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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집(孤雲集)》 해제(解題)

최치원의 저술과 고뇌, 그리고 역사 탐구 -

1. 최치원의 생애와 저술



신라 말의 격동기에 살았던 최치원은 여러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술은 재당 시절과 귀국한 뒤 관리로 재직하던 시절, 그리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해인사에 은거하던 시절 등 세 시기로 구분된다.



1_ 가계와 출생



최치원은 헌안왕(憲安王) 1년(857)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해운(海雲), 호는 고운(孤雲)이며, 사량부(沙梁部) 출신이다. 그의 가계에 대해서는 잘 알 수 없으며, 여러 기록을 통하여 일부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다.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아버지 최견일(崔扁逸)이 사찰의 중건 활동에 관계하였다는 내용이 나온다. 형제로는 승려인 대덕(大德) 현준(賢俊)과 정현사(定玄師)가 있으며, 종제(從弟)로 최서원(崔棲遠)이 있다.


최치원의 가문은 육두품(六頭品)에 속한다. 그는 〈무염 화상 비명(無染和尙碑銘)〉에서 육두품을 득난(得難)이라고도 한다고 하여 이를 자랑스레 말하고 있다. 왕족인 진골(眞骨) 다음가는 육두품으로는 흔히 신라의 육성(六姓)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가문이 대표적이므로, 분명히 얻기 어려운 귀한 신분이었다. 하지만 각 행정 관부의 장관인 영(令)에는 취임할 수 없는 신분이어서 능력만큼의 대우를 받을 수는 없었다. 따라서 육두품은 신라 사회에서 주도 세력의 일부라기보다는 부수적인 신분층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이들은 주로 학문이나 종교적인 면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중국 유학생의 대부분이 이 계층에 속한다.



2_ 입당 유학과 재당 시절



최치원도 경문왕(景文王)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으로 유학의 길을 떠났다. 그때 아버지 최견일은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고 말하지 마라. 나 또한 아들이 있었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가서 게을리하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라.〔十年不第進士 則勿謂吾兒 吾亦不謂有兒 往矣勤哉 無隳乃力〕”라고 하여 격려하였다. 이를 깊이 새긴 최치원은 열심히 공부하여 유학한 지 6년 만인 경문왕 14년(874)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때의 시험이 외국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빈공과(賓貢科)로 알려져 있는데, 상세히 검토한 결과 당(唐)나라에서는 빈공과가 시행되지 않았다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방에서 인재를 천거받아 입경(入京)하여 과거를 치르게 했다. 그 합격자들을 향공진사(鄕貢進士)라 불렀으며, 신라와 같이 이역(異域)에서 온 사자(士子)들이 급제하면 빈공진사(賓貢進士)라 불렀다. 이로 인해 ‘빈공’은 점점 이역의 공사(貢士)를 두고 말하는 것이 되었다. 이는 여러 가지 사료를 통한 상세한 고증이 이루어진 것으로 신뢰할 수 있고 이로써 최치원의 위상이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으니, 그의 문재(文才)로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치원은 2년 뒤 선주(宣州) 율수현 위(凓水縣尉)가 되어 지방 치안을 맡았다. 《계원필경집》에 나타난 그의 관직 생활은 청렴결백한 모습을 보여준다. 1년여 뒤에는 대과인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응시하고자 사직하였다. 하지만 저축한 봉록이 다함에 따라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면서 중도에 포기하고 당시 회남 지역의 절도사였던 고변(高駢)에게 자신을 천거하였다. 이때 최치원은 “그러한즉 공자의 당중에도 타향의 제자들이 있었으니, 맹상군의 문하엔들 어찌 먼 지방의 사람들이 없었겠습니까?〔然則尼父堂中 亦有他鄕之子 孟嘗門下 寧無遠地之人〕”라고 하여 외국인이라도 재주가 있다면 발탁하여 쓸 수 있다고 역설하였다.


결국 고변에게 발탁되어 표(表)ㆍ장(狀)ㆍ서계(書啓)ㆍ격문(檄文) 등을 제작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할 때에 그가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어 문명을 천하에 떨친 일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 공적으로 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 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되었으며, 겸하여 포장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이어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그는 헌강왕 11년(885) 귀국할 때까지 17년 동안 당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동안 당의 여러 문인들과 사귀어 문재가 더욱 빛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도 그의 저서명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규보(李奎報)는 〈당서(唐書)에서 최치원(崔致遠)의 열전(列傳)을 두지 않은 것에 대한 의(議)〉에서 《당서》 열전에 그의 전기가 빠진 것은 중국인들이 그의 문재를 시기한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재당 시절에 이룬 그의 저술로는 대략 다음의 것들이 있다.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


《금체시(今體詩)》 5수(首)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권(이상 《계원필경》 서)


《계원필경》 20권, 《사륙집(四六集)》 1권(《신당서》 예문지)



《계원필경집》 서문에 수록된 내용에 따르면 《계원필경집》은 최치원이 당으로부터 귀국한 뒤, 그가 고변의 종사관이던 시절의 저작들을 주로 하고 귀로에서 지은 것까지 모아 편집하여 국왕에게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위 저술들 중 앞의 셋은 당의 동도(東都)에 있을 당시의 작품들을 모은 것이며, 《중산복궤집》은 율수현 위로 있을 당시의 저작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저술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집》뿐이다.


《계원필경집》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내력은 알 수 없다. 오늘날 전하는 것은 1834년(순조34)에 서유구(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홍석주(洪奭周)의 집에 소장된 옛 책을 얻어 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그리고 1930년에 들어와 충청북도 음성의 경주최씨문집발행소(慶州崔氏文集發行所)에서 신활자(新活字)로 간행하였다.


《계원필경집》은 고변을 위한 대필과 공식 문서가 대부분이지만, 재사(齋詞)는 당대(唐代)의 도교 연구에,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사(越南史) 연구에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고변을 과대평가하여 그를 중국 역대의 영웅들과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記德詩)〉의 경우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신당서》에 《사륙집》 1권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위의 서문에 들어 있는 책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미처 수록하지 못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혹 남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시들의 일부가 유전(流傳)되어 《고운집》에 수록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3_ 귀국 후 관료 시절



헌강왕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하였다. 당시의 신라는 이미 골품제 사회가 무너져 가는 많은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대두해 올라오는 호족 세력 때문에 중앙 정부는 지방 주군(州郡)의 세금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재정이 궁핍하게 되어 사자를 보내 독촉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중앙 집권적인 정치 체제의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신분제의 과감한 개혁을 포함한 혁신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집권층인 진골 귀족들은 황룡사 9층탑의 중수, 창림사지 석탑의 조성, 대숭복사의 중창 등과 같은 불사(佛事)를 통한 전통적인 종교적 권능에 힘입으려는 고식적인 정책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을 뿐이었다. 대야주(大耶州 합천(陜川))에 은둔한 왕거인(王巨人)이 붙였다는 괘서(掛書) 이야기는 집권층에 대한 지식층의 반항으로 이해되는데, 최치원 또한 마찬가지 위치에 서는 것이다.


