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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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 미산집

강남간사록〔江南幹事錄〕 직무 수행 기록 - 미산집 제8권 / 기(記) : 한장석(韓章錫, 1832~1894)

갑술년(1874) 2월에 나라에 원자(元子) 탄생의 경사가 있어 증광시를 시행하였으므로 내가 왕명을 받고 호남좌도에 가게 되었다. 3월 상순 임자일에 대궐에 이르러 하직인사를 올리고 계판(啓板) 앞에서 별도로 분부를 받들었다. 또 특명(特命)으로 중희당(重煕堂)에 입대(入對)하여 직접 하유(下諭)를 받들었는데, 공정함을 갖추도록 힘쓰고 주선을 편리하게 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이었다.

그리고 여정의 원근과 왕복에 걸리는 시간을 물어보셨는데 말씀이 간곡하고 근엄하셨다. 은혜로이 돌아봐주시고 정중히 접대해주신 것은 대개 특별한 대우이다. 물러나 가만히 스스로 생각해보니 천신(賤臣)이 수십 년간 문필에 종사하면서 과거장에서 고생하며 대양(對揚)하리라는 일념을 일찍이 마음에 맹세했었다. 하물며 이제 지척에서 임금의 말씀을 들으매 돈어(豚魚)를 감읍시킬 만한데,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을 품겠으며, 두려운 마음으로 분발하여 정성과 노력을 다해 우러러 선발하여 보내시는 지극한 뜻에 부응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시 한 수를 지어 뜻을 나타내고 절을 올리고 대궐을 물러나와 노량진을 건너는데, 청지기 김희상(金煕祥)ㆍ최경순(崔景淳)과 하인 김원길(金元吉)이 따라왔다. 고리(故吏) 오용묵(吳容默)이 일 때문에 남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또한 함께 하였다. 해 질 녘에 문성동(文星洞) 선영에 두루 참배하고 시흥현(始興縣)에서 묵는데 수령 이근집(李根集)이 나와서 만나 보았다.

계축일에 일찍 출발하여 부곡(富谷)의 여러 선조들 묘소에 성묘하고 점사(店舍)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광주(廣州) 주전(厨傳)이었다. 율전(栗田)에 있는 할아버지 묘소에 들러 참배하고 저녁에 화성부(華城府)에 이르렀다. 명령을 전하여 거쳐 가게 되는 여러 고을의 모든 친지와 인사들에게 만나러 오지 말도록 했다. 문지기에게 경계하여 편지나 명함을 통하지 말도록 하니 이르는 곳마다 엄숙하였다.

갑인일 한낮에 진위현(振威縣)에 이르니 현령 목양석(睦養錫)이 나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성환역(成歡驛)에서 묵었는데 직산(稷山) 주전(厨傳)이었다.

을묘일 한낮에 천안군(天安郡)에서 쉬는데, 군수 이민성(李敏性)이 나와서 만나보았다. 저녁에 광정역(廣亭驛 공주목에 속함)에서 묵었다. 병진일 한낮에 금강(錦江)에서 밥을 먹고 저녁에 노성현(魯城縣)에서 잤다.

정사일 한낮에 은진현(恩津縣)에서 쉬는데, 현령 조종필(趙鍾弼)이 나와서 만나 보았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렀는데 호남의 첫 경계이다. 영읍(營邑)에서 맞이하는 의식이 이곳부터 점차 성대해졌다. 저녁에 여산부(礪山府)에 머물며 근민헌(近民軒)에서 묵는데 부사(府使) 권인병(權寅秉)이 들어와 만나보고 묵은 회포를 풀었다.

무오일에 시읍(試邑) 화순현(和順縣)에 공문을 보내 많은 선비들에게 포고하기를 각기 마음을 다해 공부에 정진하고 부정한 방법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낮에 삼례역원(參禮驛院)을 거쳐 저녁에 전주부에 이르렀다. 판관 김계진(金啓鎭)이 하루 전에 와 있어서 반갑게 만나 즐거움을 다하였다.

기미일에 안찰사 조성교(趙性敎)가 나와서 만나보고 선화당(宣化堂)으로 맞아 들여 술자리를 마련하고 기악(妓樂)을 베풀어 대접해주었다. 비에 막혀 그대로 머물렀다.

경신일에 비가 그치자 늦게 출발하여 유점(鍮店)에서 점심밥을 먹었는데, 전주 관주(官厨)에서 제공한 것이었다. 산길로 6, 7리를 가서 운암강(雲巖江)에서 배를 타고 가니 골짜기 여울이 매우 세찼는데 비가 온 뒤라 더욱 기세가 강했다. 배는 작고 사람은 많은데다 해 질 녘이 되자 바람이 높아져 건너기를 다투는데 날이 저물어서야 비로소 뭍으로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 강물을 끼고 고개를 넘으니 잔로(棧路)는 매우 좁았지만 바위 틈 골짜기의 농장이며 밭과 촌락이 서로 바라보이고 뽕나무와 대나무며 가시나무 사립문이 은은히 그림과 같아서 닭과 개를 이끌고 가서 살고 싶을 지경이었다. 밤이 깊어 갈담점(葛覃店)에 이르렀고 임실(任實)에서 묵었다.

신유일에 또 배를 타고 운암강 하류를 건너 정오에 순창군(淳昌郡)에서 쉬었다. 군수 조태영(趙台永)이 만나러 나와서 기녀를 대동하여 풍악을 울리고 함께 응향각(凝香閣)에 올랐다. 응향각은 군문(軍門) 안의 큰 못 가에 있는데, 붉은 기둥은 거울 같은 수면에 어리고 푸른 연잎이 바람을 부채질하며 아름다운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며 고운 놀잇배를 마주해 있어 시원하게 트였으면서도 맑고 그윽하고 온갖 형상이 모두 잠겨 있으니 그곳을 호남의 명루라 일컫는데, 기녀와 관현의 성대함 역시 한 도의 으뜸이라고 할 만하다.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여구(驪駒)〉가 이미 불리니 구점(口占)으로 시 한수를 짓고 작별하였다. 밤 2고(二鼓 10시 경)에 담양부(潭陽府)에 당도하니 부사 이승경(李承敬) 어른이 나오셔서 만났고 또한 노래하는 기녀들이 술자리를 도왔다.

임술일에 5십 리를 가서 광주목에 이르러 잤다. 고을에 당도하기 5리쯤 전에 큰 도랑과 긴 숲이 길 왼편을 끼고 있었는데 연꽃이 필 때여서 서호(西湖)의 멋진 풍광보다 못하지 않았다. 목사 박봉하(朴鳳夏) 어른은 아버지의 친구이신데 만나 뵙자 매우 기뻐하셨다. 남평(南平) 사또인 벗 이위재(李渭在)는 부시관(副試官)으로 부안 사또인 벗 이영(李永)과 함께 와서 만났는데 천리 길에 부평초처럼 만나니 참으로 즐거워할 만하였다.

