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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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유고(孤山遺稿)》 해제(解題)

1. 머리말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 1587~1671)의 시문집 《고산유고(孤山遺稿)》를 번역한 것이다.


고산은 주지하듯이 일찍부터 국문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특히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를 비롯한 일군의 시조(時調) 작품에서 보여 준 뛰어난 문학적 성취는, 그를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과 함께 한국 고전 시가 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하는 데에 이견이 없게 하였다. 이 평가 과정에서 그의 국문 시가에 대해서는 이미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수많은 연구 업적이 축적되었다. 그런데 그의 한시와 산문의 한문 작품은 국문 문학 중심의 연구열 때문에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선 수적으로만 따져 보아도 한시가 국문 시가 작품의 4배가 넘을 정도로 많고, 창작 시기도 10대부터 70대 이후까지 거의 전 생애에 걸쳐 있는 점을 감안할 때, 고산 문학에서 한문 작품이 갖는 중요성을 새삼 재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울러 한시 작품은 국문 시가에 못지않은 미학적 성취와 시적 형상성을 담고 있어 문학사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충분하며, 산문 작품도 어지러운 정치 현실에 굽히지 않고 소신을 밝힌 것과 예송(禮訟) 등 당대 주요 논쟁에 소견을 피력한 것이 많아 사상사적으로도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이번 《고산유고》의 번역은 고산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것이며, 나아가 고산이 살아간 조선 중기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 요긴하리라 판단된다.


2. 고산 윤선도의 삶과 행적



고산의 삶과 문학을 구체적인 역사적 계기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우선 그가 살았던 17세기 전반기의 시대적 상황, 특히 붕당(朋黨)과 관련된 정치적 혼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575년(선조8) 무렵부터 시작된 동서(東西)의 대립적 붕당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가속되었고, 그 결과 당파 간의 사화(士禍)로 확대되어 수많은 인물들의 몰락을 가져왔다.


동인(東人)은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리고, 임란 이후에는 북인이 다시 대북(大北)과 소북(小北)으로 갈렸다. 초기에는 정치적 이념의 차이에 따른 학파(學派) 간의 대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붕당의 추세는 점차 권력 투쟁의 수단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1606년부터는 주로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대북과 소북 간에 치열한 쟁투가 벌어졌다. 이때 대북은 광해군을 지지하고 소북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지지하였는데,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모든 권력은 대북에게 돌아갔다.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정인홍(鄭仁弘), 예조 판서(禮曹判書)에 이이첨(李爾瞻) 등이 발탁되면서 새로운 정권의 핵심 인물로 등장한다.


광해군을 추대한 대북 정권은 반대 세력의 재기를 염려하여 곧바로 말살책을 기도한다. 우선 임해군(臨海君)에게 불궤(不軌)를 도모했다는 죄목을 씌워 진도(珍島)에 유배시켰다가 다시 교동(喬桐)으로 옮기게 하였는데, 그 뒤에도 대북의 중진들은 그의 처형을 적극 주장하였다. 끝내 임해군을 제거한 정인홍ㆍ이이첨 등은 영창대군에게도 박해를 가하였다. 1613년(광해군5) 4월 조령(鳥嶺)에서 일어난 강도 사건을 서얼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해 대역죄를 범한 것이라고 모함하고, 그의 외조(外祖) 김제남(金悌男)도 관련되었다고 누명을 씌웠다. 결국 그들은 김제남을 살해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하였으며, 이이첨의 명을 받은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이 영창대군을 증살(蒸殺)하기에 이른다. 영창대군의 죽음으로 대북 세력은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고산은 1587년(선조20) 한성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지금의 종로구 연지동)에서 태어나, 8세에 관찰공 유기(惟幾)의 양자로 입양되어 호남 제일의 갑부인 해남 윤씨 가문의 종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호남에서 몇 안 되는 동인(東人) 가문이다. 동인과 서인의 치열한 정쟁의 와중에 1590년 정개청(鄭介淸) 옥사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전해의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에서 기인한 기축옥사의 연장으로, 호남 연고의 동인이 다수 희생되었다. 여기에 고산의 조부 윤의중(尹毅中), 이발(李潑 윤의중의 외조카), 정언신(鄭彦信 고산의 사돈인 정세관(鄭世觀)의 조부) 등이 포함되었다. 그리고 이 옥사 사건 때 서인이 보인 행동을 해석하는 시각차로 후에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지는데 고산의 가문은 남인의 길을 선택한다.