최치원은 재주가 많은 만큼 질시도 많이 받았다. 그는 이를 피하는 방편으로 외직(外職)을 원했다. 890년(진성여왕4) 전후로 태산군(太山郡 태인(泰仁), 현재의 전북 정읍시 칠보면 일대)에 나아간 뒤, 이후 천령군(天嶺郡 함양(咸陽))과 부성군(富城郡 서산(瑞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그가 지방에 내려가게 된 것은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 2월에 그를 끌어 주던 각간(角干) 위홍(魏弘)이 죽은 뒤, 국왕의 총애를 받는 미장부(美丈夫)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천권(擅權)하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그들로부터 견제를 받은 때문이라 생각된다. 즉 이제는 그를 끌어 주던 헌강왕과 정강왕은 물론 위홍마저도 죽은 것이다. 부성군 태수로 있던 893년 하정사(賀正使)에 임명되었으나 도둑들이 횡행하여 가지 못하였고, 그 뒤에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간 일이 있다.


진성여왕 8년(894)에 최치원은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린다. 여기에는 그의 정치적 견해가 잘 나타나 있었을 것이다. 원문이 전하지 않는 지금으로서는 그 윤곽을 추측해 보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위로는 강수(强首)나 설총(薛聰)의 전통을 이어받고, 아래로는 최승로(崔承老)의 모범이 되었을 이 시무책은 중앙 집권적인 귀족 정치를 지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국왕보다는 현명한 재상에 의해 유지되는 재상 중심의 귀족 정치 체제를 주장하였을 것이다. 이는 결국 고려왕조에서 왕족들의 정치 참여를 배제하는 문벌 귀족 사회를 이루는 계기가 된다.


최치원이 생각한 중앙 귀족이란 진골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육두품까지 포섭하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층의 폭을 넓히다 보면 신분보다는 학문을 토대로 한 인재 등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의 정치적 개혁안은 신라의 골품제 사회보다 개방적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추측되지만, 한편 그가 지방 호족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이었을까 하는 데에는 의심이 간다.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 최치원은 육두품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 하지만 당시의 사회 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은 그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치원은 호족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극복하지 못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는 그가 시무책을 올리기 이전에 지은 글에 길을 묻는다는 ‘문진(問津)’이나 갈림길을 뜻하는 ‘기로(岐路)’가 자주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최치원은 새 왕조 건설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에 인용된 고사(古事)에 양호(羊祜)가 조상의 무덤에 서린 제왕의 기운을 파냄으로써 충성의 의리를 극명히 드러낸 것과 안녹산(安祿山)이 용미도(龍尾道)를 파헤친 것이 미치광이의 짓이라고 한 내용에서 십분 이해할 수 있다.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은 즉위 11년 만에 정치 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孝恭王)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른다.


최치원은 문한관으로 재임하면서 왕명을 받아 표ㆍ기ㆍ소 등을 저술하였으며, 그 일은 지방관으로 재직하면서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이들 저작을 묶어 그의 생존시에 편찬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들이 훗날 문집으로 구성되었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저술들은 다음과 같다.



〈진감 화상 비명(眞鑑和尙碑銘)〉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


〈무염 화상 비명(無染和尙碑銘)〉


〈지증 화상 비명(智證和尙碑銘)〉(이상 《사산비명》)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삼국사기》 권11, 진성왕 8년)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삼국사기》 권4, 지증마립간 원년)



먼저 위의 네 비명은 진감 화상ㆍ무염 화상ㆍ지증 화상 등 세 분 선사의 업적과 왕실의 대숭복사 중창 불사를 기리는 사적비인데, 본래는 독립된 글이었지만 조선 시대에 들어와 하나로 묶어 유통되면서 《사산비명》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사산비명》은 왕명을 받아 저술한 것이어서 그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은유와 비유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조심스레 비추었다. 또한 이 글은 그가 혈기 왕성하게 활동할 때인 30대의 젊은 시절에 지은 것이어서 그의 자신감과 자부심 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하여 그의 정치적 이상도 살필 수 있는데, 점차 신라 사회가 혼란에 이르게 되면서 고민하는 그의 모습 또한 역력히 살필 수 있다.


〈시무십여조〉는 진성여왕에게 올린 것으로, 당시 현실의 문제를 논의하고 그에 대한 개선책을 제시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의견을 잘 알 수 있는 이 귀중한 문헌도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제왕연대력》은 《삼국사기》의 사론(史論)에 “신라 말의 명유 최치원이 《제왕연대력》에서 모두 모왕(某王)이라 칭하고 거서간(居西干) 등을 말하지 않았는데, 대개 그 말이 야비하여 칭할 만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부식(金富軾)이 이를 본 것만은 틀림없는데, 그 책 이름으로 짐작건대 연표류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4_ 해인사 은거 시절



《동사강목》에 따르면 그는 효공왕 4년(900)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 산천을 유람하게 된다. 그가 즐겨 찾은 곳은 경주의 남산, 의성의 빙산(氷山), 합천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溪寺), 마산의 별서(別墅)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 밖에도 동래의 해운대를 비롯하여 그의 발자취가 머물렀다고 전하는 곳이 여기저기에 있다. 만년에는 형인 승려 현준, 정현사와 더불어 도우(道友)를 맺고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합천군 고적 독서당(讀書堂)〉에 의하면, 최치원이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집을 나갔는데 갓과 신을 수풀 사이에 남겨 두고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그가 신선이 되었다고 전하기도 하지만, 이우성(李佑成)은 그가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 세상을 버리고 떠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주장하여 왔다.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신라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정치적 이상은 훗날 그의 문제(門弟)들에 의하여 고려에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고려왕조에 들어 왕족이 배제되고 재상 중심의 귀족 정치가 실현된 것이다.


최치원은 정치에서 물러나 해인사에 은거하면서도 저술에 몰두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주로 승려들의 전기를 지었다.