계해일에 화순현을 향해 출발하는데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험준한 절벽인 판치(板峙)를 넘어 10여 리를 말달려 읍에 당도하였다. 높은 가마를 타고 공복을 갖춰 입고 서양관(瑞陽館)으로 들어가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극위(棘圍) 밖에서 스물다섯 고을에서 책 상자를 지고 온 선비들이 길을 끼고 비를 맞으며 담처럼 둘러서서 보았다. 동청(東廳)으로 들어가 부시관 및 참시관인 동복(同福) 현감 이학래(李鶴來) 및 참시관인 본 고을 현감 강문영(姜文永)과 더불어 상견례를 하고 관리와 선비들을 호령하니 부서(部署)가 이윽고 엄숙해졌다.

이튿날인 갑자일 아침 해가 돋을 무렵에 여러 유생들이 과거장에 모이기를 마쳤다. 글제를 게시하고 시권을 거두니 눈처럼 쌓이고 물결치듯 펄럭여 순식간에 웅이산(熊耳山)과 나란해졌다. 시필(試筆)의 흔적이 흥건한 것을 주의(朱衣)에게 일임하여 저울처럼 공정한 마음을 지니고 거울에 비추듯 주목하니 천군(天君 마음)이 환히 트여 온갖 사특함이 스스로 달아났다. 한낮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고정(考定)을 다 마치고 그 다음날을 지나 병인일에 종장(終場)을 시험보이기를 역시 초장(初場)과 같이 하였다. 정묘일에 탁호(坼號)하여 방을 게시하였다. 무진일에 수계(修啓)했다. 기사일에 봉서(封書)를 보내고 비를 무릅쓰고 동복현(同福縣)에 이르러 잤으니 적벽(赤壁)을 보기 위해서였다.

경오일에 동복 현감 이청전(李靑田)과 함께 무진루(無盡樓)에 올랐는데 무진루 위에 외조부이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선생의 시판(詩板)이 있었다. 옛날 순조 계해년(1803, 순조3) 봄에 선생이 경시관으로 이곳에 들리셨는데, 지금 72년이 지나 내가 또 이 임무로 마침 이곳에 왔으니 이 일은 우연이 아니다. 둘러보고 감회가 일어 시판의 시를 차운하여 그 아래에 새겨 걸었다. 수령과 함께 적벽(赤壁)에서 노닐었는데 고개 너머 10리 밖 저 멀리 붉은 벼랑이 가파르게 들쑥날쑥 솟았고 절벽이 병풍을 이루어 우뚝한 봉우리는 조각해 놓은 듯한데 무성한 녹음이 덮고 있었다. 한 줄기 맑은 계곡 물이 그 아래를 띠처럼 감돌아 배를 띄울 만했다. 붉은 산 푸른 물이 멀리까지 젖어들어 잠겨 있었다. 산꼭대기에 학소대(鶴巢臺)와 지기석(支機石)이 있고, 절벽 아래 조금 넓은 곳에는 ‘강선대(降仙臺)’며 ‘적벽동천(赤壁洞天)’이라고 새겨놓았는데 푸른 이끼 속에 붉은 글자라 물 건너편에서도 볼 수 있었다. 북쪽 벼랑의 몇 그루 반송(盤松)이 물에 임해 일산을 드리운 듯, 규룡이 서리고 용이 엎드린 듯한데 그 수령을 알 수 없었다. 조그만 집이 날개를 편 듯 절벽과 서로 마주보는데 편액에 ‘망미(望美)’라고 되어 있지만 옛 이름은 ‘환선(喚仙)’이었다. 숭정(崇禎) 정축년(1637)에 정지준(丁之儁)씨가 재난을 듣고 의병을 일으켰다가 얼마 후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며 노년을 마치고자 하였는데 정자는 그때에 건립되었다. 자손들이 대대로 지켜오다가 여러 번 흥폐를 겪었으나 지금은 완전히 새로 수리하였다. 선현들의 제영(題詠)이 자못 많았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의 시에 차운한 것도 있었다. 공경히 그 운자를 따라 지어서 수령에게 판에 새겨 달라고 부탁하여 흔적 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자취를 의탁하였다.

술이 깨기도 전에 다시 물염정(勿染亭)으로 향했다. 물길을 따라 산을 둘러 물굽이를 돌아 6, 7리를 가니, 문득 조그만 골짜기가 열렸다. 기이한 봉우리가 둥글게 에워싸서 마치 성벽 같은데 조그만 언덕이 돌출하여 가운데 있고 맑은 냇물이 띠처럼 둘렀으며 푸른 솔이 이어졌는데 나는 듯한 용마루가 그 위에 우뚝하니, 깊으면서도 실은 트여 있고 맑으면서도 실은 화려하였다. 그 속에 들어간 사람은 마치 호중구화(壺中九華)에 노니는 것 같았다. 정자를 지은 사람은 창주옹(滄洲翁)으로 지금도 나씨(羅氏)의 소유이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짓고, 동복(同福) 수령과 작별하였다. 30리를 가서 광주 무등산에 당도하였고 산길로 들어가 10리를 가서 원효암(元曉庵)에 닿았는데 산길은 매우 험했고 날도 저물어 어두워졌다. 사또 박 어른께서 주방 아전과 가기(歌妓)를 보내어 산행을 도와주었다.

신미일에 간편한 가마를 타고 승경을 찾아갔다. 산승이 알려주기를, “오른편으로 산발치를 따라 10여 리쯤 가면 입석대(立石臺)이고, 수백 보를 더 가면 서석대(瑞石臺)입니다. 또 5, 6리를 더 가서 상봉에 오르면 그곳이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입니다. 또 10리를 가다가 내려가면서 풍혈(風穴)을 보고, 광석대(廣石臺)에서 쉬면 관람이 끝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승려의 말대로 차례차례 올라가 구경하였다. 입석대는 색이 검푸르고 네 모서리가 먹줄을 대고 깎은 듯했으며 우뚝하게 산등성이 위에 나란히 버티고 서 있었다. 높이는 10여 장(丈)이고 병풍처럼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관악기가 옥처럼 쌓이고 기둥이 금빛 죽순처럼 솟은 것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폐부가 모두 맑아지게 했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부는데 소리가 어디로부터 나는지 알 수 없더니 한참 후에 그쳤다.

서석대는 얽힌 바위가 큰 언덕을 이루었고 흙이 덮여 평평한 대(臺)를 이룬 것이 여러 층이어서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만 비로소 그 높이를 깨닫게 된다. 상봉(上峯)은 특히 우뚝 높고 커서 수만 떨기를 묶어 평지에서 솟구쳐 올라 있었다.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헤엄치며 바다로 가는 듯, 비늘과 지느러미가 노여워 뻗친 듯, 빽빽이 모이고 삐쭉삐쭉 솟아 있었다. 높다랗게 세 봉우리를 이룬 것은 천(天), 지(地), 인(人) 삼황봉(三皇峯)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그 정상에 올라보니 돌이 가지런하여 나막신을 수용할 만했지만 좌우로 여유 공간이 없어 말에 걸터앉듯이 하였다. 바다 위를 굽어보니 늘어선 고을이 빽빽하여 바둑돌을 늘어놓은 듯하고 끝자락의 산기슭과 단절된 항구들이 높았다 낮았다 하였다. 하늘 끝 구름 안개 아득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아마도 남해일 것이라 했다.

