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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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 기대승(1527~1572)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 1527~1572)은 16세기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로 스물여덟에 「주자대전」 100여 권을 탐독한 후 네 권의 「주자문록」을 남겼다. 경연에서 선조에게 전한 말을 묶은 「논사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본관은 행주. 자는 명언(明彦), 호는 고봉(高峯)·존재(存齋). 아버지는 몰재 기진(進)이고, 어머니는 강영수의 딸 사이에서 1527년 光州 召古龍里 松峴洞에서 5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대승의 집안은 조선조에 서울 청파동에 세거하였는데, 기묘사화로 인해 복재 奇遵이 화를 당하자 기준의 형이자 기대승의 아버지인 기진이 광주의 소고룡리로 낙남하면서부터 줄곧 광주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기대승은 어린 시절부터 부친의 훈도와 주위 사람들의 기대로 사림정치에 대한 뜻을 키우고 매우 부지런하게 공부했다. 18세 되던 해에는 당시 조정의 훈구대신들에게 축출되어 향리에 은거하였던 龍山 鄭希濂로부터 문장을 지도받았다.

1549년(명종 4)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1년 알성시(謁聖試)에 응해서 시험에 합격했으나, 준의 조카라는 사실을 안 당시의 시험관 윤원형(尹元衡)의 방해로 낙방했다. 29세에는 부친상을 당하여 삼년상을 치루면서 주자의 사상과 경륜에 깊이 침잠하였다.

1558년 문과에 응시하기 위하여 서울로 가던 도중 김인후·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太極說)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天命圖說)을 얻어 보았다. 그해 10월 이황을 처음으로 찾아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13년 동안(1558~70)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四七論辯)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32세에 넉넉히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고,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출사할 무렵 이미 金麟厚와 사상적인 교감을 하였고, 李恒과는 이기불상잡의 측면에서 토론을 벌였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는 李滉에게 성리학이나 출처의 의리를 묻는 등 거의 사제나 다름없는 관계로 가르침을 받게 되어 그의 사상이 더욱 성숙해졌다.

1562년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을 거쳐 1563년 3월 승정원주서에 임명되었다. 그해 8월 이량(李樑)과의 불화로 삭직되었으나, 종형 대항(大恒)의 상소로 복귀하여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청직(淸職)에 들어섰다. 이듬해 10월에 병조좌랑을 지내면서 지제교를 겸임했다.

이어 1565년 이조정랑을 거쳐, 이듬해 사헌부지평·홍문관교리·사헌부헌납·의정부사인을 두루 지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사헌부 집의·전한(典翰)이 되어 기묘사화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윤원형 세력이 반대파를 숙청한 사건)으로 죽음을 당한 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에 대한 추증을 건의했다.

1568년(선조 1) 우부승지로 시독관(侍讀官)을 겸직했고, 이듬해 대사성에 올랐다.

1570년 을사위훈(乙巳僞勳)을 논할 때, "을사(乙巳)의 녹훈(錄勳)이 위훈(僞勳)이 아닐 뿐더러 또 선왕이 이미 정한 것이니 삭탈할 수 없다"고 하여 삭탈을 주장한 사람들의 반발을 사 벼슬에서 물러났다. 1571년 홍문관부제학 겸 경연수찬관·예문관직제학으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72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로 임명되었다. 공조참의를 지내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그해 11월 고부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명종 말과 선조 초 사이에 경연을 맡아서 이황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시비를 가릴 것과 사화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을 중용할 것과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을 표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낙향하고 점차 선조가 기대승을 견제함에 따라 기대승도 낙남하던 중 일생을 마치었다.

그의 관료 생활에 변화가 많았던 것은 그의 직설적인 성격과 당시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에 대한 의욕은 남보다 강하였다. 문과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가던 중 김인후 이항 등과 만나 태극설을 논했고,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 보게 되자 이황을 찾아가 의견을 나눌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조선 유학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주자학자이며, 지치주의적 이념으로 왕도정치를 펼치려 했다. 그의 주자학설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단칠정론은 이황·정지운·이항 등과의 논쟁을 통하여 체계가 이루어졌다. 그는 조광조의 지치주의 사상을 이어받아, 전제주의 정치를 배격하고 민의에 따르고 민리를 쫓는 유교주의적 민본정치·왕도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1558년 이황과의 만남은 사상 형성의 커다란 계기가 되었다. 그뒤 이황과 학문과 처세에 관한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 가운데 1559년에서 1566년까지 8년 동안에 이루어진 사칠논변은 조선유학사상 깊은 영향을 끼친 논쟁이다.  특히 퇴계 이황과 나눈 12년간의 편지, 8년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역사에 길이 남을 조선 최고의 사상 로맨스로 유명하다.

그는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반대하고 단칠정이 모두 다 정이다 라고 하여 주정설을 주장했으며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수정해 정발이동기감설을 강조하였다. 또한 이약기강설을 주장, 주기설을 제창함으로써 이황의 주리설과 맞섰다.

기대승의 사상은 사단칠정이기론과 사림정치론, 예학사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기대승은 이황과 8년간 논쟁을 통해 그의 성리학을 깊이 심화시켰는데, 그는 이기불상리를 중시하여 사단도 정이라고 봄으로서 사단과 칠정의 發을 다 같이 理와 氣의 共發로 보는데 비해, 이황은 이기불상잡의 측면을 존중하여 사단을 이의 발, 칠정을 기의 발로 각각 分對하여 설명한 것이다. 기대승의 이기공발설은 후일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로 발전되어갔다.

또한 기대승은 사림정치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是非’를 바르게 하여 정치 기강을 확립하고 정치 이념의 정통성을 확립하는 ‘道統’ 즉 정치운영론, 현인등용론, 위민경제론, 언로개방, 교화교육을 통해 사림정치를 실시하고자 하였다.

기대승은 예학에 조예가 깊어 각종 예서를 섭렵하고 예를 바로잡는 데 기여하였으며, 사림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종의 지위를 높여 중종 - 인종- 명종으로 이어지는 왕의 계보를 확고히 하고, 사림들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기대승 등의 노력으로 선조대부터 본격적으로 사림정치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의 인물됨은 기묘명현인 조광조의 후예답게 경세택민 위한 정열을 간직했고 정치적식견은 명종과 선조 두 왕에 대한 경연강론에 담겨 있다. 이 강론은 『논사록』으로 엮어 간행되었는데, 그 내용은 이재양민론, 숭례론, 언로통색론으로 되어 있다.

그는 명종 말과 선조 초 사이에 경연을 맡아서 이황과 함께 사림정치로의 막을 올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기묘사화 이후 시비를 가릴 것과 사화로 인해 피해를 받은 사람을 중용할 것과 도통을 계승한 인물들을 표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이 낙향하고 점차 선조가 기대승을 견제함에 따라 기대승도 낙남하고 일생을 마치었다.

그는 학행이 겸비된 사유로서 학문에서는 그의 사칠이기설에서 이황과 쌍벽을 이루었고 행동에서는 지치주의적인 탁견을 진주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정운룡, 고경명, 최경회, 최시망 등이 있다. 광주 임곡에 위치한 월봉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헌이다.

문집으로 원집 3책, 속집 2책, 별집부록 1책, 『논사록』1책, 『왕복서』3책, 『이기왕복서』1책, 『주자문록』4책 등 모두 15책의 『고봉집』이 있다.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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