《의상전(義湘傳)》(《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권2 안함전(安含傳) 및 《삼국유사》 권4 의상전교(義湘傳敎))


《당대천복사고사주번경대덕법장화상전(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 권50 사전부(史傳部))


《석이정전(釋利貞傳)》(《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 건치연혁(高靈縣建置沿革))


《석순응전(釋順應傳)》(《신증동국여지승람》 권30 합천군 고적(陜川郡古跡))


〈보덕전(普德傳)〉(《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3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앞의 두 승전의 주인공인 의상과 법장은 각각 신라와 중국의 화엄종을 대표하는 거장(巨匠)이다. 두 사람은 중국에서 화엄종의 대가인 지엄(智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지엄은 의상에게 의지(義持)의 호를, 법장에게 문지(文持)의 호를 내렸다. 이는 두 제자의 재주를 보아 내린 것인데, 최치원이 이들의 전기를 지은 것은 두 사람을 대비시키려는 어떤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법장화상전》은 완전한 내용이 전하고 있으나, 《의상전》은 《해동고승전》과 《삼국유사》에 일부 편린이 전하고 있을 뿐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따라서 양자에 대한 최치원의 입장을 정확히 알 수 없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장화상전》은 대안(大安) 8년(1082, 문종36) 고려 대흥왕사(大興王寺)에서 판각되어 배포되었는데, 이것이 중국으로 건너가 송(宋) 소흥(紹興) 19년(1149) 의화(義和)에 의하여 재간행되었다. 이것이 다시 필사(筆寫)되어 일본 고산사(高山寺)에 소장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대일본속장경(大日本續藏經)》과 《대정신수대장경》에 활자로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를 《최문창후전집》에 수록하여 놓았다. 중국과 일본을 거쳐 다시 돌아온 셈이다.


《석이정전》과 《석순응전》 역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 편린만 나올 뿐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에 따르면 이정과 순응이 가야 왕실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주목되는 것으로 〈보덕전〉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고구려 멸망기에 활동한 보덕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도교를 장려하고 불교를 억압하게 되자 남쪽 완산주(完山州 전주(全州))로 망명하여 불교를 폈던 승려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국이상국집》에 일부 들어 있을 뿐 저술 내용이 모두 전하지 않아 최치원이 이를 지은 의도를 알기 어려우나, 멸망기의 모습을 전하려 한 것 같다.


이 승전들이 저술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천복(天復) 4년(904, 효공왕8) 해인사에서 《법장화상전》을 저술한 사실을 미루어 보면 나머지도 이를 전후한 시기에 지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가 많은 승전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난세(亂世)에 처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새 시대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해인사에 은둔한 최치원은 난세인 당시의 현실을 꿈으로 보았지만, 그 꿈을 새 시대의 도래로 인식하고 있었다. 새 시대에는 새로운 인물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 이념이 요구된다. 따라서 정치에서 물러나 있었던 그는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승전을 저술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가 지향한 새 시대의 모습은 뛰어난 군주보다는 훌륭한 재상이 정치의 중심에 서는 것이었다. 이는 상(商)나라 고종(高宗)이 꿈속에서 본 부열(傅說)을 찾아서 그를 재상으로 삼고 그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발전시킨 고사(《서경(書經)》 〈열명(說命)〉)를 인용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5_ 최치원에 관련된 위서류(僞書類)



다음은 최치원의 저술로 잘못 전해 오는 것들이다.


첫째는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인데,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찬집서적목록(纂輯書籍目錄)에 일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의 아들 권별(權鼈)이 편찬한 《해동잡록(海東雜錄)》에도 계승되어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해동고승전》 〈아도전(阿道傳)〉에 인용된 바와 같이 박인량(朴寅亮)의 저서라고 해야 옳다. 《수이전》의 〈최치원전(崔致遠傳)〉에는 그를 주인공으로 한 설화가 실려 있다. 이것은 저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당시 당나라의 분위기로 볼 때 최치원 자신이 이를 저술하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 전설의 출처가 고운이 고변의 막료로 있던 선주 지방의 전설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저술로 보기 어렵다.


둘째로 《경학대장(經學隊仗)》이 그의 저술로 일컬어져서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 목록 권외서목(卷外書目)에도 들어 있고, 최근에는 《계원필경집》과 합본으로 출판된 것도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성리학에 대한 것이어서 최치원의 저술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


이외에도 《강산유가곡(江山遊歌曲)》이라는 비기농설(秘記弄說)이 화산(華山)의 소장본에 있고, 또 《아양진결(蛾洋眞訣)》이 청분실(淸芬室)의 소장본에 있다고 하나 모두 믿을 수 없는 위서(僞書)에 속한다.


2. 《고운선생문집》의 편찬과 역주



최치원의 저술은 《계원필경집》과 《사산비명》, 《법장화상전》만이 온전히 전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여러 책에 흩어져 그 일부만 전하고 있다. 또 위에서 서명으로 제시된 것 외에도 관료로 재직하면서 작성한 글들이 따로 묶여 편찬되었을 법한데 알 수가 없다.



1_ 문집(文集) 30권



이 책은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을 통하여 편찬된 사실이 확인되는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이 문집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편찬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고려 초의 일로 짐작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당시에도 이 책이 남아 있어서 참조하였다. 30권이라고 하면 적지 않은 양이므로 이것이 남아 있다면 풍부한 그의 문장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30권의 문집이 온전히 전하지 않아 세조(世祖) 5년(1459) 최항(崔恒) 등에게 명해서 12권의 문집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이것마저도 전하지 않는다.



2_ 최국술본(崔國述本) 《고운선생문집》(연세대 소장)



1926년 6월에 이르러 최국술이 악부(樂府)ㆍ《동문선》ㆍ야사(野史)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기록을 모아 《고운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본 번역서의 대본으로 서지 사항은 다음과 같다.



1926년, 목판본, 3권 2책, 10행 20자, 19.8×15.7㎝, 상하이엽화문어미(上下二葉花紋魚尾)


권수제 고운선생문집


판심제 고운선생문집



이 《고운선생문집》은 3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서문과 목록 그리고 〈고운 선생 사적(孤雲先生事蹟)〉이 실려 있다. 서문은 노상직(盧相稷)과 책을 편찬한 후손 최국술이 썼다. 목록에는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저자의 저술 목록인 권외서목(卷外書目)이 첨부되어 있는데, 승전류(僧傳類)는 수록되지 않았다. 사적은 《삼국사기》ㆍ《동국통감(東國通鑑)》ㆍ《동사찬요(東史纂要)》 등의 사서류(史書類)와 가승(家乘), 그 밖에 저자의 유적ㆍ사원(祠院)ㆍ치제문(致祭文)ㆍ축문(祝文)ㆍ《단전요의(檀典要義)》 등에서 저자와 관련된 자료를 채집하여 수록하였다. 내용이 광범위하여 편찬자가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는데, 책의 3분의 1에 해당할 정도이다.