당시 남인은 정치적으로 열세에 있었는데, 고산이 26세인 1612년(광해군4) 진사시에 합격하면서 정계에 나설 무렵 남인의 세력은 왕권의 강화와 북인(北人)과 서인(西人)의 타도를 주장하며 정치적 열세를 만회하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정권의 주도권은 쉽게 옮겨지지 않았고, 오히려 정적(政敵)에 의해 집중적으로 탄핵을 당하여, 그가 수없이 많은 유배를 겪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뛰어든 것은, 광해군 시절, 즉 대북 정권하에서 당대의 권신이던 이이첨의 전횡에 대해 비판적 상소를 올린 일에서 시작된다. 한갓 유생에 불과하던 30세인 1616년(광해군8) 이이첨의 전횡을 탄핵한 〈병진소(丙辰疏)〉는 이후 고산의 삶을 결정지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예 관료로 정계에 갓 입문한 그가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과 직접적으로 대결한 이 일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산의 강직한 성품과 투철한 사대부 의식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그는 오히려 이이첨과 그 세력들의 무함을 입고 경원(慶源)으로 유배를 가게 되는데, 이는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유배 경험의 시작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고산이 서인 정권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작용하는 동시에 서인들로부터 배척당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는 〈병진소〉에서 김제남 역모 사건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지나갔는데, 김제남 사건으로 상당한 희생을 당했던 서인들은 이를 근거로 〈병진소〉가 소북(小北)의 사주에 의한 것이었다고 몰아붙인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대북 정권이 무너지자, 비로소 고산은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다. 그러나 서인 중심의 중앙 정계에서 여전히 배제되어, 곧바로 출사의 기회를 잡지는 못하였다. 고산은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의 견제로 겨우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받는다. 고산으로서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기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가 버렸다. 이후 의금부 도사, 안기 찰방, 사포서 제조에 계속적으로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우여곡절 끝에 그가 다시 중앙 정계에 진출한 것은 42세인 1628년(인조6) 별시 문과 초시에 장원급제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당대의 유력한 정치가인 이조 판서 계곡(谿谷) 장유(張維)의 도움으로 뒷날의 효종인 봉림대군(鳳林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에 제수되고, 이후 공조 좌랑ㆍ한성부 서윤ㆍ시강원 문학 등의 주요 관직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숱한 정적들의 견제를 이기지 못하고 1634년(인조12)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가, 이듬해 결국 고향인 해남(海南)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고산의 삶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은 1636년의 병자호란이라 할 수 있다. 50세의 나이로 해남에 머무르던 고산은 난리 소식을 듣자 가복(家僕)들을 이끌고 강화로 향했으나 그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된 뒤였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으로 향하다가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주도로 배를 돌린다. 이 일로 고산은 남한산성에 있는 왕을 알현하지 않고 돌아갔다〔不奔問〕는 죄목으로 1638년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가는 등, 서인들로부터 지속적인 시비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이 일은 그의 삶의 새로운 전기이기도 하였다. 제주도로 가다가 보길도(甫吉島)에 이르러 유려한 풍광에 압도된 그는 그곳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은거한다. 부용동(芙蓉洞)은 보길도에 자리한 산간 지역으로, 산세가 연꽃처럼 포개져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금쇄동(金鎖洞)은 그 이듬해 정적들의 모함으로 1년간 영덕에 유배를 갔다가 돌아온 후, 다시 해남에 은거하던 중에 발견한 곳이다. 그는 이후 약 17년간을 해남의 금쇄동과 보길도의 부용동을 오가며 지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고산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온다. 효종은 대군 시절 자신의 사부였던 고산을 대우하고자 성균관 사예와 동부승지를 거듭 제수한다. 고산은 조정의 상황을 고려하여 사퇴하는 소를 올리고 고산에 머무르다 왕의 특명을 어길 수 없어 예조 참의에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 〈진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를 올려 인재를 고루 등용하고 붕당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시의 실력자인 원두표(元斗杓)를 탄핵하는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를 올리는데, 이 일로 관직을 삭탈당하고 다시 해남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를 통해 보건대 30세 때 올린 〈병진소〉가 한때의 혈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는 불의 앞에 직언을 서슴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던 것이다. 69세인 1655년(효종6)에 고산은 다시 서용(敍用)되어 현안에 대한 상소를 올릴 기회를 얻게 되고, 71세에는 첨지중추부사를 제수받는다. 이듬해 공조 참의로 승진하지만 정적의 끊임없는 반대로 효종도 어쩔 수 없이 고산의 퇴직을 허락하고 만다.


1659년에 효종이 승하하자 고산은 73세로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어 효종의 산릉을 간심(看審)하는 데 참여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추천한 수원(水原)이 채택되었다가 취소되고 건원릉(健元陵) 안 건좌(乾坐) 언덕이 채택되면서 파직당한 것은 본격적인 예송 논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이듬해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 문제로 남인의 삼년설과 서인의 기년설(朞年說)이 치열하게 대립하였다. 고산은 남인으로서 삼년설을 주장하는 장문의 소를 올려 기년설을 주장한 송시열(宋時烈)을 배척한다. 이 논쟁에서 패한 그는 함경도 삼수(三水)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후 광양(光陽)으로 이배되는 등 약 8년간의 유배 생활을 겪는다. 삼수의 유배지에 도착한 그는 〈예설(禮說)〉 두 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히고 있는데, 이를 통해 끝내 타협하지 않는 그의 성격을 다시금 엿볼 수 있다.


1667년(현종8) 8월 해남으로 돌아온 고산은 9월에 다시 부용동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5년여간 유유자적하면서 보내다가 1671년에 85세로 별세한다. 이처럼 고산의 일생은 청년기에서 노년기에 이르기까지 임병양란의 사회적 혼란과 사색당파의 어지러운 정치 현실 속에서 파란만장한 부침을 거듭하였다.


3. 고산의 시 세계의 특징적 국면



1) 이분법적 세계 인식과 현실 지향 의지


고산의 한시를 일별해 보면, 그가 강호(江湖)와 세속(世俗)을 양분하여 배타적인 구도로 인식하였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분법적 세계관은 조선 전기의 사대부 문학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그의 한시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도 하나의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분법적 구도는 외형적으로는 유사하더라도 시대적 정황과 개인의 현실적 처지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산의 경우 강호의 생활이 현실과 단절된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긴장을 끊임없이 지속한다는 점이다.


다음의 작품에서 우리는 이러한 고산의 세계 인식의 틀을 찾아볼 수 있다.



눈에는 청산이요 귀에는 거문고 소리 / 眼在靑山耳在琴
이 세상 어떤 일이 내 마음에 들어오랴 / 世間何事到吾心
가슴 가득 호연지기 알아줄 사람 없어 / 滿腔浩氣無人識
한 곡조 미친 노래 혼자서 읊노매라 / 一曲狂歌獨自吟


