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희 ⾦係熙 세조 3년(1457) 8월 11일∼세조 4년(1459) 11월 21일김계희(?∼?)의 본관은 김해(⾦海)이며, 자는 회숙(晦叔), 호는 퇴은(退隱)이다. 청도군사 (淸道軍事)를 지낸 김순생(⾦筍⽣)의 아들이다. 1435년 생원시에서 갑과 3위, 1441년 식년시 문과에서 병과 2위로 급제한 뒤 1447년 주서(注書)를 시작으로 경상도 도
동구 월남동 녹동마을 당산제조사일시 : 1993. 9. 2조 사 자 : 정 기 진조사방법 : 현지면담조사 (과거시행)제 보 자 : 허남곤 (67)녹동마을은 광주에서 화순으로 가는 도로 우측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분적산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김해김씨, 나주임씨 등 70여호가 살며 요즈음은 대파 농사로 높은 소득을
광주시 동구 내남동 내리마을 소양재(素養齋)는 소양공 참봉 김언형(金彦珩)과 처 단인인 김해김씨(金海金氏)을 기리는 재실이다. 1988년 광산김씨 후손들이 소양재를 건립하기로 의결하고 1991년에 완공했다.광산김씨 집의 김정(金禎)의 아들인
김언형은 호는 소양헌(素養軒)이며, 봉선전 참봉을 지냈다.전남
탁영로는 조선시대 사림파(士林派)의 대표적 인물인 탁영 김일손의 호를 따서 명명된 도로다. 길이는 424m에 불과한 짧은 도로로 2009년 11월 광주광역시 북구청장이 고시했다.탁영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계운(季雲), 호는 탁영(濯纓) 또는 소미산인(少微山人)이라 불린다. 탁영의 할아버지는 김극일(金克一)이고, 아버
광주시 광산구 운수동 120 하강골마을1886년(고종 23년)김해김씨 효열비는 운수동 하강골 부락에 위치해 있다. 송정영광간 도로변 좌측에 세워져 있으나 시궁창으로써 위치가 좋지 않다.숙부인 김해김씨는 광산군 동곡면 현송대동 복호부락에서 송항의후손으로 태어나 13세때 진주강씨 문절공 후손의맹의 후손 증조참대
광주시 동구 학동 필문대로329번길 22(武光祠)1958년이 춘담기인 최병채기적(春潭奇人崔炳釵紀績)은 동구 학동 구 춘태여상 자리인 무광사(武光祠) 경내에 있다. 춘담 최병채春潭 崔炳釵(1907~1987)의 공적내용을 화강암에 음각하였다.최병채는 1907년 곡성군 석곡면 운룡리(현 순천시 주암면 운룡리)에서 부친 경환(炅奐)씨
광주시 남구 포충로 701에 있는 광산김씨효열각이다. 오른쪽은 효원각으로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가 있고, 왼쪽은 열일각으로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이다. 효자천선당광산김선진행적비는 황산사
밑에 1956년 김해김씨 문중이 건립했다. 비의 내용은 노조모와 편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광주시 남구 원산동 916-8 황산사 아래1956년황산사 아래 천선당 김선진행적비가 있다.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했다. 행적의 내용은 노조모와 편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하여 향리의 효자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라는 점이다. 풍적비 옆에는 풍산홍씨 실적비도 함께 세워져 있다.효행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김
광주시 남구 원산동 961-81956년 이 효열부풍산홍씨실적비(孝烈婦豐山洪氏實蹟碑)는 황산사 아래쪽 도로변에 위치해 있다.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한 비석이다. 주변은 대리석의 돌기둥을 세워 돌담장을 둘러 비석을 보호하고 있다.효열부 풍산홍씨 실적비는 아들인 김선진행적비와 같이 원산마을 황산사 바로 밑 도로
광주시 남구 덕남동 산138번지 향등제 인근1922년 남구 양과동 만산마을에는 1922년 광산 김씨 김정복(金廷福)·김정열(金廷烈)의 효행를 기리는 ‘쌍효비(雙孝碑)’가 있었다. 광산김씨 문중에서 두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효열의 내용은 효열행지에 기록되어 있다. 남구 양과동 쓰레기매립장 조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번지 신기마을 뒤편 양양재(洋洋齋) 1984년이 효부고성이씨기행비(孝婦固城李氏紀行碑)는 원래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과 구암마을 앞 사이 들판에 비각을 갖추어 1984년에 세웠다. 비석의 내용은 김해김씨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행한 효행 사실을 국한문 혼용체로 기록되어 있다. 장흥
광주시 남구 노대동 707, 신기마을 양양재1981년이 춘강김공순곤기실비(春岡金公淳坤紀實碑)는 남구 노대동 노대마을 입구 도로변에 1981년 건립되었다가 노대동 신기마을 뒷편 양양재洋洋齋로 옮겨졌다. 이 비는 김순곤이 이 고장 발전에 기여한 내용을 기록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김해김씨 문중에서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