권1에는 부(賦) 1편, 시 32제(題), 표(表) 8편, 장(狀) 6편, 계(啓) 1편, 기(記) 3편이 실려 있으며, 대부분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시는 오언고시 4제, 오언절구 2제, 칠언절구 10제, 오언율시 4제, 칠언율시 6제, 칠언시구 3제, 칠언절구 1제, 칠언율시 1제가 시체별(詩體別)로 편집되어 있는데, 재당 시절과 귀국 이후의 작품이 혼재되어 있다. 표와 장은 귀국 후에 지은 신라왕의 대작(代作)으로, 당에 보낸 국서(國書)이다. 이 가운데 〈백제견사조북위표(百濟遣使朝北魏表)〉는 백제왕의 대작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저자의 글이 아님이 분명하다. 기 2편은 불교와 관련된 글이다.


권2와 권3에는 〈무염 화상 비명〉, 〈진감 화상 비명〉, 〈대숭복사 비명〉, 〈지증 화상 비명〉이 실려 있다. 이 네 편의 비명은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불리는데, 귀국 후 왕명을 받들어 지은 것으로, 당시에 유행한 사륙변려문(四六騈驪文)으로 쓰였다. 이 글들은 많은 고사를 인용하여 주인공들의 업적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고전에 밝지 못하면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사산비명》은 만력(萬曆) 연간(1573~1619)에 철면노인(鐵面老人 중관 해안(中觀海眼))이 《고운집》 10권 속에서 4편의 비명을 뽑아 주석을 붙여 하나의 독립된 책으로 만들었으며, 연담 유일(蓮潭有一, 1720~1799)이 내용을 덧붙였다고 한다. 이후에 몽암 매영(蒙庵昧穎, ?~?)의 《해운비명주(海雲碑銘註)》(1783년)와 각안 범해(覺岸梵海, 1820~1896)의 《사산비명》(1892년) 등으로 계승되어 주해(註解)가 보완되었는데, 이는 지금도 전한다. 이들은 모두 지리산 권역 사찰에 주석한 승려들이다. 이후 순조(純祖) 연간에 호남에 내려온 처사 홍경모(洪景謨)가 새로운 주해를 더했으며,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이 보다 정밀한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1931년)을 만들었다. 이본(異本)에 따라 주해가 약간씩 다르다. 이본은 《문창집(文昌集)》(규장각본), 《사갈(四碣)》(고려대 도서관본), 《계원유향(桂苑遺香)》(崔完洙 소장본) 등 여러 표제로 되어 있다.



3_ 최면식본(崔勉植本) 《고운선생문집》(고려대 소장)



6개월 뒤인 1926년 12월, 또 다른 후손인 최면식이 이상영(李商永)의 서(序)를 받아 역시 똑같은 이름의 《고운선생문집》을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계원필경집》을 포함하여 권1에는 시 86수, 표(表) 20수, 장(狀) 73수가, 권2에는 소(疏) 2수, 계(啓) 8수, 격(檄) 4수, 위곡(委曲) 20수, 거첩(擧牒) 50수, 서 18수, 기(記) 2수, 재사(齋詞) 15수가, 권3에는 별지(別紙) 95수, 제문(祭文) 5수가 실려 있다.



4_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1972년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선생의 자료를 모아 새로이 《최문창후전집》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여기에는 위의 최국술이 간행한 《고운선생문집》과 서유구가 간행한 《계원필경집》을 영인 수록하였다. 또 이 두 책에 실리지 않은 자료들 특히 불교관련 자료들을 모아 속집을 편집하여 〈고운선생속집(孤雲先生續集)〉 항목을 추가하였다. 이 〈고운선생속집〉에는 《고운선생문집》에서 누락되었거나 새로 발견된 한시와 금석문 그리고 《법장화상전》 등과 같은 불교 관련 내용이 수록되었다. 이로써 최치원의 저술을 하나로 모으게 되었고, 불교 관련 내용이 빠진 것을 보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후 최치원 사상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바탕이 되었다.



5_ 《고운선생문집》의 역주



洪震杓 譯, 〈四山碑文〉, 《韓國의 思想大全集》 3, 同和出版公社, 1972.


崔濬玉 編, 《國譯 孤雲先生文集》 上ㆍ下, 孤雲先生文集編纂會, 1972ㆍ1973.


崔英成, 《註解 四山碑銘》, 亞細亞文化社, 1987.


淨光, 《智證大師碑銘小考》, 經書院, 1992.


李智冠, 《譯註 歷代高僧碑文》 新羅篇, 伽山文庫, 1993.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編,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3, 가락국사적개발연


구원, 1993.


李佑成 校譯, 《新羅 四山碑銘》, 亞細亞文化社, 1995.


崔英成, 《崔致遠全集 1 四山碑銘》, 아세아문화사, 1998.


崔英成, 《崔致遠全集 2 孤雲文集》, 아세아문화사, 1999.



위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최치원 문집은 일찍부터 번역이 나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최준옥의 주도로 여러 전공 학자들이 각 분야별로 나누어 처음으로 완역이 이루어졌다. 상권에는 《계원필경집》을, 하권에는 《고운선생문집》 외에 〈고운선생속집〉과 사적을 싣고 역주를 달았다. 이는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최문창후전집》을 완역한 것인데, 여기에서도 빠진 내용을 추가로 수록하여 그 가치를 더하였다. 이는 편저자 최준옥의 정성 어린 노력의 값진 산물로, 이로써 최치원 사상을 연구하는 발판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최영성이 《고운선생문집》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사산비명》을 중심으로 상세한 역주 작업을 했다. 이는 《사산비명》을 연구하려는 학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일정 영향을 주었다.


