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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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주를 이끌어온 광주의 중심




서구의 이름과 연혁

 

197371일 대통령령으로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남부·서부·지산출장소를 통합하여 45개 동으로 구성된 전라남도 광주시 서구가 신설되었다. 남부출장소의 사···월산·농성·백운 등 14개 동, 서부출장소의 유·누문···상무 등 15개 동, 지산출장소의 본촌·우치·삼소 등 16개 동을 합해 광주시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구라 하였다. 청사는 1979년 임동의 옛 청사에서 농성동 현 청사의 뒷편 자리로 이전하였다.

198041일 북구의 분리 개청으로 관할구역을 변경하였다. 지산출장소 3개동과 유동·누문동·북동·동운동·용봉동을 북구로, 동구 관할 양림·방림1·2동을 서구로 편입하여 22개동이 되었다. 1983년에는 농성동을 농성1·2동으로, 화내동을 화정1·2동으로 분동하였고, 1985년에는 월산4동을 월산4·5동으로, 백운동을 백운1·2동으로, 주월동을 주월1·2동으로 분동하였다.

1986111일 광주시의 직할시 승격으로 광주직할시 서구로 개칭하였고 198851일 대통령령 제12444호에 의해 27개동을 관할하는 자치구로 승격하였다. 199531일 남구가 신설되면서 서구의 관할구역이 변경되어 양림·방림·주월·백운·봉선동이 남구로 분리되었고 1995420일자 대통령령 제14629호에 의한 관할구역 변경으로 광산구 서창출장소 관할 전역을 서구로 편입하고 1999년 양1동과 양2동을 양동으로 통합했다.

2001년 서창동을 서창동과 금호풍암동으로 분동하였다. 2003년 상무1동을 상무1동과 치평동으로, 금호풍암동을 금호동과 풍암동으로, 2005년 금호동을 금호1·2동으로 분동하여 17개 행정동이 되었다.

현재의 서구 신청사는 농성동 옛 소방본부 부지에 499억원을 투입, 20093월 착공해 2011825일 준공, 923일 개청식을 가졌다. 대지면적 17천여에 지하 2, 지상 7층 규모로 본청을 중심으로 보건소와 의회가 날개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다.

광주광역시의 주민들은 오랜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워온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현재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는 19805월의 대규모 시민항쟁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기념관과 공원은 모두 광주광역시 서구에 소재하고 있다.

서구 상징 마크의 전체적인 도형은 하늘, , 강을 표현하여, 아름다운 생활 터전인 서구의 전원적인 자연 환경을 나타낸다. 역동적인 태양은 광주의 새 심장으로서의 서구, 쾌적하고 여유 있는 서구, 편리하고 기능적인 서구, 정감 있고 따뜻한 서구, 튼튼하고 생산적인 서구를 이루어 나가는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뜻한다.

마스코트 이름인 해오리는 백로의 우리말인 해오라기의 준말로, 떠오르는 서구와 환경 친화적인 아름다운 생활 터전의 의미를 담아 살기 좋은 서구의 이미지를 함축시켰으며, 친근감 있는 이미지를 줄 수 있도록 디자인하였다.


서구의 지리적 조건


서구는 광주광역시에 포함된 5개 자치구 가운데서 그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이다. 지리적으로 전라남도와 경계를 접하지 않고 광주의 중심부를 점하고 있어 행정구역명과는 달리 중앙구라 할만하다. 서구는 남쪽으로 무등산 줄기를 타고 뻗어 내려온 금당산, 개금산, 송학산의 수려한 산악을 배경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북으로는 광주천, 서로는 영산강의 지류인 극락강이 휘돌아 나가며 이웃 자치구와 경계를 이루며 비옥한 평야가 상당하다. 백마산·사월산·짚봉산 등의 구릉성 산지가 산재하여 지형적 특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서구가 자리한 광주광역시는 통일신라시대 말기에 축조된 광주읍성이 근대도시로 발전한 것이며 약 1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문화 역사의 도시이다. 광주읍성은 축조 당시부터 격자형 도로를 건설하는 등 근대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현재 서구가 자리 잡은 곳은 구 광주읍성의 서문 밖 일대로서 서구는 광주읍성과 그 역사를 함께 해 왔다.

광주 분지를 남동에서 북서 방향으로 관류하는 광주천 남쪽에 위치하며, 남동부의 금당산을 제외하면 구릉성 산이거나 대부분 평지이다. 북부는 광주천을 중심으로 평지가 넓게 분포하고, 서쪽의 극락강과 합류하는 지점은 넓은 범람원으로 자연제방이 길게 발달해 있다.

서구는 광주의 공업지구 및 주택지구로 발전해 왔다. 광천공단은 1961년 자동차의 국산화계획이 입안되고, 아세아자동차공장 건설을 위한 기초 조사가 착수되면서 조성되었다. 1973년 지방공업개방 장려지구로 지정되었고, 총 입주업체의 반 이상이 조립금속업체로서 자동차부품과 관련된 기계류를 생산하는 업체가 많다. 그러나 계속적인 도시화로 주택지가 팽창해 광천공단이 시가지에 인접하게 됨으로써 공해업소를 다른 곳으로 이주시키고 있다.

서구의 발전은 광주천을 따라 길게 발전하다가 점차 서부로 확장되고 있는데, 광주천 부근은 주거지로 비교적 일찍부터 개발되어 주거환경이 불량하다. 광주천에서 2정도 떨어진 근래 개발된 지역은 신흥주택지 및 아파트지구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농성동은 관공서들이 대거 이전함으로써 급속히 고급주택지화 되었다. 화정동은 아파트지구를 이루며 최근에 금호동과 풍암동 일대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인구의 유입이 활발해졌다.

군 장교 교육기관이던 상무대가 이전한 장소에 광주의 새로운 중심지인 상무지구가 조성되었다. 기아자동차 광주공장과 김대중 컨벤션센터를 잇는 흐름의 한가운데에 5·18기념공원이 있는 이곳은 광주광역시청을 비롯한 많은 관공서가 들어서면서 중심업무지구와 주거기능이 결합된 지역으로 개발되었다.

현재 광주 제일의 시장인 양동시장은 상설시장이긴 하지만 아직도 정기 재래시장의 특성이 남아 있다. 100여년 전만 해도 갈대밭을 이루던 지역으로 1914년 이 지역의 덕림리와 도천면의 백운리, 군분면의 연례리가 효천면 교사리가 되었고, 1923년에는 광주면 교사리가 되었다. 1935년 광주부 천정泉町이 되었다가 1946년 천정2구가 현재의 양동이 되었다. 양동良洞이라는 이름은 동네에 큰 샘이 있어 샘몰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상설 장터라는 특성을 감안하여 어질게 살라는 의미에서 8·15광복 뒤에 이처럼 지어졌다. 그러나 양동은 시 중심에 있으면서도 개발이 낙후되어 도시기반 시설이 미비하고 영세민이 많이 사는 지역이기도 하다. 1997년 호남지역 최대 높이의 금호생명 빌딩(KDB생명보험 빌딩)이 들어섰고 광주은행·농협·국민은행 등의 금융기관이 밀집해 있다.

