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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에서 소개하는 광주의 역사, 문화, 자연, 인물의 이야기 입니다.

광주광역시서구문화원에서는 광주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문화 이야기를 발굴 수집하여 각 분야별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광주의 3.1운동

光州의 3·1運動 


광주지방에는 개화기 때부터 예수교가 들어와 있었고, 1903(光武 7)년에는 금동(錦洞)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08(隆熙 2)년에는 숭일학교가 개교되었다. 뒤이어 수피아여학교와 제중(濟衆)의원 등 교회사회기관의 설립으로, 사회발전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문화의 영향으로 3·1운동이 일어날 무렵에는 서울과 일본 등지로 유학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이들 유학생들을 통하여 세계정세와 독립운동의 동향이 재빨리 전파되기도 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이미 동경 유학생 정광호(鄭光好)에 의하여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 명의의 2·8선언서가 광주청년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최한영(崔漢泳) 김복수(金福洙) 등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이를 다수 등사하기도 하였다.

또 3·1운동 직전에는 서울의 예수교 인사들과 최흥종(崔興琮) 김철(金鐵)의 사이에 3·1운동에 관한 연락이 있기도 했다. 국장(國葬)에 참가하기 위하여 상경했던 김철과 서울 유학생 최정두(崔正斗) 등은 3월 5일 광주로 돌아와서 지체없이 3·1만세운동에 대한 계획과 준비를 진행하였다.

5일 밤 양림동(楊林洞)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김강(金剛, 숭일학교 교사) 최병준(崔炳俊) 황상호(黃尙鎬) 강석봉(姜錫奉) 한길상(韓吉祥) 최한영(崔漢泳) 최영균(崔瑛均) 김용규(金容圭) 서정희(徐廷禧) 김태열(金泰烈) 홍승애(洪承愛) 등이 함께 회합을 갖고, 3월 8일 큰장날을 기하여 학생 시민 총동원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키로 하였으며, 아래와 같이 책임을 분담했다.

•선언서 및 태극기 준비 : 최한영
•일반시민동원 : 서정희
•예수교회동원 : 김강
•수피아 연결 학생동원 : 홍승애
•숭일학교 학생동원 : 최병준
•기타학교 학생동원 : 김태열, 최영균, 김용규
•자금 담당 : 김기조(金基造)

최한영은 자기 집에서 최정두 한길상 김용규 범윤두(范潤斗) 등과 협력하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및 격문 그리고 애국 독립운동가 등을 밤낮으로 인쇄하였고, 다른 이들도 임무를 수행하기에 분주하였다. 그러나 준비와 연락관계로 거사일시는 3월 10일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

10일 오후 3시경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에는 약 1천명의 인파가 몰려 들었다. 양림동쪽에서는 예수교인과 숭일 수피아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일반시민은 서문통(西門通, 지금의 우체국 앞길에서 황금동으로 가는 길)으로, 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 지금의 우체국 옆 충장로 2가에서 파출소까지)을 거쳐 운집했다.

또 지산면(芝山面) 일곡리(日谷里)에 사는 이주상(李周祥)은 광주의 주도 인물들과는 아무런 관련없이, 두 아들 윤호(允鎬) 창호(昌鎬)를 선두에 세운 다음 수백명의 근처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서 대거 합세했다. 이들은 일곡과 생용 등지에 사는 이씨(李氏)와 범씨(范氏) 및 노씨(盧氏)들이었다.

이렇게 시위군중이 모여들자 숭일 수피아 학생들은 선언문과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지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군중을 인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니, 장꾼들이 모두 호응하여 온 시장은 만세 소리로 떠나갈 듯하였다.

