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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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목사 권공 묘갈명 병서 〔光州牧使權公墓碣銘 幷序〕- 용주유고 제17권 / 묘갈(墓碣)
선조 말엽 단성(丹城)에 과거 공부로 뛰어난 자가 있으니 권달보(權達甫 권집(權潗))라고 한다. 그의 종제 정보(靜甫 권도(權濤))와 그의 아우 도보(道甫 권준(權濬))와 아울러 세상에서는 ‘삼권(三權)’이라고 일컬었다. 도보가 죽은 지 십여 년 만에 그의 아들 극유(克有)가 그의 형과 아우와 함께 부친의 일을 성실하게 서술해 가장(家狀)을 만들어 나에게 주며 말하기를,
“선생은 우리 선친의 벗이십니다. 감히 선친의 혼령을 빌려 선생께 글을 써 주십사 간청을 드립니다.”
하였다. 나는 눈물을 거두며 대답하였다.
“아, 참으로 잘 왔네. 자네 부친과 나는 오십 년 오랜 친구 사이니 자네 부친의 평생을 나만큼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것이네. 묘갈명을 어찌 사양할 수 있겠는가.”
가장을 살펴보건대, 도보의 성은 권(權)이고 휘는 준(濬)이며 호는 상암(霜嵒)이고 도보(道甫)는 그의 자이다. 책을 읽을 줄 안 때부터 부형이 시키지 않아도 걸상의 무릎 닿는 부분이 뚫어질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는데 그 중 《맹자》를 가장 열심히 읽었다. 약관의 나이에 향시에 여러 차례 합격하였다. 계축년(1613, 광해군5)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그의 종제 정보(靜甫)와 함께 그해 증광시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관(分館)되었다. 권지에서 규례대로 박사에 올랐고, 성현 찰방(省峴察訪)으로 나갔다가 다시 규례대로 전적으로 승진하였다.
당시 광해군의 정사가 혼란하여 간신들이 권력을 휘둘러 인사를 마음대로 단행하면서 어진 이를 낮추고 자신의 당인(黨人)을 높였다. 황덕부(黃德符), 이위경(李偉卿) 등이 마음대로 날뛰고 아첨하였는데 도보와 잘 지내고자 좋은 관직으로 꼬였지만 도보가 좋게 여기지 않는 데야 어찌 하였겠는가. 성균관과 찰방을 전전한 것은 이 일에 관계된 것이라 한다.
계해년(1623, 인조1) 인조반정 때에 한 가지 재주 한 가지 능력을 가진 사람도 등용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도보만은 형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결성 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갔다.
정묘년(1627)에 예조 낭관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후 황해 도사(黃海都事)에 제수되었다.
무진년(1628)에 중앙으로 들어와 예조 정랑이 되었고, 얼마 있지 않아 수안 군수(遂安郡守)에 제수되었다.
신미년(1631) 가을에 종묘서 령(宗廟署令)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낭관으로 전직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직하였다. 겨울에 사예(司藝)로 개차되고 다시 상례로 개차되었다가 태복시 정으로 옮겼다. 한 달여 만에 삼척 부사(三陟府使)에 제수되었다.
갑술년(1634)에 직강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을해년(1635)에 장악원 정을 거쳐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나갔다.
병자년(1636) 가을에 청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남한성이 포위되고 호남과 영남의 두 절도사가 잇따라 패전하였다. 당시 온 도의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오직 자신의 몸을 보존하고 처자를 보호할 계획에 여념이 없었다. 도보는 분개하여 우뚝 서서 마을의 부로들을 의로써 격동하고 흩어진 병졸들을 군령으로 수습하였다. 정홍명(鄭弘溟)에게 호소사(號召使)에 응하도록 권했으며 겁먹고 굼뜬 체부 종사관(體府從事官)을 꾸짖었다. 그러자 난민들이 두려워할 줄 알게 되어 창고가 그런대로 보존되었으니 도보의 공이다.
무인년(1638)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상의원 정으로 개차되었다. 부임하기 전에 삼척에서 횡령하였다는 모함으로 죄를 받아 광양에 유배되었다가 얼마 뒤에 방면되어 돌아왔다.
임오년(1642, 인조20) 10월 16일에 단성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5세였다.
아, 도보의 넓은 도량과 아름다운 재주가 누구만 못하기에 여기에서 그치고 말았는가. 군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도보가 혼란한 조정에서 쫓겨난 것은 보통 선비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계해년(1623, 인조1) 이후로 도보를 아는 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섰지만 도보를 밀어준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고 도보도 거의 얼굴과 언사에 드러낸 적이 없다. 이는 거의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군자’라고 할 수 있지만, 계해년 이전 현달하지 못했을 때보다 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당시에 쓰임이 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은 자신의 뜻을 행하고 싶어서가 아니겠는가. 도보는 세 곳의 큰 고을 수령을 지내면서 모든 일을 신속하게 다스려 모두 고과에서 최고로 위에 보고되어 안팎 옷감을 하사받았으니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이 표창된 것이다. 그가 떠났을 때에는 떠난 후의 추모하는 마음을 돌에 새기지 않고 동(銅)에 새겼으니, 백성에게 은택을 주겠다는 평소 지닌 도보의 뜻이 여기에서 펼쳐진 것이다. 후한(後漢) 때의 순리(循吏)의 공적이 어찌 표비(豹朏)의 두려움을 부끄러워하겠는가? 처음에 내가 세 권씨에 대해 혼자서 평을 해보았었다. 달보는 외면은 단정하고 내면은 고아하며 정보는 융통성과 지조를 둘 다 갖추고 때로 규각을 드러내니 모두 한 때의 명사가 되기에 충분한데, 지극한 성실함으로 화려함이 없고 밖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모두 진솔하다는 평은 도보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그 뒤 입신양명하고 행한 일이 대략 나의 말과 비슷하게 되었다.