광천동에는 도심에 분산되어 있던 고속버스터미널과 시외버스터미널을 통합한 광주종합버스터미널이 들어서 버스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상록회관(구 농촌진흥원)에서 상무대 앞을 지나 송정역에 이르는 상무로가 있고, 아르헨티나 살타시와 자매결연한 기념으로 이름을 정한 농성동 살타공원에서 백운광장을 지나 남광주역에 이르는 대남로는 순환도로의 일부로서, 1968년 광주시와 자매도시를 결연한 타이완의 대남시의 이름을 명명하여 거리 이름을 지었다.


서구의 환경

 

운천, 풍암, 전평호수 등 도심 곳곳에 자리한 호수는 도시의 운치를 더하며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쾌적하고 살기 좋은 녹색도시로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월드컵경기장, 생활체육공원, 국민체육센터, 시민공원, 518 기념공원, 서구문화원, 서구문화센터 등 주민의 질 높은 생활을 지원하기 위한 문화체육시설은 살기 좋은 도시로서 서구가 가진 매력을 뽐내게 하는 요소들이다.

상무·풍암·금호지구는 광주에서 가장 쾌적한 주거환경을 자랑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광역시 청사 입주로 광주행정의 중심지역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터미널 등이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로의 역할 또한 톡톡히 한다. 광천종합터미널과 서구를 가로지르는 제2순환도로 등 충실하게 다져진 교통기반은 광주가 서구를 통해 외부와 소통하게 하는 교통요지의 역할을 담당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특히 지하철 1호선은 김대중 컨벤션역, 상무역, 운천역, 쌍촌역, 화정역, 농성역, 돌고개역, 양동시장역 등 8개역이 서구지역에 걸쳐 있고 제2순환도로 등이 경유하고 도심철도가 건설예정으로 있어 도시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60만 군 장교 양성의 요람이었던 옛 상무대 부지를 개발하여 광주광역시청을 비롯하여 광주의 공공기관 대부분이 입주하였다. 시청 이외에 한국은행, 가정법원, 광주지방법원 등기국, KBS광주방송총국, 대한지적공사, 한국토지주택공사, 국민건강보험공단, 광주도시공사, 광주여성발전센터 등 각종 공공기관들이 들어선 밀집지역이다. 반대편에는 현대, 대우, 한국, 중흥파크, 호반, 쌍용금호 등 굴지의 아파트 단지가 입주해 있다. 또 인근에 상무시민공원과 5.18자유공원을 비롯하여 김대중컨벤션센터나 홀리데이인호텔 등 여러 대형 시설물이 들어서 있어 각종 전시행사 및 숙박시설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서구는 호남 최고의 비즈니스 허브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따라서 어느 지역보다 주민의 행정수요가 다양하다는 지역 특성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 자치 여건은 호남 제일의 전통 재래시장으로서 여전히 그 활력을 유지하고 있는 양동시장 뿐 아니라 상무시장, 서부시장 등이 있고 광주신세계와 같은 현대적인 대형백화점 및 e마트와 롯데마트 등 할인점과 문구와 완구 전문도매상가 등이 대거 자리하고 있어 광주 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 신구 유통시장에 더하여 지역의 대기업들도 서구에 있어 이 지역 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보태는 소중한 자산들이다.

특히 양동시장은 원래 1910년대에 광주교 아래 백사장에 2·7일마다 열리던 광주 큰장이 1928년 광주천의 직강공사를 실시하면서 현재의 태평극장 앞에 광주의 작은 장과 큰장을 묶어서 사정시장을 개장하였으나, 1940년 신사 주변에 장이 서면 시끄럽고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천정시장(현 양동시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하였다. 그 후 양동시장은 광주의 시장을 대표하는 곳으로 자리 잡았다. 생활용품이 넉넉지 못한 시절 군피복에서 시작하여 각양각색의 물품이 산적해 있던 곳이 양동시장이며, 명절준비로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던 삶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다. 순대, 튀김집이 한 곳에 몰려 즐비하고, 특히 닭전머리는 예부터 널리 알려진 가금류 시장이다.

19805.18민주화운동의 열기가 한창일 때 시장의 상인들이 학생과 시민들에게 주먹밥과 음식들을 제공하여 후덕한 시장 인심의 표상을 보여 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은 지금도 따뜻한 광주의 인심을 대표하는 재래시장으로 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양동시장에 연한 광주천을 1972년에 복개하고 그 위에 상가가 들어섰다. 그러나 복개상가 밑으로 지나는 광주천의 수질도 좋지 않고 주변 환경과도 어울리지 않아 서울의 청계천이 고가도로를 헐고 옛날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듯이 광주천을 덮어 도로와 상가로 만든 양동복개상가를 철거하고 예전처럼 복원하자는 논란이 있다. 한때 이곳 복개구간을 복원해 생태하천으로 조성한다는 대통령 후보의 공약도 있었지만 670여 곳에 달하는 점포주인 간에 이해관계가 엇갈린 데다 보상비 등의 문제가 겹쳐 있어 현실에 옮겨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또한 서구는 양동, 광천동, 농성동 등 구 도심권과 도시기반 시설이 잘 갖춰진 화정, 염주, 상무, 금호, 풍암 지구의 신도심 그리고 개발 여지가 많은 서창동과 유촌동의 농촌지역이 혼재되어 전원의 아름다움을 갖춘 도농 복합지역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상무지구, 금호풍암 지역은 광주의 행정, 상업, 교통, 문화, 교육, 정보 등의 중심축으로 급부상하고 있다. 주변에 금당산, 중앙공원, 상무시민공원과 월드컵경기장, 국민체육센터, 풍암전평운천호수 등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그 역할이 커지고 있다.

이러한 환경적 요인들과 행정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들이 어우러져 광주광역시 서구는 20년 전부터 도시의 주거평가가 있을 때마다 전국에서 1,2위로 부상되었고 2008년에는 살기 좋은 도시평가에서 평가대상 232개의 도시지역 중 가장 살기 좋은 8개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2016년 아동여성이 안전한 우리골목 프로젝트의 성공적인 추진을 위한 민-관 업무 협약식을 갖는 등 살기 좋고 아름다운 도시 만들기를 진행하고 있다.


서구의 자연


산과 구릉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서구는 어디에 가나 광주 전역을 내다볼 수 있어 산에 오르는 맛이 나는 곳이다.