〈낙서재에서 우연히 읊다〔樂書齋偶吟〕〉



1, 2구에서 화자인 고산은 자신의 관심이 각각 청산과 거문고로 대표된 자연과 음악에 있으며, 세속의 현실 문제와는 유리된 상태로 지내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다음의 3, 4구를 보면 이러한 모습이 현실에 대한 관심의 단절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의 내심은 여전히 세속적 현실에서 펼쳐야 할 ‘호연(浩然)한 기상’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그러한 그의 심정을 알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는 데에 있다. 그래서 고산은 혼자서 강개한 심정을 ‘자유분방한 노래〔狂歌〕’로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고산이 겉으로는 현실로부터 초연한 자세를 보이지만,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현실 지향의 꿈은 결코 떨쳐 버릴 수 없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오히려 이런 표현들에는 고산의 강한 정치적 지향성이 역으로 투영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그의 삶의 역정에서 겪는 정치적 부침은, 이 시가 창작되던 시점은 물론, 전 생애에 걸쳐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정치 현실과의 거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그 이면에는 그것에 의해 강하게 견인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라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고산의 생애는 끊임없는 붕당정치로 인한 유배, 강호 자연에로의 은거, 그리고 정치 현실로의 복귀 등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가 이처럼 격심한 당쟁의 와중에서 출처(出處)를 반복했던 것은, 사실 당대 대다수의 사대부가 겪은 일반적 행로이기도 하다. 고산처럼 정치적 관심과 참여가 많은 인물일수록 더욱 그러하였다. 대부분 자전적(自傳的)인 고산의 한시에는 불우한 현실로부터의 도피 내지 은자(隱者)로서의 삶을 꿈꾸는 마음을 노래하는 작품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시편들의 문면만을 보면, 불우한 현실로부터 벗어나 자연에서 고고하게 자신을 지켜 가고자 하는 삶을 바랐던 것으로 읽힌다.



인간 세상 높은 벼슬 결코 바라지 않고 / 人間軒冕斷無希
오직 소원은 강호에 일찍 돌아가는 것 / 惟願江湖得早歸
고산에 작은 집 이미 지어 놓았는데 / 已向孤山營小屋
언제나 마름과 연잎 옷을 입어 볼까 / 何年實着芰荷衣


〈겸보 숙장의 영회 시에 차운한 두 수〔次韻謙甫叔丈詠懷 二首〕〉



이 작품은 고산이 ‘귀거래(歸去來)’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강렬하게 표방하고 있는 것으로 흔히 인용되는 시이다. 1, 2구를 보면 그는 모든 사람들이 희구하는 벼슬살이는 꿈꾼 일이 없고, 다만 강호에 일찍 돌아가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술회한다. 4구의 ‘연잎 옷〔芰荷衣〕’은 은자들이 입는 옷이다. 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은자의 생활을 따르고 실천한다는 의미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부귀공명과 입신양명 등과 같은 세속적 가치로부터 벗어나, 강호 자연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는 은자의 삶을 동경하는 현실도피적 모습이 나타나 있다. 일반적으로 도피는 은둔과 거의 동의의 개념으로서, 현실을 거부하고 현실권외에 은퇴하여 고답적(高踏的) 삶을 지향함으로써 현실로부터 자기를 지키려고 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산이 실제로 그러한 은둔을 실천하고 탈속적 경지의 신선적 삶을 지향한 것은 아니다. 이어지는 두 구를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경의 차원에 머무를 뿐 구체적인 실행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비록 그가 은거를 위해 고산에 벌써 작은 집까지 마련해 두었다고는 하지만, 언제 그것을 이룰지는 알 수 없다는 의문형으로 시상을 맺는 것을 보면 그의 귀거래는 불분명한 희망 사항일 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고산이 〈병진소〉를 올렸던 30세에 지은 것이다. 〈병진소〉는 1616년(광해군8) 12월 21일에 올린 것으로, 고산이 처음으로 정치 현실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주 내용은 당시의 권신인 이이첨을 탄핵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으나 이이첨의 권세에 눌린 승정원ㆍ삼사ㆍ관학 등이 오히려 김제남의 반역 사건과 연루된다고 모함하였다. 결국 12월 23일에 고산은 절도(絶島)에 안치되는 처분을 받고, 이듬해 1월에 함경도 경원으로 압송된다. 이는 그가 아직 벼슬에 오르기도 전의 일로, 자신에게 닥칠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한 소신 있는 행동이었다. 이처럼 유자(儒者)로서의 소명의식(召命意識)을 실천한 고산이 은둔을 희구하는 것은 부정적 현실에 대한 강개한 회포의 토로에서 나온 것으로 일시적인 모습일 뿐이다.


다음의 작품도 같은 관점으로 이해된다.



나는 해은도 아니고 산은도 아니지만 / 吾非海隱非山隱
산과 바다에 평생토록 마음이 끌렸다네 / 山海平生意便濃
처신이 졸렬하니 세상길 어긋날 수밖에 / 用拙自違今世路
우연히 옛사람들처럼 은거하게 되었다오 / 幽居偶似古人蹤
흰머리 삼천 장도 과히 싫지 않나니 / 不嫌白髮三千丈
일만 겹 붉은 구름에 기쁨이 넘치니까 / 剩喜彤雲一萬重
소하를 노예로 부리는 일도 오히려 가능한데 / 奴隷少霞猶可得
먼지 낀 얼굴 치켜드는 고대광실이 부러울까 / 朱門誰羨抗塵容


〈차운하여 한화숙에게 부치다〔次韻寄韓和叔〕〉



고산이 65세에 지은 이 시도 아름다운 정경이 존재하는 강호 자연인 ‘산과 바다〔山海〕’와 불합리한 현실인 ‘세상길〔世路〕’이라는 양분된 세계 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화자인 고산은, 수련에서 자신이 은자의 삶을 평소에 자주 동경해 왔음을 말하고, 함련에서는 현실로부터 떠나온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할 것은 그가 자신의 귀거래를 세속과 절연하고 산이나 바다에 은거하며 사는 은자들의 삶과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에게 은자의 삶은 결코 최종적인 목표가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의 은거는 자발적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외적 조건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해 가을에 고산은 보길도 부용동에서 유명한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 40수를 지었다. 고산의 시에 보이는 은둔 희구에 담긴 현실적 논리는 〈어부사시사〉에서도 발견된다. 실제로 고산이 부정적 현실로 인하여 몸은 은거하였지만, 시적 주체의 사회에 대한 관심은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이든, 이상적 질서 회복에 대한 바람이든 여러 방식으로 표출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다른 시 〈동하각(仝何閣)〉에서 스스로 ‘내가 어찌 세상을 떠날 수 있으리오, 세상이 지금 나와 맞지 않아서지.〔我豈能違世 世方與我違〕’라고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시에서 강호와 세속은 분명히 구분되어 있지만, 강호에 있을 때에도 그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지향은 멈추지 않았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2) 자연친화적 태도와 심미적 몰입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산에게 강호의 생활은 타의에 의해 강요된 선택이었다. 하지만 격동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부침을 거듭하던 고산의 일생은 오히려 강호 자연의 아름다움에서 흥취를 얻고 향유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은 심미적 체험은 그에게 시작품을 통해 자연 경물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창작 동기와 여건을 아울러 얻게 해 주었다. 따라서 사물의 다양한 모습은 그의 시에서 중요한 주제가 된다.