붉은 해가 뜨겁게 내리쬐는데 일산에 의지해 술을 마시고 술을 마신 후에는 노래를 부르라고 명하여 푸른 벼랑이 떠나갈 듯하니 호탕하여 한문(寒門)에 날아오르고 홍애(洪崖)를 치는 듯한 생각이 들어 배회하며 한참을 있다가 떠났다. 이 길을 따라 조금씩 내려오는데 참대나무와 오래된 등나무 덩굴이 옷과 띠를 갈고리 마냥 걸리게 하여 허리를 구부리고 땅을 골라 디디며 지나왔다. 거의 산허리쯤 이르자 큰 바위가 빽빽이 늘어서서 칼을 뽑은 듯 중첩한 봉우리를 이루고 있었는데 꼭대기에 구멍이 있어 햇빛이 새어들기에 바라보니 문과 같았다. 운근(雲根)을 밟고 월굴(月窟)을 더듬으며 거의 사람이 통할 수 없는 길을 까치걸음으로 더위잡고 올라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크고 작은 바위들이 눕기도 하고 서기도 한 채 뒤섞여 있었다. 그 틈새가 봉합되지 못한 곳이 저절로 깊숙한 구멍을 이루었는데 그 넓이가 가로 세로 두어 개의 홀(笏)만 하여 고개를 숙여 들어갔다가 빠져 나와 그 꼭대기로 올라가니 심히 위태로웠으며 또 기이한 경관도 없었다. 정송강(鄭松江 정철(鄭澈))의 발길이 닿은 곳인 까닭에 유명한 것이다. 이곳이 이른바 풍혈(風穴)이다.

그 밑은 광석대(廣石臺)로 어지러운 바위가 사방으로 둘러 서 있는데 높이가 모두 수십 길이었다. 대가 그 가운데 자리하여 수십 인이 앉을 만하였고 금강산 명경대(明鏡臺)와 같았는데, 움푹 깊은 것은 그보다 심했으나 깨끗하게 솟은 것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과 숲 속 꽃송이가 짙푸르고 붉게 빛나 술을 마시며 노래를 하는데 바람이 세차 벽락동(碧落洞)에 들어선 듯 떨려서 오래 머물수가 없었다. 호남의 산은 기묘함이 적은데 오직 바다를 둘러싼 여러 산들은 자못 우뚝하고 훌륭하다고 하나 지대는 더욱 낮다. 오직 이 산만 높이 솟아 남방의 으뜸이 되었으니 무등(無等)이라는 이름이 이런 이유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나무와 맑은 샘은 없고 웅장한 하나의 산일뿐인데 특별히 바위로써 그 변화를 다했다. 다만 그 드러내 보임이 일정치 않아 나머지 땅에는 소홀하였고 조각을 하는 데는 너무 기교를 부리다가 천진함에서 멀어졌다. 사람에게 비유하자면 평소에 녹녹하여 빼어난 절조가 없던 사람이 출세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 행동이 있는 것과 같다. 《시경》에 이르기를 “위의가 매우 성대하여 가려낼 수가 없다.〔威儀棣棣, 不可選也.〕”하였으니, 가려낼 수 있다면 어찌 훌륭한 선비이겠는가? 저녁에 증심사(證心寺)에 이르러 묵었다. 절이 산문(山門)에 있어 대숲과 시내와 골짜기의 승경을 갖추고 있었다.

임신일 새벽에 비가 오다가 아침에 갰다. 광주(光州)에 들러 박 어른께 인사드리고 동창(東倉)에 당도하여 오찬을 먹었다. 저녁에 장성부(長城府)에 도착했는데 18년 전 아버님께서 부임하셨던 곳이다. 소자가 모시고 따라 온 적이 없어서 일찍이 기징사(奇徵士)와 백양산(白羊山)을 보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이었다. 징사는 이름이 정진(正鎭)인데 남방의 유종(儒宗)이며, 백양도 역시 남방의 명산이다. 이번 걸음에 오래 묵은 소원을 풀게 되었다. 제민헌(濟民軒) 관아에서 묵으니 이졸(吏卒)이 모두 구면인 듯이 기뻐하였으며 그 이름을 들어보니 종종 예전 근무자도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늙었다. 기징사가 사는 곳을 물어보니 이미 지나쳐 왔다.

이튿날 계유일에 하인을 물리치고 혼자 먼 길을 말을 타고 가서 장성부 하사(下沙)에 이르러 찾아뵈었다. 큰 체격에 용모가 훌륭하고 훤칠하여 존경할 만하였다. 연세가 지금 연세 70여 세에 늙고 또 병들었으나 낙천적이고 장중하여 도(道)를 지닌 자임을 알 수 있었다. 한참 동안 더불어 이야기하였는데 의논이 순정(醇正)하고 심성이 소탈하였다. 작별에 임하여 “저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시겠습니까?” 물으니, 이렇게 답하였다. “ 일명지사(一命之士)가 마음을 보존하고 사물을 사랑한다면 반드시 백성을 구제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대는 이미 벼슬길에 나가 임금을 섬기니 나랏일에 힘을 쏟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또, “근세의 유자(儒者)들은 입만 열면 문득 심성(心性)과 이기(理氣)를 말하며 일생을 애쓰지만 일에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삼가 정주(程朱)의 서언(緖言)을 지켜 궁행 실천할 뿐입니다. 장점을 겨루고 단점을 끌어내어 송사하듯 설이 분분한 것과 같은 것은 저는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들어보면 대개 뜻이 독실하고 지키는 바가 간략한 것이 노년에 이르기까지 변함없는 선비였으니, 지금 세상에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겠는가?

장성부로 돌아오는 길에 백양산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아형(雅兄)인 이재국(李在國)은 오랜 친구인데, 상을 당하여 집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이 큰길 곁에 있으므로 조문하려고 들렀다. 청암역(靑巖驛)을 지나 백양산 아래에 이르니 길은 평탄하나 궁벽한 곳이라 나무숲 그늘이 짙었으며 초가집이 나란히 어우러져서 매우 그윽한 운치가 있었다. 두 산이 바짝 좁아져 골짜기를 이루었고 골짜기 입구에는 단청한 들보가 시내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이곳이 쌍계루(雙溪樓)였다. 노승 인정(印正)이 시를 청하기에 포옹(圃翁)의 판상(板上) 시를 차운하여 주었다. 견여(肩輿)를 갖추도록 명하여 숲길을 뚫고 냇물을 건너 구불구불 돌아 올라갔다. 울창한 숲 속에 석봉(石峰)이 빼어남을 다투며 종종 반쯤 드러나 보여 흰 구름처럼 하얗게 푸른 하늘에 솟아 있었다. 백련암(白蓮庵)에 투숙하였는데 산꼭대기 높은 절벽이라 진세를 벗어난 듯한 뜻이 있었다. 난간 밖으로 몇몇 봉우리가 엄연히 다가와 손을 맞잡고 읍하는 듯하였다. 한밤중 경쇠와 범패 소리에 뭇 산들이 모두 메아리쳐서 충분히 사람에게 깊은 반성을 일으켰다.

