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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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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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암사 / 雲岩祠
    주(州)의 서쪽 15리에 있는데 해광(海狂) 송제민(宋齊民), 창랑(滄浪) 고경리(高敬履), 화암(花岩) 송타(宋柁), 석주(石州) 권필(權鞸), 별제(別提) 신필(申鞸), 도계(道溪) 신한상(申漢相)을 향사(享祀)한다.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15인이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광주읍지(1924)
    2020-04-20 | NO.18
  • 원산사(지) / 圓山祠(地)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선거이(宣居怡)를 배향했던 사우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사원철페령으로 훼철향사인물: 선거이(宣居怡, 1550~1598) 본관-보성(寶城) 자-사신(思愼) 호-친친재(親親齋)
    2020-03-04 | NO.17
  • 의열사 / 義烈祠
    광산김씨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을 주벽으로 지평공 김덕홍(金德弘), 풍암공 김덕보(金德普) 3형제를 등을 배향한 사액서원이다. 지평공은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임란때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충장공은 역적 이몽학(李夢鶴)과 내통했다는 간신배의 무고를 당해 (1596년) 29세로 춘산화연곡(春山火燃曲)을 남기고 옥중에서 원사했다. 1661년 신원되고 1678년 의열사에 배향되었다. 풍암공은 학문이 높고 효행이 있어 형들과 같이 의열사에 배향되었다. 이곳은 광산김씨 문중에서는 광주시 서구 금호동 산 31번지(만호마을)라고 밝히고 있으나 현재는 찾을 수 없다. ---------광주읍지(1924)에 따르면 주(州)의 서쪽 25리에 있다. 처음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을 향사(享祀)하다가 숙종 무오(戊午,1678)에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을 합사(合祀)하여 의열(義烈)이라 사액(賜額)하였다.갑술(甲戌,1694)에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을 배향(配享)하였으며 영조 무신(戊申, 1728)에 다시 증지평(贈持平) 김덕홍(金德弘)과 증집의(贈執義) 김덕보(金德普)를 배향(配享)하였다. 장의(掌議)  2인, 원생(院生) 20인 이었다.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하였다.이 때문에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의 영정을 운리(雲里)의 본손재실(本孫齋室)로 이안(移安)하였다가, 그의 자손들이 다시 별도의 사우를 지어 그 이름을 운리영당(雲裏影堂)이라 하였다.   1604년(선조 39) 창건1604년(선조 39) 당부면 벽진촌에 '벽진서원'으로 건립1621(광해군 13) '의열'이라 사액1694(숙종 20) 오두인(吳斗寅) 추배1728년(영조 4) 김덕홍(金德弘) 김덕보(金德譜) 추배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1986년 복원사우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향사인물 박광옥(朴光玉, 1526-1593) 본관-음성(陰城) 자-경원(景瑗) 호-회재(懷齋)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해주(海州) 자-원징(元徵) 호-양곡(陽谷)김덕령(金德齡. 1567~1596) 본관-광산(光山) 자-경수(景樹)김덕홍(金德弘, ?~?) 본관-광산(光山) 김덕령의 형김덕보(金德譜, 1571~1627) 본관-광산(光山) 자-자룡(子龍) 호-풍암(楓巖) 김덕령의 동생
    2020-03-05 | NO.16
  • 장렬사 / 壯烈祠
    광주광역시 북구 두암동 837-1번지(면앙로 170번길)장렬공(壯烈公) 김유신(金庾信),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망헌(望軒) 김광립(金光立)을 배향한 사우1849년 창건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연혁 1849년(헌종 15)에 김해김씨(金海金氏) 문중에서 광주 우산동에 건립, 김일손(金馹孫)·김광립(金光立)을 추가배향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1906년에 복원시 현재의 위치로 이건, 원래자리에는 유허비 세움1977년에 다시 중수, 김일손과 김광립의 위패는 두암사(斗巖祠)에 옮기고 김유신만 배향1978년에는 화랑원을 건립규모 :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집향사인물 김유신(金庾信, 595~673): 본관은 김해(金海), 가야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12대손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 과정의 중추적 구실을 함.