금당산金塘山은 풍암동에 자리한 산으로 높이가 304m이며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다. 산 정상에서 좌우로 옥녀봉(222m)과 황새봉이 위치하고 있다. 정상의 정자에는 금초 정광주 선생이 쓴 옥녀봉대玉女峰臺라는 빗돌 글씨가 오르는 사람을 반긴다. 멀리 무등산이 친근한 앞산처럼 보인다. 산세가 험하지 않아 노약자와 어린이도 쉽게 오를 수 있고 넉넉잡고 2시간이면 여유있게 완주할 수 있는 산이다.

산 이름인 금당金堂은 말 그대로 , 황금 집으로 크고 화려한 집을 비유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금당은 본래 불교에서 나온 말로 부처님을 모신 건물인 사찰의 전각을 말한다. 부처님은 참으로 존귀한 분이기에 불상을 조성할 때 금 옷을 입힌다. 그래서 금 옷을 입고계신 분이 주석하고 있는 건물을 금당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빛고을 광주가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고 계시는 극락정토이고, 서구의 진산인 금당산이 부처님 집, 금당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산 아래에는 풍암호수가 있어 하루에도 수많은 시민이 찾는 도심 속의 안락한 휴식공간이다. 매년 5월이면 만개한 장미화원에서 장미축제가 열린다. 발전적으로 호수에 연한 여의주 형상의 이곳을 야생찔레 단지로 조성하여 전국적으로 만연한 장미축제 대신 찔레축제를 개최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동쪽을 향하여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는 2002년 월드컵 경기에서 붉은 악마 응원의 함성이 드높았고 4강 신화의 기적을 보여주었던 역사적인 광주월드컵경기장이 있다.

개금산蓋金山은 서창 관내 매월동에 있으며 높이는 142m이다. 산봉우리가 세 갈래로 크게 갈라져서 마치 닭의 볏[鷄冠]과 같다 해서 개관산이었는데 지금은 개금산이라 부른다. 이산 남쪽은 주로 솔밭으로 이루어지고 경사가 완만하여 그 자락에 많은 민가와 음식업소가 들어서 이 근방의 수려한 경관을 찾는 광주시민들이 줄을 잇는다. 광주에서 오리구이를 먹고 싶을 때 매월농원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말할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는 유명 대중음식점이다.

개금산 입구에 있는 전평호수는 잘 가꾸어진 연꽃호수라는 점에서 이곳에서 연꽃축제를 열어도 될 정도로 각양각색의 연꽃을 볼 수가 있다. 산책로 수준의 구간으로 매월동 전평호수-매월농원-개금산전망대-정상-구룡사-서광주역을 잇는다. 이곳 정자에서는 월드컵경기장과 금당산과 옥녀봉이 보이고 그 뒤로 무등산이 자리한다. 송정동 쪽으로 우측에 어등산이 바라보인다.

백마산白馬山은 세하동과 매월동 경계에 있으며 최근까지 군사보호구역이었던 이 산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도심 속에서도 그렇게 때 타지 않은 순정한 산이다. 서창 향토마을 바로 옆에 그냥 지나치기 쉬운 샛길이 있다. 이 길이 백마산 들어가는 입구다. 높이는 162m이고, 금당산에서 남서쪽으로 화방산을 거쳐 송학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절골[寺洞] 동편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여 솟아있다. 서쪽으로 극락강이 흐르고, 비행기가 오르고 내리는 광주공항과 송정동 일대가 한눈에 조망된다.

<대동여지도>에 보면 왕건이 진을 쳤다는 왕조대가 이곳에 표기되어 있다. 그 터로 나주시 노안면 학산리 봉호마을 뒷산과 백마산이란 설이 함께 존재한다. 백마산은 우뚝 선 뫼로 몰매>말매>마산>백마산으로 변했다. 조선시대엔 이 산 위에서 삽봉 김세근揷峰 金世斤(1550~1592) 장군이 의병들을 모아 적에 대항하는 훈련을 했다고 한다. 나라 사랑하는 일을 위해, 한 사람을 사모하는 일보다 당연히 백성을 구하는 일을 값지게 알고 살았던 오래 전 우리 조상들의 함성이 가득했던 곳이다.

백석산은 쌍촌동에 있으며 광주의 서호西湖이 부르는 운천호수가 있다. 원래는 저수지였다가 호수로 사용됙 있는 데 20111228일 서호포럼 탁인석 대표가 현장에서 200여 시민들과 함께 서호명명식을 가진 바 있다. 서울의 숭례문崇禮門을 남대문, 흥인문興仁門을 동대문으로 부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호수는 산책로가 연계될 뿐 아니라 금호지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코스가 개설되어 있으며, 경사가 완만하여 어린이나 노약자들이 활용하기 좋은 장소이다.

운천호수를 빙 둘러 산책로 500m 구간에 조형물과 음악분수, 실개천, 지압로, 정자 등이 있고, 여름에는 홍련이 호수를 가득 메우며, 논병아리 흰뺨검둥오리 등의 조류가 찾아 드는 도심 속 명소가 되었다. 2010년부터는 음악분수와 야간경관이 조화를 이뤄 무더운 여름날 시민들에게 시원한 즐거움을 선물하고 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여름에는 홍련과 백일홍이 활짝 핀다.

운천호수 - 남광병원 뒤(향림사) - 상무초등학교 뒤 - 금호성당까지 총 연장거리는 4.5 km이다. 20124월에 내 집 앞 마을가꾸기 사업의 하나로 조성한 백석산 녹차단지에 녹차나무 4,000주를 식재했다.

짚봉산은 풍암동에 있으며 높이가 128m로 낮은 산책로인 탓에 1일 약 1,500여명의 주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특히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짚봉산 샘터는 수질이 좋아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많은 주민들이 애용하고 있다. 짚봉산에서 바라보면 사방이 열려 전망이 좋다. 월드컵경기장을 비롯해서 광주시내의 동서남북이 모두 관측되고 무등산을 비롯하여 멀리 펼쳐진 산과 들이 넓게 보인다. 염주체육관 - 짚봉산 - 노인고개 - 풍암제 - 염주체육관에 이르는 총 연장거리는 5.5km이다. 필요하다면 등산로가 연결된 옥녀봉을 지나 금당산 정상에도 오를 수 있다.

송학산(208m)은 서구 서창과 남구 대촌에 걸쳐 있는 데 불암마을 팔학산(한생이산)과 잇대어 있는 산이다. 산 전체의 모습이 무등산의 축소판처럼 둥글고 산 곳곳에 큰 바위가 박혀있다. 서구 용두동 25에 광주시 문화재자료 제6호인 지석묘군이 있는데 위치는 서창출장소에서 대촌으로 가는 고개 넘어 왼쪽 송학산 자락에 있다. 이 지석묘군은 남북을 축으로 10개의 지석묘가 3열로 배치되어 있다. 서창의 강 길을 따라 청동기 사람들이 입주하였음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서구의 멋과 풍류- 서구 5


 생활터전으로서 서구는 숲과 호수가 어우러진 녹색 환경도시이자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살기 좋은 도시이다. 광주의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북쪽으로 북구, 동쪽으로 동구, 서쪽으로 광산구, 남쪽으로 남구에 접하며, 자연과 도시가 조화를 이룬 쾌적하고 살기 좋은 전원 도농지역이다.

