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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령-형조좌랑증좌찬성충장김공신도비명

광주시 북구 송강로 13(금곡동)

2004년

증 좌찬성 충장 김공 신도비(贈 左贊成 忠壯 金公 神道碑)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 선조(宣祖)께서 국운을 어루만지신 지 20여 년 만에 섬나라 왜적이 크게 방자하여 우리 8도의 백성(生靈)들을 짓밟자, 당시의 의사들이 갑옷 입은 말을 타고서 칼날과 살촉을 뚫고 중흥의 공적을 협찬 선양하여 공적이 큰 사람은 기상(旗常)에 표창되고 공적이 적은 사람은 봉록(俸祿)과 관작(官爵)으로 보답하여 수두룩하게 이루 다 셀 수 없다.

그런데 고() 충용장군으로서 의정부 좌찬성을 추증한 김 충장공만은 의병을 일으킨 지 4년 되도록 한 번 명령한 포상도 받지 못하고 또 터무니없이 모함을 당하여 죽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2백년이 되도록 당시를 거슬러 올라가 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탄식하면서 팔뚝을 움켜잡고 맨 먼저 김 장군을 칭찬 이야기하여 비록 아낙네와 어린이, 마부와 가마꾼들일지리도 김 장군이 비로소 의병을 일으켰을 적에 분조(광해군)가 명령한 익호장군의 칭호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익호장군이라고 부르다가 시호(諡號)를 충장(忠壯)이라고 내려줌에 이르러서는 사대부들이 모두 충장공이라고 부른다.

공의 휘()는 덕령, 자는 경수인데 광주 석저촌 사람이다. 증조의 휘는 후()인데 호조정랑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윤효(允孝)인데 선무랑이며, 아버지의 휘는 붕변(鵬變)인데 습독(習讀)이요. 어머니는 남평반씨인데 직장 계종(季宗)의 딸이다. 아들 셋을 두었는데 공이 그 둘째이다. 공은 대대로 예부터 유가(儒家)로서 일찍이 문장 명성을 날리어 17세에 향해(鄕解, 초시)에 합격하였다. 얼마 후에 또 우계 성 선생(성혼)의 문하에서 유학하여 유자의 학문을 강문(講問)하여 비록 뛰어나게 큰 뜻을 지녔으나 사람들이 아는 이가 없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의 형으로 지평에 추증된 덕홍이 앞장서 의병을 일으키자 공도 역시 종군하였는데 지평공이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모두 죽으면 늙으신 어머님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하고서, 마침내 공을 보내어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도록 하고, 홀로 고공 경명과 더불어 진군하여 금산에서 전투하다가 죽었다.

이듬해 계사년에 왜적들이 서울에서 퇴각하였으나 그래도 영남에 웅거하면서 날마다 병력을 증강하여 재차 침략할 것을 도모하는데도 관군 및 여러 의병들이 대부분 왜적이 먼지만 바라보고도 달아나 피해 버렸다. 이때에 공은 어머니 반부인(潘夫人)의 상사(喪事)를 당하여 이미 장사를 지냈었다. 관찰사 및 이웃 고을의 수령들이 비로소 차츰 공의 명성을 듣고 서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충정공 이귀(李貴)가 당시에 장성현감이 되어 공이 대장(大將) 인재이다.고 말하니, 이에 특별히 형조좌랑 벼슬을 제수하였다.

공의 자부(姊夫, 자형) 김응회(金應會)는 호걸스러운 선비였다. 대의로써 공을 개도(開導)하고, 조정의 교지가 또 마침 이르니, 공은 이에 묵최(墨縗, 검은 상복)로써 의병을 일으켜 전답과 집을 팔아서 무기를 마련하고 이웃 고을에 격문을 전달하여 용감하게 싸울 병사 5천여 명을 얻었다. 그러자 도원수 권율은 그 군대를 초승군(超乘軍)이라고 표지해 주고, 임금이 또 사자(使者)를 보내 군호를 충용군(忠勇軍)이라고 내려주셨는데, 때는 갑오년 정월이었다.