    2020-03-05 | NO.15
  • 절효사 / 節孝祠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567(일곡로 41번길 41-8)노준공(盧俊恭) 노희서(盧希瑞)를 배향하는 사우1398년(태조 7) 창건1398년(태조 7) 건립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철폐1986년 복원규모 : 사우, 일신재(日新齋)향사인물 노준공(盧俊恭, 1340~1397) 본관-광산(光山)노희서(盧希瑞, 1558~1592) 본관-광산(光山)
    2020-03-05 | NO.14
  • 지산재(구, 지산사) / 芝山齋(舊, 芝山祠)
    광주광역시 남구 양과동 715-1(남구 지산재길51)지산재(芝山齋)는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신주를 모신 지산사(芝山祠)의 강당이다. 1979년 8월 3일 광주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경내에는 강당인 지산재와 내외삼문ㆍ영당이 있는데, 그 중 지산재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산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중앙 3칸은 마룻바닥이고 양퇴칸은 방을 놓아 일반 민가같은 인상을 준다. 편액(扁額) 글씨는 고당(顧堂) 김규태(金奎泰)가 썼으며, 건물 왼쪽 빈터에 1985년에 세운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1737년(영조13)에 영당(影堂)을 세워 영정(影幀)을 모시다가 1846년(헌종12)에 지산사를 세웠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헐려 없어졌던 것을 1922년에 다시 세웠다. 처음에는 최치원을 중심으로 최운한(崔雲漢,1444년~1499), 최형한(崔亨漢,1460?~1504), 정오도(鄭吾道,1641~1732)네 분을 모셨으나, 고쳐 세우면서 최치원만을 모시게 되었다. 1791년(영조 13) 창건1737년(영조 13) 양과동에 영당(影堂)을 건립1846년(헌종 12) 지산사(芝山祠)라 이름하고 최치원을 비롯해 최운한(崔雲漢)·최형한(崔亨漢)·정오도(鄭五道)를 배향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1922년 강당을 건립, 지산재(芝山齋)라 이름을 바꾸고 최치원만 배향1979년 8월 3일 광주광역시유형문화재 제10호로 지정사당 : 정면 4칸, 측면 2칸, 단층 맞배지붕향사인물 : 최치원(崔致遠, 857~?) 본관-경주(慶州) 자-고운(孤雲)·해운(海雲)향사일: 음력 9월 9일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0호(1979년 8월 3일)* 2023.6.22. 수정
    2020-03-05 | NO.13
  • 진천사(지) / 眞泉祠(址)
    주(州)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문숙공(文肅公) 박석명(朴錫命), 칠졸재(漆拙齋) 박창우(朴昌禹), 석촌(石村) 박충정(朴忠挺),시암(時庵) 박영림(朴榮林), 우헌(寓軒) 박상현(朴尙玄),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금암(黔岩) 박치도(朴致道),손재(遜齋) 박광일((朴光一), 소은(素隱) 박중회(朴重繪), 담락재(湛樂齋) 민사하(閔師夏)를 향사(享祀)한다.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20인이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 광주읍지(1924)광주광역시 광산구 진곡동 가작마을박광일(朴光一)을 배향했던 사우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향사인물 : 박광일(朴光一, 1655~1723) 본관-평양(平壤) 자-사원(士元) 호-손재(遜齋)현재 진천사유허비(眞泉祠遺墟碑)만 존재
    2020-03-05 | NO.12
  • 천동사 / 泉洞祠 이민서