그는 집을 완성한 뒤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초청할 필요 없이 청산이 문에 들어오고 / 入戶靑山不待邀
산 가득 화초들이 용모 다듬고 인사하네 / 滿山花卉整容朝
앞 여울 항상 요란하다 저어하지 마오 / 休嫌前瀨長喧耳
세상의 소음 언제나 듣지 않게 해 주니까 / 使我無時聽世囂


〈낙성한 뒤에 절로 흥이 나서〔堂成後漫興〕〉



이 시는 고산이 30세에 처음 유배를 당하여 함경도로 옮겨가던 때의 작품이다. 그는 지금 새로 온 집에서 주변을 바라보고 있다. 현실에 좌절한 자신의 처지에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유배지로 가 있으면서도, 그의 시에 나타난 자연은 쓸쓸하고 서글픈 모습이 아니라, 이렇듯 우호적이고 긍정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푸른 산은 부르지 않아도 다가와 인사하고, 산을 가득 메운 온갖 꽃들은 단정한 용모로 자신에게 조회한다. 그리고 문 앞에 흐르는 여울물도 어지러운 세상사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나도록 돕는다. 이처럼 자연 경물은 그에게 삶의 위안과 정신적 안식을 주는 정다운 대상이다.


다음에 살펴볼 세 편의 연작도 유사한 정감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궤안에 기대니 산창엔 맑은 저녁 풍경 / 隱几山窓晴景晩
봄바람 속에 기수(沂水)에서 목욕할 시절 / 春風正是浴沂時
앞 강물에 가벼운 돛 지나가거나 말거나 / 前灘遮莫輕帆過
한가로이 푸른 솔 보며 시냇가 거니노라 / 閑看蒼松澗畔遲



우연히 백구와 친해졌을 뿐 / 偶與白鷗親
나는야 진짜 은자가 아니라오 / 吾非隱者眞
강 언덕에 지팡이 짚고 서니 / 江皐倚杖立
꽃버들도 봄날을 못 이기는 듯 / 花柳不勝春



하나의 방이 비좁지 않으니 / 一室非爲小
일천 산도 많은 줄 모르겠네 / 千山未覺多
숨어 사는 이 베개에 기대 누우니 / 幽人欹枕臥
지는 햇빛이 물가의 꽃에 비껴 있네 / 斜日在汀花


〈해민료에서 우연히 읊으며 다시 앞의 운을 쓰다〔解悶寮偶吟復用前韻〕〉



시제(詩題)에 달린 자주(自註)에는 “해민료(解悶寮)는 고산(孤山)의 명월정(明月亭) 서쪽에 있다.”라고 하였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해민료는 ‘현실의 온갖 번민〔悶〕’을 ‘풀어 주는〔解〕’ 안식처이다. 이곳에서 고산은 일시적이나마 힘겨운 현실로부터 벗어나 주변 정경을 완상하면서 얻은 감흥을 편안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볼 문제는, 고산의 강호 자연에 대한 지향이 결코 정경의 아름다움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산의 태도는, 근대의 낭만주의적 시인들이 흔히 보여 주는 꿈과 현실이라는 양분된 세계를 설정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 이상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태도와는 분명 궤를 달리한다. 즉, 그의 강호 지향적 태도는 미화되고 이상화된 꿈의 세계로 빠져드는 감상적 탐닉이 아니라, 강호에서의 삶을 긍정하면서 거기에서 감흥을 얻고 있다. 이는 자신의 선택에 강한 자긍심을 가지며 나아가 그러한 체험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강호 생활에서의 흥취와 강한 자긍은 다음에서도 볼 수 있다.



황원포 안에 자리한 부용동 / 黃原浦裏芙蓉洞
오두막 세 칸이 내 머리 덮어 주네 / 矮屋三間蓋我頭
보리밥 두 끼에 동동주 한 잔 / 麥飯兩時瓊液酒
종신토록 이 밖에 또 무얼 구하랴 / 終身此外更何求


〈실제의 일을 기록하다〔記實〕〉



이 작품은 고산이 해배(解配)되어 부용동으로 돌아와 지은 것이다. 황원포(黃原浦)는 보길도의 바다이다. 여기서 화자인 고산은, 작은 초가삼간에 보리밥을 먹는 빈궁한 삶이라도 편안히 여기겠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자세를 보여 주고 있다. 이렇듯 가난한 삶은, 물론 그가 당시에 소유하였던 경제적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내용이지만, 강호 생활의 자긍심이 소박한 삶에 대한 긍정적 수용으로 변주되어 표현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그가 자연에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얻은 감흥은 때로 심미적인 경도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음의 시에서 우리는 고산의 즉물적 감흥과 그 심미적 고양이 어떠한 양상으로 형상화되는지 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동화되어 강한 유대 내지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다.



