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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觀察使) 어공(魚公) 진익(震翼) 의 신도비명 병서- 어진익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의 《한수재집(寒水齋集)》 제24권 / 신도비(神道碑)

관찰사(觀察使) 어공(魚公) 진익(震翼) 의 신도비명 병서


내가 일찍이 선배 어른들을 종유하면서 삼가 이조 참판에 추증된 관찰사 겸재(謙齋) 어공(魚公)을 보았는데, 너그러우면서도 절제함이 있고 곧으면서도 과격하지 않으며, 재주는 번잡한 사무를 처리하기에 충분했는데도 마치 무능한 것 같았고 청렴함은 세상을 경계시키기에 충분했는데도 명예를 바라는 데 가까울까 두려워하였으며, 변고와 험난한 일을 두루 겪으면서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거의 옛날에 일컫던 현대부(賢大夫)였던가 보다.

공의 휘는 진익(震翼)이요, 자는 익지(翼之)이다. 어씨는 상조(上祖) 화인(化仁)으로부터 비로소 함종(咸從)에 적(籍)을 두었다. 아조에 들어와서는 변갑(變甲)이란 분이 문과에 장원하여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는데,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면서 누차 소명이 내려도 나가지 않았다. 효첨(孝瞻)은 판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세공(世恭)은 호조 판서로 아성군(牙城君)에 봉해졌고 시호는 양숙(襄肅)인데, 이분들은 모두 문장과 훈업으로써 대대로 명신이 되었다. 고조 휘 계선(季瑄)은 좌참찬으로 아선군(牙善君)에 봉해졌고, 증조 휘 운해(雲海)는 평창 군수(平昌郡守)로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는데, 학행이 있어 율곡ㆍ우계 등 여러 선생들과 서로 친구로서 좋게 지냈으며, 조 휘 몽린(夢麟)은 동몽교관으로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고 휘 한명(漢明)은 세칭 명진사(名進士)로서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을 지내고 좌참찬에 추증되었는데, 병자호란 때에 강도(江都)에서 충성을 바쳐 효종의 칭찬과 감탄을 받았다. 비(妣)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참봉 숙(俶)의 딸로 모두 4남을 길렀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공은 천계(天啓 명 희종) 을축년 11월 6일에 태어났는데, 어려서는 준걸하고 석대하였으며, 자라서는 위대하게 기국과 도량이 있었다. 힘써 배우고 글을 잘 지어 겨우 15세가 되었을 때에 기예와 학업이 이미 진취되었으므로, 과시(科試)에 합격하여 매우 명성이 있었다. 무자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고 나서 임진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무술년에는 금오랑(金吾郞)에 천수(薦授)되었고, 차례에 따라 내자시 직장ㆍ호조 좌랑에 승진되었다. 임인년에는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대책(對策)으로 합격하여 병조의 좌랑과 정랑ㆍ함경도 도사ㆍ성균관 직강을 역임하였다.

을사년에는 지평이 되었는데, 이때 정언 이무(李堥)가 사사로운 은총을 받은 재상 허적(許積)을 논핵한 것 때문에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출되자, 공이 동료들과 함께 항쟁하니, 상이 진노하여 공을 먼 변방으로 찬축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공은 편안한 마음으로 대처하여 조금도 근심스러운 빛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삼사(三司)가 함께 쟁론하고, 영부사 이공 경석(李公景奭), 영상 정공 태화(鄭公太和), 좌상 홍공 명하(洪公命夏)가 또다시 차자를 올려 공을 변호하니, 상의 뜻이 조금 풀리어 다만 삭직할 것을 명하였는데, 뒤에 또 대신 및 간관의 말로 인하여 마침내 서용(敍用)되었다. 이로부터 누차 사헌부에 들어가, 안치되어 있는 죄인 윤선도(尹善道)를 감형하여 이배(移配)하라는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영남 사람 유세철(柳世哲)이 기해년 효종 승하시의 복제(服制)가 잘못되었다고 헐뜯어 무함한 죄를 논핵하였다.

그 사이에 병조로 옮겨졌고 다시 정언에 옮겨졌다가 얼마 안 되어 어버이 봉양을 위해 지방관으로 나가기를 요청하여 함평 현감이 되었다. 이때 대부인은 이미 백씨(伯氏)의 임소(任所)인 무안현에 있었으므로, 형제가 교대로 대부인을 판여(板輿)에 모시고 왕래하면서 한도가 없이 곡진하게 봉양하니,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 다음해에 어떤 일로 파직되어 돌아왔다가 다시 서용되어 정언ㆍ사서가 되고 사예ㆍ장령에 승진되었다.