    주(州)의 서쪽 40리 나주 경계에 있다. 두 고을이 합설하여 유애사(遺愛祠)를 만들었는데 문간공(文簡公) 이민서(李敏敍), 병산(屛山) 이관명(李觀命), 한포재(寒圃齋) 이건명(李健命), 삼산(三山) 이병상(李秉常), 송호(松湖) 유언호(兪彦鎬)를 향사(享祀)한다.장의(掌議) 1인, 색장(色掌) 1인 원생(院生) 25인이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광주읍지(1924)이건명(李健命, 1663~1722)의 부친 이민서를 제향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나중에 이건명을 배향하였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4 書院》이건명의 본관은 전주,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ㆍ재월재(霽月齋)이며, 시호는 충민이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자 이조 판서 이민서(李敏敍)의 아들이다. 노론 사대신 중의 한 사람이다. 1686년(숙종12)에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수찬ㆍ응교ㆍ우승지ㆍ대사간ㆍ이조 판서ㆍ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717년(숙종43)에 그의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하였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延礽君)의 보호를 부탁받았다.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하여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ㆍ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진력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2)에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8월 19일에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1725년(영조1) 노론정권하에서 신원되어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한포재집(寒圃齋集)》 등이 있다.이건명이 천동사에 배향할 때 김원행이 지은 제문이 《미호집》 본권에 〈천동사이충민공배향제문(泉洞祠李忠愍公配享祭文)〉이란 제목으로, 그의 묘지명이 민우수(閔遇洙)의 《정암집(貞菴集)》 권11에 〈우의정충민이공묘지명(右議政忠愍李公墓誌銘)〉이란 제목으로, 그의 묘표가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집(陶谷集) 권20에 〈의정부좌의정한포이공묘표(議政府左議政寒圃李公墓表)〉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泉洞祠李忠愍公兩丁祝文 천동사의 이 충민공에 대한 양정 축문사림의 종사(宗師)이고 / 士林之宗사직의 공신(功臣)이로다 / 社稷之功순수한 충정과 크나큰 절개는 / 精忠大節백세토록 존숭할 바로세 / 百世攸崇' 미호집 제20권 / 고문(告文) 미호 김원행 선생[주-D001] 천동사(泉洞祠) : 광주(光州)에 있는 사우(祠宇)로서, 이건명(李健命)의 부친 이민서(李敏敍)를 제향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나중에 이건명을 배향하였다. 《燃藜室記述 別集 卷4 書院》[주-D002] 이 충민공(李忠愍公) : 이건명(李健命, 1663~1722)으로, 본관은 전주, 자는 중강(仲剛), 호는 한포재(寒圃齋)ㆍ재월재(霽月齋)이며, 시호는 충민이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의 손자이자 이조 판서 이민서(李敏敍)의 아들이다. 노론 사대신 중의 한 사람이다. 1686년(숙종12)에 춘당대 문과에 을과로 급제, 수찬ㆍ응교ㆍ우승지ㆍ대사간ㆍ이조 판서ㆍ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1717년(숙종43)에 그의 종형 이이명(李頤命)이 숙종의 뒤를 이을 후계자 문제로 숙종과 단독 면대하였던 정유독대(丁酉獨對) 직후, 특별히 우의정에 발탁되어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延礽君)의 보호를 부탁받았다. 이어 경종 즉위 후 좌의정에 승진하여 김창집(金昌集)ㆍ이이명ㆍ조태채(趙泰采)와 함께 노론의 영수로서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에 진력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반대파인 소론의 미움을 받았다. 1722년(경종2)에 노론이 모역한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 전라도 흥양(興陽)의 나로도(羅老島)에 유배되었다가, 그해 8월 19일에 유배지에서 목이 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1725년(영조1) 노론정권하에서 신원되어 시호가 내려졌으며,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 흥덕(興德)의 동산서원(東山書院), 나주의 서하사(西河祠)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한포재집(寒圃齋集)》 등이 있다. 