갑술일에 운문사(雲門寺)를 방문했다. 스님 한 사람이 앞장서고 푸르름이 싸인 하늘 속으로 사람의 그림자가 오르내리는데 바라보니 흰 새가 오가는 것 같았다. 빽빽한 숲은 햇빛을 가리고 그윽한 샘은 답하듯 울리는데 잔도와 비탈길을 꺾어 돌며 누차 멋진 경치를 만났다. 비온 후라 더욱 선명하고 윤기 나는 데다 맑게 내달리는 것이 즐길 만하였다. 절에 당도하니 높고 널찍하여 조망이 탁 트였다. 경담(鏡潭)이라고 부르는 산인(山人)은 총명하여 불경에 능통하고 자못 계행(戒行)이 있었다. 앞길을 찾아 가다가 왼쪽으로 가니 돌길이 갑자기 끊겼으므로 남여를 버리고 걸어서 한 등성이를 올라가니 제단처럼 넓고 평평한데 그 위에 큰 소나무가 솟아있고 햇빛이 땅에 닿지 못하며 바람이 불어 옥구슬 소리를 냈다. 물외암(物外庵)과 약사암(藥師庵) 두 암자를 굽어보며 영천암(靈泉庵)에 이르니 모두 절벽 밑에 깃들어 있었다. 지난번에 보았던 푸른 산 중 석봉(石峰)의 중턱인데, 그 배 부분을 불룩하게 하여 처마를 토해내고 있어 바라보니 학의 둥지나 호랑이굴과 같았다. 그런데 영천굴(靈泉窟)은 더욱 기이하여 속은 넓고 밖은 좁게 오므라져 휑하니 문이 되었고 사찰이 깊이 감추어져 비바람을 가릴 수 있었다. 그 속으로 들어서니 매우 어둡고 차가웠으며 맑은 물방울이 바위 구멍으로부터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을 대를 쪼개 받아내는데 물맛이 차가워 품평할 만했다. 굴 문을 나서서 오른쪽으로 가니 연이은 산봉우리의 정상이 홀연히 갈라져 길쭉하게 뻗어 마치 문틀에서 들보가 삐져나온 듯, 한 점의 흙도 없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사다리를 부여잡고 올라가 보니 그 밖은 바로 백련암 경내였다. 풀ㆍ나무ㆍ산봉우리ㆍ골짜기가 모두 전에 두루 지나온 곳이었으나, 굴속의 풍광은 별세계 같았다. 쌍계루에 돌아와 밥을 재촉해 먹고 산을 나서서 갈현(葛峴)을 넘어 내장산(內藏山)으로 들어서니 정읍(井邑) 땅이다. 고갯길이 구불구불해서 물고기를 꿴 듯 줄지어 개미가 쳇바퀴 돌 듯 돌아서 겨우 평지에 도착했다. 맑은 샘과 흰 바위, 빽빽한 숲과 겹겹한 산등성이로 그 경내가 매우 그윽하였다. 산길을 여러 번 구비 돌아 그 열고 닫히는 비경을 이루 다 감당할 수 없었는데 온통 푸른색이어서 원근을 구별하지 못했다. 사찰 대여섯 곳은 지금은 모두 영락했고, 오직 벽련암(碧蓮菴)이 쉴 만했다. 이번 걸음에 명산을 구경한 것이 셋인데, 서석산(瑞石山 무등산)은 우뚝 솟았으나 벌거숭이 산이고, 내장산은 그윽하지만 속되고, 물과 바위와 숲과 산봉우리가 승경을 아우른 것으로는 마땅히 백양산이 최고라 하겠다. 각각 시 한편을 지어 승경을 기록하였다.

을해일 한낮에 입비촌(立碑村)에서 쉬고, 저녁에 담양부(潭陽府)에서 잤다. 병자일에 비가 심하게 내렸다. 포시(晡時 오후 3~5시)에 순창군에 도착해서 머물러 잤다. 조 사또가 노래하고 춤추는 기녀를 선발해 풍악을 울려 즐겁게 해주었다.

정축일에 여전히 비가 내렸다. 느지막이 밥을 먹고 조 사또와 응향각(凝香閣)에서 작별한 다음 적성강(赤城江)을 건넜는데 강가의 산이 맑고 고와서 사랑스러웠다. 배 안에서 시를 지어 조 사또에게 부치고 남원에 도착하여 묵는데, 관사(館舍)며 성지(城池)가 가장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일컬었다. 남문밖에는 높다랗고 널찍한 누가 있는데 앞으로는 큰 못에 임했고 대숲 섬과 연못과 무지개다리며 붉은 사다리가 표연히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오를 것 같은 상상을 갖게 하였다. 오른쪽으로 교룡산성(蛟龍山城)을 바라보니 푸르름이 서로 얽혔고, 앞으로는 큰 들판이 있어 저 멀리까지 드넓고 맑고도 깨끗하였다. 여기가 예로부터 일컫던 광한루(廣寒樓)인데, 선현들의 시제 판이 벽에 가득하였다. 또 요선관(邀仙館), 영주각(瀛洲閣), 삼신산(三神山), 오작교(烏鵲橋)가 있어 좌우로 늘어서 있다. 모두 신선의 이름을 빌려 쓴 것이지만 시정(市井)과 너무 가까우니 진짜 신선을 불러오진 못할 듯 했다. 임백호(林白湖)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고, 비로소 화순에서 임실로 향했다. 직로(直路)를 취하면 이틀 만에 이를 수 있지만 시험 시기가 아직 멀었기 때문에 길을 우회하여 여기에 이른 것인데, 여전히 날짜에 여유가 있었다. 마침 서울에 있을 때는 만나지 못했던 벗인 부사(府使) 윤횡선(尹宖善)을 만났다. 며칠 머무를 흥취는 없었지만 일찍 남쪽으로 내려와 송광산(松廣山)월출산(月出山)의 승경을 맘껏 보지 못한 것이 유감스러웠다.

무인일에 오수역(獒樹驛)에 도착하니 해가 아직 정오가 되기 전이었지만 머물러 그곳에서 묵었다. 관사(官舍) 동쪽 편에 조그만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라고 불렀는데, 역시 맑고 탁 트여 바라볼 만하였다.

기묘일에 30리를 가서 임실현(任實縣)에 도착해 교열루(敎閱樓)에 올라가 공복(公服)으로 바꿔 입고 운수관(雲水館)에서 망궐례(望闕禮)를 행했다. 운수관의 편액은 바로 종증조부이신 익정공(翼貞公)의 필적이었다. 동청(東廳)에 자리를 열고 현감 정준화(鄭駿和) 수령과 상견례를 하였다. 부안(扶安) 수령이 또 부시관(副試官)으로 왔고, 참시(參試)는 오수(獒樹) 승(丞) 왕경련(王景鍊)이었다.

무인일에 유생들을 크게 모아 초장(初場)에서 논(論)과 의(疑)를 시험하였다. 기묘일에 도 전체에 부(賦)와 표(表)를 시험하였다. 경진일에 책(策)을 시험하여 삼장(三場)을 다 마쳤다. 답안을 고시(考試)하여 방을 내건 것이 바로 신사일 새벽이다. 근년에 조정의 명으로 매양 감영(監營)에서 동당시(東堂試)를 합설하였는데 도별로 나누어 옛 제도를 회복한 것은 금년부터 시작되었다.