물고기와 물새는 서로 친하고 / 魚鳥自相親
강과 산도 안색이 진실하여라 / 江山顔色眞
사람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 人心如物意
이 세상 어디나 봄빛이련만 / 四海可同春



세상 안에는 지기가 적어도 / 人寰知己少
세상 밖에는 우우가 많다네 / 象外友于多
우우가 또 어떤 것들이냐고 / 友于亦何物
그거야 산새와 들꽃이지 뭐 / 山鳥與山花


〈병으로 고산에 돌아오다가 배 위에서 감흥이 일기에〔病還孤山舡上感興〕〉



이 작품은 유배지인 함경도 삼수(三水)에서 해배되어 돌아오는 길에 지은 시로, 세 편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시이다. 그는 지금 긴 유배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살아서 다시금 강호의 흥취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술회한다. 첫 작품의 1, 2구를 보면, 자유로이 자신의 천성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물고기와 새, 그리고 늘 제자리를 지키며 변함없이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는 강과 산 등의 자연 사물에, 화자인 고산은 깊이 심취하고 있다. 이러한 심미적 감흥은 3, 4구에서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심미 의식으로 전이되어 표출된다. 그는 사람〔人心〕과 사물〔物意〕이 하나로 통할 수 있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연의 축복인 ‘봄’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임을 노래한다.


시상의 맥락이 이어지는 다음 작품을 보면, 그러한 의식이 보다 심화 내지는 확장되어 나타난다. 고산은 산새와 꽃과 같은 평범한 자연 사물을 우애가 있는 자신의 형제의 위상으로 설정할 정도로 심미적 감흥이 드높게 고양되는 모습을 보인다. 인간 세상에서 지기(知己)를 얻지 못한 그는 일상적 사물의 자재(自在)를 관찰하면서 그 생동감 넘치는 경물의 아름다움에 깊이 심취하고 있는 것이다.



3) 일상적 사물에의 성찰과 삶의 관조



사물에 대한 관찰을 통해 감동을 느끼고 그것을 시로 형상화하는 것은 시 창작의 기본 원리이다. 한시에서 계절의 순환, 사물의 생동(生動) 등이 많이 다루어지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성리학을 학습하고 삶의 이법과 지표로 받아들였던 당대에서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만한 일반적인 명제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물(觀物)의 자세는 이론적으로는 서로 유사하나, 실제에 있어서는 개인이 서 있는 시대와 처지에 따라 그 주목하는 바가 상이하게 나타난다.


고산도 많은 시작(詩作)에서 다양한 경물을 제재로 하여 형상화하였다. 다만 고산의 경우는 사물의 본래적 의미에서 화석화되고 관념화된 경물, 예컨대 흔히 사군자(四君子)로 일컬어지는 ‘매란국죽(梅蘭菊竹)’이나 ‘연비어약(鳶飛魚躍)’과 ‘운영천광(雲影天光)’ 등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주위에 함께 공존하는 세계 속의 지극히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사물들이다.



꽃 지자 숲이 우거지기 시작하고 / 花落林初茂
봄이 가니 해가 더욱 길어지누나 / 春歸日更遲
하나의 원기(元氣)를 조용히 살필지니 / 一元宜靜覩
사계절은 순서대로 바뀌건 말건 / 四序任遷移
장미의 시렁에는 제비의 지저귐이요 / 燕語薔薇架
양류의 가지에는 꾀꼬리의 노랫소리 / 鶯歌楊柳枝
풍광이 어딜 가나 좋기만 한데 / 風光隨處好
멋진 흥치를 아는 사람 적어라 / 佳興少人知


〈차운하여 어떤 이에게 답하다〔次韻答人〕〉



화자는 지금 계절의 변화에서 자연의 이치를 체득하고, 경물들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다. 그의 시선은 남들이 무심코 지나칠 만한 작은 사물도 놓치지 않고 있으며, 그것들을 정감 어린 모습으로 바라본다. 이때의 자연 사물은 관념화되거나 상투적으로 고정된 대상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에 가득 찬 대상으로서 시적 자아인 고산과 마주한다.


여기서 우리는, 고산이 이러한 데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고산은 평소 시의 실용적인 측면, 즉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의 효용성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효용론적(效用論的) 시관(詩觀)은 다음과 같은 〈송일대군방장무서(送一大君房掌務書)〉의 언급에 나타나 있다.



시란 성정(性情)을 음영하여 정신을 유통하게 하는 것이니 꼭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백성의 상도(常道)와 사물의 이치에 관한 것은 읽으면 이롭게 행하는 이익이 있으며, 인정(人情)이나 물태(物態)를 잘 말한 것은 열람하면 많이 아는 바탕이 됩니다. 하지만 그 악함이 경계가 되기에 부족한 것과 그 선함이 법도가 되기에 부족한 것은 다 정자(程子)가 이른바 ‘쓸데없는 말〔閑言語〕’이니 진실로 볼 것이 없습니다.



이 인용문은 시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기준에 대해 서술한 부분이다. 고산은, 좋은 시로 ‘백성의 상도(常道)와 사물의 이치에 관한 것’과 ‘인정(人情)이나 물태(物態)를 잘 말한 것’을 꼽고 있다. 이 두 가지 주제는 모두 일상적 체험을 말하는 것으로, 이 체험들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좋은 시가 산생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관(詩觀)은 그의 시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다음의 시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소빙화가 압록강 언저리에 돋아났나니 / 消氷花在鴨江潯
짧디짧은 줄기 하나 바늘처럼 가늘어라 / 短短單莖細似針
일천 자 눈 속에서 살기를 몰아내고 / 千尺雪中排殺氣
한 떨기 꽃잎 안에 천심을 보듬었네 / 一錢葩裏保天心
옥황상제 뜰 앞에서 자라나야 제격인데 / 端宜玉帝庭前植
못가에서 읊조리는 시인과 어이 짝했는가 / 底伴騷人澤畔吟
봄소식을 관새 밖에 부쳐 주어 알리려는 / 春信寄傳關塞外
동군의 세심한 배려를 비로소 알겠도다 / 東君用意始知深


〈소빙화(消氷花)〉



이 시는 소빙화(消氷花)라는 꽃을 주제로 한 4수의 연작인데, 인용한 시는 두 번째 작품이다. 화자는 수련에서 먼저 이 꽃의 외적인 생태를 요약하고, 함련에서는 그가 이 꽃에 주목한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이 꽃이 살기가 가득한 차가운 눈 속에서 피어나기 때문이다. 이 계절의 시적 소재로는 주로 국화나 매화가 주로 다루어진다. 국화는 흔히 늦가을의 서리에 피어난다고 하여 ‘오상고절(傲霜孤節)’로, 매화는 겨울의 눈을 견디어 내고 빼어난 기품을 자랑한다고 하여 ‘빙자옥질(氷姿玉質)’, ‘아치고절(雅致孤節)’ 등의 성어로 상투화되어 시제(詩題)에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지금 고산이 주목하는 것은 유배지인 변방에서 우연히 본 보잘것없는 평범한 꽃풀이다. 그런데 이름처럼 ‘얼음을 녹이고 피어나는〔消氷〕’ 이 꽃에서 고산은 정쟁의 시련과 고난을 지나온 자신의 삶과 유사한 점을 본 것이다.