이건명이 천동사에 배향할 때 미호가 지은 제문이 《미호집》 본권에 〈천동사이충민공배향제문(泉洞祠李忠愍公配享祭文)〉이란 제목으로, 그의 묘지명이 민우수(閔遇洙)의 《정암집(貞菴集)》 권11에 〈우의정충민이공묘지명(右議政忠愍李公墓誌銘)〉이란 제목으로, 그의 묘표가 이의현(李宜顯)의 도곡집(陶谷集) 권20에 〈의정부좌의정한포이공묘표(議政府左議政寒圃李公墓表)〉란 제목으로 실려 있다.[주-D003] 양정 축문(兩丁祝文) : 사우(祠宇)에는 일반적으로 매년 봄가을, 즉 2월 첫 정일(丁日)과 8월 첫 정일에 향사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축문을 말한다.​​* 미호집([渼湖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김원행(金元行:1702~1772)의 시문집. 20권 10책. 활자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간행연대와 편자는 알 수 없으나, 저자 생존시에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권1·2에는 시·상서·서계·의(議), 권3~12에는 서(書), 권13에는 서(序)·기·제발, 권14·15에는 잡저·혼서·찬·명·묘지명, 권16~20에는 신도비명·비명·묘갈명·행장·제문·고문·애사·전(傳)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는 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권상하(權尙夏)·이간(李柬)·이재(李縡)의 학통을 계승했다. 따라서 당시 성리학계의 2대 조류인 호론·낙론 논쟁에서 한원진의 호론을 반대하고, 이간의 낙론을 지지했다.서(書)에서 그의 학문의 핵심인 예론과 성리학론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김시관(金時觀)과의 성리설에 관한 논변, 유척기(兪拓基)와의 예설에 관한 왕복논변, 송명흠(宋明欽)과의 예설·인성·사론 등에 관한 논변, 임성주와의 의리에 관한 논변, 유언민과의 제례·귀신에 관한 문답, 현직명(玄直明)과의 성리학·제례에 관한 문답이 주류를 이룬다. 그리고 권10에 수록된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의 경서의의 및 성리에 관한 논변은 실학의 경학사상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또한 잡저의 〈독서차록 讀書箚錄〉·〈중용문답 中庸問答〉·〈미호경의 渼湖經義〉·〈미상록 渼上錄〉·〈미상기문록 渼上記聞錄〉 등은 중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기술해놓은 것으로 중용 위주의 경학적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중용 위주의 경학적 취향은 자연스럽게 예학 연구로 연결되었으며, 그의 예학은 김장생·장현광에 필적했다. 이 책은 조선 후기 성리학설사 연구에 자료가 된다. 규장각·장서각·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김원행은 조선 영조 때의 주자학자로 당시 호론과 낙론의 대립 속에서 낙론을 지지한 대표적 학자였다.본관은 안동. 자는 백춘(伯春), 호는 미호(渼湖)·운루(雲樓). 아버지는 제겸(濟謙)이며, 당숙인 숭겸(崇謙)에게 입양되어 창협(昌協)의 손자가 되었다. 이재(李縡)의 문인이다.1719년(숙종 45)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본가의 할아버지 창집(昌集), 생부 제겸, 친형인 성행(省行)·탄행(坦行)이 죽임을 당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다.1725년(영조 1) 창집 등 집안 사람들이 신원(伸寃)된 뒤에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시골에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1740년 이후 수차례 벼슬에 임명되고 1759년에는 왕세손을 교육할 적임자로 영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후 산림으로 있으면서 박윤원(朴胤源)·오윤상(吳允常)·홍대용(洪大容) 등 많은 학자를 길러냈다. 당시 주자학계는 2대 조류인 낙론과 호론이 대립하고 있어서 이간(李柬)이 이재와 함께 낙론의 중심이 되고, 한원진(韓元震)이 호론의 중심이었다.​그는 낙론을 지지한 학자로서 김창협의 학설을 이어받아, 심(心)을 이(理)라고도 하지 않고 기(氣)라고도 하지 않으며, 이와 기의 중간에 처하여 이기를 겸하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 주리와 주기의 절충적인 입장을 취했다. 저서에 〈미호집〉 20권 10책이 있다. 시호는 문경이다. *2023.9.25. 수정