광주의 한 중앙에 자리 잡은 중심이면서 산자수명한 전원적 농촌을 끼고 있어 대도시의 활달함도 있고 시골마을의 순후한 인심이 함께 숨 쉬는 이상적인 도농 복합공간이다. 오래 전에 서구 5경이 있었다.


1- 德興泓澄(덕흥홍등) 덕흥마을 곁을 흐르는 맑고 깊은 강물

江頭宿霧午猶重(강두숙무오유중강물 위에 머문 안개는 한낮에도 무거운데

隔岸叢中聞仙語(격안총중문선어언덕 저편 억새떨기 속에서 신선의 말소리가 들린다

潭深洞口龍眠慣(담심동구용면관마을 앞 깊은 못속에 용이 누워 잠을 자고

風傳綠野鐵馬嘶(풍전녹야철마시푸른 들녘 부는 바람은 철마의 울음소리를 전한다

 

옛날의 덕산마을은 들 건너 말뫼마을(광산구 우산동)과 같이 이 근방 자연부락으로서는 가장 큰 마을로 부촌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맑고 넉넉했으며 들은 넓고 기름졌다.

무등산에서 흘러내리는 광주천과 담양에서 시원하는 극락강이 합류하는 이 지점은 홍수 때 강물이 자주 범람하여 만들어진 토사가 덕산뫼라는 둥근 언덕을 만들었는데 전라선 기차를 타고 멀리서 바라보면 마을을 돌아 흐르는 파란 냇물과 넓게 펼쳐진 푸른 들판이 마치 푸른 바다 위에 떠있는 큰 함정처럼 보이는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그리고 덕산뫼의 경사면에 반원형으로 길게 마을이 형성되고 그 언덕의 정상에 우뚝 서 있는 느티나무는 장관이었고 그 밑에서 <덕흥당산제>라는 민속행사가 열렸는데 그 유래가 이 백년에 이른다. 한동안 덕흥당산제가 치러지지 않다가 2018년 정월 보름부터 다시 복원되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이 거목은 수령 400년이 넘는 느티나무 고목으로 높이 18m, 둘레가 4.4m이고 수관넓이는 무려 1백평이 훨씬 넘는 것으로 마치 무슨 큰 파도를 보는 것 같은 위용을 보여준다. 이 거목이 건재해 있는 한 덕 마을의 길고 탄탄했던 역사를 감출 수는 없으며 그 명성은 더욱 빛날 것이다.

특기한 것은 마을회관 입구에 특별하고 거룩한 추도비 하나가 서 있다. 19911213일 공군 작전임무 비행중 이 마을 상공에서 기체 고장으로 추락의 비극을 맞자 기체를 버리고 낙하산으로 충분히 생명을 건질 수가 있었는데 주민의 피해를 염려해서 고장 난 기체를 마을 상공 밖으로 조종을 계속하다가 기체와 함께 추락사한 이상회 공군대위의 거룩한 의행을 기려 세운 것으로 이 마을의 명성과 같이 구원의 생명을 갖는 마을의 보감이다.


2- 晩歸荷薰(만귀하훈) 만귀정의 연꽃향기

滿塘蓮葉萬介傘(만당연엽만개산못 속에 가득한 연잎은 일만개의 우산이요

遠而益濃花香抒(원이익농화향서멀리서 더욱 짙은 꽃향기를 쏟아 놓는다

須將鼓笛催皓月(수장고적최호월피리 불며 밝은 달 떠오르기 기다리니

堤列嬌櫻堪折取(제열교앵감절취둑 위에 늘어선 예쁜 벚꽃나무 꺾을 만하네


만귀정은 서구 서창동 동하마을 앞 연못 안에 있는 수중정자이다. 이 마을의 흥성장씨 효우당 장창우 공이 후학을 가르친 옛터에 그 유덕을 기리는 후손들이 1930년에 지었다. 광주도심지에서 10km 남짓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이 정자는 봄이면 호반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벚나무가 터뜨린 분홍빛 고운 꽃은 마치 채색구름을 보는 듯하고 온통 수면을 뒤덮은 연잎을 때리는 소나기 빗소리는 장중한 관현악을 듣는 것 같다.

여름철에는 우거진 수풀이 지어낸 짙은 그늘과 물가를 노랗게 수놓는 창포 꽃의 애련하고 얌전한 자태가 삼복더위를 말끔히 씻어 준다. 가을에는 상사화의 붉은빛이 푸른 호반을 뒤덮고 겨울에는 밤새 노송가지에 내려앉은 석화가 또한 별유천지다.

이래서 춘하추동 이곳을 찾는 행락의 인파가 끊이지 않으며 이 정자에는 일제강점기 때 시사회詩社會라는 문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도내 일원의 지식인 시인 묵객들이 모여 한시를 짓고 청류를 즐기는 매우 고아한 모임이었다. 이 나라의 원로시인 노산 이은상과 초대 조선군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일본육군대장이 특별회원으로 가입할 정도였다. 이 모임은 당시 국내에서는 드문 순한시동인純漢詩同人이다.

  

3- 楓岩桂月(풍암계월) 단풍바위에 걸친 달빛

鷄冠三峰影投水(계관삼봉영투수계관산 세 봉우리는 그 그림자를 물속에 던지고

彩霓橫亘架淸穹(채예횡긍가청궁오색무지개는 옆으로 가로질러 맑은 하늘에 뻗쳐있네

峽裏紫崖屹矗立(협이자애흘촉입산골짜기 자줏빛 낭떠러지 우뚝 솟아 있고

霜餘紅葉正飄浮(상여홍엽정표부서리맞은 붉은 잎들 바람에 나부끼네


풍암과 매월은 구 서창과 광주 중심부의 접경에 있는 산촌이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금당산과 개금산 등 근교에서는 드물게 보는 높은 산과 풍암호수와 전평호수 등 아름다운 호수를 가진 경치 좋은 곳이다.

회산마을 뒤에 있는 개금산은 그 모습이 마치 닭의 볏처럼 봉우리가 셋으로 갈라져 있고 그 산자락에 자리 잡은 회산마을은 임진왜란 때의 공신 회재 박광옥 선생의 탄생지로 선생에 대한 갖가지 일화가 구전되고 있다.