최한영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얼떨결에 됫박을 든 채 행렬에 따라나와 만세를 부르는 쌀장수도 있었고, 평소 친일파라고 지목되던 사람들도 참가했으며, 걸인들까지도 기뻐 날뛰더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무단통치가 얼마나 가혹했으며, 우리 민족이 얼마나 독립을 갈망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시위행렬은 서문(西門)을 지나 우체국 앞을 돌아 충장로로 내려가서, 지금의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금남로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구법원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 앞으로 몰려 들었다. 이러한 시위행렬에 일본경찰은 총을 멘 채 그저 따라만 다닐 뿐, 감히 손을 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군중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무장 기마헌병대가 출동하여 주동인사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에 흥분한 군중들은, "우리가 자진해서 경찰서로 가겠다"고 외치며 경찰서 앞마당으로 몰려들어 가면서 더욱 맹렬하게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이때부터 경찰과 헌병은 발악적으로 대들었고, 총검을 휘두르며 무차별 구타와 폭행을 자행하였다. 노인이나 어린학생들까지 마구 때리고 치고 했다. 이리하여 삽시간에 경찰서 앞마당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고, 그 자리에서 구금된 사람이 100여명이었다.

남은 군중들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우리도 잡아 가두어라, 잡아가둔 동지를 내놓아라"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몸은 지치고 일경(日警)의 폭압은 가중되어, 땅거미가 질 무렵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일제는 헌병과 경찰 뿐아니라 소방서원까지 동원하여 비무장 비폭력의 평화적인 시위에 폭행을 가하였다.

이 운동은 다음날인 11日에도 계속되었다. 이날 오후 5시쯤 숭일학생과 농업학교 학생이 선두가 되어, 300명가량의 군중과 대열을 지어 만세를 부르며 시내를 돌면서 시위를 했다. 그리고 13일 큰 장날은 장꾼들을 포함한 약 1,000여명의 군중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고 그중 일부는 시위행진도 하였다.

그러나 미리부터 이에 대비하여 배치되었던 헌병·경찰에 의하여, 11일에는 23명이 검거되었고 13일에도 20명이 체포되었다. 이 운동으로 검속당한 애국지사들은 비인도적인 학대와 고문을 당하고 재판에 회부되었다.

당시의 법적 처벌의 규정을 보면, 출판법 위반이 징역 3년, 보안법 위반이 징역 2년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광주 감옥에 수감 중이던 10여명은, 보안법 위반으로만 형을 받기 위하여 독립선언서 등은 광주에서 인쇄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모두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의 인쇄물용지는 시내 일본인 상점에서만 팔던 반지(半紙)를 여러 상점으로부터 고루 나누어 구입하여 사용하였던 바, 불과 4일동안에 약 10만장을 사왔기 때문에 시내 전일본인(全日本人) 상점의 종이를 모두 거두어 온 셈이 되어 들통이 나고 말았다.

거의 반년이 지난 뒤 공판(公判)이 시작되었는데, 일본인 검사 堀江이 논고를 통하여, "국헌(國憲)을 교란시킨 죄는 사형에 처해 마땅하나 관대히 다스리겠다"고 하자, 광주만세운동의 책임자였던 김철(金鐵)은, "이번 운동의 책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른 학생들은 그냥 훈방하라. 그리고 내 이름은 김철이다. 쇠는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든지 해보라"고 하며, 이번 광주운동은 전적으로 자기 한사람에게만 죄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하였다.

김철(金鐵) 서정희(徐廷禧) 이달근(李達根) 변순기(邊舜基) 정두범(鄭斗凡) 송기호(宋琪浩) 김성민(金聖敏) 등은 서울의 고등법원에까지 상고 투쟁했지만, 끝내 기각당하고 옥살이를 했다. 이 중 변순기는 서울의 고등 법원에서 도도한 열변을 토하며,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고 힐난했다. 이 당시 광주 지방법원에서 언도된 형량은 다음과 같다.

징역 8년  김화순(金華順), 윤순임(尹順任), 이옥희(李玉姬), 박영자(朴永子), 최경동(崔敬東) 
징역 6년  이라주(李羅州), 이태옥(李泰玉), 김덕순(金德順) 
징역 3년  김철, 정광호, 범윤두, 김용규, 한길상, 최정두, 박일구, 김윤호, 이창호, 김태열, 김범수, 강석봉, 최병준, 김강, 최한영 
징역 2년  김정수, 송기호, 황상호, 정두범, 노천묵, 김철주, 송흥진, 조보근 
징역 1년  박애순(朴愛順), 진신애(陳新愛), 홍승애(洪承愛), 송광춘(宋光春, 대구감옥 옥사) 

이들은 전원이 대구 복심법원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서울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모두가 옥고를 겪었다.