도보는 본래 안동 사람으로 그의 먼 조상인 김행(金幸)이 고려 초에 권씨 성을 하사받았는데 그 일이 《고려사》에 보인다. 우리 조선에 들어와 휘 금석(金錫)이 단성(丹城)에 살기 시작하여 마침내 단성 사람이 되었다. 증조 휘 시준(時準)은 영경전(永慶殿) 참봉이다. 참봉은 휘 운(運)을 낳았는데 상의원 별제이다. 별제는 휘 세인(世仁)을 낳았는데 군기시 판관이다. 이씨에게 장가들어 3남을 낳았는데, 장남 집(潗)은 임자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자는 달보이다. 도보는 그의 막내아우이다. 도보는 고성 현령(固城縣令) 조응도(趙凝道)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현숙하고 아녀자의 법도가 있어 숙인에 봉해졌다. 도보보다 6년 앞서 죽었다. 도보의 묘는 의령(宜寧) 박령산(縛領山) 묘향(卯向)의 언덕인데 조숙인과 같은 묘역 안의 다른 무덤에 묻혔다.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장남은 극리(克履)로 업유(業儒)이다. 차남은 극관(克觀)이고 삼남은 극유(克有)이다. 극유는 성균관 진사로 벼슬하여 선공 참봉(繕工參奉)이 되었다. 사남은 극겸(克謙)으로 그 역시 업유이다. 극리는 부사 조정생(曹挺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극관은 일찍 죽었다. 극유는 목사 이지천(李志賤)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극항(克恒)은 윤정벽(尹正辟)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흠(欽)과 유(鑐)는 극리의 아들인데, 유는 생원이다. 익(釴)과 윤(鈗)은 극유의 아들인데, 익은 진사이다. 전(錪)은 극항의 아들이다. 흠은 이준로(李俊老)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장남은 우형(宇亨)이다. 우형은 현감 송정렴(宋挺濂)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다. 나머지는 어리다. 유는 윤정남(尹挺男)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익은 찰방 이귀징(李龜徵)에게 장가들어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윤은 박이혁(朴以赫)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와 딸 둘을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전은 심유진(沈儒珍)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측실에게서 딸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심여(沈櫖)에게 출가하여 딸 둘을 낳았다. 차녀는 정연휴(鄭延休)에게 출가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세상은 말 잘하는 것 좋아해서 / 世好佞美
그대에게 억지로 ‘어눌하다’ 이름붙이고 / 强名君曰吶
세상은 꾸미는 것 좋아해서 / 世好飾羽
그대에게 억지로 ‘질박하다’ 이름붙이네 / 强名君曰質
어눌하고 질박함이 / 惟吶與質
기름진 권세의 길엔 불리하겠지만 / 雖不利於脂膏形勢之途
탁무(卓茂)와 주읍(朱邑)의 무리와 함께 / 與卓茂朱邑之倫
백성의 사당에 거하면서 칭송의 노래 성대하리니 / 居民社而歌于于
그렇다면 세상의 교활한 자들은 / 則世之巧儇者
90리 길 양보하고, 한 수를 물리는 그 정도 뿐 아니네 / 不趐三舍讓一籌輸
그대의 뜻과 사업은 바로 질박하고 어눌함 속에 있다는 것 / 惟君志業正在質吶之中兮
세상에 누가 알리요 / 世誰知之
참으로 사람들은 몰라도 하늘은 아시리니 / 固有人不識而天翁知兮
그대 자손 마땅히 번성하리라 / 宜爾子孫之振振猗

[주-D001] 광주 …… 묘갈명 : 
이 글은 권준(權濬, 1578~?)의 묘갈명이다. 권준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보(道甫), 호는 상암(霜嵒)이다.
[주-D002] 걸상의 …… 정도로 : 
후한(後漢)의 관영은 55년 동안 나무로 만든 탑상(榻牀)에 앉아 있었는데, 단정한 자세를 한번도 잃은 적이 없었으므로, 무릎 닿는 곳에 모두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高士傳 管寧》
[주-D003] 두 절도사 :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佑申)과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을 가리킨다.
[주-D004] 자신을 …… 군자 : 
《논어》 〈학이〉 제1장에 나오는 말로, 공자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라고 하였다.
[주-D005] 어찌 …… 부끄러워하겠는가 : 
원문은 ‘해뉵표비지출재(奚恧豹朏之怵哉)’인데, “표비(豹朏)”의 의미가 불분명하고 관련된 전고를 찾을 수 없어 일단 위와 같이 번역한다.
[주-D006] 탁무(卓茂)와 주읍(朱邑) : 
두 사람 모두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웠다. 탁무(?~28)는 전한(前漢) 원제(元帝) 때에 밀현령(密縣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왕망(王莽)이 집권할 때 벼슬을 내렸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하였다. 광무제(光武帝)가 즉위하자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그를 태부(太傅)로 발탁하고 포덕후(褒德侯)에 봉하였는데, 뒤에 밀현에 탁무의 사당이 세워졌다고 한다. 《後漢書 卷25 卓茂列傳》 주읍(朱邑, ?~기원전 61)은 동향(桐鄕)의 색부(嗇夫)가 되어 치적을 남겼다. 주읍이 죽자 그의 아들이 유언에 따라 그를 동향에 장사지냈는데, 그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우고 세시(歲時)로 제사를 지냈다. 《漢書 卷89 循吏傳 朱邑》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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