신암마을 뒤에 있는 금당산과 옥녀봉은 가을단풍이 곱고 개금산 밑에 있는 전평호수(속칭 매월리방죽)는 물이 맑고 교통이 좋아 일제강점기 이래 낚시터로 유명했으나 지금은 금지구역이다. 호수 근처 주막에서는 일제 말에 일본인 주재소 수석과 조선인 동경유학생이 女子정신대문제로 크게 다툰 피 끓는 조선남아의 항일발분사건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다.

운리마을은 이름 그대로 구름 속에 감추어져 있는 깊숙한 마을로 한때 전국적으로 널리 퍼진 경천신앙인 무을교의 본거지로 그 교당의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 쇠정이라는 조그만 주막이 있었는데 옛날에는 시장이 설만큼 번창하였다. 서창, 대촌, 남평 등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 광주시민에게 팔리는 상거래의 장소이었다.


4- 尙武茂林(상무무림) 상무대에 우거진 수풀(빌딩의 숲)

瑞石山下第一區(서석산하제일구서석산 밑에서 으뜸가는 좋은 지역에

高廈林立萬家春(고하임입만가춘높은 집이 숲처럼 늘어서니 만 집의 봄이로다

雲泉沼中鳧鳴絶(운천소중부명절운천방죽에 물오리 울음소리 그쳤지만

秋月山上踊彩雲(추월산상용채운담양 추월산 위에 비단구름이 춤을 춘다


 구 상무대 부지는 개발과 발전으로 이제 광주시의 중핵지점으로 축복받은 곳이지만 쓰라린 과거를 갖는 수난의 땅이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의 동양침략의 전초기지인 군용비행장으로 만들 때부터 이 지역주민들을 강제동원 등으로 괴롭혔으며, 5.18 광주민주항쟁 때는 무고한 광주시민을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가 되었다.

평범한 농촌지대였던 이곳이 군사기지로 되었던 직접적인 원인은 한말 때 일제침략군의 호남지역 우리 의병의 진압작전이 계기가 되었다. 1907년 가을부터 전남지방, 특히 광주 장성 영암 함평 등 서부지역에서 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투쟁이 격화되자 일제는 우선 광주에 주둔시켰던 수비대를 동원하여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우리 의병투쟁의 불길을 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증강된 14연대 병력과 헌병경찰 특설부대 등이 총동원되었는데 이 상무대에 그 주력이 주둔하였다.

상무대 지역이 일본의 군사기지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대동아 전쟁이 차츰 가열화 되면서 일본군 항공대가 주둔하게 되고 군용비행장이 된 것은 이 지역 사방이 열린 평탄한 지형으로 항공기 이착륙이 용이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5.18 광주민주항쟁 당시 계엄분소가 이곳에 설치되고 진압작전이라는 이름으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불의와 폭거에 맞선 정의의 시민들이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광주시의 발전 팽창에 따라 상무대 군사교육시설이 옮겨가고 신도심 개발사업이 진행되어 빌딩의 숲을 이루어 시청, 시 경찰청, 체신청 등 중요한 공공시설 건물이 들어섰고 구 상무대 동편 야트막한 언덕을 곱게 다듬어서 아름다운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도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5- 常祿櫻霞(상록앵하) 상록원의 벚꽃노을

凌風古院櫻香盈(능풍고원앵향영풍파를 이긴 옛정원에 벚꽃향기 가득하니

倣霞花下成人山(방하화하성인산노을을 본뜬 꽃 아래에 사람의 산을 이룬다

入極天遊超汗漫(입극천유초한만하늘위에서 노니는 마음 상쾌하기 그지없는데

來如棠花近又姸(래여당화근우연찾아오는 해당화(美人)는 가까워질수록 더욱 곱구나

 

농성동 상록원에 있던 농촌진흥원은 일제 때의 농사시험장으로 이곳에서는 식민통치의 투영이 없는 단순한 벼의 품종개량과 농사기술의 연마와 보급을 담당한 친화농촌 기관이었다. 광주시가지에서 떨어진 야트막한 구릉지대에 고즈넉이 자리한 이곳에 벚꽃나무가 심어진 것은 농사시험장이 설치된 직후의 1940년대 초로 벌써 수령 80년의 노목이 다 된 셈이다. 벚꽃군락지가 적은 이 지역에서는 으뜸가는 봄철 꽃놀이의 명소로 매년 4월이 되면 이곳 광주시민의 마음이 온통 이곳으로 쏠리기도 했다.

만개를 기다리지 못하고 모여드는 상춘 인파는 날마다 인산인해를 이루고 차를 타고 지나는 외지인들에게는 광주가 온통 화려한 꽃의 도시로 비춰지면서 한때 광주의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록회관이 들어서면서 상당한 벚꽃나무가 잘려나갔고 최근 아파트 부지로 확정되어 개발될 예정이어서 옛 모습을 갈수록 찾기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서구의 멋과 풍류 - 서구 8

  

최근에는 서구에는 그 자체로 꽃이나 벌 나비보다 아름다운 서구 8을 서구청에서 정하여 홍보하고 있다. 서구 8경은 만귀정, 금당산, 풍암호수, 서창들녘의 낙조, 용두동 고인돌, 운천사 마애여래 좌상, 양동시장, 5.18기념공원이다.

1경은 만귀정이다. 서구 8경 중 제 1경은 전북 남원에 살던 만귀(또는 효우공) 장창우가 세하동 동하마을로 주거지를 옮긴 후 후학을 기르며 만년을 보내기 위해 세운 만귀정(시 문화재자료 제5)이다. 정자의 명칭 만귀晩歸는 장창우가 이곳에서 인생을 자연과 더불어 보내겠다는 영귀詠歸의 뜻으로 해석된다. 원래의 건물은 세월이 지나면서 무너져 없어졌고, 후손들에 의해 1934년 중건과 1945년 중수가 이루어져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정면 두 칸의 규모이고 골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에,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남의 세 방향에 난간을 돌렸다. 큰 연못 가운데 세워진 수중 정자인데, 그 옆에는 1940년 만귀 선생의 7세손 장안섭이 지은 습향각과 송정 읍장이었던 장안섭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 광산 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묵암정사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늘어서 있다.

만귀정에는 많은 시문이 현판으로 걸려 있는데, 그 중 중건기는 1934년 고광선이 썼으며, 중건상량문은 같은 해에 이병수가 썼고, 중수기는 1945년에 후손인 묵암 장안섭이 썼다. 또한 경내에는 1939년에 송광세가 쓴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亭詩社創立記念碑가 세워져 있어, 이곳을 무대로 결성된 만귀정시사의 시작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만귀정 4계의 경관은 정말 대단했다. 봄이면 호반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벚나무가 터뜨린 분홍빛 고운 꽃이 마치 채색구름을 보는 듯하고, 온통 수면을 뒤덮은 연잎을 때리는 소나기 빗소리는 장중한 관현악을 듣는 것 같다. 여름철에는 우거진 수풀이 지어낸 짙은 그늘과 물가를 노랗게 수놓는 창포 꽃의 애련하고 얌전한 자태가 삼복더위를 말끔히 씻어 준다. 가을에는 상사화의 붉은빛이 푸른 호반을 뒤덮고, 겨울에는 밤새 노송가지에 내려앉은 석화가 또한 별유천지다. 이곳 만귀정을 보기 위해 행락 인파가 끊이질 않는 이유다.