임오일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20리쯤 가서 오원강(五黿江)을 건넜다. 한 줄기가 골짜기를 의지하여 흐르는데 맑고 투명하여 밑바닥이 보였으며 얕아서 옷을 걷고 건널 만했다. 또 20리를 가 만마관(萬馬關)에서 쉬었다. 관은 두 산이 협소해지는 곳이자 남쪽으로 가는 길의 요충지에 위치해 있다. 옛날부터 견훤(甄萱)이 웅거했다는 곳으로 전해오는데, 옛 성(城)은 훼손되고 무너져서 방어할 수는 없다. 전 관찰사 이호준(李鎬俊) 공이 처음 수리하여 보(堡)를 설치하고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월별로 구분하여 지키게 하니 망루와 관아가 환하게 빛나 웅부(雄府)와 같았다. 시 2편을 지었다. 30리를 갔지만 전주성(全州城)에 이르지 못했다. 두 산이 마주 솟아 있고 여러 물줄기가 합쳐져 협곡에서 쏟아져 내리니 바위와 돌무더기에 부딪혀 금(琴)이며 축(筑) 소리를 이루었다. 한 굽이를 막 돌아들어 바라보니 붉은 기둥이 아스라이 건너편 벼랑에 나는 듯이 솟아 있었다. 하인이 “한벽당(寒碧堂)입니다.”라고 알려주더니 물을 건너 달려갔다. 높이 층층한 산봉우리를 베고 저 멀리 맑은 물결을 움키면서 비스듬히 남고산성(南固山城)을 마주하고 있는데, 성가퀴가 가려졌다가 보였다가 하고 그윽하면서도 시야가 넓고 평평하여 흉금을 펼칠 만하였다. 낭랑히 좌태충(左太冲)의 “천길 높은 산봉에 옷 먼지 털고, 만 리 흐르는 강물에 발을 씻노라.〔振衣千仞岡, 濯足萬里流.〕” 구절을 읊조리는데 시를 마치기도 전에 석양이 산에 걸렸으므로 누를 내려와 수레를 몰아 남성(南城)으로 들어왔다. 통판(通判)이 관소로 와서 만나보고 인근 지역의 인사 또한 찾아온 자가 있어 비로소 문을 활짝 열고 평소처럼 접대하니 모두들 시험에 탈락한 자도 원망이 없다고 말하였다. 아아, 한 치의 마음이 비록 은미하나 남을 속일 수 있겠는가? 스스로를 속이면서 남에게 믿음을 구하기는 어려우리라.

계미일에 오랜 친구인 관찰 통판(觀察通判) 이우선(李禹善)군을 찾아갔다. 서울로부터 남쪽 지방에 와서 살고 있어 몇 해 동안 만나지 못했다. 운수관에서 게효(揭曉)하던 날 저녁에 시로써 풍자하며 손을 잡고 막혔던 회포를 풀었는데 전송을 위해 이곳에 뒤쫓아 왔다가 이곳에 이르러 작별하고 갔다. 이날 밤새도록 크게 비바람이 쳤다. 영부(營府)에서 가희(歌姬)를 보냈는데 거문고와 시(詩)와 그림에 능한 기녀였다.

갑신일에 비가 오고 날이 개질 않으니 사또가 내가 가는 것을 만류했지만 가고 머무는 것에는 기한이 있으니 한번 어기면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게 됨을 생각하고 드디어 출발하여 공북루(拱北樓)를 지났다. 공북루와 만경대(萬景臺)와 승금호(勝金湖)는 모두 예전에 보았던 곳이므로 생략하고, 배를 타고 대천(大川)을 건너 낮에 삼례원(參禮院)에서 밥을 먹었다. 도랑물이 넘쳐 진창이 미끄럽고 비가 아직 개지 않았다. 마부와 하인이 고생하며 말을 몰아 황혼녘에 여산부(礪山府)에 닿았다.

을유일은 쾌청하였다. 황화정(皇華亭)에 이르니 감영에서 나와 모시던 사람과 아전, 관노들이 모두 인사하고 떠났다. 이날 고시와 근체시 각 1편을 지었다. 저녁에 경천역(擎天驛)에서 잤다. 병술일은 광정역(廣亭驛)에서 잤다.

정해(丁亥) 일에 목천(木川) 땅에 들러 산장으로 박영래(朴永來) 군을 방문하고 저녁에 성환역(成歡驛)에서 잤다. 일가 사람 한원교(韓元敎)가 만나러 왔기에 그가 사는 마을을 물어보니 큰길에서 5리 정도 거리였다. 무자일에 지나오다가 저녁에 오산점(五山店)에서 잤다. 기축일에 과천현에서 잤다. 경인일에 도성으로 들어와 복명(復命)하고 집으로 돌아가니 실로 4월 중순이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41일이 지났고 다닌 길이 1,947리여서 기록해둔다.


