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하마을 뒤에는 백마산, 각시봉 등의 산들이 에워싸고 있으며 앞쪽(서쪽)에는 극락강 유역에 넓은 평야가 있어 대부분 논농사를 한다. 1990년대 들어서는 시설원예 농가가 늘었다. 조선 초에 청주한씨가 입촌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마을 형국이 연(하)꽃에 비유된다. 당산은 마을 앞에 큰샘과 마을 곳곳에
광주시 서구 불암길 82-100(서창동)1592년 임진왜란 때 충남 금산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순절한 삽봉 김세근 장군의 업적을 새긴 비이다. 1974년(갑인년)에 유림 지도자인 안동 김윤동金潤東이 글을 지었다. 묘정비 내용은 극락강변 팔학산 아래에 건물을 짓고 창렬단이라 하였다. 고제봉, 유월파, 안청계, 고학봉 등과 함께
서구 덕흥로 312(덕흥동)극락강변에 유유자적하며 금성錦城(나주) 송암거사 오길주吳吉柱가 지냈던 곳이나 지금은 금성오씨 재각인 덕호재德湖齋로 대신하고 있다. 학사 민병한閔丙漢이 쓴 기문이 『조선환여승람』(1935)에 남아 있어 이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후손인 오동수吳東洙의 찬기가 있다.지금은 빨간 벽돌
서구 동하길 10(세하동)만귀정晩歸亭은 흥성 장씨의 선조인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雨(1704∼1774)가 학문을 가르쳤던 옛 터에 후손들이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해 지은 일제강점기 정자이다. 원래 건물은 소실됐으나 1934년에 다시 중건됐고, 1945년에 고쳐지었다.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은 옆면에서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개산송당蓋山松堂은 명종 때 개금산 아래 회재懷齋 박광옥朴光玉(1526~1593) 이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쳤던 집의 당호堂號이다. 오늘날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이다. 30세 무렵인 1556년에 개산송당에 머물면서 제자를 기르고 도학道學(성리학)을 탐구하였다.43세 때 개산 남쪽
서구 유촌동 (옛 극락면)한말 효자였던 정석동鄭碩東이 지었다는 계정溪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쪽 10리에 있고 여러 사람의 제영이 있다고 했다. 정석동은 하동정씨 문절공 좌찬성 정수충鄭守忠(1401~1496)의 후손이다. 주역, 소학 등의 경서와 산수를 좋아하여 찾아다니며 시를 읊었
서구 유덕동 (덕흥마을)유덕동 마을의 원래 명칭은 덕산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덕흥으로 부르게 됐다. 마을의 역사는 500여년이 된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원래 한씨 성촌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 나주 오씨와 남평 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 야트막한 덕산德山(해발 35m) 정상에 느
서구 서창동『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 광산현에는 극락원極樂院이라고 하고 주의 서쪽 3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일대에는 앞으로는 영산강이 흐르고, 왼쪽에는 서창교 일대 야트막한 언덕을 끼고 조선 중엽까지 한양길 중 하나였다.극락원은 조선 중엽 이후에는 사라진 역으로 이후로도 오랫동안 이 일대에서는
서구 동하길 10 (세하동)서구 세하동, 마을 뒤에 백마산과 옥녀봉이 솟아있고 마을 앞에는 서창평야의 넓은 들고 그 가운데로 극락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넓은 서창평야를 바라보며 오랫동안 마을 입구에 자리한 옛 정원형 정자가 있다. 마을 입구에 큰 연못이 있고 그 위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3개의 정자가 나란
서구 유덕로12번길 12유촌마을 북쪽에 1948년 정종태程宗太 김정곤金晶坤 정원채鄭元采 정찬규鄭燦奎 등이 선도적으로 노력하고 동민들의 협력으로 지은 영락정泳樂亭이 있었다. 원래 이 자리에 영풍정泳豊亭이라는 정자가 있었으나 허물어졌고 마을 사람들이 영락정을 세웠다고 한다. 앞면 2칸, 옆면 2칸 건물로 내부 전체
서구 유덕동광주시 서구 치평동과 쌍촌동 사이의 영산강 구간을 일컫는 극락강변은 오래전부터 주변 초등학생 소풍지역으로 유명하고, 도시민들의 주말 휴식처로서 이용되고 특히 낚시터를 찾는 외지인들이 늘고 있다.강변에 낚시터가 유명했으며 광주향교의 『광주지』(1964)에 따르면 운암雲岩 정평태丁平泰가 생전에 유유
서구 벽진동옛 서창면 주곡리 벽진마을 산기슭에 정자 주은정舟隱亭이 있었다. 처사 김해 김만성金滿姓의 시음 공간으로 지어졌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원운과 사우들의 시가 전한다고 있다. 다만 정자 이름에서 배[舟]자를 사용했다는 것은 극락강의 오가는 배를 상징한 것으로 보여 강가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광천동 광천동의 유래와 연혁광천동은 일제 때의 광천정光川町을 1947년부터 고쳐 부른 이름이다. 엣날에는 광주천가에 새로 방죽을 쌓았다고 해서 새방천 혹은 신방천이라 부르기도 했다. 조선후기 기록인 『여지도서』 및 『호구총수』에 따르면, 현 광천동 지역은 광주목 군분면軍盆面에 속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언젠가 ‘고산자 대동여지도’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속 주인공은 지도에 목숨 걸고 지도 때문에 딸도 잃는 일들이 벌어진다. 지도는 문물이 소통하며 사람이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오늘날 위성지도나 내비게이션 등으로 길 찾는 일이 쉬워지긴 했으나 여전히 지도는 중요하다. 우리나라 지도는 삼
서구의 이름과 연혁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으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45개 동으로 구성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가 신설되었다. 남부출장소의 사·구·양·월산·농성·백운 등 14개 동, 서부출장소의 유·누문·북·임·상무 등 15개 동, 지산출장소의 본촌·우치·삼소 등 16개 동을 합해 광
선사시대광주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출토된 유적, 유물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이 가능하다. 상무 신도심을 개발하면서 확인된 인근의 서구 치평동 구석기 유적은 12만5천년 전까지 올라갈 수 있는 삶의 흔적임이 확인되었다. 이 지역의 구석기 문화는 뗀석기로 대표된다. 이 뗀석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