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본량면 원당리, 광산구 왕동(원당)지역에 난와難窩 오계수吳繼洙가 지어 강학했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기문을 쓴 정자가 있었다.난와 오계수(1843∼1915)는 유학자이며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며 항일지사이다. 본관은 나주. 자는 중함重涵, 호는 난와難窩. 아버지는 갑선甲善이며, 어머니는 나주 정시혁鄭時爀의 딸이
북구 양산동 75-7 삼호정은 효자 정윤길정려, 효자 정재요 열부 밀성박씨정려, 만석재晩石齋 등이 있는 도로가에 있다. 굳게 닫힌 철문과 2m 높이의 담이 거대하게 서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다. 서구 화정동 화담사에서 모시고 있는 문절공 정수충이 처음 지었던 것을 퇴락 후 그 터에 후손 석포石圃 정병현
북구 용봉동 용봉동에 있었다는 삼양정사는 광주 봉곡리鳳谷里에서 태어나 자란 술재(述齋) 안종기(安鐘基, 1881~1949)가 국치의 변을 당해 출사를 접고 동지들과 구인회를 만들어 은거하며 유민으로 삶을 지내다 생을 마감한 곳이다. 창평 삼인산三人山에서 삼양정사를 짓고 후진교육에 전념했다는 기록도 있어 확
광산구 내등길 265 (내등마을) 황룡강의 송산교에서 임곡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우측에 내등마을이 나온다. 마을 안쪽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 어등산 북쪽 기슭에 불환정이 있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서쪽 30리 거리에 있다. 불환정의 주인은 임덕원(1713~1787)이다. 조선중기의 유명한 처사로 부귀와영화
북구 북쪽 10리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10리 거리에 있는 건물로 죽산안씨 20세인 명수明水 안정환安正煥(1843~1909)이 지었다. 오늘날 북구 일곡동이다.안정환의 본관은 죽산(竹山) 자는 덕유(德有)이다. 그가 정자에서 교차하는 만감으로 읊은 시에서 정자를 지은 이유를 알 수 있다. 명수라는 이
광산구 본량본촌길 29(동호동 419) 만취정은 청송심씨 동족마을인 동호동 남동마을 입구에 있다. 2002년 광주시 문화재자료 26호이다. 남동마을 입구에는 만취정, 남동사, 동호사 등이 마을 앞 도로와 나란히 배열하여 지나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만취정은 정남향을 바라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 만취
남구 노대동 473 만오 윤하검(1813~1905)을 위해 1902년 그의 두 아들인 희진喜鎭, 희성喜聖 형제가 지은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남쪽 10리 거리에 있다. 윤하검은 집이 가난했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성품 때문에 항시 시인 묵객들이 그의 집을 찾곤 했다. 윤하검은 종이품의 가의대부嘉義大夫에
동구 계림동 동계정/동계초당은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 등촌(登村)마을은 청풍이라는 동이름 처럼 산수가 수려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진 자연마을이다.등촌(登村)마을 골짜기 대밭골에는 1774년(영조 50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사후에 증지
동구 지산동 동쪽으로 5리에 있으며 구단舊丹 사동砂洞 서암瑞岩 조병훈趙秉勳이 지어 지냈던 곳으로 《조선환여승람(1935)》에 전하고 있다. 화순 능주 광덕리 출신 방은(芳隱) 임호응(林鎬應, 1870~?) 등이 다녀가며 시를 남겼다고 전한다. 임석주(林碩周)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나주의 신 모에게서 수업을
광주시 광산구 평동 묵헌默軒 이중권李重權(1869~1932)이 학문을 강구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때 지어 지냈던 곳이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당시에는 전남 나주 평동면平洞面에 있었으며 평동면은 1949년에 삼도면과 본량면, 광산군으로 이속시키고,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변했다.이중권의 자는 경구敬球, 호는 묵헌黙軒
광산구 신룡동 391-12 (신촌마을)《광주읍지》(1924)에서 낙암은 주의 북쪽 40리 거리에 있다고 했다. 신촌마을 뒤 중앙 언덕에 기씨의 재각인 청량재淸凉齋와 함께 낙암정이 있다. 낙암은 고봉 기대승(1527~1572)이 성리학을 강론한 곳으로 1570년에 짓고 그 아래 동편에 수칸數間의 우사寓舍를 지어 찾아오는 학자들을 머
북구 무등로 1550(청풍동, 신촌마을) 균산정은 북구 청풍동 신촌마을 초입에 있는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동쪽 10리에 있다. 균산筠山이란 대나무의 살갗처럼 추운 겨울의 눈보라에도 그의 절개가 변치 않음을 뜻한다. 노사 기정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은 남평 문씨 균산筠山 문용현文龍鉉의 유
북구 무등로 1550 (신촌마을) 괴양정槐陽亭은 속칭 비산술산이라는 남평문씨 신재공파 소유의 선산 계곡 위에 있다. 이곳은 북구 석곡월산길 119(망월동) 경렬사에서 광주 4수원지 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신촌마을’ 초입에 표석을 끼고 마을로 들어서면 팽나무. 마을 안쪽 냇가 석곡천이 나온다.신촌마을 앞
광산구 안청동옛 하남면 안청리, 광산구 안청동에 조선 후기의 문신 관어헌觀魚軒 박양동朴陽東(1829~1905)이 지어 지낸 정자이다. 안호(安湖) 박제방(朴濟邦)의 아들로, 아버지에 이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성품이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였고 학문을 즐겼으며, 여러 후학을 가르치며 한
북구 석곡동경암정은 유학자이며 참봉을 지낸 경암(敬庵) 정민석(鄭珉錫, 1866~ ?)이 지었다. 《조선환여승람》(1935)에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교리였던 지고(止皐) 고의상(高儀相 1833 ~1906)이 지은 기문이 남아 있다고 전하고 있어 구한말에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정자 주인은 본관이 경주로 노사 기정진의 손자이며
이용헌(李龍憲, 1851~1895)은 광산 출생으로 본관은 함평이다. 자는 운오(雲五)이며 호는 오산(梧山)이다. 조부는 취헌(醉軒) 이만엽(李萬燁)이다. 효행이 출전(出天)하여 승지(承旨)의 증직(贈職)을 받았다.「십회잠(十懷箴)」‧「척사부정설(斥邪扶正說)」등을 쓰는 등 유학의 진수(眞髓)를 다하
지리산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친 신덕균(1878∼1908)은 광주 우산동(또는 각화동 277) 출신이다. 초명(初名)은 덕순(德淳), 자는 정효(正孝), 호는 몽암(夢菴), 본관은 평산으로 신태수(申泰洙)의 아들이다.일찍이 기우만(奇宇萬)과 전우(田愚)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에 뛰어났다.광주북구지(1994)에는 우산동 출신으로
박해량(1850~1886)의 본관은 순천, 자는 도겸(道謙), 호는 율수(聿修)이다. 광산구 하남동(장수리)이 거주지이다. 박해량의 호는 율수재聿修齋로 고산 임헌회,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노사 기정진 등에게서 학문을 터득했으나 3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업적을 많이 남아 있지 않으나 탐라耽羅, 흑산黑山 등지에 유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