[주-D001] 직무 수행 : 
원문은 우역(于役)으로, 《시경》 〈군자우역(君子于役)〉에서 나온 말이다. 왕명을 받아 직무를 수행하러 가는 것을 의미한다.
[주-D002] 대양(對揚) : 
임금의 명을 받들어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것을 의미한다. 《서경》〈열명 하(說命下)〉에, “감히 천자의 아름다운 명을 그대로 선양(宣揚)하겠습니다.〔敢對揚天子之休命.〕”라고 한 문장에서 나온 말이다. 대(對)는 답한다는 뜻이고, 양(揚)은 선양한다, 송양(頌揚)한다는 뜻이다.
[주-D003] 돈어(豚魚) : 
미물을 의미한다. 《주역》 〈중부괘(中孚卦) 단(彖)〉에 “괘사(卦辭)에서 돼지와 물고기에까지 미치게 되면 길하다고 한 것은 그 믿음이 돼지와 물고기에게까지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豚魚吉, 信及豚魚也.〕”라는 말이 나온다.
[주-D004] 오용묵(吳容默) : 
본관은 해주이다. 유학(幼學)으로 1883년 박문국 사사(博文局司事)로 근무하였으며, 다른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주-D005] 문성동(文星洞) : 
경기도 시흥현(始興縣)에 속한 마을이다.
[주-D006] 이근집(李根集) : 
1823~?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성여(成汝)이다. 1858년에 진사시에 합격, 음직으로 진출하여 하급 관직을 거쳐 1873년부터 시흥 현령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D007] 주전(廚傳) :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경유하는 역참에서 음식과 거마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역주 사직악기조성청의궤》
[주-D008] 목양석(睦養錫) : 
본관은 사천이며, 1872년 11월부터 1875년 7월까지 진위 현령을 지냈다.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전한다.
[주-D009] 이민성(李敏性) :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고종 때 현릉 영, 진잠 현감(鎭岑縣監)을 거쳐 1872년에 천안 군수로 부임했다.
[주-D010] 조종필(趙鍾弼) : 
1840~? 본관은 한양, 자는 은상(殷相)이다. 1867년(고종4) 진사시에 장원, 1874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공감 주부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72년에 은진 현감으로 부임했다.
[주-D011] 황화정(皇華亭) :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에 있던 정자이다. 조선 시대에는 충청도 땅이 아니라 전라도 여산읍 소속이었다. 이곳에서 전라도 관찰사가 임무를 교대하던 곳으로 우암 송시열이 지은 〈황화정기(皇華亭記)〉현판이 걸려 있었다.
[주-D012] 권인병(權寅秉) :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1873년에 여산 군수로 부임했다.
[주-D013] 시읍(試邑) : 
과거장을 여러 고을을 돌아가면서 설시(設施)하는데, 그해 과장을 설시한 곳을 시읍이라고 한다.
[주-D014] 김계진(金啓鎭) : 
인적 사항은 미상이며, 1864년(고종1)부터 장악원 주부, 청산(靑山) 현감, 남원 현감을 지냈고, 1874년(고종11) 전주 판관으로 부임하였다.
[주-D015] 조성교(趙性敎) : 
1818~1876. 본관은 한양, 자는 성유(聖惟),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1859년(철종10) 문과에 급제, 1866년(고종3) 성균관 대사성ㆍ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동지사 부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1년(고종8)에 예조 판서에 올랐고, 동지사의 정사로 재차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187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주-D016] 조태영(趙台永)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8년(고종5) 충훈부 봉조관을 지내는 것을 시작으로 노성 현감(魯城縣監), 안성 군수(安城郡守)를 지냈고, 1873년(고종10)에 순창 군수(淳昌郡守)로 부임했다.
[주-D017] 여구(驪駒) : 
《대대례기(大戴禮記)》에 나타나는 일시(逸詩)의 편명으로, 손님이 떠나려 하면서 이별의 정을 표시하는 노래이다. 손님이 “검정 망아지 문에 있고 마부 모두 대기하오. 검정 망아지 길 위에 있고 마부 멍에 올리었소.〔驪驅在門, 僕夫具存. 驪驅在路, 僕夫整駕.〕”라고 노래를 부르면, 주인은 ‘손님이여 돌아가지 마오’라는 뜻의 〈객무용귀곡(客無庸歸曲)〉을 불렀다 한다. 《漢書 卷88 王式傳》
[주-D018] 이승경(李承敬) : 
1815~?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부터 문의 현령, 괴산 군수, 은율 현감 등을 지냈으며 1872년(고종9)에 담양 부사로 부임했다. 《경조부지(京兆府誌)》를 편찬하였으며, 문집으로 《여사난고(餘事亂藁)》를 남겼다.
[주-D019] 서호(西湖) : 
중국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에 있는 호수로 풍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주-D020] 박봉하(朴鳳夏) : 
1809~1881. 본관은 밀양, 자는 성구(成九), 호는 동정(東井)이다. 1852년(철종3) 음사(蔭仕)로 은진 현감을 지냈으며, 장흥 부사ㆍ대구 판관ㆍ대흥 군수(大興郡守)ㆍ해주 판관을 거쳐 1873년 광주 목사로 부임했다. 경상북도 영천에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가 있다.
[주-D021] 이위재(李渭在)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 강릉 참봉(康陵參奉)을 지내고 그 이후로 의금부 도사, 장악원 주부를 거쳐 1873년에 남평 현감으로 부임하였다.
[주-D022] 이영(李永) : 
자세한 인적 사항을 알 수 없다.
[주-D023] 극위(棘圍) : 
경비가 삼엄한 과거 시험장을 가리키는 말이다. 극원(棘院)이라고도 한다. 합격자 발표를 하는 날 낙방한 응시자들의 난동을 방지하기 위하여 가시나무 울타리를 쳤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舊五代史 卷127 和凝列傳》
[주-D024] 이학래(李鶴來)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 서부 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 영(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 군수로 부임했다.
[주-D025] 강문영(姜文永)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73년(고종10)에 화순 현감(和順縣監)으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전라 감사 조성교(趙性敎)에 의해 파직되었다.
[주-D026] 웅이산(熊耳山)과 나란해졌다 : 
몹시 높은 것을 말한다. 웅이산(熊耳山)은 하남성(河南省) 의양현(宜陽縣)에 있는 산인 바, 한나라 때 광무제(光武帝)가 적미군(赤眉軍)을 진압하고서 그들에게서 노획한 병갑(兵甲)을 의양성 서쪽에 쌓아 놓았는데, 그 높이가 웅이산과 나란하였다고 한다. 《後漢書 卷11 劉盆子列傳》
[주-D027] 주의(朱衣) : 
주의사자(朱衣使者)를 줄인 말로 과거시험 고시관을 가리킨다.
[주-D028] 종장(終場)을 …… 하였다 : 
과거 시험을 초ㆍ중ㆍ종장이라 하여 3일 동안 보는데, 초장(初場)에는 사서(四書) 가운데 의심을 일으키게 할 만한 대목을 논하도록 하여 논(論)과 표(表)를 짓게 하고, 중장(中場)에는 부(賦)와 표(表)를 짓게 하고, 종장(終場)에는 책문(策文)을 짓도록 했다. 여기서 종장을 초장과 같이 했다는 말은 시험을 시행하고 관리하는 방식을 동일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주-D029] 탁호(坼號) : 
과거 급제자 명단이 든 봉투를 뜯어보고 성명을 부르는 것을 말한다.
[주-D030] 수계(修啓) : 
보고할 내용을 정리하여 계문(啓文)을 작성하는 것을 말한다.
[주-D031] 적벽(赤壁) : 