    2020-04-20 | NO.11
  • 충민사 / 忠愍祠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동 산133( 북구 무등로 1050)전상의(全尙毅)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우1985년 창건 1977년 장군의 묘소를 지방 문화재 기념물 제 32호로 지정1985년 충민사(忠愍祠)를 새로 건립하여 준공구모: 사당, 수의문, 정려각, 유물관향사인물: 전상의(全尙毅, 1575~1627) 본관-천안(天安)
    2020-03-05 | NO.10
  • 충장사 / 忠壯祠
    광주광역시 북구 금곡동 산 1023(북구 송강로13)김덕령(金德齡) 박광옥(朴光玉) 오두인(吳斗寅) 김덕홍(金德弘) 김덕보(金德普)를 배향한 사우1604년(선조 37) 창건1604년(선조 37) 창건 당시 명칭 「벽진서원(碧津書院)」, 박광옥(朴光玉)을 제향1678년(숙종 4) 지방사람들의 발의로 김덕령(金德齡) 추향, 명칭 「의열사(義烈祠)」로 변경1680년(숙종 6) 「의열사(義烈祠)」 사액1694년(숙종 20) 오두인(吳斗寅) 배향1788년(정조 12) 김덕령의 형제 김덕홍(金德弘), 김덕보(金德普) 배향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1975년 「충장사(忠壯祠)」로 복원규모사당 : 정면 3칸, 측면 3칸, 팔작지붕내삼문 : 익호문(翼虎門)외삼문 : 충용문(忠勇門)유물관동재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서재 :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은륜비각(恩綸碑閣)향사인물박광옥(朴光玉, 1526~1593) 본관-음성(陰城) 자-경원(景瑗) 호-회재(懷齋)김덕령(金德齡, 1567~1596) 본관-광산(光山) 자-경수(景樹)오두인(吳斗寅, 1624~1689) 본관-해주(海州) 자-원징(元徵) 호-양곡(陽谷)김덕홍(金德弘, ?~1593) 본관-광산(光山) 김덕령(金德齡)의 형김덕보(金德普, 1571~1627) 본관-광산(光山) 자-자룡(子龍) 호-풍암(楓巖) 김덕령(金德齡)의 아우기타사항유물관 : 김덕령장군 의복(중요민속자료 재111호), 묘에서 출토된 관곽, 친필 등 전시사당 뒤쪽에 김덕령장군 묘소 및 가족묘지 조성은륜비각(恩綸碑閣) : 1842년 건립 충효동 배재마을에서 이건충효리정려비각(忠孝里旌閭碑閣) : 1789년 건립
    2020-03-05 | NO.9
  • 편방사 / 片坊祠
    주(州)의 동쪽 2리에 있다. 처음 경렬공(景烈公) 정지(鄭地), 설강(雪江) 유사(柳泗), 송설정(松雪亭) 고중영(高仲英), 증판서(贈判書) 전상의(全尙毅), 송암(松菴) 유평(柳坪)을 향사하다가 후에 충무공(忠武公) 정충신(鄭忠信), 구암(龜岩) 고경조(高敬祖), 시은(市隱) 유성익(柳聖翊)을 배향하였다. 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20인 이었는데 고종 무진(戊辰, 1868)에 철폐되었다.- 광주읍지(1924)
    2020-04-17 | NO.8
  • 포충사 / 褒忠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원산동 947-4(포충로767)고경명(高敬命),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 3부자와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을 배향한 사우장의(掌議) 2인, 색장(色掌) 2인, 원생(院生) 20인이다.1601년 창건1601년(선조 34) 호남 유생들이 사우건립을 청하고, 광주 제봉산(霽峯山) 아래에 사당을 건립1603년(선조 36) 박지효(朴之孝) 등 문인과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는 상소올려 포충(褒忠)이란 액호 하사1616년, 1618년, 1623년 사우건물 중수1810년, 1879년, 1919년, 1927년, 1933년에 각각 중수1970∼1974년의 중수와 1978~1980년의 중건정화사업으로 현재의 건물 완성규모사당–앞면 3칸으로, 1고주 5량가의 맞배집동재와 서재–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집내삼문과 외삼문–앞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평대간향사인물주벽-고경명(高敬命, 