불교계와 역사학계의 연구도 이어졌다. 먼저 정광이 《지증대사비명소고》를 출판했다. 정광은 지증대사비가 소재한 문경 봉암사(鳳巖寺)에 주석한 것이 인연이 되어 여러 해에 걸친 판독과 선학들의 성과물을 바탕으로 분석을 통하여 마멸된 글자를 복원하는 한편 우리말 번역과 상세한 주해를 곁들였다. 이외에도 《사산비명》의 다른 비명(碑銘)은 물론 봉암사에 있는 〈정진대사 비명(靜眞大師碑銘)〉과 〈상봉대사 비명(霜峯大師碑銘)〉을 비롯하여 우리 불교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록하여 불교사의 흐름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이지관의 역주가 나왔는데, 이것은 난해한 불교 내용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역사 학계의 원로인 이우성은 《사산비명》에 대한 모든 집주(集註)와 번역본을 망라하여 정리하면서 오자와 탈자에 대한 교감(校勘)과 잘못된 주석을 산정(刪整)하는 한편 자신의 신주(新註)는 제한하고 참고할 만한 선학의 주석을 수록하였다. 평이한 번역으로 독자들의 접근이 용이하도록 함과 동시에, 원문의 용어를 되도록 많이 살려서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하도록 노력하였다. 이 책은 《사산비명》을 접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이 특색이다.


이같이 새로운 역주가 시도되면서 새로운 내용이 보태져 이해를 도울 수 있게 된 것은 유익한 일이다. 《고운선생문집》에 대한 역주는 최영성에 의해 다시 한 번 정리가 이루어졌다. 최영성은 《고운선생문집》 가운데 〈고운 선생 사적〉 부분을 빼고 대신 대동문화연구원본의 〈고운선생속집〉을 추가하였다. 여기에서는 앞서의 역주에서 미진한 점을 보완 개선하였는데, 이는 학계의 발전에 또 다른 기여를 한 것이다.


이번에 역주되는 것은 세 번째의 완역서가 된다. 역주자 이상현은 이미 《목은집(牧隱集)》, 《도은집(陶隱集)》 등의 문집은 물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서책들을 역주하여 높은 평가를 받아 왔다. 그는 유학과 문학에 대한 지식은 물론 불교학을 전공하여 폭넓은 지식을 갖추었으며,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의미 있는 주석 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불교의 난해한 문구는 이해도 어려울 뿐더러 설명 역시 쉽지 않은데, 이 책에서는 이를 무리 없이 소화해 내고 있다. 가령 〈희랑 화상에게 증정하다〔贈希朗和尙〕〉에는 화엄 사상과 관련된 내용이 함축되어 있는데, 이를 상세하게 잘 설명하여 이해를 돕고 있다. 또 과거의 번역이 직역을 위주로 하여 다소 딱딱한 분위기였다면, 이 책은 문장의 맛을 잘 살려 읽기 쉽게 번역하였다. 다만 〈고운선생속집〉의 내용을 더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는데, 이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 같다.


3. 《고운선생문집》의 학술적 가치



《고운선생문집》에는 《사산비명》을 비롯하여 재당 시절과 신라로 귀국한 뒤의 저술이 모두 들어 있다. 이런 까닭에 양국의 역사는 물론 정치와 사회를 살피는 데 중요한 사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재당 시절에 지은 한시는 당시의 중국 사회를 이해하는 바탕이 된다. 〈새벽의 노래〔詠曉〕〉는 날이 밝아 오면서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묘사하면서 뭇 인간들의 활동상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이는 당시 중국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화정(華亭)의 학 울음소리, 파협(巴峽)의 애잔한 원숭이 울음소리, 엄격한 군율을 자랑하는 세류영(細柳營)의 조두(刁斗) 소리, 군대가 주둔한 고성(孤城)에 울리는 호각 소리 등은 엄중한 분위기를 전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당시의 혼란한 사회상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강남의 여인〔江南女〕〉에서는 사치스러운 풍조를 즐기고 절박한 생산 활동을 경시하는 강남의 습속을 비판하고 있다. 전반부의 사치스럽고 놀기를 좋아하는 여인은 당나라의 상층 문화를 상징하며, 후반부의 베 짜는 여인은 서민 생활을 표현한 것이다. 최치원이 겪었던 당시의 강남은 농업 기술의 발달로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그 결과 새로운 부유층은 사치스러운 생활을 영위했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국왕을 대신하여 중국에 올린 여러 표와 장은 신라사는 물론 나당교류사 연구에 필요한 중요한 사료이다.


〈사은표(謝恩表)〉에는 경문왕이 학문을 좋아하는 군주로 〈유능한 인재를 구하는 부〔求賢才賦〕〉 1편과 〈황제의 교화를 찬미하는 시〔美皇化詩〕〉 6운을 지었는데, 유능한 인재를 구하여 등용했다는 내용과 화합을 다지며 먼 지방 사람들을 회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조서 두 함을 내린 것을 사례한 표문〔謝賜詔書兩函表〕〉에서는 헌강왕이 《노자(老子)》와 중국어에 익숙한 사실, 그리고 문장이 뛰어나 당나라에 보내는 상주문(上奏文)의 초고를 직접 작성한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당나라에 유학하는 숙위(宿衛) 학생들과 관련된 여러 편의 장문(狀文)에는 학생들의 명단과 그들의 활동상 그리고 양국이 교류한 상황과 수업 기간이 10년인 점 등 우리 사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실들이 서술되어 있다.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즉위한 효공왕을 대신하여 〈양위표(讓位表)〉와 〈사사위표(謝嗣位表)〉를 지었다. 전자에서 흑수(黑水)는 발해를, 녹림(綠林)은 궁예와 견훤을 빗대어 나타냈으며, 그들로 인하여 당나라에 인사도 못 가는 절박한 상황을 묘사하였다. 후자에서 전횡(田橫)이 왕후(王侯)로 봉해 주겠다는 한 고조(漢高祖)의 부름을 받고 낙양으로 가던 중 남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여 자결하였는데, 이를 들은 그의 부하들도 따라서 자결한 고사를 인용하였다. 이 같은 고사의 인용은 사실상 신라가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달하였음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불교와 관련된 내용에서는 오늘날에는 알 수 없는 사실을 담고 있어 신라 불교사의 공백을 메우는 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산비명》에서는 선종사와 경문왕대의 불사 활동을, 〈선안주원 벽의 기문〔善安住院壁記〕〉에서는 순응과 이정 화상이 해인사를 창건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다. 선덕여왕 당시 중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신라의 불교를 빛낸 승려로 지영(智穎)과 승고(乘固)가 있었는데, 이들이 대덕(大德)의 첫 시작이었다. 더불어 대덕이라는 승려의 지위는 나이 50에 이르러야 허락되며, 임기는 7년이라는 사실을 적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 알기 어려운 신라의 불교 제도에 대한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신라에서는 일찍부터 관리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으로 국학을 설치해 5경과 《문선(文選)》을 가르쳤다. 원성왕 4년(788)에는 독서삼품(讀書三品)이 시행되어 졸업 성적에 따라 3품으로 차등을 두었는데, 그중 상품(上品)은 5경과 《문선》에 모두 통달한 사람에게 주어졌다. 이에 더하여 3사(史)는 물론 제자백가(諸子百家)에 능통한 자는 특품이라 하여 등급을 뛰어넘어 등용하였다. 최치원의 학문은 그것에 더하여 개인 문집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학들이 《사산비명》을 집주(集註)한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이같이 제자백가를 뛰어넘는 그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고운선생문집》의 학술적 가치를 필자가 제대로 설명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최치원의 사상을 잘 알아낼 수 있는 분석 방법론을 제시하여 연구자들의 이해를 돕는 것으로 학술적 가치에 대한 설명을 보완하고자 한다.