3월 10일의 광주 독립만세운동이 있은 뒤, 양림동에 있는 기독병원에서 회계원으로 근무하던 황상호(黃尙鎬)는, 3·1운동에 참가한 바도 있었지만, 이 독립운동을 영속화시키기 위하여 민중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조선독립광주신문」을 발행하였다.

이는 서울에서 윤익선(尹益善)의 명의로 발행되었던 「조선독립신문」을 본따 착상한 것으로, 같은 병원에서 일하고 있던 약제사인 홍덕주(洪德周) 장호조(張鎬祚) 등과 상의하여, 병원에서 쓰던 등사판을 이용 황송우(黃松友, 황상호의 가명)사장 명의로 제4호까지 발행하였다.

이 「조선독립광주신문」 제1호는 3월 13일에 300부가 인쇄되었는데, 홍덕주와 장호조 등에 의하여 광주 큰 장터 및 시민들에게 배부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15일에는 제 2호가 발행 배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 4호까지 발행하다가 일경에 적발되어 체포되었는데, 광주 지방법원에서 황상호는 징역 3년을, 그리고 홍덕주와 장호조는 각각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한편 4월 8일에는 광주보통학교 4년생의 만세운동계획이 있었다. 즉 동교 4학년 급장인 최영섭(崔泳燮)이 유봉식(柳鳳植) 등 청년동지들과 연락하여, 4월 8일 오전 10시를 기해 자혜의원(慈惠醫院, 현 전대부속병원)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4월 7일에 4학년생들을 운동장에 모이게 한 다음, 독립운동 계획을 알리면서 이튿날 모두 학교를 쉰 채 자혜의원 앞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8일에는 4학년생이 전부 휴교한 가운데 최종하(崔鍾夏) 김봉수(金鳳洙) 김길선(金吉善) 등 생도들이 예정대로 지정 장소에 집합하였는데, 일본경찰이 이를 미리 알고 달려와 강제 해산시키고 최영섭 등을 검속하였다.

이를 전후로 하여 비아(飛鴉) 하남(河南) 임곡(林谷) 등 여러 곳에서도 혹은 산상(山上)에서, 혹은 들판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났다. 그리고 또한 앞서 3 1운동을 이끌었던 범윤두는, 다시 서방면(瑞方面)의 유지 양해문(梁海文) 및 범희대(范熙大) 범윤곤(范潤坤) 등과 연락하면서 대규모의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지만,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불발에 그쳤다.

이렇게 대규모적인 시위운동이 불가능하게 되자, 뜻있는 인사들은 다시 개별적으로 상해임시정부 등 해외기관과 연락하면서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효천면(孝泉面)의 유한선(劉漢先)과 본촌면(本村面)의 이주상(李周庠) 및 비아면(飛鴉面)의 허원삼(許元三) 등은 나주군의 최종렬(崔鍾烈) 김양숙(金良淑) 등과 연락해 가며, 그 해 6월 상해임시정부에 협조할 목적으로 국민회(國民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본촌면(本村面)의 이동석(李東石) 등 수십명을 회원으로 모집하여 각 회원에게 1원 내지 4원씩의 입회금을 받아 비밀활동을 해오던 중, 일경에 적발되어 대구 복심법원에서 6개월 내지 2년의 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또한 서창면(西倉面)의 김홍두(金弘斗)는 이듬해 7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하고 돌아온 다음 전라도의 통신기반 설치를 위하여 활동하였으며, 본촌면의 노석정(盧錫正) 노석중(盧錫中) 김아래(金雅萊) 조병철(曺乘喆) 그리고 효천면의 김정련(金正連) 윤영기(尹永淇) 및 임곡면의 양인묵(梁仁默) 등은 이듬해 7월부터 화순군의 노형규(盧衡奎) 조병렬(曺秉烈) 및 곡성군의 신유선(辛有善) 등과 함께 서울에 있는 신덕영(申德永) 최양옥(崔養玉) 등과 연락해 가면서 광주 화순 곡성 담양 보성 등지에서 임시정부의 자금모금을 위한 활동을 하다가 검거되어 1년 내지 5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자료: 전라남도이순신연구소, http://cafe.daum.net/chonnamtour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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