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용두동 봉학마을에는 읍궁암泣弓巖이 있어요. 엄이재掩耳齎 뒤편에 있는 푸른 이끼가 낀 바위를 말합니다. 이 엄이재는 한말 유학자이자 깨어있는 지식인으로 평가받는 현와弦窩 고광선高光善(1855∼1934) 선생이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봉황산鳳凰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
예로부터 광주에는 왕조대王祖臺라 명명하던 곳이 있었지요. 왕조대는 왕이 머문 곳 또는 왕이 군진軍陣을 친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왕이란 다름 아닌 고려 왕조의 건국자인 태조 왕건을 말합니다. 이 왕조대에 얽힌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1천 년 전으로 올라갑니다. 어느 해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 왕건과 견휜의
서창동 중앙부에 있는 백마산은 해발고도 162.1m의 나지막한 야산에 불과하지만 수려하면서도 골짜기가 깊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인 삽봉에 얽힌 전설이 많이 남아 있지요. 삽봉은 조선조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戊午士禍 당시 문민文愍 김일손金馹孫(1464~1498)이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史草 사건에 연루돼 참살당하는 화
서창동 백마산에는 수련골과 수련재, 차일봉, 장수굴 등 삽봉揷峰 김세근金世斤(1550∼1592) 장군과 관련된 지명들이 유독 많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백마산에는 임진왜란 때 공신인 삽봉 김세근 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지요. 삽봉은 조선 연산군 시절 일어난 무오사화에 김일손金馹孫이 연루돼 참살을 당하자 종6품 벼슬을
박희수朴希壽(1540~?)는 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덕로德老이고, 호는 회헌懷軒이다. 1540년 서창동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박상의 손자이고 김해부사 박민제朴敏齊의 아들이다. 회재 박광옥의 문인이며 벼슬은 1577년(선조 10) 음보蔭補로 후릉참봉厚陵參奉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 때 호남에서 박광옥 고경명과 함께 의병을
박지효朴之孝(1553~?)의 본관은 충주이며 자는 자경子敬, 호는 육류정六柳亭이다. 1553년 서창면 절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기대승에게 글을 배워 학문이 깊었으며 40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막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고경명 등을 제향하는 포충사에 대해 1603년 그와 후손들이 사액을 청하여 포충이라는 이름과 편
박대수朴大壽(1533~1612)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의 참모관이 되어 왜군을 무찌르는데 훌륭한 전략을 내놓았고 광주 의병소 시절엔 고경명과 함께 의병활동을 펼쳤던 애국지인이다.본관이 충주이며 자는 인수仁叟, 호는 송계松溪이다. 진사 박지흥의 증손이며, 하촌 박정의 장남인 박호손朴虎孫의 아들이다. 1533년 서창
김홍두金弘斗(1879~1933)의 아호는 악포樂浦이며 서창면 용두리 155, 학동마을에서 출생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 서당에서 글을 배운 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에게 본격적으로 공부하여 남달리 애국심이 강하였다. 1910년 강제로 국권이 강탈되자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祺中, 한훈韓焄,
김원범金元範(1886~1909)은 항일 의병장 김원국의 아우로 일제 감옥에서 자결한 애국지인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다. 형인 원국이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 시장에서 일본헌병을 타살하고 피신하자, 보다 조직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를 규합, 1906년 3월 형과 함께 광주 무등산에서 거사를 일으켰다.이
김원국金元國(1873~1909)은 일제강점기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맞서 싸우며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애국지인이다. 본명은 창섭昌燮, 호는 석포石浦, 일명 원국元局이다. 서창동 북촌마을 출신이며 의병이었던 김원범의 형이다.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못 마땅하게 여겨오던 김원국은 1905년 9월 광주군 송정리시장에서 일
김세근金世斤(1550~1592)은경남 함안군 마륜동 출생으로 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중빈重賓, 호는 삽봉揷峰이다. 김해인으로서 절효공 극일의 후손으로 1550(명종5년)년 4월 16일 출생하였다. 임진왜란 때 스승 중봉 조헌선생의 격문을 받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제봉 고경명의 의병과 합세한 금산전투에서 순군한 의병부장
김극추(金克秋), 湖節1上-084-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김극추金克秋(1552~1610)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의병장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서구 눌재로 420(세하동)서창한옥문화관은 도시화와 산업화로 사라져가는 우리의 농촌 풍습을 옛 그대로 보존해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볼거리와 체험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된 전통문화 체험공간이다. 주로 전통문화 또는 농촌생활 체험을 할 수 있는 학습장으로서 활용되고 있으며 주5일제 수업 전면시행에 맞춰
광주시 서구 풍금로 182(빛고을국악전수관 내)서구의 전통문화를 잘 보존해 계승시킴으로써 서구민으로서 자존감을 심어주는 서구 전통문화연구센터이자 계승터이다. 전통문화는 우리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줄 뿐 아니라 아름답지만 무조건의 답습은 따분할 수 있다. 서구문화원은 전통문화를 배우고 익히는데 답습에 머무르지
서구 서창동 603-2 일대서창나루는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 있었다. 현재 서창교라는 교량이 있었던 일대이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극락진이라 했던 나루가 바로 서창나루를 말한다.극락진은 현재 광주~송정리를 잇는 도로인 광송도로가 지나는‘극락교’라는 다리 때문에 극락교 자리에 극락진이 있었을 것이란 혼동을 일으
덕풍나루의 존재는 오횡묵의 『지도군총쇄록』에 등장한다. 덕풍진德豊津으로 일컫는 이곳은 1896년 전남관찰부에 업무 보고를 위해 광주를 방문하던 당시 지도군수 오횡묵이 지금의 나주시 노안면과 광주시 광산구 동곡동을 지나 이곳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서창마을 쪽으로 향했다고 한다.『세종실록』에는 황룡강
눌재로는 남구 압촌동에서 서구 서창동과 벽진동에 걸쳐 있는 도로다. 눌재로는 남구 압촌동 지석제 부근의 회재로와 맞닿는 부근에서 시작하여, 벽진동의 벽진고가교까지 6,224m의 도로로, ‘우부리 격살 사건’, ‘신비복위소’ 등으로 의로움을 몸소 실천한 눌재 박상(1474~1530)을 기린 도로다. 눌재로를 통해 서구에서 선정
다리가 놓여 지기 위해서는 천川이나 강을 건너는 길이 있어야 한다. 서구에는 영산강과 광주천, 서창천이 있고, 전평호수에서 발원하여 서창천과 합류하는 내도 있다. 따라서 영산강과 광주천, 서창천을 건너는 길에는 크고 작은 많은 다리가 놓여 있다. 다리는 새로운 길이 나면서 놓여 지기도 하지만, 하천이 복개되거나
한국지명총람은 1970년대에 전국적으로 조사된 땅이름으로 1986년에 발간되었다. 여기에 수록된 다리는 지명으로 남은 다리이다. 위치만 기록되어 있고 구조와 실물의 형태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많다. 여기에 기록된 순수한 우리말로 되어 있는 이름의 다리는 역사가 아주 오래된 것으로, 큰 다리보다는 징검다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