최치원은 글을 지을 때 고사를 인용하여 글의 주인공이나 사건에 대해 설명하여 그 의미를 빛나게 했다. 이런 까닭에 그의 글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므로 그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인용된 고사의 내용을 알아본 뒤 다시 본문의 문장을 살펴 취지를 파악해 나가야 한다.



1_ 각 문장에 표현된 용어의 사용



문장 속에 사용된 용어들이 갖는 의미를 분석하면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서로 만나 며칠 만에 또 헤어지려 하니 / 相逢信宿又分離
갈림길에 또 갈림길 보는 것이 시름겹다 / 愁見岐中更有岐
손안에 계수 향은 다 녹으려 하는데 / 手裏桂香銷欲盡
이제 그댈 보내면 얘기할 지기(知己) 없다 / 別君無處話心期


- 〈유별서경김소윤준(留別西京金少尹峻)〉



위 시는 최치원이 태산군으로 나간 891년(진성여왕5)경이나 그 뒤 김준과 같이 하정사로 가기 전의 부성군 태수로 부임한 892년경에 지은 것이다. 이 시기의 신라는 889년 농민 봉기 이후 혼란이 확대되면서 후삼국 시대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최치원은 자신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현실적으로는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착잡한 상황이었다. 여기서 갈림길을 뜻하는 ‘기(岐)’를 거듭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최치원에게 선택의 기로가 중요한 화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 있던 시절부터 진로 선택과 관련된 글귀인 ‘기로(岐路)’와 ‘문진(問津)’을 자주 사용해 왔는데, 이는 그가 그 당시에도 힘든 역경 속에서 지내 왔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귀국한 뒤에도 위의 시에 나타난 것처럼 그는 계속해서 진로 선택의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찾는 ‘지기(知己)’가 사용되었음도 주목된다.



2_ 비유나 은유를 위해 인용된 고사의 원전 내용을 통한 이해



그의 문장에서 비유나 은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주 작업이 필수적이다. 역주를 해야 인용 구절이 어느 책에 실려 있고,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저당 잡혀 돈을 내게 되는 것으로 부처가 만약 이런 사실을 알게 된다면 마땅히 비통해할 것입니다.〔皆是百姓賣兒貼婦錢 佛若有知 當悲哭哀愍〕


- 《남사(南史)》 권70, 순리열전(循吏列傳) 우원(虞愿)


비록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저당 잡혔다는 비난을 받지 않으리라고 보장하더라도〔雖保無賣兒貼婦之譏〕


- 〈대숭복사 비명〉



위의 예는 남조 시대 송(宋)나라 명제(明帝)가 상동(湘東)의 옛집을 사찰로 만들어 큰 공덕을 세우고자 했을 때, 우원이 위와 같이 백성들의 곤란한 형편을 들어 도리어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간언(諫言)한 내용이다. 이 내용은 불사에 대한 공덕은 좋은 것이지만, 그로 인하여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한다면 도리어 나쁘다는 것을 지적한 것으로, 사실상 무모한 불사의 공덕을 반대한 것이다. 이러한 고사를 최치원이 〈대숭복사 비명〉을 지으면서 인용하고 있다. 물론 신라에서 곡사(鵠寺)를 대숭복사(大崇福寺)로 중창(重創)하는 일이 위의 사례처럼 백성에게 세금 부담을 준다는 비난은 없다고 하여 최치원은 그것을 찬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이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은 나름대로의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찬양하면서 굳이 좋지 않은 사례에 비유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최치원은 본래 3교의 사상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므로 그가 불교를 배척하는 입장에 있지는 않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지만 그는 남조 송의 명제와 같이 백성을 괴롭히는 공덕 활동에 대해서는 역시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인용문의 내용을 통해 분석해 보면 그가 지닌 사상적 경향을 파악할 수가 있다.



3_ 비슷한 뜻의 고사를 반복 인용하여 강조한 취지의 이해



최치원은 고사를 인용하면서도 비슷하거나 동일한 뜻을 담은 내용을 하나의 글 속에 여러 번 반복하여 사용하였다. 이를 잘 분류하여 살펴보면 글의 또 다른 특성을 살필 수 있다. 〈무염 화상 비명〉의 경우를 보자.



〈무염 화상 비명〉에 인용된 중국 역사 중 장량 사례


비문원문 출전(《한서(漢書)》 권40 〈장량전(張良傳)〉)
不能致商山四老人以此四人曰 陛下輕士善罵 臣等義不辱 故恐而亡匿
憶得西漢書留侯傳尻云 良所與上 從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所與 從容言天下事甚衆 非天下所以存亡 故不著
彼文成侯爲師漢祖 大誇封萬戶位列侯 爲韓相子孫之極……果能白日上昇去 於中止 得爲鶴背上一幻軀爾家世相韓……封萬戶位列侯 此布衣之極 於良族矣 願棄人間事 欲從赤松子游耳 乃學道 欲輕擧
圯上孺子 盖履迹焉良嘗閒從容步游下邳圯上 有一老父 衣褐……讀是則爲王者師 後十年興 十三年 孺子見我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최치원은 한(漢)의 개국 공신인 장량과 관련된 고사를 하나의 글에서 네 번이나 인용하고 있다. 이는 최치원이 장량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최치원은 자신도 장량처럼 일을 여유 있게 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은 두 번째 사례에서 천하의 존망 외에는 기록하지 않겠다고 한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장량전〉 말미에 있는 이 내용은 본래 사관(史官)이 장량의 전기를 찬술할 때에 천하의 존망과 관계된 것 외의 작은 일은 제외했다고 한 것이다. 이유인즉, 장량의 업적이 많아 이루 다 기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를 들어 최치원 자신도 그러한 태도로 〈무염 화상 비명〉을 찬술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이것은 최치원 역시 스스로가 장량과 같이 천하의 존망을 좌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졌음을 역설적으로 주장하려고 한 것임을 보여 준다.