자연 사물에 대한 관찰과 사색을 통해 인간의 삶의 원리와 질서를 반조(返照)하는 것은, 물론 고산만의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이러한 태도를 꾸준히 지속하면서 자연 사물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적 체험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데에 이르기까지 세심한 시선으로 시작품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이 고산 시 세계의 개성적 면모 가운데 하나로 일상 사물에의 성찰(省察)과 삶의 관조(觀照)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이다. 다음의 시에서 고산은, 자신의 경험과 거기에서 얻은 감상을 장편의 고시(古詩) 형식을 사용하여 근체시(近體詩)의 형식적 제한을 벗어나 자유롭게 술회한다.



길 가다 만난 한 마리의 개 / 途中逢一犬
꼬리는 길고 색깔은 흰데 / 尾長而色白
이틀 동안 내 말을 따라다니며 / 兩日隨我馬
말에서 내리면 내 발을 맴돌았네 / 下馬繞我舃
손을 저어도 끝내 경계하지 않고 / 麾之終不懋
꼬리 흔들면서 뭔가 구하려는 듯 / 掉尾如有索
노비들도 기꺼이 밥을 던져 주며 / 奴婢欣投飯
토끼 쫓을 꾀를 다투어 생각했는데 / 爭思逐兔策
오늘 아침에 홀연히 보이지 않아 / 今朝忽不見
일행이 깊이 탄식하며 아쉬워했네 / 一行深歎惜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왔다가 / 來何不待招
쫓지도 않았는데 어디로 떠났는가 / 去何不待斥
인간 세상에 조물이 하는 짓이란 / 造物於人世
백 가지 일이 죄다 희극일 뿐이니 / 百事渾戲劇
얻었다고 기뻐할 것도 없고 / 得之不足喜
잃었다고 한탄할 것도 없네 / 失之不足嘖
사람의 삶과 죽음이라는 것도 / 人之生與死
이것과 다를 것이 뭐가 있으랴 / 與此何殊跡
이에 알겠도다 세상 떠난 미아(尾兒)는 / 乃知化去兒
팔 년 동안 내 곁에 머문 객이었음을 / 是我八年客
이로 인해 갑자기 깨치며 / 因此頓有悟
가슴의 응어리가 비로소 풀렸나니 / 塡胸氣始釋
그동안 함께 놀아 준 신선의 짝이 / 無乃舊仙侶
너무 슬퍼하는 나를 애달피 여겨 / 哀我悲懷迫
특별히 이 동물을 나에게 보내 / 爲之遣此物
미혹을 깨우치려 함이 아니리오 / 以開迷惑膈
길가의 모래톱 물 밝게 비치나니 / 路傍沙水明
나의 뜻 다시 향할 곳이 있어라 / 我意還有適


〈마음을 달래다〔遣懷〕〉



이 시의 창작 동기는 고산이 여정에서 우연히 만난 개와의 일화에서 기인한다. 첫 구에서 12구까지는 그 일을 요약하여 제시하고 있다. 여정에서 길거리를 떠도는 개와의 만남은 그다지 특이할 것이 없는 일상적 상황이다. 하지만 고산은 이러한 평범한 일상사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는다. 다음의 13구부터는 이 일에서 깨달은 자신의 감상이 표출되어 있다. 그가 얻은 깨달음은 ‘얻음과 잃음’, ‘만남과 헤어짐’, ‘삶과 죽음’ 등은 자연의 이법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일에 앞서 같은 해 그는 아끼고 사랑하던 서자(庶子)인 미(尾)를 8살의 어린 나이에 잃고 깊이 상심하고 있었다. 마흔여섯에 얻은 늦둥이인 미는, 늘 그를 따르며 재롱을 부리는 귀염둥이였기에 상심이 더욱 컸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가운데 떠돌이 개와의 우연한 만남은, 그에게 아들 미의 죽음과 관련하여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는 계기가 된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은, 15구부터 18구까지에서 보이듯 살아가는 데 있어서 득실은 그다지 마음에 둘 일이 아니며, 삶과 죽음의 문제도 결국 무상(無常)한 것으로 슬픔이나 괴로움에 빠질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적 체험을 자아 성찰의 계기로 삼고, 인생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는 태도는 그의 여러 시편들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고산의 시 세계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적 국면으로 보인다.


4. 고산 산문의 내용과 특성



현전하는 고산의 산문 작품은 운문 작품과는 달리 주로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관련된 것이 대부분이다. 다루고 있는 내용으로 보아도 문학적이라기보다는 현실 참여적인 데에 초점을 둔 실용문이다. 그렇지만 고산의 명성이 널리 알려진 것은 운문이 아니라 바로 이 산문 때문이다. 실제로 고산의 문장은 수준이나 완성도가 매우 뛰어나, 그에 대해 부정적으로 기술한 기록에서도 ‘능문(能文)’으로 인정될 만큼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우선 그의 대표작인 〈병진소〉(《고산유고》 권2)를 통해 고산의 산문 세계가 가지는 특징적 국면의 일단을 살펴보기로 한다.