현재 전남 화순군(和順郡) 이서면(二西面) 창랑천(滄浪川) 일대의 절벽을 말한다. 적벽이란 명칭은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동복으로 귀양 온 최산두(崔山斗)가 중국의 적벽에 버금간다 하여 붙였다고 한다.
[주-D032] 이청전(李靑田) : 
청전은 이학래(李鶴來)의 호이다.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고종3) 서부 도사(西部都事)를 지냈고, 그 이후 사재감 봉사, 화령전 수문장(華寧殿守門將), 희릉 영(禧陵令) 등을 거쳐 1874년에 보성 군수로 부임했다.
[주-D033] 무진루(無盡樓) : 
동복현에 적벽 부근에 있었던 누정이다. 치헌(癡軒) 조효능(趙孝能)이 세운 것으로, 소동파의 《적벽부》 내용 가운데 맑은 바람과 밝은 달빛은 조물주가 무진장 허락한 것이니 누리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뜻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豊墅集 無盡樓記》
[주-D034] 망미(望美) : 
망미정은 병자호란때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정지준(丁之儁, 1592~1663)이 1646년(인조24)에 세운 정자로, 화순군 이서면 장학리의 적벽을 바라보는 곳에 있다.
[주-D035] 정지준(丁之儁) : 
1592~1663. 본관은 압해(押海), 자는 자웅(子雄), 호는 적송(赤松)이다. 준(儁)은 준(雋)으로 표기된 곳도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양인용 등과 함께 호남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청주를 거쳐 남한산성에서 싸우던 중,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망미정을 짓고 학문에 전념했다.
[주-D036] 물염정(勿染亭) : 
전라남도 화순군의 경승지인 화순 적벽(和順赤壁) 상류에 있는 정자이다.
[주-D037] 호중구화(壺中九華) : 
돌이 매우 기이하고 아름다운 광경을 이룬 것을 의미한다. 송나라 때 호구(湖口) 사람 이정신(李正臣)이 괴이한 돌을 쌓아 구봉(九峯)을 만들었는데, 소동파(蘇東坡)가 호중구화(壺中九華)라 이름 짓고 시를 읊었다. 소식의 〈호중구화시서(壺中九華詩序)〉에 “호구 사람 이정신이 이석(異石)을 가졌는데 아홉 봉우리가 영롱하게 굽이져 창령(窓櫺)과 같았다. 그래서 나는 1백 금(金)으로 그것을 사서 구지석(仇池石)과 짝을 지으려 했는데 남쪽으로 옮기게 되어 미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름을 호중구화라 함과 동시에 시로써 기록한다.”라고 하였다.
[주-D038] 창주옹(滄洲翁) : 
나무송(羅茂松, 1577~1653)으로, 본관은 나주, 자는 수부(秀夫), 호는 창주(滄洲)ㆍ만취(晩翠)ㆍ물염정(勿染亭)이다. 1615년(광해군7) 문과에 급제하여 거산 찰방(居山察訪), 정언(正言),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하자 병조 정랑으로 임금을 호종(扈從)하였으며, 강화가 이루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 물염정(勿染亭)에서 학문을 닦으며 여생을 보냈다. 《창주문집(滄洲文集)》이 있다.
[주-D039] 원효암(元曉庵) : 
광주 무등산 원효 계곡에 있는 사찰로,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이곳에 머무르면서 절을 개축한 후부터 원효사ㆍ원효암ㆍ원효당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었던 영규(靈圭)가 이곳에서 수도하였다고 전한다.
[주-D040] 한문(寒門)에 날아오르고 : 
시원하다는 의미이다. 주자(朱子)가 공풍(鞏豐)에게 답한 편지에, “이 무더운 여름철을 당하여 한문에 날아올라 시원한 바람에 씻은 듯하다.〔當此炎燠, 灑然如羾寒門而濯淸風也.〕” 하였는데, 《초사(楚辭)》 〈왕일(王逸)〉의 주(注)에, “한문은 북극(北極)에 있는 차가운 곳이다.” 하였다. 《朱熹集 卷64 答鞏仲至》
[주-D041] 홍애(洪崖)를 치는 : 
신선이 된 듯하다는 의미이다. 홍애는 전설상 황제(黃帝)의 신하로서 신선이 된 영륜(伶倫)의 호이다. 요(堯) 임금 때 이미 나이가 삼천 살이었다 한다. 《神仙傳》 곽박(郭璞)의 〈유선시(游仙詩)〉에, “왼손으로는 부구의 소매를 당기고, 오른손으로는 홍애의 어깨를 친다.〔左相浮丘袖, 右拍洪崖肩.〕”는 표현이 보인다.
[주-D042] 운근(雲根) : 
벼랑이나 바윗돌을 뜻하는 시어(詩語)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
[주-D043] 월굴(月窟) : 
전설에 달이 지면 들어가 쉰다는 굴로, 서쪽에 있다고 한다. 월굴을 더듬는다는 표현은 높이 올라갔다는 의미이다.
[주-D044] 벽락동(碧落洞) : 
풍광이 깨끗하고 좋은 곳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말이기도 하고, 구체적 지명을 일컫는 경우도 있다. 《계승(桂勝)》에는 벽락동을 막연한 숲이 깊고 그늘지며 물이 맑고 운치 있으며 바위가 높지만 밝고 트인 곳을 대개 벽락동과 같다고 설명하였고, 《강서통지(江西通志)》에는 익양현(弋陽縣) 관아 동북쪽에 산이 깊고 바위가 험한 곳이 있는데 그곳 석벽에 ‘벽락동천(碧落洞天)’이라는 넉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였으며, 소동파의 시에 언급된 벽락동은 영주(英州) 아래 14리에 있는 곳이라고 스스로 주석을 달았다.
[주-D045] 위의가 …… 없다〔威儀棣棣, 不可選也.〕 : 
《시경》 〈백주(柏舟)〉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주-D046] 증심사(證心寺) : 
무등산에 있는 사찰이다. 860년에 철감선사(澈鑑禪師)가 창건하였고, 1094년에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중수하였으며, 1443년 전라도 관찰사 김방(金倣)이 자신의 녹봉으로 중창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자 1609년(광해군1) 석경(釋經), 수장(修裝), 도광(道光) 등의 선사들이 중창하여 일제강점기 초기에는 임제종(臨濟宗) 운동의 본부가 되었다. 1951년 4월 50여 명의 무장공비들에 의하여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으며 1971년에 크게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D047] 기징사(奇徵士) : 
기정진(奇正鎭, 1798~1879)으로,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대중(大中), 호는 노사(蘆沙),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학덕이 높아 조정의 부름을 받은 선비를 징사라고 하는데, 기정진은 1866년(고종3)에 조정에서 동부승지, 호조 참판 등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였다. 학문에 전념하여 서경덕(徐敬德), 이황(李滉), 이이(李珥), 이진상(李震相), 임성주(任聖周)와 함께 성리학의 6대가(六大家)로 일컬어진다. 《노사문집(蘆沙文集)》이 있다.
[주-D048] 일명지사(一命之士)가 …… 것입니다 : 
일명지사는 처음 벼슬길에 나선 선비를 가리키는데, 벼슬하는 선비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대동소이한 말이 《근사록(近思錄)》 권10에, 정명도(程明道) 선생의 말로 있다. “처음 벼슬한 사가 진실로 만물을 사랑하는 데 마음을 두면 사람에게 반드시 구제해 주는 바가 있을 것이다.〔一命之士, 苟存心於愛物, 於人, 必有所濟.〕”라고 하였다.
[주-D049] 이재국(李在國) : 
1838~? 본관은 청안, 1885년(고종22) 사마시 증광시에 3등으로 합격, 1890년 무렵에 의령원 수봉관(懿寧園守奉官)을 지냈다. 그 외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주-D050] 쌍계루(雙溪樓) : 
백암산 백양사 입구에 있는 누각이다. 1370년에 무너진 뒤 1377년에 복구되었으며, 정도전ㆍ이색 등이 기문을 남겼다. 이색의 〈백암산정토사쌍계루기〉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계곡의 물이 합쳐지므로 ‘쌍계루’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주-D051] 포옹(圃翁) : 
정몽주(鄭夢周)를 가리킨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장성현〉에, 백암사의 승려가 요청하여 포은 정몽주가 쌍계루에서 지어준 시가 전한다.