더불어 최치원이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역시 군주는 인재를 존중하고 대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양(梁)나라 혜왕(惠王)은 빛이 나는 옥구슬이 많다고 자랑하다가 제(齊)나라 위왕(威王)이 나라의 보배는 구슬이 아니라 단자(檀子)ㆍ전반자(田盼子) 등과 같은 명신들의 능력이라고 말하자 할 말을 잃었다. 조(趙)나라의 지사(志士) 예양(豫讓)은 조양자(趙襄子)를 세 번이나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죽음을 당했는데, 그 이유는 조양자에게 자신이 섬기던 지백(智伯)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원수를 갚으려고 한 것이다. 이는 지백이 자신을 국사(國士)로 대우해 주었으므로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고자 한 것이다. 전자는 군주가 인재를 중시해야 함을, 후자는 신하는 자신을 알아주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해야 함을 보여 주는 사례이다. 나아가 군주는 인재들로부터 간언(諫言)을 잘 듣고 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진섭(陳涉)과 항우(項羽)는 천하를 얻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사례들을 들어 최치원은 자신과 같은 인재의 등용이 필요함을 간접적으로 역설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 1의 각 문장에 표현된 용어의 사용은 한시의 문장에 직접적으로 들어 있는 것이어서 어느 정도 독자들이 주의 깊은 관심을 갖는다면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2의 인용된 고사의 원전 내용을 통한 이해와 3의 비슷한 고사를 반복하여 인용한 것은 《사산비명》의 찬술에 인용된 고사들이다. 이 두 비명은 대숭복사를 중창한 것에 대한 사적비와 무염 화상의 업적을 기리는 것으로 모두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비명에서 최치원은 자신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비명 찬술에 인용된 고사의 원전(原典) 내용을 찾아 정리하고 주제별로 묶어 보면 또 다른 특성을 알 수 있다. 바로 그러한 이해를 얻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고운선생문집》의 학술적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이를 위해서는 여러 분야에서의 역주 작업이 절실하다. 잘못하면 전혀 엉뚱한 해석이 나오기 때문이다. 다음은 그러한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여산의 혜원이 논(論)을 지어 말하기를 “여래가 주공과 공자와 더불어 드러낸 이치는 비록 다르지만, 돌아가는 바는 한 길이다. 각각 자교(自敎)에 국집(局執)하여 (교체가 지극하면) 겸응(兼應)하지 못하는 것은 만물을 능히 전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故廬峰慧遠著論 謂如來之與周孔 發致雖殊 所歸一揆 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故也〕” 하였다.


- 〈진감 화상 비명〉



이 기사는 혜원(慧遠)이 지은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체극불겸응(體極不兼應)에 나오는 내용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체극불겸응자 물불능겸수(體極不兼應者 物不能兼受)’의 설명인데, 일부 역주에서,



“지극한 이치에 통달하였다. 능히 서로 겸하지 못하는 것은 물(物)이 능히 겸하여 용납하지 못한 때문이다.”


“극치를 체득함을 겸하지 못했음은 물이 아울러 받지 못하는 때문이다.”



등으로 잘못 번역한 사실이 확인된다. 이 부분은 위 해석처럼 각자의 교(敎)에만 국집하게 되면 불교는 유교와 통하지 못하고 유교는 불교와 통하지 못하니, 이는 만물을 전체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이 같은 오류는 역주자가 불교에 밝지 못하고 변려문의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 문학 철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역주는 물론이요, 합동으로 읽어 나가면서 새로운 역주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4. 사산비명의 찬술과 젊은 최치원의 사상 동향



최치원의 저술에 나타난 사상적 경향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여기서는 젊은 시절의 대표적 저작인 《사산비명》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재당 시절에 저술된 《계원필경집》과 해인사에 은둔한 이후에 저술된 《법장화상전》은 본 해제의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어서 제외한다.


다음의 내용은 최치원이 《사산비명》을 찬술하면서 여러 고사(古事)를 인용한 것 가운데, 중국 역사 사례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에서 제시한 분석 방법론, 즉 인용된 고사의 원전 내용에 대한 검토를 바탕으로 살펴본 결과이다. 그 결과 그의 관심 대상이 변화함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당시 사회 변화의 흐름과 밀접하였다.


889년(진성여왕3) 농민 봉기 이전에 찬술된 〈진감 화상 비명〉에서는 최치원이 평소 마음에 새겨 두고 있던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군주로서 백성을 부릴 때에는 시기적절하게 해야 원망이 없을 뿐 아니라 화를 당하지 않는다는 사례와 더불어 군주의 잘못에 대하여 올바르게 간언해야 하는 신하의 도리를 살피고 있다. 다음은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그 시기를 잃으면 안 된다는 의식을 드러냈다. 이는 묵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내용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개혁이 필요한 때는 적극 도모해야 한다는 잠재의식이 최치원의 뇌리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잘 알려 주고 있다.


최치원은 현실 문제에 대해 신라 사회에 어떠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개혁은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사는 일 없이 호응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그가 당으로부터 귀국을 결심하면서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어서 찬술한 〈대숭복사 비명〉에서 최치원은 제왕들이 사치를 억제하고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충신들의 간언을 잘 받아들이면 그 나라는 흥할 것이라는 생각을 보여 준다.


한 효문제(漢孝文帝)는 궁궐을 짓는 비용이 중인(中人) 열 집의 재산에 해당되므로 사치스럽다 하여 중지시켰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은 3년 동안 정사를 돌보지 않다가, 신하의 간언을 듣고 결단을 내린 뒤 노력을 통하여 부국강병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자신의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성현을 존숭한 공자 자산(子産)이 유씨(游氏)의 사당을 헐지 않은 것과 한 효경제(漢孝景帝) 때 노(魯)나라 공왕(恭王)이 공자의 집을 헐지 않은 것은 아름다운 사례였다. 이 같은 성현의 존숭을 미루어 훌륭한 인재를 찾아 중용해야 했다.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융족(戎族)의 사신 유여(由余)가 훌륭한 인재임을 알아보고 계책을 써서 자신의 휘하로 만들었고, 그로 인하여 진나라는 융족을 물리치고 안정적인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제왕들을 보좌할 수 있는 훌륭한 신하들의 활동도 중요하다. 한나라 건국 공신인 장량(張良)은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일을 결정지었고, 한신(韓信)은 싸우면 백전백승했다. 무제의 책문에 응하여 활동하였던 동중서(董仲舒)는 유학을 중흥시켰으며, 선제(宣帝) 때의 병길(丙吉)은 재상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하여 나라를 계속 발전시켰다.