신하 된 자가 만약 나라의 권세를 한 손에 쥐게 되면, 자기의 복심(腹心)을 중요한 자리에 배치하여 위복(威服 상벌(賞罰))의 권한이 자기에게서 나오게 할 것입니다. 설사 어진 자라도 이렇게 하면 안 될 것인데, 더군다나 어질지 못한 자가 이렇게 한다면 나라가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지금 성상(聖上)께서 임어(臨御)하시어 군군신신(君君臣臣)하는 때이니 당연히 이와 같은 사람은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이 삼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이첨(李爾瞻)이 하는 짓을 보건대, 불행히도 여기에 근사(近似)하기에, 신은 삼가 괴이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이 글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고산이 아직 정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기 전인 30세에 지은 것이다. 진사(進士)로서 이이첨, 박승종(朴承宗) 등의 주벌을 청한 이 글은 고산의 문명(文名)을 널리 알린 첫 번째 계기가 되었다. 위의 인용문은 글의 첫머리 부분인데, 문면에서 보듯 고위관직에 있는 상대의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직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 선비의 기풍은 바로 국가의 원기(元氣)인데 이와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통분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처음 군부(君父)를 뵐 때에 그만 이와 같이 하고 보면, 다른 날 조정에 서게 되었을 때에, 얻으려 안달하고 잃을까 걱정하는〔患得患失〕 그 마음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아비와 임금을 시해(弑害)하는 역적이 없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면 반드시 이들 무리에서 나올 것이요, 충군애국(忠君愛國)하는 사람이 없다면 몰라도 만약 있다면 반드시 이들 무리에서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선유(先儒)의 시에 “이런 사람을 쓰고 이런 방도를 행하니, 어느 날 태평시대가 올는지 모르겠네.〔所用是人行是道 不知何日可昇平〕”라고 하였는데, 신은 항상 이 시구를 외우며 천장을 쳐다보고서 혼자 탄식하곤 합니다. 이이첨이 임금의 총애를 저토록 독점하고 있고, 국정(國政)을 저토록 오랫동안 맡고 있는데도, 재변(災變)이 저와 같고 나라의 형세가 저와 같고 백성의 원망이 저와 같고 풍속이 저와 같고 사습(士習)이 저와 같다면, 이자가 과연 현능(賢能)하다고 하겠습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위의 인용문은 스스로 불의(不義)라고 생각하는 일에는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고산의 강직한 성품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병진소〉와 아울러 중앙 정계로부터 삭출(削黜)되는 계기가 된 〈논원두표소(論元斗杓疏)〉와 정개청(鄭介淸)을 변호하고 그의 문집 간행을 청한 〈국시소(國是疏)〉도 정치적 소신과 절의(節義)를 강조한 고산의 삶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어 함께 참조할 수 있다.


고산 산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시무(時務)에 관련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1635년(인조13)에 성산 현감(星山縣監)으로서 양전(量田)의 문제점을 논한 〈을해소(乙亥疏)〉, 나라의 급선무를 여덟 가지 조목으로 제시한 〈진시무팔조소(陳時務八條疏)〉 등이 대표적이다. 다음의 인용은 〈진시무팔조소〉의 시작 부분이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매우 걱정스러운 인사(人事)와 지극히 두려운 천변(天變)을 목격한 것이 한둘이 아니라서 공연히 슬프고 놀라운 마음이 들기에, 여관(旅館)의 차가운 등불 아래 밤이 깊도록 잠들지 못한 지 몇 날이 지나고 몇 달이 지났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인사(人事)가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고, 천변(天變)이 다행히 노여워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아, 전이(轉移)의 기틀이 단지 전하가 하시기에 달려 있다고 여겨지기에, 감히 시무(時務) 팔조(八條)를 진달하오니 성명(聖明)께서 한번 봐 주셨으면 합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이 형편없다고 말까지 무시하지 마시고, 유념하여 성찰해 주소서. 이러한 말씀을 듣지 않으시면, 앞으로 후회하셔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는 정치적 쇄신을 요청하는 신하로서의 마음뿐만 아니라 세자 시절부터 지켜봐 온 효종의 안정된 국정을 바라는 사부로서의 애정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이어서 고산이 제시한 8가지 시무는 다음과 같다.



1. 하늘을 두려워하소서〔畏天〕


2. 마음을 다스리소서〔治心〕


3. 인재를 잘 분별하소서〔辨人材〕


4. 상벌을 분명히 하소서〔明賞罰〕


5. 기강(紀綱)을 떨쳐 일으키소서〔振綱紀〕


6. 붕당을 깨뜨리소서〔破朋黨〕


7. 나라를 강하게 하는 길이 있습니다〔强國有道〕


8. 학문을 함에는 요령이 있습니다〔典學有要〕



고산은 각 조목을 들고 그에 대한 전거를 통해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 글에 대해 부정적인 실록(實錄)의 평가도 있으나, 효종은 고산의 충심 어린 마음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효종실록》 3년 10월 22일 조에 “소(疏)를 보고서 말한 뜻을 모두 잘 알았다. 나라를 다스리는 대경(大經)과 대법(大法)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나니, 말마다 절실하고 글자마다 간절해서 두 번 세 번 읽으며 그칠 줄을 몰랐다.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이 언외(言外)에 흘러넘치니, 깊이 느꺼워 탄식할 뿐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내가 불민(不敏)하기는 하지만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계속해서 소장(疏章)을 올려 나의 과실(過失)을 지적하고 부족한 점을 돕도록 하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사직하지 말고 얼른 나와서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라고 한 기사가 전한다.


고산 산문의 또 하나의 특징은 예론(禮論)에서 찾을 수 있다. 1660년(현종1)에 자의대비 복제(服制)의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한 〈논예소(論禮疏)〉와 〈예설〉 2편 등 이른바 ‘예송(禮訟)’ 논쟁에 직접 참여하여 소견을 제시한 글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 예송은 주지하듯이 효종의 사후에 계모 자의대비 조씨(趙氏)가 어떤 복(服)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란이었다.


