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옥 朴光⽟ 선조 25년(1592) 9월 7일∼선조 25년(1592) 12월 박광옥(1526∼1593)의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경원(景瑗), 호는 회재(懷齋)이다. 아버지는 사예 박곤(朴鯤)으로 광주 출신이다. 154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했다. 광주 선도면(船道⾯)에 집을 지어 개산송당(蓋⼭松堂)이라 이름하고 문하생들
박상 朴祥 중종 22년(1527) 4월∼중종 24년(1529)박상(1474∼1530)의 본관은 충주(忠州)이며,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로 기묘 사화 때 화를 입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박소(朴蘇)이고, 아버지는 진사 박지흥(朴智興)이다. 동생 박우(朴祐)는 문과에 급제하고 대사성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박숙무 朴叔楙 성종 25년(1494) 10월 29일∼?박숙무(1426∼1495)의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자는 윤진(胤陳)이다. 함흥차사로 알려진 충민공 박순(朴淳)의 손자이며, 증참판 박흔(朴昕)의 아들이다. 문음으로 관직에 올랐다. 형은 문과에 급제하고 도승지와 대사헌을 지낸 박숙진(朴叔蓁), 동생 박숙달(朴叔 達)과 박숙창(朴叔
繞亭松樹政堪憐。정자를 감싼 소나무는 정녕 사랑스럽다.合。빽빽한 나무는 푸르름 두른채 높은 구름에 숨어있고不獨大材樑棟用。그 홀로 큰 재목으로 동량에 쓰일 뿐만 아니오霜前。눈과 서리 앞에서도 얼마나 엄격한 지 볼 수 있으리.取比他年晩節全。훗날 만절의 온전함을 비유하였네.신응시, 《백록유고(白麓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전해 내려오는 눌재 박상과 어머니 이천서씨 부인에 관한 이야기.눌재 박상의 아버지 박지흥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통분해 호남으로 내려왔고, 입암산 산신령의 도움으로 광주에 터를 잡게 되었다. 박지흥이 광주에 터를 잡고 이천서씨(利川徐氏) 부인과 재혼해서 박정(朴禎), 박상(朴祥),
박순(朴淳) 광주(光州) 사람이다. 본조 선조(宣祖) 때에 재상이 되었는데 조야(朝野)의 사람들이 공의 청렴한 지조를 존경하였다. 만년에 당시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아 영평현의 백운계 가로 물러났는데, 거처하던 곳에 배견와, 이양정이 있었다. 입을 닫고 시사(時事)를 말하지 않고 약초를 심고 고기 잡으며 책을 읽
기언 별집 제25권 / 구묘문(丘墓文) 선생은 성은 박씨(朴氏)이고 휘는 광옥(光玉)이며 자는 경원(景瑗)이다. 그 선조는 본래 음성인(陰城人)이다. 4세조 태학 생원 계양(繼陽)으로부터 비로소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자손들이 드디어 광주인이 되었다.선생은 천성이 지극하였다. 태어나 일곱 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는
고산유고 제3권 상 / 소(疏) 삼가 아룁니다.신은 돌아갈 길은 머나먼데 질병이 바야흐로 극심하고, 떠나갈 마음은 다급한데 무더위가 바야흐로 혹독하여, 천리 길을 발섭(跋涉 산 넘고 물 건넘)할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서, 아직도 체류하며 나그네 생활을 참고 있노라니, 심회(心懷)가 망연(茫然)해지면서 온갖 생각이 모
기대승(奇大升, 1527~1572),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論)을 씀1. 머리말이 책은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문집과 저술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4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고봉집(高峯集)》은 198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하여 펴낸 바 있다. 1970년에 간행된 석인본을 대본으로 한 기왕의 국역서