[주-D052] 백련암(白蓮庵) : 
백양산 중턱에 있었던 암자인데,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주-D053] 운문사(雲門寺) : 
백양사(白羊寺)의 산내암자인 운문암을 가리킨다. 백암산 최고봉인 상왕봉(象王峰) 아래에 있다. 고려 충정왕(재위 1349~1351) 때 각진국사(覺眞國師) 복구(復丘, 1270~1355)가 개창하면서부터 고승들의 수도장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한국전쟁 때 소실되어 유적만 남아 있다가 1985년 복원되었다.
[주-D054] 경담(鏡潭) : 
1824~1904. 경담은 법명이며, 본명은 서관(瑞寬)이다. 어려서 장성 백양사(白羊寺)로 출가하였으며, 그 뒤 구암사(龜巖寺)의 백파(白波)로부터 불경과 외전(外典)을 배운 뒤 선암사(仙巖寺)의 침명(枕溟)으로부터 선법(禪法)을 공부하였다. 임종에 관해서는 전하지 않는다. 《東師列傳》
[주-D055] 물외암(物外庵)과 …… 영천암(靈泉庵) : 
물외암, 약사암, 영천굴은 모두 백양사의 산내암자이다. 영천암은 영천굴 속에 있다.
[주-D056] 영천굴(靈泉窟) : 
백양사 경내에 있다. 영천굴은 20평 남짓한 천연석굴로 단칸의 영천암이 있는 곳이다. 굴속의 바위틈에서 샘이 솟아나오는데 이를 영천이라 한다.
[주-D057] 벽련암(碧蓮菴) : 
내장산 서래봉 중턱에 있다. 한동안 내장사라 불리기도 하다가 근세에 와서 영은암을 내장사로 개칭하고 이곳은 다시 벽련암이라 칭한다.
[주-D058] 입비촌(立碑村) : 
정읍과 담양 사이의 길목에 있었던 마을인 듯한데,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주-D059] 응향각(凝香閣) : 
순창 관아 안의 동헌 옆 연못가에 있었던 누각이다.
[주-D060] 적성강(赤城江) : 
섬진강의 상류로서 순창군 적성면을 흐르는 구간을 적성강이라고 부르며 남원군 대강면에서부터 섬진강으로 불린다.
[주-D061] 붉은 사다리 : 
원문은 단제(丹梯)인데, 선경(仙境)으로 들어가는 길을 의미한다.
[주-D062] 교룡산성(蛟龍山城) : 
남원산성(南原山城)이라고도 불린다. 산성을 언제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성을 쌓은 입지나 형식으로 볼 때 백제 때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주-D063] 임백호(林白湖) : 
임제(林悌, 1549~1587)로, 본관은 나주, 자는 자순(子順), 호는 백호ㆍ풍강(楓江)ㆍ소치(嘯癡)ㆍ벽산(碧山)ㆍ겸재(謙齋)이다. 1576년(선조9) 생원진사시에 합격, 이듬해 알성시에 급제한 뒤 흥양 현감, 북도 병마사, 예조 정랑을 거쳐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임백호집》이 있다.
[주-D064] 윤횡선(尹宖善) : 
1832~?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구(景搆)이다. 1872년에 남원 부사로 부임해 있었다. 1882년(고종19) 증광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임금의 특별 명령으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 그 후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이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주-D065] 송광산(松廣山) :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면 신평리에 있는 조계산(曹溪山)의 옛 이름이다.
[주-D066] 월출산(月出山)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과 강진군 성전면에 걸쳐 있는 산으로, 광주의 무등산(無等山), 순천의 조계산(曹溪山)과 함께 호남의 명산으로 손꼽힌다.
[주-D067] 교열루(敎閱樓) : 
임실현 관아 안에 있었던 누각이다.
[주-D068] 운수관(雲水館) : 
임실현 관아인 동헌이다.
[주-D069] 익정공(翼貞公) : 
한용귀(韓用龜, 1747~1828)로, 본관은 청주, 자는 계형(季亨), 호는 만오(晩悟), 시호는 익정이다. 1772년(영조48) 성균관 재학시 황감제(黃柑製)에서 장원급제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진하사(進賀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바 있으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주-D070] 정준화(鄭駿和) : 
인적 사항은 자세히 알 수 없다. 1866년부터 의릉 참봉, 선공감 봉사 등을 지내고 1872년 임실 현감으로 부임했다.
[주-D071] 삼장(三場) : 
과거(科擧)에서 초장(初場), 중장(中場), 종장(終場) 세 번의 시험을 치는 것을 가리킨다.
[주-D072] 동당시(東堂試) : 
대과(大科)나 문과(文科)의 속칭, 혹은 증광시(增廣試)를 말한다.
[주-D073] 오원강(五黿江) : 
임실 관촌면 일대를 흘러가는 섬진강 줄기를 부르는 명칭이다.
[주-D074] 만마관(萬馬關) : 
전주에서 남원(南原)으로 가는 길에 슬치재를 못 가서 있는 전주의 관문이다.
[주-D075] 견훤(甄萱) : 
867~936. 전주 견씨(全州甄氏)의 시조이고, 본성은 이(李)이며, 아자개(阿慈介)의 아들이다. 후백제의 초대 왕(재위 900~935)으로 관제를 정비하고 중국과의 국교를 맺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충돌하며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에 고려 왕건에게 투항하여 신검 토벌을 요청해 후백제를 멸망시켰다.
[주-D076] 이호준(李鎬俊) : 
1821~1901.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충백(忠伯),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1864년(고종1) 경과 증광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867년에 친척의 자제인 이완용(李完用)을 양자(養子)로 입적, 당시 서자(庶子)로 이윤용(李允用)을 두고 있었다. 1870년 전라도 관찰사 재임 중 외침에 대비한 성의 수보(修補)와 군사훈련에 힘썼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원 의장, 궁내부 특진관, 의정부 참정을 지냈다.
[주-D077] 전 …… 하니 :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 4월 15일 기사에 보면, 전주부의 만마관은 육로(陸路)로 통하는 요해처이니 그 성을 완전히 축조하고 곁에 관아(官衙)를 설치하여 남고진장(南固鎭將)으로 하여금 봄가을로 돌아가며 지키도록 해 달라는 전라 감사 이호준(李鎬俊)의 장계에 대해 윤허하는 내용이 나온다.
[주-D078] 좌태충(左太沖) : 
태충은 진(晉)나라 좌사(左思)의 자이다. 인용한 시구는 그가 지은 〈영사시(詠史詩) 8수〉가운데 제5수에서 나온 구절이다. 《文選 卷21》
[주-D079] 관찰 통판(觀察通判) : 
관찰사의 감영에 소속된 판관(判官)을 가리킨다.
[주-D080] 게효(揭曉) : 
과거 시험 합격자 명단을 공포(公布)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D081] 공북루(拱北樓) : 
전주부의 공북루를 가리킨다.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시 팔복동에 자리한 누각으로 조선 시대에는 조정에서 조령(朝令)을 받들고 사람이 내려올 때 부윤(府尹)이 나가 맞던 곳이기도 하다.
[주-D082] 삼례원(參禮院) : 
전라도 전주부(全州府) 삼례도(參禮道)로, 전주부 북쪽 35리에 있다.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지역이다.
[주-D083] 여산부(礪山府)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에 해당하는 곳이다.
[주-D084] 경천역(擎天驛) : 
경천역(敬天驛)이라고 쓰기도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일대이다.
[주-D085] 광정역(廣亭驛) : 
광정역(廣程驛)이라고 쓰기도 한다. 지금의 충남 공주시에 속했던 지명이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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