신성일, 윤정희, 허장강 등 유명 스타들이 출연했던 영화 꽃상여’, ‘탈선 춘향전도 이곳에서 촬영했다.

현대 시인 김종은 만귀정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대 보는가/ 연못의 맑은 몸/ 하늘 내려와 구름 띄우고/ 갑사댕기 허공의 꼬리 사이로/ 사람 세상 깨우며 흔들리는 그늘을/

그대 듣는가/ 비단처럼 환해지는 집/ 소리 내지 않고도/ 햇빛 푸른 등지느라미로 떠다니는 노래를/

그대 만났는가/ 밤늦게 귀가하는 주인 기다리며/ 세상의 불빛 모아/ 등불 걸어둔 자리/ 낭랑한 음성으로 글 읽는 물소리를.”


만귀정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시사회라는 문인들의 시회詩會가 결성되었는데, 이 시회에는 광주를 중심으로 한 전남도내 일원의 지식인 시인 묵객들이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시회의 이름이 나자 원로시인인 노산 이은상과 초대 조선군사령관인 장곡천호도長谷川好道 일본 육군대장도 특별회원으로 가입했다고 한다.

만귀정시회는 당시 국내에서는 드문 순 한시동인漢詩同人이었다. 회원들이 지은 작품 가운데 묵암 장안섭과 노산 이은상의 두 편을 골라 감상해 보자.


하일단 夏日短(짧은 여름날) / 묵암 장안섭

衫泥踵洗心淸  땀에 밴 적삼과 진흙 묻은 발꿈치는 되레 마음을 씻어 맑게 하고

送暑迎風夏日短  무더위를 보내고 서늘바람 맞으니 긴 여름날이 오히려 짧다.

知足身家老泰平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몸은 늙어서도 마음 태평하고

荷鋤如有陶翁情  쟁기 짊어진 것은 마치 도연명의 고상한 마음과 같네.


춘불로 春不老(봄은 늙지 않아) / 노산 이은상

四面綠陰眼界斜  사방 녹음은 눈가는 데까지 펼쳐있고

濃熏佳氣數三家  짙은 향기 좋은 기운은 서너집을 넘나들고

埰女荷簪春不老  나물 캐는 여인 금비녀에 봄이 늙지 않아서

牧兒萊笛渺無涯  목동의 풀피리 소리 높은 들보에 싱그러운데

樹密止知黃鳥歌  울창한 숲 그 속에서 꾀꼬리 노랫소리 들려오네

回首更看塵像好  고개를 돌려 다시 보니 세상 모습이 좋고

階前芳草織如紗  섬돌 앞 향기로운 풀이 비단 짜놓은 것 같구나.


2경은 풍암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금당산이다. 금당산은 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옥녀봉과 황새봉이 우뚝 솟아 있다. 해발 304m의 나지막한 산으로, 곳곳에 걷기 좋은 산책로가 조성돼 있어 누구나 부담 없이 오를 수 있다. 계절이 만드는 금당산의 사계 풍경도 빼어나지만, 팔각정, 다목적 쉼터, 체육시설 등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어 휴식처로도 안성맞춤이다. 또 수많은 나무와 야생화 등이 자생하고 있고, 산책로 주변에는 나무이름표(소나무 등 64170)를 설치하여 어린 아이들을 위한 자연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매년 새해 첫날이면 해맞이 축제가 열린다.

광주를 둘러싸고 있는 산 중 도심지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산으로 야간조명시설이 잘 되어있어 야간에 올라 광주시내 야경을 감상하는 것도 좋다.

현대 시인 전원범은 금당산을 이렇게 노래한다.


그리운 사람 찾아가듯 금당산에 오르면/ 언제나 팔을 벌려 따뜻이 안아 주는구나/ 여는 것이 문이요 막는 것이 벽이라는 데/ 이리로 오면 막는 것도 여는 것도 없다/ 구름도 풀어 가다가 되돌아오는 자리/ 내 마음 한 가운데에 탑으로 선 산이여/

옥녀봉 황새봉이 머리에 인 저 하늘/ 쓰리고 아픈 삶을 바람으로 씻어주는구나/ 산에서 산을 배우고 나무에서 나무를 배우며/ 나도 금당산처럼 산으로 서고 싶다/ , 여름, 가을, 겨울, 언제나 말이 없이/ 저렇게 온몸으로 서서 다가오는 산이여.”

  

3경은 풍암호수이다. 풍암호수는 하늘이 광주를 보려고 이 호수를 눈동자 삼았다 할 만큼 주변경관이 자연의 삽상한 기운으로 충만한 곳이다. 이웃하여 2002월드컵에서 4강의 신화를 일군 월드컵경기장이 연한 관계로 두 명소의 관광 상승효과는 가히 환상적이다. 풍암호수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6년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위해 축조한 인공호수다. 이후 풍암 택지 개발과 더불어 이용객이 증가함에 따라 1999년부터 국토공원화 시범사업으로 전통정자와 나무다리 등을 설치하여 물과 전통이 어우러지는 광주의 상징적 쉼터로 개발되었다.

풍암호수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주위의 송림과 어우러진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물이 맑고 수심이 깊기 때문에 물에 비치는 풍경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주요시설로는 2.2km의 일주 산책로, 분수와 물면이 리듬을 일으키는 조경 시설, 나무다리, 정자, 야외 공연장을 겸한 음악당이 있다. 주말 밤 트럼펫이나 색소폰 연주회 등은 풍암호수를 더없이 아름답게 만든다. 최근에는 풍암호수의 풍광에 맞춰 진시영 작가의 금속 조형물 ‘Hamony(화합)’이 설치되어 찾는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다.

특히 장미원은 갖가지 장미들의 쟁염爭艶의 현장으로 장미의 향기가 시민들을 유혹하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장미공원에 이어진 소나무 숲 야산은 찔레단지 조성을 구상하기도 하여 이마저 실현되면 관광과 힐링 차원에서 풍암호수의 명성은 더더욱 커질 것이다. 목교 5개소, 한식 정자 1, 연식파고라 1, 그리고 야외 공연장을 겸한 음악당이 있어 주간 시간은 물론이고 환상으로 물들인 밤 시간의 트럼벹이나 섹소폰 연주회 등은 풍암호수를 더없이 아름답게 한다.

