주-D012] 담암(澹菴)의 상소문 : 
담암은 송나라 때의 명신(名臣) 호전(胡銓)의 호이다. 그는 일찍이 금(金)나라와의 화의(和議)를 적극 반대하여, 당시 화의를 주장하던 진회(秦檜)ㆍ손근(孫近)ㆍ왕륜(王倫) 등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宋史 卷374 胡銓傳》
[주-D013] 반기를 …… 사람 : 
윤휴(尹鑴)와 박세당(朴世堂)을 가리킨다. 윤휴는 《독서기(讀書記)》라는 저서에서 《중용》과 《대학》 등 주요 경전을 해석하면서 주자(朱子)의 설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지탄을 받았다.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이라는 저서에서 사서(四書), 특히 《중용》과 《대학》에 더욱 역점을 두어 해석하면서 주자의 설을 비판하고 독자적으로 해석하였다.
[주-D014] 면재(勉齋) : 
주희(朱熹)의 문인(門人)인 황간(黃榦)의 호이다. 황간은 자가 직경(直卿)이며, 복주(福州) 민현(閩縣) 사람이다. 저서로는 《경해(經解)》, 《중용총론(中庸總論)》, 《면재문집(勉齋文集)》 등이 있다.
[주-D015] 자양(紫陽) :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여기서는 송(宋)나라 주희를 가리킨다. 주희의 아버지 주송(朱松)이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에 있는 자양산(紫陽山)에서 독서하였는데, 주희가 그곳에 청사(廳事)를 자양서당(紫陽書堂)이라 하였으므로, 자양은 주희의 호(號)가 되었다. 후세 사람들이 흡현에 자양서원(紫陽書院)을 세웠다.
[주-D016] 홍수(洪水) : 
원문 ‘회양(懷襄)’은 회산양릉(懷山襄陵)의 준말이다. 큰물이 창일하여 산과 언덕을 둘러싸고 있다는 뜻으로, 수습할 수 없는 낭패의 지경에 이른 것을 가리킨다.
[주-D017] 하늘은 잊지 않아서 : 
《순자(荀子)》 〈부(賦)〉의 내용으로 “밝은 하늘이 회복되지 않아 근심이 끝도 없구나. 천 년 이후에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이것이 도의 당연함이다. 제자들이여 힘써 공부하라, 하늘이 잊지 않으리라.[皓天不復, 憂無疆也. 千秋必反, 道之常也. 弟子勉學, 天不忘也.]”라고 하였다. 지금의 시련에 굴하지 않고 자신을 수양해 나아가면 언젠가는 바른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당부의 말이다.
[주-D018] 주작영(朱雀影) …… 있으리라 : 
주작영은 남쪽 7수(宿)의 별자리 이름으로, 흔히 중국의 최남단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우리나라 남쪽의 전라도에 박광일이 우뚝해서 든든했었다는 말이다. 《손재집》 권1의 〈세상을 탄식하는 노래를 수암에게 부치다[歎世吟寄呈遂菴]〉라는 시의 하단에 〈수암이 화답하다[遂菴所和]〉란 시가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 시의 전문(全文)은 “태산이 무너져 도가 멀어지려 하니, 시운이 바야흐로 양이 시드는 가을에 이르렀네. 주작영 속에 기둥 하나 우뚝하니, 이 늙은이 이제부터 근심하지 않으리라.[泰山頹矣道將幽, 時運方當大往秋. 朱雀影中亭一柱, 老夫從此不搔頭.]”라는 내용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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