공은 마침내 병사들을 이끌고 영남 지역에 당도하여 격문을 돌려 곧바로 대판성(大坂城)을 쳐들어가겠다.하였는데 대판성은 왜적의 수도이다. 왜장 청정(淸正)이 몰래 화가를 보내 공의 용모를 그려 오도록 하여 그 용모를 보고 끌끌 혀를 차면서 말하기를, 참 장군이다.라고 하고서, 이에 여러 주둔한 병사들을 철수시켜서 통합하여 큰 진지를 만들어 대비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여러 장수와 병사들이 성벽과 보루가 서로 바라보이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오직 곽재우 장군만이 충성과 지략으로써 특별히 드러났었다. 공은 편지를 보내 힘을 합쳐 왜적들을 섬멸하자고 약속하고서 마침내 함께 정암(鼎巖) 나루터에 진을 쳤다. 왜적이 밤중에 시내를 건너와 장차 군영을 습격하려고 하자, 공은 복병을 설치하였다가 습격하여 그 왜적들을 크게 무찌르니 왜적들이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공이 진중에 있으면서 일찍이 울부짖는 두 마리 호랑이를 생포하여 왜적들에게 보여주니, 왜적들은 더욱 떨고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면서 익호장군을 피하였다.

공은 진주에서 군대를 주둔시켰는데, 진주가 막 왜적들의 유린한 바가 되어 해골(骸骨)들이 언덕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나 공이 병사를 주둔시킨 뒤로는 한 사람이나 한 기마병도 감히 진주 지역에 접근한 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왜적을 참수하고 노획한 공은 없어도 영남과 호남의 사이에 백성들이 비로소 안심하고 호미와 쟁기를 잡고 농사지어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니면서 품팔이하던 사람들이 차츰 돌아오고, 군대도 역시 남은 군량이 있었다. 그런데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이에 말하기를, 공이 성루를 대치한 지 3년 되도록 지금까지 촌공(寸功)도 없었다.고 하였으니, ! 어찌 모함이 아니겠는가.

공은 또 일찍이 곽 장군과 더불어 바다에 배를 타고 동래 앞바다로 향하여 왜적의 성루를 공격하니, 왜적들이 필사적으로 부르짖으며 군영을 닫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때에 공이 조정의 명령을 받아 제도의 의병들을 모두 통솔하게 되니,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쳐 병사들이 모두 좋아서 뛰며 한 번 분전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천조(天朝, 명나라)가 이미 전쟁을 싫어하여 봉공(封貢)을 논의하고, 조정에서도 역시 여러 장수들에게 경계하여 왜적들과 교전하지 말도록 하여 공이 여러 차례 싸울 것을 주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아니하니, 공은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고서 마침내 감상(感傷) 분개하여 술을 흠뻑 마시고 또 병마저 생겼다.

공은 군중에 있을 적에 군리(軍吏)로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참수하였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가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마침내 체포되어 국문 당하다가, 당시의 재상인 정공 탁()이 힘껏 구제함에 힘입어 석방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아니하여 호서(충청도)의 역적 이몽학이 반역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공과 곽장군 및 홍계남, 고언백, 최담령이 모두 자기와 내통하여 공모하였다.고 하였는데, 계남언백도 역시 의병의 여러 장수로서 왜적들이 꺼리는 바가 된 사람들이며 담령은 공의 휘하 병사로서 의용(義勇)이 있었던 사람이다.

공은 바야흐로 병사들을 이끌고 몽학을 토벌하려다가 도중에 역적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본진으로 돌아갔었다. 그런데 조정이 마침내 유언비어를 받아들여 공을 체포하니, 공은 강개하게 국문을 받으면서 말씨가 태연자약하게 말하기를, 신이 친상 중에 있다가 전쟁 일로 종사하였지만, 또 조그마한 공도 이루지 못하여 충성과 효도가 모두 무너졌으나, 죄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으로 애석할 것이 없습니다. 다만 원컨대 신의 연고 때문에 죄 없는 최담령을 죽이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담령은 마침내 죽임을 모면하였다.

이때에 여러 장수들 중에 이따금 공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충청병사 이시언은 더욱 심하였다. 공이 체포된 것은 시언의 밀계 때문이었다. 충숙공 서성이 당시에 승지가 되어 공이 반역하지 않았다고 힘껏 보호하고, 재상인 정탁과 김응남도 모두 공이 죄가 없다고 극도로 말하였지만, 조정의 의론이 넌지시 이시언의 말을 주장한 사람이 있어 공은 마침내 병신년 8월에 가혹한 형벌을 받아 옥중에서 돌아갔다.