4경은 서창들녘 낙조이다. 서창들녘에다 낙조를 붙여 명명한 이곳은 이름만으로도 환상성이 그려지는 명소다. 극락강과 황룡강이 만나면서 형성된 영산강 상류 지역의 서창들녘은 광주에서 가장 너른 들판이다. ‘서창西倉이란 조선시대에 세곡을 수납하는 서쪽의 창고라는 의미다.

서창동 향토마을 일대에서 해 질 무렵 낙조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너른 들판과 지는 해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그야 말로 그림 그 자체다. 특히 들판이 황금빛으로 변하는 가을철에는 황금 들녘과 석양이 지는 노을의 모습이 어우러져 경이로운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매년 7월 백중 무렵이면 서창 만드리 풍년제가 열려 다양한 전통문화와 전통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다.

쓸쓸한 날에는 들판으로 나가자. 아주 쓸쓸한 날엔 들판을 넘어서 강변까지 걸어가 보자.” 공항로를 따라 극락교 아래로 접어들면 어느 새 서창들녘이 다가와 낙조를 배경으로 길손을 부른다.

5경은 용두동 고인돌이다. 용두동은 용의 머리로 이곳 지형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청동기 시대 지배자의 무덤인 고인돌이다. 광주를 대표하는 고인돌 중 하나는 북방식 고인돌이 있는 서구 용두동 학동 마을이다. 광주~송정간 도로의 극락교 앞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서창 동사무소를 지나 대촌 동사무소 쪽으로 가다 고개를 넘으면 바로 왼쪽 송학산(209m) 기슭에 있다.

고인돌은 남북으로 3열로 배치되어 있는데 우측열의 보존 상태가 가장 양호하다. 현재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10기이며, 덮개돌이 없는 굄돌 7개가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이전에는 2~3기 더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용두동 고인돌의 덮개돌은 높이가 대부분 50센티미터 정도이나 입구에 자리 잡은 고인돌은 가로 14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 폭이 50센티미터로 가장 크다. 주변에 채석장이 없는 것으로 보아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인근 송학산에서 채석해 온 것으로 보인다.

용두동 고인돌군의 가장 큰 특징은 북방식(탁자식) 고인돌 1기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3호 고인돌로 불리는 북방식 고인돌은 모두 3기의 굄돌이 있는데, 대부분의 북방식 고인돌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게 변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방식 고인돌을 대표하는 강화도 고인돌과는 달리 남부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북방식 고인돌의 굄돌 높이가 낮아지고 크기도 작아진다.

6경은 양동시장이다. 서구 천변좌로 238에 위치한 양동시장은 1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일대가 휘휘한 갈대밭이었다. 다른 고을의 오일장처럼 양동시장이 서는 날은 장꾼들에게는 일종의 축제였고 시장 한쪽에서 씨름판이 열릴 만큼 흥청거렸다. 주로 농수산물의 집산 매매지였던 양동시장은 호남지역 최대의 재래시장이었고 일찍부터 통샘거리라 불리던 천정泉町에 큰 샘이 있어 일명 샘몰로도 불렸던 곳이다. 서민의 애환과 정서가 살아 숨 쉬는 양동시장은 1910년부터 동구 불로동 광주교 아래 하천변 백사장에서 큰 장이라는 이름으로 3일과 8일장을 열다가, 광주천이 직강화되고 1940년 광주공원의 신사가 국폐신사로 승격되면서 신사주변 정리 차원에서 새 터를 잡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다.

1,800여 평에 634개의 점포로 설립인가를 받아 출발한 후, 1972년 하천복개로 장세가 확장되어 오늘의 상설시장이 되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규모면에서도 호남 최대다. 양동시장에서는 농산물, 축산물, 수산물 등 다양한 품목의 물품을 취급하며, 특히 혼수제품으로 유명하다. 최근에는 양동문화센터가 들어서 문화관광형 시장으로서 발돋움하고 있다.

이곳 지명이 양동良洞이 된 것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기 위해 마을 이름을 바꾸면서부터인데, 여러 부류의 드센 사람들이 어울리는 장터이니 서로에게 어질고 착하게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7경은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이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시 유형문화제 제4)은 서구 쌍촌동에 위치한 고려시대 석굴 불상으로 2미터 크기다. 운천사는 원래 정토사淨土寺로 불렸던 사찰이었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은 넓적한 얼굴에 긴 눈, 우뚝 솟은 코와 두터운 입술, 길게 늘어진 귀 등 특이한 형상의 얼굴에다 굵은 목, 벌어진 어깨, 결가부좌한 자세 등을 취하고 있는데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보물 48)과 흡사하다. 얼굴에 비해 몸체가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어깨와 손이 비례에 맞지 않게 크다. 두 손을 배 위에 모아 약 그릇을 쥔 것을 볼 때 약사여래좌상으로도 보인다. 근엄하고 경직된 얼굴과 딱딱한 형상의 신체, 우견편단을 한 옷 주름의 형식적이고 이완된 처리 등이 기존의 마애불상과 다른 독특함이다.

커다란 자연 암벽에 불상을 양각하고 그 위에 건물을 지어 불당으로 삼았다가, 2002년 대웅전을 새로 지어 실내로 모셨다. 법당의 마애여래좌상은 야외의 불상과는 달리 실제 호흡하는 입체감과 생동감이 느껴져 실내 마애불만의 특별한 생동감을 준다.

운천사마애여래좌상에는 원효대사와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원효대사가 무등산 원효사에 머무르던 어느 날 서쪽 하늘에 서기가 가득해 제자를 보내 살펴보았더니 커다란 바위에서 빛이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 빛을 보고 그곳에 불상을 새긴 것이 바로 운천사마애여래좌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전설과는 달리 불상의 양각 양식을 보면 전형적인 고려 시대의 작품이다. 전설이 잘못되었다거나 억지스럽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한다.

8경은 5.18 기념공원이다. 5.18기념공원은 5.18민주화운동의 참뜻을 올바르게 계승하기 위해 조성된 시민 휴식공간이다. 상무대 이전 부지 일부를 시민공원으로 무상양여 받아 조성하였는데, 넓이는 204,985.

5.18기념공원에는 5.18자료실과 공연.행사시설을 갖춘 5.18기념문화관, 시민군 조각상.추모 공간과 5.18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원형 분수공간을 갖춘 대동광장이 있다. 5.18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재판을 받고 형을 살았던 군법정.영창은 망월동 5.18묘지와 연계, 민주성지 순례코스로 운영되고 있다.

5.18민주화 운동 학생기념탑과 광주학생교육문화회관도 있으며, 공원 정상에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3층 누각인 오월루가 있다. 그밖에 사찰 무각사와 잔디광장, 산책로 등이 있다. 오월루에서 바라보는 상무지구의 야경이 장관이다.


