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남군 정충신에 대한 만시, 4수 〔錦南君鄭忠信挽, 四首〕 - 동명집 제5권 :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 1597~1673)황각으로 인하여서 발탁됐으매 / 拔擢因黃閣젊은 나이 때에부터 날아올랐네 / 飛騰自黑頭몸은 비록 군사 일에 종사했지만 / 身雖事鞍馬책은 춘추 좋아하는 기벽 있었네 / 書是癖春秋호도책을 써서 적을 격파
정금남에 대한 만시 십이 운[挽鄭錦南 十二韻] - 계곡선생집 제29권/ 오언 배율(五言排律) : 장유(張維 1587~1638)서석산(瑞石山)의 수려한 기운 한 곳에 모여 / 瑞石鍾靈秀출중한 영재가 세상에 나왔어라 / 英才出等夷높은 나무 옮겨 앉아 굳센 깃털 다시 닦고 / 遷喬刷勁翮천리마 뒤에 붙어서 앞질러 멀리 치달렸지 / 附驥
정충신(鄭忠信, 1576~1636), 湖節4中-078-1, 光州, 甲子, 樹勳 -《호남절의록》(1799)정충신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말의 명장 정지(鄭地)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광주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이다.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이인
김치원(金致謜 1562~?)의 자는 화제(和濟), 호는 수진당(守眞堂)이다. 현신교위(顯信校尉)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권율장군을 도와 이치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湖節3上-021-3, 光州, 壬辰, 權慄參佐 -《호남절의록》(1799)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손자 김치원(金致謜 1562~?)은 ‘수진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화암마을)광주읍지(1924)에는 주의 북쪽 40리에 있다. 찰방 이영선의 아들인 묵은 이정신李鼎新(1593~1674)이 만년을 위해 갈미봉 남쪽에 서옥리西玉里 신촌마을에 지었던 정자이다. 1645년엔 대치면 장안동 선산 아래에 짓고 관수재觀水齋라 하였다. 이어 1695년에 지은 것을 관수정이라 했다. 1918
경열사景烈祠는 광주 무등산 자락과 나주, 두 곳에 있다. 두 곳의 경열사 모두 고려장군으로 우리나라 수군을 창설한 정지 장군을 모시고 있다. 대체 왜 정지 장군을 모신 사당이 두군데나 있는 것일까? 정지 장군의 고향은 나주였지만 정지 장군이 머물며 왜구창궐에 나섰고, 일생을 마감한 곳은 광주였다. 이에 충청도 사
금남로4가 [동] 본래 광주군 기례방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후리, 성저리, 보통리의 각 일부와 성내면의 고촌리, 북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성저리라 해서 광주면(시)에 편입되었다. 1927년 본정 4정목으로 고쳤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전후리, 보통리를 갈라서 금남군 정충신의 군호
금남로3가 (파 【동】 본래 광주군 기례방면의지역으로서 광주 읍성 밑이 되므로 성밑 또는 성저라 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후리, 보통리의 각 일부와 성내면의 고촌리, 북촌리 일부를 병합하여 성저리라 해서 광주면(시)에 편입했다. 1927년 본정 3정목으로 고쳤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의
금남로2가(錦南路二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 안이 되므로 성안 또는 성내, 읍내라 하였는데, 1927년 본정 2정목이라 하다가 1948년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금남군 정충신의 군호를 따서 금남로 2가로 고치고, 1957년 동제 실시에 따라 동구 충금동회의 관할이 됨.
금남로1가(錦南路一街) 【동】 본래 광주군 성내면의 지역으로서 광주 읍성 북문 안쪽이 되므로 북문안 또는 북문내, 북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공수방면의 상촌리, 하촌리의 각 일부와 기례방면의 시리, 성저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북성정이라 했다. 1927년 본정 1정목으로 고쳤는데, 1948년
문학관과 문학공원 하나도 없는 문화도시 광주에 그나마 있는 주요 시비(詩碑·문학비)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지적됐다. 광주지역은 남구 사직공원에 11개의 시비가 있고 광주공원에 영랑과 용아의 시비, 북구 광주문화예술회관 고정희와 정소파, 중외공원에 김남주, 서구 마재근린공원에 정덕채, 광산구
편방사(片坊祠) 유허비(遺墟碑)는 <광주읍지>에 따르면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음기(陰記)가 있다.최초의 경렬사는 인조 22년(1644)에 현재 광주광역시 동구 동명동 74번지에 편방사(片坊祠)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이곳은 정지 장군이 말년에 낙향했던 곳이 광주목 편방면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경렬공
광주시 남구 중앙로107번길 15 (광주공원內)행주산성 전투로 잘 알려진 권율 장군의 도원수충장권공창의비(都元帥忠莊權公倡義碑)는 사적비군 입구 은행나무 정중앙 앞자리에 자리하고 있다. 가장 갚진 비다. 권율 장군은 팔도 총사령관이었으며 광주목사와 도원수를 지내며 이순신 장군과 함께 육지는 권율, 바다는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산 176번지1893년이 경렬사유허비(景烈祠遺墟碑)는 망월동에 있는 경렬사에 있다. 사당에는 고려 말의 무신 정지(鄭地)장군을 비롯하여 정충신, 유사, 고중영 등 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그 안에 1893년 행주인 奇宇萬 선생이 쓴 경렬사유허비가 옛 사지에서 1979년 경열사 경내로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광주 지역 아전이었던 충무공 정충신鄭忠信(1576∼1636)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 권율權慄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정충신은 거지 복장을 했지요.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전해야 하는 데 왜군들이 길을 점령하고 있어 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장계를 전달할 사
김극추(金克秋), 湖節1上-084-2, 光州, 壬辰, 高敬命同倡 -《호남절의록》(1799)본관은 김해이며 자는 여직汝直, 호는 절봉節峰이다. 탁영 김일손의 증손으로 알려져 있다. 김극추金克秋(1552~1610)는 어렸을 때부터 용감했을 뿐 아니라 학문도 깊어 주변의 부러움을 샀으며 의병장군 권율과 인연으로 의병에 투신했던
서구 금호운천길 31(금호동) 병천사秉天祠는 지방 세력가로 알려진 지응현池應鉉(1868∼1957)이 일제강점기에 지은 사당으로 충주 지씨들의 사우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1337∼1392)를 비롯해 전라도도원수를 지냈던 지용기(1330∼1392), 고려 명장 정지의 9대손인 정충신(1576∼1636), 서흥부사를 지냈던 지계최(?∼16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