공은 이미 성 선생의 문하에 들어갔었고, 문청공 정철은 또 공의 고을 사람이었다. 성 선생과 정 공은 모두 바야흐로 동인의 당 사람들이 속 시원하게 죽이려고 하는 대상이 되었고, 공의 위력 있는 명성이 또 독특하게 여러 장수들의 위에 솟아났었다. 때문에 공과 함께 체포된 사람들이 많았지만, 공만 홀로 죽임을 모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서는 여러 의사들이 모두 해산되어 싸울 마음이 없었다.

공이 돌아가자 왜적의 진중에서는 술을 따라 마시면서 서로 경축하며 말하기를, 김 모가 죽었으니 양호(전라도와 충청도)는 다시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듬해 정유년에 마침내 대규모로 군대를 일으켜 남원을 함락시키고, 승승장구하여 경기 지방을 침범하였으나, 양호의 사이에서는 감히 한 화살이라도 쏘아 서로 방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천조가 대규모로 군사를 파견하여 그 왜적들을 꺾지 않았더라면 국가의 일을 거의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 참소하는 사람의 입이 사람의 나라에 전화(戰禍)를 끼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참혹하구나!

공은 날쌘 용력이 무리에서 뛰어나 눈이 10리 밖의 물체도 구별할 수 있었다. 일찍이 길이가 두어 길이나 되는 큰 칼을 가지고 말을 채찍질하며 산비탈을 달리면서 칼을 휘두르며 오르내림에 숲의 나무들이 모두 쓰러졌으나 평소에 항상 깊이 스스로 숨기었다.

그는 어버이를 섬김에 있어서 용모가 화순(和順)하여 어린 아이의 얼굴빛을 지녔다. 반부인이 병에 걸려 위태로움에 다다르자, 유능한 명의를 찾아 하룻밤에 2백리를 말로 달려 진주에 당도하여서는 뜰아래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굳이 왕진(往診)해 달라고 요청하고, 따라서 그 명의를 위하여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집에 당도하니 겨우 반나절이 걸렸었다. 곧바로 약을 올리니 병이 나았었다.

공의 형이 이미 의병을 일으켜 국난에 순절하였고, 공의 아우 덕보도 역시 일찍이 군중에서 공을 따라다니다가 얼마 뒤에 공을 여의고 서석산 밑에 은거하면서, 스스로 풍암거사라고 호를 지어 부르면서, 정홍명, 안방준과 더불어 벗을 삼았었다. 정묘난에는 안 공에게 편지를 보내 충의로써 서로 격려하였었는데, 그 수적(手蹟)이 지금까지 아직도 전하면서 격앙(激昻) 감개(感慨)하여 크게 공의 유풍(儒風)이 있다. 공의 배위는 흥양이씨인데, 공이 돌아간 이듬해에 왜적들을 꾸짖으며 추월산 안에서 순절하였다.

공이 돌아간 뒤로 65년 만에야 우리 현묘(顯廟, 현종)가 비로소 명령하여 공의 원통함을 씻어준 뒤에 여러 차례 벼슬을 추증하여 병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우리 정묘(正廟, 정조)는 또 명령하여 시호를 내려주고 좌찬성을 추증하면서 친히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하고, 또 공이 살았던 곳을 충효리라고 명명하고서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그 비석에 글을 새겨 표창하도록 하였다.

이 부인은 공을 따라 정경부인을 추증하고, 공의 백형(伯兄)은 특은으로써 지평을 추증하였다. 풍암공은 일찍이 유일(遺逸)로써 천거되어 벼슬을 제수하여 별제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이르러 역시 특별히 집의를 추증하였다.

공은 후사가 없었고, 풍암공만이 유독 한 아들을 두었는데, 말하자면 거()로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풍암공의 명령으로 공의 제사를 겸하여 받들었다. 정묘 때에는 또 조정의 명령으로써 방손 한 사람을 선택하여 공의 제사를 받들어 대대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는데 지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진사의 7세손 홍기(洪基)이다.

진사는 폐조(광해군) 시대를 당하여 상소를 올려 흉악한 무리들을 배척하였고, 그의 아들 경휘(慶輝)는 정공 홍명의 문하에서 종유(從遊)하여 문행으로써 명성이 드러나 모두 공의 집안의 자손들이 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었다.

