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거(金彦琚, 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다. 김정(金禎)의 셋째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났다.김언거는 1525년(중종20) 사마시司馬試, 1531년 문과에 병과 12위로 급제한 뒤 이듬해 예조좌랑 및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1542년에는 낭관을 지내다가 체직되었고, 1545년에는 금산군수에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는 조선 중기 문신이며 자는 중락(仲洛), 본관은 서산이고 호는 설강이다. 교수였던 서희송과 어머니 청송심씨 아들로 유득공현(남구 대촌면 이장동)에서 태어났다.1522년 21세에 진사가 되었고, 1528년 27세에는 문과 별시에 병과 4위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외임을 많
광산구 풍영정길 21(신창동) 풍영정은 조선시대 승문원판교를 지낸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가 지은 정자로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이다.《광주읍지》(1879, 1924)에는 주의 서북쪽 20리에 있다. 지금의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 청원정은 광산구 신창동은 옛 광주 마지면馬池面 선창리仙滄里 선창산과 칠천漆川 강변에 있었다. 옥과 훈도를 지낸 김언거의 중형인 청원정 김언우(金彦瑀)의 정자이다. 인근에 칠계 김언거(金彦据,
1503~1584)의 풍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정자가 자리했던 극락강을 칠
무성한 푸른대는 황계(黃鷄)에 비치고맑고 찬기운 세모(歲暮)에 과시함을 점쳐얻었네.벗을 기다리는 뜰가에 가을 빛이 늦고옷깃을 씻은 난간엔 저녁빛이 나직하네. 바람앞에 거문고는 스스로 서리앞의 가지를 사랑하고달아래 거울은 먼저 비갠 언덕에서 보네.오늘에 쫏고 가는 기울의 글귀는모름지기 정자위의 시
북구 운암동 (서영대) 북구 운암동 대내(안몰)마을 출신인 난곡蘭谷 이연관李淵觀(1857∼1935)은 1898년 운암산에 영풍정을 짓고 이곳에서 지냈다. 이연관의 자는 성보成甫 또는 형국炯國이요,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일곡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삼우당 이제백의 6대손으로 부친은 이인석李麟錫, 모친은 노씨盧氏이다. 유복자로
광산구 풍영정길 21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과 극락강이 마주치는 강변 일대에는 무수한 정자군이 있었다. 대표적인 정자가 1560년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관직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칠계 김언거가 지은 풍영정이다.그의 6세손 김이려金以呂(1633~?)는 서루書樓를 지었다. 서루에 시를 남긴 사람은 朴潢, 尹
북구 운암동 (대내마을) 삼우당 이제백李齊白(1682~1759)이 시문을 짓고 풍류를 즐기며 지역 인사들과 지냈던 곳이다. 광산인으로 자가 백여(白汝)이며 호는 삼우당(三友堂)이다.매화(梅)와 동백(栢)을 심고 그 아래에 바위(巖)를 두고 삼우당이라 편액하고 매화의 청결함과 동백의 곧음, 돌의 견고함을 벗하고자
북구 일곡로 51번지 모룡대는 1934년 노종구가 부친 곡은 谷隱 노훈규(1844∼1915)의 유적을 기념키 위해 세운 정자이다. 광주읍지(1924) 효자란에 노훈규가 기록돼 있다. 한 평도 안 되는 초미니 정자에는 글이 새겨진 목판이 21개나 걸려있어 버거울 정도다.원래 모룡대가 있던 곳은 임금[龍]을 중심으
광산구 풍영정길 21 (신창동)풍영정을 지은 칠계 김언거金彦据(1503∼1584)의 아들 관포당灌圃堂 김광부金光符가 극랑강변 어딘가에 지어 지냈다. 김광부는 선무랑 군자감주부이다. 이황이 김언거에게 보낸 '기제관포정(寄題灌圃堂)'이란 시에 ‘관포당(灌圃堂)’이 나온다. 寄題灌圃堂 漆園傲吏離風塵 千載同歸漆水
설날 전후로 많은 이들이 고향을 다녀갔다. “예전 그대로인데!”, “와, 많이 바뀌었네.” 등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갔다.광주 서구 서창동을 다녀간 이들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다. 마을에 따라 바뀐 모습의 양상이 크게 다르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기억나는 것은 ‘극락’이다.우리나라에서 ‘극락’이라는 지
광주시 광산구 1885년瑞山柳氏鍾城府使雪江公諱泗 설강유사선생묘갈명은 덕은 송병선이 짓다.유사柳泗(1503~1571)는
조선중기의 문신, 본관은 서산이며 자는 중연(仲沿), 호는 설강(雪江)이다. 남구 유등곡柳等谷(현 이장동
양과동) 출신으로 봉훈랑(奉訓郞, 문관 또는 종친에게 준 종 5품 벼슬) 경흥교수(慶興敎
광주를 걷는다. 광주에 주민등록을 두고 살기 시작한 지 40여년이 되었는 데도 아직도 모르는 광주의 기억들을 찾을 때마다 새롭기만 하다. 신문기자 생활을 30여년 했으니 제법 오래 했고 문화원장을 맡은 지도 4년이 지났다. 자연스레 지역문화에 애정을 쏟고 있다.지난해 <양동시장에서 서창 들녘까지>라는 서구지
광주 서구 극락강의 서창나루 마지막 뱃사공이면서 일제강점기 때 서창에 나눔을 베푼 인물로 알려진 박호련의 행적을 최근 서구문화원에서 찾아 공개했다.서구문화원(원장 정인서)은 일제강점기 당시 한재 등으로 굶주림에 허덕이던 서창 지역민들에게 두 번씩이나 쌀과 돈을 풀어 함께 나눔의 삶을 실천한 박호련의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