경술년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상을 마치자 장령에 제수되고 종부시 정에 승진되었다. 공이 하루는 장령으로서 사헌부에 나가서 이미 전계(傳啓)하여 비답을 받았는바, 대사성 이공 민적(李公敏迪)이 일을 논한 것이 상의 뜻에 거슬리어, 상이 특명으로 그를 외직에 보임시키면서 당일로 발견(發遣)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때 금문(禁門)을 곧 닫을 시간이 되었으므로, 공이 즉시 아뢰기를 “이민적이 소장을 올리자마자 견벌을 바로 가하여 그를 빨리 발견하도록 재촉하시니, 이는 사람을 내쫓은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거조입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근래에는 제신들의 상소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상신(相臣)에게 관계가 되면 찬출이 잇따라서 조정이 거의 텅 빌 지경이니, 전하께서 장차 국사를 어디에 두시려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크게 노하여 하루에 두 번 아뢰는 것은 상규에 어긋난다 하여 특명으로 파직 추고하였다.

계축년에는 사복시 정ㆍ사서ㆍ문학을 역임하고 헌납에 옮겨졌다. 갑인년에는 사간ㆍ보덕에 승진되었다가 조정의 천거로 인하여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발탁 제수되었다. 이때 왜인(倭人)이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남방에 대한 근심이 한창 많았는데, 전 부사 권대재(權大載)가 자못 임상(任尙)의 정사를 썼던 터이므로, 공은 그 가혹했던 정사를 너그러움으로 대신하니,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행해져서 변경이 편안하였다.

그곳을 2년간 다스리는 동안에 절의 있는 이를 포창하고 군졸을 훈련시키고 낭비를 줄이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해 주니, 백성에게 은혜가 깊었다는 명성이 넘쳐흐르고 백성과 오랑캐들이 서로 다투어 칭송하였다. 그러자 순무사(巡撫使) 권대재 역시 여론에 따라 그 사실을 조정에 포양하여 보고했으나, 끝내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에 의하여 접수되지 못했다. 이윽고 당로자의 뜻에 거슬리어 마침내 체포 파직되기에 이르렀다.

정사년에 서용되어 형조 참의가 되었다. 마침 가뭄을 만나 죄인을 심리(審理)할 때에, 유배된 소유(疏儒) 이세필(李世弼) 등을 석방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연석(筵席)에서 강력히 쟁론하여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렸다가 마침내 다른 일로 책망을 받고 파직되었다.

뒤에 역적 윤휴를 이웃집에서 만났는데, 그의 만류를 받고서도 안색과 언사를 조금도 꾸미지 않고 즉시 옷을 떨치고 일어나버리니, 그가 크게 유감을 품었다. 이로 인해 그가 공이 동래부에 있을 때의 일을 다시 제기함으로써 공이 두 차례나 형리(刑吏)의 심문을 받고 끝내 도배(徒配)되기에 이르렀으나, 오래지 않아 방환되었다. 이에 앞서 참찬공이 양주(楊州) 마산(馬山)의 기슭에 별장을 짓고 손수 향나무와 잣나무 각각 두 그루씩을 심어 놓았는데, 공의 형제가 또 4인이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삼괴당(三槐堂)의 고사를 모방하여 그 사이에 정자를 지어 사수정(四秀亭)이라 편액을 써서 걸고 여러 자제들과 함께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유유자적하였다.기미년에는 여주 목사가 되었다.

신유년에는 호서 관찰사가 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남의 말에 의하여 사체(辭遞)되었다. 그러자 우암 송 선생이 차자를 올려 “어진익은 권간(權姦)이 임금을 속이던 때에 우뚝 서서 굴하지 않는 지조가 있었는데, 지금 남의 말에 의해 사체되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대신에게 물어서 다시 앞서 내린 관직 임명을 거듭 내리시어 어진익으로 하여금 그대로 버려진 인재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고, 연해서 세 번이나 차자를 올려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해에 광주 목사(光州牧使)ㆍ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다가, 뒤에 병조ㆍ예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동부승지를 거쳐 좌승지에 전임되었다.