고봉전서(高峯全書) 보유 - 조순(趙淳) 고봉 선생이 서거하신 지 431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다. 우리나라에는 그동안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자취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지나갔고 왕조도 점차 쇠퇴하여 마침내 경술년의 국치(國恥)를 당하였으며 광복 후에도 국토가 양단되고 국론이 분열되어 마침내 내
문인 정철(鄭澈) 송강(松江)소자(小子)가 선생을 사모한 지 오래되었으나 오늘에 이르러 더욱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그 까닭은 흐려져 가는 사류(士類)의 추향을 누가 밝히고 저하되어 가는 세상의 도의를 누가 높이겠는가를 생각할 때 높이고 밝히실 분은 오직 우리 선생이시기 때문입니다. 선생이 가신 후로는 이 세상에
간이집 제2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국가가, 아조(我朝) 선조(先祖)의 계보(系譜)가 무함을 받은 채로 중국 조정의 전책(典冊)에 실려 있는 것과 관련하여, 이를 해명하면서 고치려고 노력해 온 것이 무려 2백 년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황제의 윤허를 이미 받기는 하였으나 이를 개정하여 다시 간행하는 일은 아직
전 의영고 직장 안중묵의 상소 - 선조 36년 계묘(1603) 3월 17일(계유) 전 의영고 직장(義盈庫直長) 신(臣) 안중묵(安重默)이 상소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백성은 임금ㆍ스승ㆍ아비를 똑같이 섬겨야 합니다. 신의 스승 정개청(鄭介淸)은 역옥(逆獄)에 걸려 억울하게
문곡 김상국에게 보내는 편지〔與文谷金相國書〕 - 서하집 제17권 / 서독(書牘) : 이민서(李敏敍, 1633~1688). 봄날이 아직도 찬데, 삼가 이 시기에 대감의 조섭이 계절에 맞게 편안하시리라 생각하며, 구구한 마음에 지극히 우러러 사모합니다. 저는 집안의 우환이 잇달았는데, 지난달에 또 서매(庶妹)의 상을 당하였습
의열사 상량문〔義烈祠上梁文〕- 서하집 제13권 / 상량문(上梁文) : 이민서(李敏敍, 1633~1688).향선생을 사(社)에 향사하여 오래전부터 정성을 바치는 사당이 있는데, 열장부(烈丈夫)가 때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유독 충(忠)을 나타내는 전례(典禮)가 빠졌도다. 이에 옛 사당을 새롭게 하여 영령(英靈)을 함께 향사하도다
액호를 청하는 상소의 사연을 시행하지 않는 건 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광주(光州)의 생원(生員) 박상진(朴尙眞) 등이 올린 정문(呈文)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선생과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선생은 도덕과 학문이 온 세상의 종사(宗師)가 되는 만큼, 그분의 영향이 미친 곳에서는 모두가 그
박상(朴祥)ㆍ박순(朴淳)ㆍ기대승(奇大升)을 합향(合享)하는 것을 점이(粘移)하는 건- 현종(顯宗) 12년(1671) : 서원등록(書院謄錄)예조(禮曹)에서 상고(相考)하는 일. 이전에 접수한 본도(本道)의 관문(關文)에 점련(粘連)한 광주 목사(光州牧使)의 첩문(牒文)에, “본주(本州)에는 예로부터 눌재(訥齋)와 사암(思庵) 두 선생
박상(朴祥)과 박순(朴淳)을 위하여 광주(光州)에 있는 사우(祠宇)에 사액(賜額)을 청하는 호남(湖南) 선비들의 상소 사연을 방계(防啓)하는 건 - 서원등록(書院謄錄) : 현종(顯宗) 4년(1663) 생원(生員) 송해(宋垓) 등의 상소에 근거하여 예조(禮曹)에서 올린 계목(啓目)에, “계하(啓下) 문건은 점련(粘連)하였습니다. 이 상
미암집 제9권 / 일기(日記) 축약함 ○임신년(1572) 융경(隆慶) 6년 우리 선조대왕 5년 11월 : 유희춘(柳希春, 1513~1577)【5일】나는 광주 목사(光州牧使) 임회 헌가(林誨獻可)와 제시진사(製詩進士) 백광훈(白光勳)을 초대하여 잠시 술을 주고받았다.【7일】정철(鄭澈)이 소식을 전하여 기대승이 서거했음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