서구지역민의 삶


서구는 영산강변을 제외하면 큰 강이 없다. 광주천, 극락천(현재는 복개) 등 소하천이 흐르기는 했지만, 수량이 많지 않았고 그마저 변덕이 심했다. 그래서 늘 물이 귀했다. 이는 서구를 관통하는 하천들의 길이가 워낙 짧았고, 주변에 높다란 산이 적어 물을 품을 만한 지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열악한 물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도처에 수리시설을 만들었는데, 대표적인 수리시설이 운천저수지였다. 흔히 운천저수지는 일제강점기 말엽인 1944년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원래 이 저수지는 조선시대에 조성되어 내정제內丁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는 당시 이 저수지가 내정면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데서 비롯된 이름으로 보인다. 1920년대에 나온 <광주읍지>에는 하촌제荷村堤로 나오는데, 이는 저수지 건너편 즉 훗날 상무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마을 이름인 하촌에서 딴 것이었다.

이밖에도 서구 지역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염주제念珠堤는 염주마을에 있었던 저수지였다. 1990년대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었지만, 현재는 매립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구 매월동의 전평제前坪堤16세기에 살았던 회재 박광옥이 축조한 것인데,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남아있다. 몇 해 전 수변공원으로 단장되었다.

또한 개천을 막아 관개용수를 담았던 보도 있었다. 보성군수를 지낸 정화가 쌓았다고 해서 보성보寶城洑라 일컬어지던 보가 돌고개 남서쪽에 있었다. 이제백이 쌓았다는 안보雁洑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위치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저수지와 보 같은 수리시설에도 불구하고 심한 가뭄이 들면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가만히 손을 놓고 기다릴 수 없어 사람들은 기우제를 지냈다. 예전 기우제는 무우제舞雩祭 또는 무제舞祭라고도 불렀다. 무우제와 무제는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물을 기원하는 제사 즉 물제에서 받침인 'ㄹ'이 탈락해 무제로 변했고, 무제가 다시 무우제로 변형됐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원래부터 기우제의 또 다른 이름이 무우제 또는 무제였고, 우제雩祭라고도 했다.

중앙공원의 짚봉산, 벽진동의 사월산, 양동초등학교 뒤편의 양동 제봉산 등이 기우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산 이름에서도 기우제 장소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짚봉산이나 제봉산은 제사+봉우리+산의 의미가 함축된 젯봉산, 짓봉산에서 온 지명이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서구의 자연은 오늘과 매우 달랐다. 조선시대에 광주의 문화와 생활을 기록한 <광주읍지>에는 당차면 주민들로 하여금 광주 관아에서 소용되는 시탄柴炭, 즉 땔나무와 숯을 마련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광주의 옛 지명 당차면은 없다. 지금의 금호동 일대를 일컫던 옛 지명 당부면當夫面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 금호동은 울창한 숲을 예상할 만큼 큰 산은 없지만, 광주 관아의 땔나무와 숯을 마련했다는 기록은 이 일대 산지의 수목이 울창했음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엽에 이르면 자연환경도 많이 바뀐다. 특히 허허벌판에 가까운 강변지역 사람들은 목재를 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덕산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던 유덕동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도 주변에 변변한 산이 없어 멀리 무등산까지 가서 땔나무를 조달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은 일부 마을을 제외하고는 서구지역의 전반적인 모습이었다.

본격적인 택지 개발 직전인 1990년대 중반 금호 지구에서도 목재 수급의 어려움은 간접적으로 파악된다, 당시 금호동 일대에는 상당수의 전통적인 민가들이 남아 있었는데, 대개 정면 3~4칸의 소박한 집들이었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간격도 넓지 않았고, 기둥도 두께 15cm를 넘지 않았다. 이는 주변에서 튼실한 목재를 구하기 어려웠던 사정 때문으로 추정된다.

서구지역 내 농민들의 경제적 기반은 꽤 큰 차이가 있었다. 금호동 금부마을의 경우 전체 주민들이 소유한 농경지 7만여 평은 대부분 논이었다. 인근 심곡마을은 전체 농경지 8만여 평 가운데 논은 3천여 평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밭이었다. 농경지도 가구당 3천 평을 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생활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주로 짓는 농작물은 벼와 보리였는데 수리시설이 부족하여 소출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당시 1마지기 당(200평 기준) 3섬 정도를 수확했는데, 이는 다른 지역에 비해 조금 적은 양이었다. 부족한 농사를 보충하기 위해 주민들은 목화와 고구마 농사를 지었고, 무명베를 짜서 양동시장에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벼농사는 봄에 논갈이로 시작했는데, 1970년대까지는 쟁기와 경운기를 병용하다가, 1980년대 후반에는 트랙터를 사용하는 농가가 늘어났다. 농업용 기계는 많지 않았다. 100여 호가 사는 심곡마을의 경우 1990년대에 경운기 2, 트랙터 2대가 고작이었다. 대다수 농가들은 농업용 기계를 소유한 농가로부터 마지기당 5만원을 주고 빌려 써야 했다.

논갈이가 끝나면 거름을 넣었다. 사육하는 가축이 많지 않아 두엄의 사용은 제한적이었고, 대부분 화학비료를 사용했다.

못자리 설치는 4월 중순부터 시작했는데, 볍씨는 마지기당 3되 반 내지 4되를 사용했다. 통일벼 재배 이전에는 노지에 못자리를 만들었으나, 통일벼를 재배한 이후에는 보온못자리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금부마을에서는 못자리에 볍씨를 뿌릴 때 찰밥을 지어 먹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는 그 해 농사가 찰지게 잘 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모내기는 525일경까지 마쳤는데, 기계식 이앙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금부마을과 심곡마을에서는 일손이 부족하면 이웃 마을 사람들과 품앗이를 하기도 했다. 모내기를 마치고 수확 전까지는 보통 세 차례의 김매기를 했는데, 1990년 대 쯤에는 손으로 제초하는 대신 농약을 사용하는 집이 많아졌다고 한다.

추수는 10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했다. 추수 전에 논물을 빼고 베어낸 나락 다발은 논바닥에 깔아 말리고, 3일 쯤 지나 뒤집었다. 이렇게 나락이 마르면 한 뭇씩 묶어 쌓아 집으로 가져와 탈곡을 했다. 트랙터가 등장한 뒤부터는 바로 논에서 탈곡을 하여 알곡만 집으로 가져왔다.

주로 쌀과 보리 위주의 농사를 짓는 동네에서는, 겨울철은 가장 한가로운 절기였다. 1970년대까지는 빠듯한 농사 살림을 보충하기 위해 가마니를 짜거나 새끼를 꽈서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이러한 삶은 1990년대 중반 택지개발이 되면서 아릿한 기억에만 남게 됐다. 뿐만 아니라 도시화가 진전되면서 농경지들은 그 형체를 알 수 없이 사라져갔고, 옛 토박이 마을마저도 아파트 숲에 갇혀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Tag #서구해오라기# 서구오경# 서구팔경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저자(연도) 제목 발행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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