계해년에는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본도의 전제(田制)가 소루함이 많아 조정에서 공에게 균전(均田)의 정사를 맡기므로, 공이 실시한 일이 많았으되 한결같이 요역을 균등히 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는데, 일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병의 위중함 때문에 해면을 요청하여 갑자년 봄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그리하여 이해 8월 25일에 백동(栢洞) 집에서 작고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부의와 조문을 의식대로 하였다. 처음에 고양(高陽)의 선영 곁에 장사 지냈다가 그로부터 27년 뒤인 경인년에 풍덕(豊德)의 망포리(望浦里) 건좌(乾坐)의 언덕으로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키가 크고 풍채가 훌륭하여 바라보면 걸출하게 보였다. 성품은 활달 솔직하고 호탕하여 간격이 없었다. 처음 공이 대각(臺閣)에 들어갔을 적에는 현모(賢母)의 교훈을 받고 더욱 스스로 격려하여, 무슨 일을 만나면 과감하게 말을 해서 권귀(權貴)를 피하지 않았고, 비록 임금의 엄한 견책을 받더라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였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너그럽고 간이하게 백성을 대하고, 청렴하고 신중하게 몸을 단속하였으며, 삼가고 힘써 법을 지키어 오직 직사(職事)만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공이 조정에 들어가 행사하는 사이에서 드러난 언론과 풍채가 이와 같았다.

평상시에는 효우하고 돈목하여, 홀로된 자씨(姊氏)가 연로하여 병들었으므로 그를 모셔다가 봉양해서 뜻에 맞게 해드렸고, 여러 아우들과 의식(衣食)을 분담해서 자씨의 자녀들을 시집 장가보냈으며, 이 마음을 종척(宗戚)에까지 미루어 또한 반드시 빈궁한 이를 구휼하고, 재(才)와 선(善)을 장려하여 성취시켰으므로, 모두가 공의 덕에 감복하여 귀의(歸依)하였다. 자제들을 가르치는 데는 매우 엄격하였고, 가속들을 거느리는 데는 법도가 있었으므로, 문정(門庭) 안에 존비의 질서가 정연하였으니, 이는 또 공이 집에 있을 때의 행의가 종족들에게 칭도된 것들이다.

공은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문재 또한 뛰어나서 사부(詞賦)를 짓는 데 있어 붓만 들면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갔고, 또 초서(草書)ㆍ예서(隷書)를 잘 썼으나, 평소의 뜻이 겸손하여 일찍이 시부나 글씨에 능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또 담박하고 조용함을 스스로 지키고 출세의 길을 좇아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나.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공을 향모하였는데,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ㆍ서하(西河 이민서(李敏叙))ㆍ외재(畏齋 이단하(李端夏)) 등 제공이 더욱 공과 친밀했다고 한다.

배(配) 정부인(貞夫人)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통사랑 휘 빈(玭)의 딸인데, 타고난 자품이 단장하고 정순하여 효성과 공경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 사이에 처해서나 여러 조카들을 무양하는 데 있어 매우 서로 화목하게 하였으며, 평소에 함부로 웃으며 말하지 않았고 갑자기 기뻐하거나 성내지 않았다. 나이가 8, 90세에 이르러서도 총명과 근력이 소장 시절보다 줄지 않았는데, 임종시에도 정신이 환하여 마치 평상시처럼 자제들을 훈계하며 얘기를 주고받았고, 유서(遺書)를 써서 자손들에게 제전(祭奠)을 힘써 간략히 하도록 경계하였다. 공과 동년생으로서 을미년 7월 1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91세였다. 이해 9월에 공의 묘 왼쪽에 장사 지냈다.

1남 2녀를 낳았는데, 남 사형(史衡)은 지금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가 되어 추은(推恩)으로 공에게 참판이 추증되었고, 장녀는 영의정 이유(李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참판 이의현(李宜顯)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어 후사가 없다. 돈녕은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유봉(有鳳)은 집의가 되었는바 경학으로 사림들 사이에 명망이 높고, 그 다음 유귀(有龜)는 문과에 급제하여 유수가 되었으며, 그 다음 유붕(有鵬)은 낭천 현감(狼川縣監)이다. 딸은 교관 김순행(金純行)에게 시집갔다. 영의정의 2남은 현응(顯應)ㆍ현숭(顯崇)이고 2녀는 윤혜(尹寭)와 참군 원명일(元命一)에게 시집갔다. 유봉의 1남 도응(道凝)은 관례(冠禮)를 하고 나서 요절하였고, 계자(繼子)는 석윤(錫胤)이며, 2녀 중에 장녀는 홍상한(洪象漢)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어리다. 유귀는 6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김시교(金時敎)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보상(李普祥)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홍계구(洪啓九)에게 시집갔고, 넷째는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책봉되었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유붕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석윤은 출계(出繼)되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외증손 남녀가 또 약간 명이다.