1533∼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고종후(高從厚, 1554∼1593):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광주 출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고인후(高因厚, 1589~1592):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광주 출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유팽로(柳彭老, 1554∼1592):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형숙(亨叔)·군수(君壽), 호는 월파(月波).안영(安瑛, ?∼1592):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서(元瑞). 남원 출신.기타사항광주광역시 기념물 제7호(1974년 5월 22일)『포충사우가 褒忠祠宇歌』(1614) 등 현판문 3매복호입안문서(復戶立案文書, 1592)고경명의 문과급제교지(1558) 등 고문서 6매고경명친필 마상격문(馬上檄文)『제봉집 霽峯集』(252매)『정기록 精氣錄』(71매) 등의 목판 493매
    2020-03-05 | NO.7
  • 학산사
    광주시 서구 서창동 1서구 서창동 불암마을 외진 곳에 있는 학산사鶴山祠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었던 삽봉揷峯 김세근金世斤(1550∼1592)을 모시는 사우이다. 경내에는 학산사와 경의당景義堂, 창렬문, 학산사 묘정비 등이 세워져 있다. 해마다 음력 3월 22일에 춘향제를 지낸다. 사우는 정면 4칸의 측면 2칸으로 내실을 두고 쪽마루를 설치했다. 건립 때 경의당과 학산사의 현판은 전북 김제 출신인 강암剛菴 송성용宋成鏞(1913-1999)이 썼다.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인 김세근이 이곳에 오게 된 것은 김일손의 무오사화 때문이다. 그의 방조였던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실은 김일손은 영남사림파의 중심이자 사관史官으로 있었다. 사람파와 훈구파의 힘겨루기라는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참살을 당했다. 김세근의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연좌의 화를 피해 식솔들을 거느리고 지금의 서구 세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세하동은 그의 이름 '세世'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세細를 쓰고 있다고 한다.김세근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동 백마산 수련곡(속칭 수련골)에서 장정 수백명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담양에서 창의한 추성회맹秋城會盟에 참가했다. 김덕령 큰형 김덕홍, 유팽노, 안영 등과 더불어 고경명의 대열에 합세하여 영동과 황간에서 적을 무찌르는 전과를 올렸다.그러나 전장에서 병을 얻어 귀향 요병 중 스승인 호서의병장 중봉重峰 조헌趙憲의 부름을 받고 병든 몸으로 다시 출정해 전주에서 군영을 정돈하고 있었다. 적군이 금산으로 침입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금산으로 가서 부장部將으로 싸우던 중 와평臥坪에서 고경명과 같이 순절하였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도 “지아비는 충忠에 죽고 지어미는 열烈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된 당연한 도리리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며 그를 따랐다. 선조는 1605년 김세근 의병장에게 병조참판, 부인 한씨에게는 정부인을 내렸다.그의 묘가 서구 서창동 불암마을에 남아 있다. 광주 지역의 유림들이 사우 창열단彰烈壇을 건립하였고,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김세근의 충의정신을 기리고 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하여 1958년 지역 유림들이 뜻을 모아 학산사를 건립하면서 창열문으로 바뀌었다.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는 학산사 동문간에 만취영당晩翠影堂이 있어 만취 김용희(金容希, 1860~1927)를 제향했다 한다.