그 배경에는 왕가의 의례에 대해 종법(宗法)을 적용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되어 있는데,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 계열에서는 효종은 왕통상 인조의 적통을 이었지만 종법상 둘째 아들이므로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고산 등의 남인 계열에서는 차자로 출생하였더라도 왕위에 오르면 장자가 되는 것이며, 자의대비는 효종을 위하여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관한 고산의 글들은 단순한 예론의 차원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자료로서도 중요하다. 17세기의 조선 사회에서 이념적 규정성이 정치적 내지 사상적으로도 큰 변수로 작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고산유고》의 판본과 내용



고산의 원고는 측실의 둘째 아들로 학관(學官)을 지낸 윤직미(尹直美)와 손자인 윤이후(尹爾厚) 등이 주도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윤직미는 고산의 연보 초고를 작성하였고, 윤이후는 홍우원(洪宇遠)에게 시장(諡狀)을, 허목(許穆)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부탁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이 집안에서 소장하던 초고를 바탕으로 6권으로 나누어 목판으로 간행한 뒤 가장(家藏)한 것으로 보인다. 이 초간본의 간행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는데, 대략 저자에게 시호가 내려진 1678년(숙종4)을 전후하여 이루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이 초간본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이후 정조(正祖)는 1796년(정조20) 전라 감사 서정수(徐鼎修)에게 명하여 개간본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이에 서정수가 6권 6책으로 15질을 새로 인쇄하여 올렸다. 이 판본은 현재 규장각,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898년(고종35)에는 10대손 관하(觀夏)의 발문이 붙은 연보 등의 부록 1권이 인쇄되었고, 1935년에는 12대손 윤정현(尹定鉉)의 주도로 연보가 새로 목판으로 간행되고 문집이 보각되었다.


본 번역본의 저본은 1796년에 보각된 후쇄본으로 규장각 소장본이고, 원집(原集) 6권과 부록(附錄)이 합 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은 시 250여 제로 연대순으로 편차되어 있고, 여러 시편에 주석이 붙어 있어 고산의 개인사와 관련한 시 세계의 변모 양상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14세에 지은 〈국도에서 배를 돌리며〔自國島廻舟〕〉를 시작으로 평생에 걸친 삶의 부침 속에 경험한 사실과 깨달음을 주제로 다룬 시들이 실려 있다.


권2와 권3상은 소(疏) 25편으로, 시와 마찬가지로 저작 연대순 편차이다. 본격적인 벼슬에 오르기 이전 진사(進士)로서 이이첨 등의 주벌을 청한 〈병진소〉, 양전(量田)의 문제에 대해 논한 〈을해소〉, 새로 즉위한 효종(孝宗)에게 진언한 〈기축소(己丑疏)〉, 삭출(削黜)의 계기가 된 〈논원두표소〉, 정개청을 변호하고 그의 문집 간행을 청한 〈국시소〉, 자의대비 복제의 삼년설을 주장한 〈논예소〉와 〈예설〉 2편 등이 실려 있다. 권3하에서 권5상은 서(書) 107편과 단자(單子) 1편이 있다. 역시 연대순 편차로 안부 편지와 특정 사안의 문답이 많다. 정유악(鄭維岳)의 《대학(大學)》 문목(問目) 등에 대한 답서, 효종 승하 후 간산(看山)의 명을 받고 총호사(摠護使) 심지원(沈之源)에게 올린 서간 등이 실려 있다. 권5하는 제문(祭文) 등 13편과 서(序) 4편, 기(記) 1편, 설(說) 2편, 비명(碑銘) 5편, 잡저(雜著) 5편, 의(議) 1편, 잡록(雜錄) 3편이다. 해남에 있으면서 지은 〈금쇄동기(金鎖洞記)〉, 복제(服制) 문제로 삼수(三水) 유배 때 지은 〈서회(敍懷)〉, 효종의 산릉을 정하기 위해 명을 받아 간산하고 나서 올린 〈산릉의(山陵議)〉가 수록되어 있다. 권6은 별집(別集)으로, 장편(長篇) 시 8수와 각종 과제(科製)로 지은 산문 17편을 모아 놓았다. 가사(歌辭)는 연대순 편차로, 영덕(盈德) 유배 후 해남 금쇄동에서 지낼 때 지은 〈산중신곡(山中新曲)〉, 〈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과 〈고금영(古琴詠)〉, 보길도 부용동에서 지은 〈어부사시사〉, 〈몽천요(夢天謠)〉 등이 있고, 끝에 경원(慶源) 유배 때 지은 〈견회요(遣懷謠)〉와 〈우후요(雨後謠)〉가 있다. 부록에 1677년(숙종3) 홍우원(洪宇遠)이 지은 시장(諡狀)이 있다.



2011년 12월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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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대ㆍ이상원ㆍ이성호ㆍ박종우 옮김, 《국역 고산유고》, 소명출판, 2004.


김경희, 《고산유고》 해제,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2003) 광주 향토사 연구 (사)광주·전남향토사연구협의회
광주광역시 동구청(2021) 동구의 인물2 광주광역시 동구청
광주시남구역사문화인물간행위원회(2015) 역사를 배우며 문화에 노닐다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Ⅰ 인물과 문헌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01) 광주남구향토자료 모음집Ⅱ 문화유적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마을(동)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14) 광주 남구 민속지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남구문화원(2021) 양림 인물 광주남구문화원
광주동구문화원(2014) 광주광역시 동구 마을문화총서 Ⅰ 광주동구문화원
광주문화관광탐험대(2011~16) 문화관광탐험대의 광주견문록Ⅰ~Ⅵ 누리집(2023.2
광주문화원연합회(2004) 광주의 다리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원연합회(2020) 광주학 문헌과 현장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광주문화재단(2021) 근현대 광주 사람들 광주문화재단
광주북구문화원(2004) 북구의 문화유산 광주북구문화원
광주서구문화원(2014) 서구 마을이야기 광주서구문화원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옛 지도로 본 광주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04) 국역 光州邑誌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3) 영산강의 나루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시립민속박물관(2018) 경양방죽과 태봉산 광주시립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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