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정신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의 미시사를 옛 문헌에서 찾아 정리해 지역 역사문화자원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책이 나왔다.정인서 광주 서구문화원장은 최근 광주시와 광주문화재단의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의 하나로 광주정신을 만들어온 옛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정리한 《광주풍경2: 푸른 역사 뒤에
"광주의 역사를 기억하고 새로운 미래자원으로 만드는 방법은 광주읍성을 잊힌 과거가 아니라 광주 천년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담보한 문화도시 초석을 다지는 핵심 브랜드로 새롭게 창조해야 합니다."30일 광주 서구문화원에서 마련한 ‘광주, 천년의 과거 천년의 미래’ 문화유산아카데미에서 조광철 광주 역사민속박물관 학
전남 영암군의 조선 최초 홍일점 의병 양방매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영암 학회 회원들은 최근 영암군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세우자는 명목으로 이영현 양달사 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송성수 금정면 문체위원장 등과 함께 양방매 의병의 유적을 찾았다.이들은 양방매 의병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진 금정면 청룡리 분토동마을
그동안 자신과 아비가 무함을 받았던 전말을 진달하고, 염치없이 직임에 나아갈 수 없으므로 삭직해 줄 것을 청하는 집의 이보욱의 상소 - 영조 3년 정미(1727) 9월 2일(을묘) 맑음. 묘시에 안개가 끼었다가 진시에 우이(右珥)가 있었음 집의 이보욱(李普昱)이 상소하기
희정당(熙政堂)에서 소대를 행하는 자리에 참찬관 정택하 등이 입시하여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진강하고, 재해로 세량(稅糧)을 감면해 주는 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 영조 3년 정미(1727) 4월 12일(무술) 맑음 사시에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갔다. 소대(召對)를 행하러 신하들이 입시한 자리이
장우귀(張宇龜)를 잉임(仍任)하도록 청하여 엄한 하교를 받았으므로 체차해 줄 것을 청하는 전라도 관찰사 김조택(金祖澤)의 상소 - 영조 2년 병오(1726) 4월 4일(병인) 맑음 전라도 관찰사 김조택(金祖澤)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은 본디 용렬하여 백에 하나도 잘하
탕평(蕩平) 등에 대한 소회를 진달하고, 정세 등을 이유로 체차해 줄 것 등을 청하는 헌납 정택하(鄭宅河)의 상소 - 영조 1년 을사(1725) 3월 25일(계해) 맑음 헌납 정택하(鄭宅河)가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이 시종(侍從)의 자리에 서게 된 이래로 이제 16년이 되었습
전 교리 김홍석(金弘錫)과 같은 관사의 동료가 될 수 없는 혐의 등을 이유로 체직해 줄 것을 청하는 부수찬 강박의 상소 - 영조 즉위년 갑진(1724) 11월 24일(갑자) 맑음 부수찬 강박(姜樸)이 상소하기를,“삼가 아룁니다. 신은 맡은 직임에 대하여 참으로 몹시 외람되이
희정당에서 대신 등을 인견할 때 영의정 김자점 등이 입시하여 사역원 역관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 인조 26년 무자(1648) 10월 13일(갑진) 맑음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김자점(金自點), 좌의정 이경석(李景奭), 병조 판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를 구하는 구언 전지에 대한 배의 등 27명의 상소문 - 정조 22년 무오(1798) 11월 30일(기축) 농사를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하는 윤음을 내렸는데, 거기에 이르기를,“내년 기미년은 바로 선왕께서 적전(籍田)에서 친히 밭을 간 해이다. 50년 간을 임금
정언 박길언이 지평 조각을 삭직하도록 아뢰다 - 정조 15년 신해(1791) 8월 28일(경오) 정언 박길원(朴吉源)이 아뢰기를,“언관(言官)의 거취는 염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소금 가게와 땔나무 가게 등 두 가게에 패(牌)를 내준 일로 그 당시 사헌부
무신년에 종정한 송창기ㆍ김차동ㆍ김진희 등 209명에게 포장과 증직을 내리다 - 정조 12년 무신(1788) 3월 23일(을유) 오부(五部)와 제도에 무신년에 종정(從征)한 장사(將士)로서 생존한 사람과, 의를 지켜 순국(殉國)하였으면서도 아직까지 공적이 포양(褒揚)되지 않은 사람들을 찾아 아뢰게 하였다.<중략>
이발(李潑, 1544 ~ 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경함(景涵), 호는 동암(東菴), 본관은 광산이다. 제학 이중호(李仲虎)의 아들이며, 네 형제 중 둘째였다. 효성이 지극하였고, 중후하고 엄정하였으며, 질박하고 성실하였다고도 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어 경연에서 왕도를 진달하고, 기강을 진작하고, 정도와 사도를 분
전남 감사 김시진이 조복양의 진소 공박으로 소를 올리다 - 현종(개수실록) 1년 경자(1660) 11월 9일(경신)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복양(趙復陽)의 진소(陳疏) 공박으로 해서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신이 호조 판서 허적(許積)과는 선후배가 같지 않아서 서울에
조복양이 소를 올려 지신을 욕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청한 전남 감사 김시진의 상소문 - 현종 1년 경자(1660) 11월 9일(경신) 전남 감사 김시진(金始振)이, 조복양(趙復陽)이 소를 올려 욕했다는 이유로 상소하여 사직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신과 호조 판서 허적의 무리와는
광주 사람 권이평이 청나라를 추종하여 참수를 당하다 - 인조 21년 계미(1643) 4월 18일(신사) 그전에 광주(光州) 사람 권이평(權以平)이 상소하여 병사(兵事)를 말하고 또 자기 아들을 심양에 보내 동궁의 관소에 급사로 쓰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정원이 내용이 괴상하고
진인의 출현에 대한 변란의 조처 - 인조 6년 무진(1628) 12월 18일(갑진) 남원 사람 송광유(宋匡裕)가 언문으로 상변(上變)하기를,“전 좌랑 윤운구(尹雲衢)가 신과 친한데, 하루는 신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망하려고 하여 진인(眞人)이 이미 나왔다. 한 술서(術書)에 「하늘이 사람을 내렸으니 그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전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 - 선조(수정실록) 26년 계사(1593) 12월 1일(경술) 전(前)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하였다.과거에 정철이 부사(副使) 유근(柳根)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경사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때 동로군문(東路軍門)이 화의(和議)를 주장
전 도사 조대중을 하옥하여 죽이다 - 선조(수정실록) 23년 경인(1590) 3월 1일(임인) 전 도사(都事) 조대중(曹大中)을 하옥하여 죽였다. 대중이 전라 도사가 되어 역변의 초기에 부안(扶安)의 관창(官娼)을 대동하고 보성(寶城)에 이르러 서로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