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용의 『樂庵遺稿』는 5권 1책의 목활자본으로 1910년 후손 奇東斗 등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서문은 宋秉珣이 썼다. 송병순은 기정룡이 기대승이 살았던 터에 암자를 짓고 살았기 때문에 樂菴이라고 일컬어졌으며, 遜齋 朴光一로부터 기대승 이후의 1인이라고 평가를 받았고, 陶庵 李縡로부터
『大谷遺稿』는 김석구의 시문집으로 6권 3책의 목활자본이다. 序는 1901년 崔益鉉이 지었다. 최익현은 奇正鎭의 수제자로서 김석구의 학술상의 위치를 중국의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 비유하였다. 권1은 시이다. 모두 102수를 수록하였는데, 궁핍한 생활에 자족하면서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자연이나 천리에 대한 이치를 노
朴魯述의 자는 公善, 호는 石陰, 본관은 順天으로, 1851년에 光州 安淸里에서 觀魚軒 陽東과 長興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奇正鎭에게서 수학하였으며, 특히 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노사의 후손인 奇宇萬과 더불어 자주 논변이 있었다. 奇宇萬이 일으킨 의병활동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栗里田舍에 숨어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
기동준奇東準(1869~1918)의 『춘담집(춘담문집春潭文集』은 10권 5책 석인본으로 1966년 아들 奇近燮이 편찬했다. 詩(권1), 書(권2~6), 序(권7), 記(권8), 疏․銘․上樑文․祝文․祭文․碑(권9), 墓碣銘․墓誌銘․墓表․行狀․傳․附錄(권10)으로 되어 있다. 서문은 없고 아들 近燮이 跋을 붙였다. 권1은 시집으로 265수의 작품
이희용의 문집 《쌍석유고(雙石遺稿)》(1984)는 3권 1책의 석판본이다. 권1에는 20首의 詩와 松沙 奇宇萬, 勉菴 崔益鉉, 植齋 奇宰, 弦窩 高光善 등에게 보낸 70여 편의 편지글이 실려 있다. 권2에는 雜著, 序, 記, 祭文이 수록되어 있다. 권3에는 이희용의 「雙石亭原韻」에 차운했던 20여 인의 서문과 작품이 차례대
정의림鄭義林의 자는 계방季方, 호는 일신재日新齋이며 본관은 광산으로, 綾州 大德에서 鄭濟玄과 珍原朴氏 致聖의 딸 사이에서 1845년(憲宗 11) 11월 출생했다. 그의 선조들은 조선시대 때 纘 이후 나주에 줄곧 거주하였으나, 그의 증조 埰가 영암으로 이주하고 조부 加錫이 다시 능주에 이주하였으며, 정의림의 조부
광산구 삼도동 도림마을 지어재(志於齋)는 조선 영조때 광산에 살던 동강처사 오대하吳大夏(1677∼1743)가 강학터로 지어 지냈던 곳이다. 지어(志於)는 논어 술이(述而)편에 “도에 뜻을 두고, 덕을 굳게 지키며, 인에 의지하고, 예의 세계에서 노닐어야 한다.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는 공자 말의 의미를 담고 있다.나
심광헌沈光憲의 본관은 청송이며 자는 언장彦章, 호는 삼암三岩. 묵헌 심풍沈豊의 아들로 조선 1541년(중종36) 본량 동호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재능이 출중하고 학덕을 겸비하여 일에 임하면 충직하여 사림들이 추중하였다.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를 역임한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국은을 입은 가
쌍석(雙石) 이희용(李熙容, 1853∼1931)의 자는 國瑞, 본관은 全義로, 1853년 1월 27일 광주 흑석동에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행동거지가 단정했으며, 독실하게 배웠다. 1874년 약관에 장성의 노사 기정진 문하에 들어가, 1875년 莘塢 金祿休와 사귐을 맺고 노사선생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1879년면암 최익현을 만났다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의 자는 익삼(益三),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하동(河東) 정씨다. 아버지는 정지초(鄭志楚), 어머니는 강화최씨(江華崔氏) 사이에 광주광역시 오치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천성이 온후하고 행동거지가 단정하였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날마다 책을 읽었으며,
석계정(石溪亭)은 북구 오치동 정대현(鄭大鉉, 1873~1946)이 처사적 삶을 살았던 곳이다. 석계서실이라고도 부른다. 격동기에
살면서 어려서 과거 시험공부를 했으나 부질없음을 깨닫고 한말 의병장 송사 기우만에게 수학 후 학문을 배우며 지냈던 곳이다.이곳도 일제감점기 때 지은 것으로 보이며, 그가 직접 석계정 원
이지호(李贄鎬, 1836~1892)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아들 이승우(李承愚, 1855~1919)는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서양 오랑캐에 대응하여 자주적인 사상
광산구 《광주읍지》(1924)에 주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다. 광산구 용곡동 복룡산 기슭에 진사 김순식金舜植이 지은 관호정觀湖亭이 있었던 곳이다. 오랜 세월이 흘러 저절로 무너져 없어지자 그의 후손 김헌기金憲基가 원래의 터에 중건하여 탁금재라고 했다. 송사 기우만의 상량문 및 기문이 있었다.
북구 용봉동 전남대 학생회관 뒤편으로 이어가는 언덕자락은 용주龍珠와 반룡盤龍마을을 안고 있어 반룡희주盤龍戱珠의 명당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곳이 개발되기 전에 청음정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의 거리에 만포처사(晩圃處士) 김재화(金在華)가 지었다. 아들은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