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원(金致謜 1562~?)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守眞堂)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湖節3上-021-3, 光州, 壬辰, 權慄參佐 -《호남절의록》(1799)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손자 김치원(金致謜 1562~?)은 ‘수진
김응복(金應福)의 자(字)는 경서(慶瑞), 호는 서봉(瑞峰). 문경공(文敬公) 탁(琢)의 후손이며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 김세천(金世天)의 둘째 아들이다.선조 때 무과급제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고종후(高從厚)와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조부 송암공(松庵公)과 함께
김언복(金彦福)의 자는 복우(福宇). 본관은 김해(金海). 고려조 때 판도판서(版圖判書) 관(管)의 후예이며, 문민공(文愍公)
탁영(濯纓) 일손(馹孫)의 증손이다. 어려서부터 기국(氣局)이 크고 영매하며 힘이 또한 장사였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 자질들 수십 명을 이끌고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의병진에 달
김억룡(金億龍, 1561~1592)의 자는 내무(內武), 호는 송암(松岩)이다. 절효공 후손이며 공신 모재 김사모(金嗣牟)의 차남이다.1589년(선조22) 무과 급제하여 용분위부사정(龍賁衛副司正)이 되었다. 정유재란때 형 억명, 아우 억호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남원성으로 가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영광 송촌사(松村祠
김선지(金銑之, 1570~1597), 湖節3下-182-2, 光州, 壬辰, 熊峙殉節-《호남절의록》(1799)김선지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휘(汝輝), 호는 제남(濟南)이며 참봉 김하(金河)의 후손, 생원 김안방(金安邦)의 아들이다. 지혜와 용맹이 남달리 뛰어나 선조 21년 戊子에 무과에 합격했다.임진왜란(壬辰倭亂)에 선전관(宣傳官)
김성원(金成遠, 1525~1597), 湖節2下-162-1, 光州, 壬辰, 一道擧義-《호남절의록》(1799)김성원은 조선 선조 때의 학자. 광주 출생. 본관 광산(光山), 자 강숙(剛叔). 호 서하당(棲霞堂)ㆍ인재(忍齋). 아버지는 교위(校尉) 홍익(弘翼)이며, 어머니는 해주최씨(海州崔氏) 장사랑(將仕郞) 한종(漢宗)의 딸이다. 김인후(金麟厚)
고종후(高從厚, 1554~1593), 湖節1下-163-2, 光州, 壬辰, 孝烈公-《호남절의록》(1799)고종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도충(道冲), 호는 준봉(隼峰), 부봉(阜峯)이다. 광주 출신.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
고인후(高因厚, 1561~1592), 湖節1上-041-1, 光州, 壬辰, 高敬命同殉 -《호남절의록》(1799)고인후의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선건(善健), 호는 학봉(鶴峯). 형조좌랑 고운(高雲)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호조참의 고맹영(高孟英)이고, 아버지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며, 어머니는 김백균(金百鈞)의 딸이다. 1577년 진사
호남절의록, 고성후(高成厚), 湖節1上-063-2, 光州, 高敬命 同倡조선 중기의 문신 죽촌(竹村) 고성후(高成厚, 1549∼1602)의 자는 여관(汝寬), 본관은 장흥(長興). 목사 경조(敬祖)의 아들로 남구 압촌동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1554년(명종 9) 6세 때부터 조부 고중영(高仲英)에게 수학하
기효증(奇孝曾), 湖節2上-066-2, 光州, 壬辰, 義穀將 -《호남절의록》(1799)기효증奇孝曾(1550~1616)의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백로(伯魯), 호는 함재(涵齋). 청백리 기건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기진(奇進)이고, 아버지는 고봉 기대승(奇大升)이며, 어머니는 충순위(忠順衛) 이임(李任)의 딸이다. 1550(명종5년)년
김덕보(金德普), 湖節4下-127-1, 光州, 丁卯, 高循厚同倡-《호남절의록》(1799)김덕보(金德普)의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룡(子龍), 호는 풍암(楓巖).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며, 어머니는 남평박씨(南平朴氏)로 직장 박계종(朴繼宗)의 딸이다. 형이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다.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 지금의 충
청주한씨 봉강재鳳岡齋는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에 있다. 호남대에서 영광쪽으로 조금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서봉마을 들어가는 곳에 봉강재 입구 석비가 보인다.봉강재는 청주 한씨 제학공 한사기(提學公 韓謝奇, 1257~ 1314)의 재실이다. 건물은 정면4칸, 측면1칸의 한식기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고당 김
이지호(李贄鎬, 1836~1892)는 광주 이씨, 자는 동현(東賢), 호는 지남(芝南)으로 광산(光山)에서 태어났다. 청심당(淸心堂) 이조원(李調元)의 후손이다. 아들 이승우(李承愚, 1855~1919)는 화순 출신으로,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서양 오랑캐에 대응하여 자주적인 사상
광산구 박호동 535-3 박산마을 입구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순절한 충민공 양산숙梁山璹을 비롯한 송천 양응정 가족 8명의 충효열행을 기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인 양씨삼강문梁氏三綱門과 임류정林流亭이 자리하고 있다.이곳에서 남쪽 방향의 박호등임로에 황룡강과 포전들을 바
북구 무등로 1021 (화암동) 마을 이름 화암은 주변에 꽃과 바위가 많아 화암花菴이라 했다거나 조선 중엽 송타宋柁 (1567~1597)가 마을 주변에 백일홍을 심어 화암당花菴堂이라 하고 그의 호를 화암花菴이라 한데서 연유했다 한다.그 이전에는 도자기를 구웠던 곳이었던 탓에 ‘불’의 의미 즉 ‘불바우’가 화(火) → 화(花)로
광산구 동곡분토길 195 (본덕동) 호가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 때 계유정란에 공을 세워 정란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세조 때 중추원첨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공조참판을 지낸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무이구강武夷九江의 위에 있다.
광산구 본량본촌길 29 (동호동) 호은정은 일제강점기 때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중재실中齋室을 갖춘 팔작지붕의 건물로 1930년 호은 심노옥沈魯玉(1847~1915)이 설계만 한 상태에서 원운과 원기 등을 만들었다. 나중에 아들인 심원하가 지방 향리를 지내면서 완성하였다고 한다. 호수의 물가에서 숨어 산다는
동구 문화전당로 38 (광산동) 광주의 동헌을 하모당이라 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에는 남쪽의 제일 깊숙한 곳에 위치한 동헌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회랑에 둘러싸여 있으며, 누각과 삼문 등 총 15채의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하모당이 객사의 동쪽에 있다. 건물의 정확한 형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