    2018-05-24 | NO.6
  • 화담사
    서구 화운로156번길 17-8(화정동)화담사花潭祠는 하동 정씨 사당이다. 문절공 정수충鄭守忠(1401∼1469)에 대한 집을 지어 영정을 모시라는 왕의 교시가 내려졌고, 1478년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鄭和(1434∼1505)가 군분으로 이사, 영정을 봉안하는 영당을 만들면서 출발한다. 화담사를 중심으로 하동 정씨 집성촌이 이루어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뒤 1776년(영조52) 화담사 사우 건축을 발의했다. 1868년(고종5)에 있었던 서원철폐령 때 위기를 맞았으나 지붕을 덮어 은폐, 보존함으로써 훼철을 피할 수 있었다. 제례만을 중단했다가 1905년 광주향교의 발의로 복설復設된 유서 깊은 공간이다. 조선시대 때는 서원 역할까지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사립학교처럼 20명 정도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다. 조선 중기 문신인 묵은공 정희鄭熙(?∼1348) 선생을 중앙에 모시고, 좌우에 그의 아들 문경공 정초鄭招(?∼1434).손자 문절공 정수충과 약포공 정오도鄭吾道(1647∼1736), 충장공 민제장閔濟章(?∼1728)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처음에는 사경과 예법에 뛰어나고 청렴결백한 정수충의 영정을 모신 영당이었다. 1784년에 그의 위패를 함께 모시면서 사당의 격을 갖추게 됐다. 1796년에는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민제장을, 1809년에는 정몽주의 제자로 충절을 지킨 그의 할아버지인 정희와 세종 때 학문 및 예술, 과학, 기술 등에 업적을 남기고 청렴했던 그의 둘째큰아버지인 정초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그 뒤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1905년 다시 제를 올리기 시작했다. 1906년 송시열의 제자로 충효가 뛰어났던 정오도의 위패를 추가하고, 정희의 위패를 중앙에 두어 지금의 틀을 갖추게 됐다.제사를 올리는 공간인 화담사는 앞면 3칸, 옆면 1칸 규모의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이며, 앞쪽에는 넓은 마루가 있다. 건물 앞쪽으로는 내삼문인 양양문洋洋門이 있고, 계단을 내려가면 중간에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인 동재廳之齋와 서재悅乎齋가 있어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의 양식을 갖추고 있다.정희(鄭熙) 아들 정초(鄭招) 손자 정수충(鄭守忠) 정오도(鄭五道) 민제장(閔濟章)을 배향한 사우1735년(영조 11) 창건1796년에 광주향교 유회소의 발의 민제장(閔濟章) 배향1809년(순조 6) 정희(鄭熙) 배향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1905년 복설1907년 정오도(鄭五道) 추배1910년 정초(鄭招) 추배사당 : 앞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내삼문 : 양양문(洋洋門)동재 : 청지재(廳之齋)는 앞면 4칸, 옆면 1칸, 맞배지붕서재 : 열호재(悅乎齋)는 앞면 4칸, 옆면 1칸, 맞배지붕외인문(外仁門)향사인물민제장(閔濟章, ?∼1729) 본관-여흥(驪興) 자-회백(晦伯) 호-삼금당(三錦堂)정희(鄭熙, ?~?) 본관-하동(河東)정오도(鄭吾道, 1625~1736) 본관-하동(河東) 자-일관(一貫) 호-약포(藥圃)정초(鄭招, ?~1434) 본관-하동(河東) 자-열지(悅之) 정희(鄭熙)의 아들정수충(鄭守忠, 1401~1469) 본관-하동(河東) 자-경부(敬夫) 정희(鄭熙)의 손자광주광역시 기념물 제18호(1993년 3월 20일)
    2018-05-24 | NO.5
  • 화암사 / 花巖祠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가산마을(삼도가산안길 8)김우생(金佑生) 김문기(金文起)를 제향하는 사우 1807년(순조7) 창건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1908년 현 위치에 다시 건립사당 : 정면 3칸, 측면1칸, 단층 맞배지붕향사인물 김우생(金佑生, 1372~1457) 본관-상산(商山) 자-문숙(文叔) 호-양산(陽山)김문기(金文起, 1399~1456) 본관-김해(金海) 자-여공(汝恭) 호-백촌(白村) 
    2020-03-05 | N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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