아, 공 같은 재기와 국량으로 나라의 큰 계책을 하는 자리에 처하여 자신의 포부를 다 펼 수 있었더라면 그 계책을 세운 것이 반드시 크게 볼 만하였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기국대로 다 쓰이지 못하고, 평생 동안 시행한 것이 겨우 안으로는 대간, 밖으로는 관찰사로서의 면모만을 드러낸 데서 그쳤으니, 어쩌면 그리도 불행하였는가. 아, 세상에는 큰 재주를 지니고도 불우한 자가 진실로 이와 같이 많으므로, 지금 이 묘문(墓文)을 지으면서 거듭 슬픔을 느낀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아, 빛나는 어씨 종족이여 / 於赫魚宗

창성한 조정에 갑자기 일어나 / 勃興昌朝

문신이며 훈신으로 / 乃文乃勳

대대로 고관을 지냈는데 / 世服大僚

평창은 행실이 돈독하였고 / 平昌行篤

운판은 명성이 높았었네 / 運判名高

공에게 이르러서는 / 式至于公

진실로 재덕이 뛰어나서 / 允矣俊髦

대간으로 직간하는 상소 올려 / 袖簡臺坡

수리가 하늘 높이 오르듯 뛰어났고 / 一鶚雲霄

임금의 비위 자주 거슬렀으나 / 尺鱗屢攖

성상께서 곧음을 받아들였네 / 聖主容直

남쪽 변진에 나갔을 땐 / 出鎭南邊

오랑캐도 공의 덕을 사모했는데 / 蠻人懷德

엉뚱한 모함을 받아 / 曰車載鬼

죄 없이 유배되었으나 / 匪罪而謫

겁화가 곤륜산을 다 태워도 / 劫火燒崑

타지 않는 건 옥뿐이었네 / 不燼唯玉

때 만나 동류와 같이 나가서 / 際時彙征

호서 관찰사가 되었는데 / 望歸湖嶽

누가 그 길을 막았던고 / 誰其尼之

우암 선생이 상소하여 배척했으나 / 大老疏斥

끝내 막아 통하지 못하게 하여 / 而違不通

백성 보호하지 못하게 되었네 / 亦曰殆哉

그러다가 동녘 토지 균전하기 위해 / 屬蕝東田

다시 강원 관찰사를 제수 받아 / 復畀外臺

장차 큰일을 하게 되었는데 / 若將有爲

병 때문에 이루지 못했네 / 病未克濟

대개 공은 세상과 잘 맞지 않아 / 盖公寡合

세상에 쓰이기도 버려지기도 해서 / 呑吐於世

공의 펴이거나 굴한 것이 / 其所伸屈

시운의 비색과 형통을 점쳤네 / 占時否泰

깨끗한 명성과 곧은 그 절조 / 淸名直節

세상에 누가 공과 맞설꼬마는 / 世孰與京

애석하게도 크게 쓰이지 못해 / 惜不大用

나라의 기둥이 되지 못하였네 / 爲國榦楨

덕수의 산 언덕의 / 德水之原

초목이 무성한 묘역에 / 有欝佳城

내가 비명 새기어 / 我銘桓楹

천년 후에까지 밝게 보이노라 / 昭示千齡

[주-D001] 임상(任尙)의 정사 : 

엄혹(嚴酷)한 정사를 뜻한다. 후한 때 임상이 반초(斑超)의 후임으로 도호(都護)가 되어 반초에게 백성 다스리는 방도를 묻자, 반초가 말하기를 “변방의 이사(吏士)들은 본디 효자 순손(孝子順孫)이 아니요, 오랑캐들은 본디 금수의 마음을 품었기 때문에 교화시키기 어려운 것인데, 지금 그대의 성품은 너무 엄하고 급하니, 의당 간이한 정사를 펴서 이민들에게 작은 과실은 용서해 주고 중요한 일만을 총괄해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임상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뒤에 과연 낭패를 당했던 고사에서 온 말이다. 《後漢書 卷47》

[주-D002] 삼괴당(三槐堂)의 고사 : 

송(宋) 나라 때 왕우(王祐)가 회화나무[槐] 세 그루를 뜰에 심고서 “내 자손 가운데 삼공(三公) 지위에 오르는 자가 반드시 나올 것이다.”고 예언을 했는데, 과연 그의 아들 단(旦)이 재상에 올랐으므로, 뒤에 그의 자손들이 거기에 삼괴당을 세웠던 고사이다.

[주-D003] 평창(平昌) : 

어진익(魚震翼)의 증조로서 평창 군수를 지낸 어운해(魚雲海)를 가리킨다.

[주-D004] 운판(運判) : 

어진익의 아버지로서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을 지낸 어한명(魚漢明)을 가리킨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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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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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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