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종열 閔種烈 고종 30년(1893) 11월 20일∼고종 32년(1895) 7월 18일민종열(1831∼1899)의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무경(懋卿), 호는 지담(芝潭)이다. 아버지는 민승세(閔承世)이다. 1865년 식년시 생원에 합격하여 1869년 경릉참봉, 1871년 제용감 봉사·금부도사, 1873년 예빈시 직장, 1874년 형조좌랑, 1875년 형
근대의 한학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선(德善). 호는 경당(敬堂). 상정(相廷)의 아들로 광산구 양과동 야평마을 출신이다. 1898년 광주 이장리에서 출생하여 죽파(竹坡) 최기룡(崔基龍)에게 경전을 배우고,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을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아 학문이 경지에 이르렀다. 우정(愚汀) 고광익(高光
고재현(高在鉉, 1885~1967) 1책, 필사본. 고재현은 초명이 재봉(在鳳)이며, 자는 치구(致球)이고, 호는 지산(志山)이다. 1885년 12월 24일 무안읍 용월리 토동 집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에 입학하였는데, 서당 선생이 그의 재능을 시험해 보고자 매일 통사 5백 행을 과제로 내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모두 외우고서 한 글자도
근세 초 기의 한학자 고재현(高在鉉, 1885 ~ 1967)이 지어 학문을 강구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강학터로 사용했다.그는 고재현은 초명이 재봉(在鳳)이며, 자는 치구(致球)이고, 호는 지산(志山)이다. 무안읍 용월리 토동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후손으로 민재(敏齋) 박임상에게 나아가 공부하였
광주 남구 월산동에 석서정사(石西精舍)가 있다. 김상기(金相基, 1891∼1954)가 말년에 정사를 짓고 문인ㆍ벗들과 시문을 지으며 살았다. 김상기(金相基)의 자는 찬경(贊敬)이요, 호는 석서(石西)며 본관은 김해(金海)다. 1891년(고종 17)에 광주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인 김용후(
후석 오준선의 <후석유고>『후석유고』는 한말의 유학자인 오준선의 목활자본 시문집으로, 25권 12책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다. 권1, 2는 오준선의 詩와 賦 451수가 수록되어 있다. 사우들과의 차운시 및 輓詩를 비롯해서 述懷 및 景物詩 등 다양한 내용의 시를 시기별로 편집하였다. 스승인 奇正鎭을 비롯해서 宋近洙,
안촌(安村) 박광후(朴光後, 1637(인조 15)∼1678년숙종 4)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사술(士述), 호는 안촌(安村)이다.조부는 진사(進士) 칠졸재(七拙齋) 박창우(朴昌禹)이고, 부친은 충의위(忠義衛) 박천용(朴天用)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모친은 남씨(南氏)이고 부인은 홍씨(洪氏)이다. 광산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헌종 12) ~ 1916)이 쓴 서은정사기(瑞隱精舍記) 송사집(1931) 권18에 전하고 있다. 瑞隱精舍記 "有不隱。隱則吾必曰瑞石乎。瑞石爲山。南服之鎭。中立而不倚。如巨人長德。咡詔生徒。是以或出或處之君子。環山輩出。蓋所謂地靈人傑者也。北馳一支。回抱作區。范氏世葬而世居。衣冠十世
유인석(柳寅奭)의 자는 춘백(春伯), 호는 수당(睡堂)으로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아버지는 유하영(柳河永, 號 農山), 어머니는 파주(坡州) 염씨(廉氏) 재묵(在黙)의 딸이다. 1859년(철종 10) 5월 9일 태어나 광산구 삼도면에서 살다가 1931년 2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수당(睡堂) 류인석(柳寅奭)은 문화 류씨(文化 柳氏
이계종(李啓琮, 1857~?)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명숙(明淑), 호는 삼산(三山) 이다. 광주 서방면 오치리에 살았다.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典賓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10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27년 8월에 吳駿善 柳昌秀 등과 함께 蘆沙 문도들에게 高山祠에 함께 배향할
이계익(李啓翼, 1878~?)의 본관은 함평이며 자는 경직(敬稷), 호는 오촌(梧村)이다. 광주 누문리에 살았다. 부 : 李龍憲조 : 李敏炯증조 : 李萬燁외조 : 閔三顯송사 기우만에게 수학하였다.1916년 송사 선생 襄禮 때 通贊으로 참석하였다.1924년 담대헌의 중건시 750냥을 성금으로 내었다.1935년 4월에 秉天祠의 일로 鳳山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