이 사례들은 최치원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 나가는 데에 필요한 내용들을 담으려고 노력한 일면을 보여 준다. 특히 한나라와 관련된 사실이 비교적 많은 것으로 볼 때, 그가 한나라를 모범적인 사례로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농민 봉기 이후에 찬술된 〈무염 화상 비명〉에서는 군주들의 역량에 대해 인재를 살피어 등용할 줄 알아야 함을 강조하는 한편, 장량을 비롯한 명신(名臣)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지방의 혼란에 따른 대책으로 지방관에 대한 관심도 표명했다. 이는 지방의 안정에 수령의 역할이 중요함을 역설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민(逸民)에 대한 관심도 보이고 있다. 그는 당에 있을 때 인재는 소보(巢父)나 허유(許由)와 같이 은둔하면 안 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를 〈무염 화상 비명〉에서도 다시 언급하고 있다.


최치원은 국가의 존망을 결정짓는 국가 발전이나 개혁의 적절한 모범 사례를 역사 속에서 찾았는데, 한(漢)나라가 가장 모범적이었다. 한신을 장군으로 임명할 때 어린아이처럼 부르는 행동을 말린 소하(蕭何)와 그것을 겸허히 받아들인 고조, 미워하면서도 후임 재상 직에 조참(曹參)을 추천한 소하, 재상에 올라 소하가 제정한 법을 바꾸지 않고 유지하여 혼란이 없게 한 조참, 천하의 존망을 좌우한 장량 등의 활동에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중 더욱 주목되는 것은 소하가 제정한 법을 조참이 고치지 않고 꾸준히 계승하여 국가를 안정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 건국된 나라로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법을 다시 고치게 되면 새로운 법이 시행되면서 새 왕조가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기보다는 도리어 혼란이 조성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최치원은 한나라 왕실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단순한 미담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중요 핵심 사안을 파악하고 탐구했다. 나아가 이 같은 한나라 초기의 발전 과정에 대한 이해는 새로 건국되는 나라가 어떻게 해야 잘 정착해 나갈 수 있는가 하는 흐름을 살핀 것으로, 최치원이 정치가와 행정가로서 역사를 바라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음을 잘 알게 해 준다.


그렇다면 이처럼 국가의 발전 단계를 꿰뚫고 있던 최치원이 생각하는 정치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장량을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던 점, 한의 건국과 발전에 공헌한 소하나 조참 등과 같은 재상들의 활동, 더불어 진(晉) 왕조에서 활동한 재상들에 관심을 두었던 점 등 여러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최치원의 정치적 지향점은 아무래도 군주보다는 재상의 보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운영 쪽이었다.


그는 신라가 진골 왕족 중심으로 정치가 운영되어 오면서 격심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는 폐단을 우선적으로 주목했을 것이다. 현명한 군주들의 활동이 전제되지 않는 경우, 재상들이 잘 보필하여도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 진나라의 경우, 사실상 왕권이 안정을 이룬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왕조가 유지된 것은 충신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손작(孫綽)은 권신(權臣) 환온(桓溫)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맞서서 사직을 지켜 냈다. 군주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여러 신하들의 도움 없이는 정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같은 생각에 무리가 없다면, 최치원은 군주보다는 재상 중심의 귀족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형태로 보았다.


〈지증 화상 비명〉에 인용된 중국 역사 사례의 경향은 이전과는 달랐다. 최치원은 한(漢)나라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위진 남조(魏晉南朝)는 물론 당 왕조에 이르기까지 인식의 범위를 확대했다. 또한 주요 관심 대상에서도 군주나 재상 외에 은둔하는 일민(逸民)에게도 관심을 기울이기에 이른 것이다. 이 같은 관심사의 확대는 당시 혼란한 현실에 부딪치면서 난국 해결의 실마리를 풀어 보는 한편, 자신의 진로 선택과도 관련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치원이 살펴본 위진 남조의 흥망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매한 군주들 때문인가, 아니면 반역을 꾀한 신하들에게 있었을까? 무엇보다도 왕조 초창기에는 권력 쟁탈이 일어나므로 안정을 이룰 수 없었음을 살폈을 것이다. 진(晉)나라의 장화(張華)는 한(漢)의 제도와 견식에 밝아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지만, 8왕의 난 때에 희생당했다. 남제(南齊)의 사초종(謝超宗)은 간신들의 핍박을 받고 불만을 토로하다가 도리어 황제의 의심을 받았고, 결국은 죽음을 당했다. 이들은 왕조 초기에 황족과 황후 세력들 간의 권력 다툼에서 희생된 충신들이다. 불의에 반대하여 나라를 바로잡으려다가 희생되기도 하였지만, 이들의 활동으로 인하여 왕조의 수명 또한 연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이 왕조를 오래 지속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안정을 이룬 것도 아니어서 희생의 대가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이같이 건국 과정에서 나타나는 흥망성쇠의 고찰을 통해 최치원은 새로운 국가 건설이 현실의 난국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최선책이 아님을 느끼게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새로운 건국이 아니라, 개혁이 올바르게 추진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최치원은 어디에 구속되기보다는 자유로움을 지향하고 있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은둔을 예고하는 조짐이었다 할 수 있다.


〈지증 화상 비명〉 찬술을 마치고 난 뒤, 최치원은 이듬해인 진성여왕 8년(894) 2월에 〈시무십여조〉를 올렸다. 그는 중국 역사를 고찰하고 고민한 끝에 판단을 내린 희망적인 견해를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았음은 이미 알려진 바와 같다. 이에 최치원은 해인사로 은둔하러 들어간다.


결국 그는 새로운 건국을 도모하는 세력들에게 협조하지 않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을 다하고 일생을 마쳤다. 최치원이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현실 상황에 직면하여 경서(經書)에 국한되지 않고 역사 사례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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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2 〈잡문(雜文)〉에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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