공의 장지는 광주의 이치에 있으면서 유좌(酉坐)로 봉분돼 있는데, 지평공과 풍암공의 묘소도 모두 한 산등성이에 가까이 있다. 공이 이미 증직이 1품에 이르렀으니 전식(典式)에 있어서 마땅히 신도(神道)에 비석을 세워야 하겠기에 마침내 글을 새기어 사실을 기재하고 거기에 명을 붙인다. 명은 다음과 같다.


하늘의 영웅 인물을 탄강시킴에

광주 무등산의 영기를 배태(胚胎)하였네.

충성과 용맹이 근간이며 울타리였고

문과 무를 두루 겸비하였네.

시와 예를 차근차근 배워 집안에서 행실을 닦다가

휙 옷소매를 떨치고 일어났는데 국란을 당한 임진왜란이었네.

우르쾅하는 우레 번쩍하는 번개이며

으르렁거리는 호랑이요 사나운 송골매였네.

왜적들이 위풍을 바라보고

고슴도치처럼 움츠러들고 버섯처럼 집결하였네.

일찍이 정암에서 싸웠는데

강물이 몹시도 붉었네.

수많은 위병들을 쉽게 지휘하여

3년 동안 호남과 영남이 몹시 편안하게 농사를 지었네.

국가의 방패와 성이었으며 보루였으니

공훈이 나보다 더 큰 사람이 없었네.

그런데 춘산의 불꽃을 그 누가 불어 일으켰는가.

저 지나친 붕당이 왜적과 한 패거리가 되었네.

그러나 천도의 공정함은 사람에게 있어서 어긋남이 없어

공의 원통함은 일시적이었고 신설(伸雪)됨은 영원하네.

밝디 밝은 성스러운 임금님이

해와 달처럼 나란히 빛나

억울한 것을 밝히고 공적을 선양하니

화려한 관복이 빛나구나.

이치의 신비탈 남쪽에

충신이 짙푸른 피가 황천에 묻혀 있네.

굳센 형과 명철한 아우가 좌우에 연이어 잠들어 있네.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 칭송되기에

이 견고한 빗돌에 새기노라.

금궤(金櫃) 속의 역사책에도 기록되어

아울러 영원히 전해지리.

-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풍산 홍석주 지음

(추기)

! 충장 김공은 우리 해동(우리나라)의 명장이다. 그 귀신같은 무용(武勇)과 책략을 미처 조금도 펴보지도 못하고 무옥에서 원통하게 돌아가 후사(後嗣)가 없었다.

그의 아우 풍암공 덕보가 그의 아들 풍계공 거에게 유명(遺命)하여 그로 하여금 공의 제사를 겸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그 뒤에 차 증손인 이촌공 수신(守信)에 이르러서는 권도(權道)로 공의 사당을 받들고 있었는데 때마침 한포재(寒圃齋) 이공 건명(健命)이 이조판서가 되어 숙종 38년 임진 1127일 병오 도목정(都目政, 6월과 12월에 시행하던 인사행정을 이르는 말)에 이촌공을 채용하여 벼슬이 별검에 이르렀다.

이때에 서명우가 장령이 되어 상소를 올려 한포재를 탄핵하기를 이조판서로 들어온 사람이 자기의 당 사람은 심어주고 다른 당 사람은 배척한 것이 아니라면 대체적으로 사사로움을 따라 공도(公道)를 멸시하여 순전히 한쪽 사람만 채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한포재가 상소를 올려 모두 변론하기를, 충용장 김덕령은 바로 임진왜란에 창의하였던 사람인데, 화를 당하여 원통하게 죽어 사적이 더욱 드러났습니다. 신이 이조에 들어가서는 그의 봉사손을 채용하였습니다.라고 하고 나의 족선조(族先祖)인 대사간 수촌공 방()도 역시 상소를 올려 강력히 변론하기를 의병장 김덕령을 봉사한 사람이 정주(政注, 관원을 임명하는 인사행정)에 채용된 것이 뭐 의심할 것이 있기에 교묘하게 취모멱자(吹毛覓疵, 털 사이를 불어가면서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 남의 결점을 억지로 낱낱이 찾아내는 것을 말함)하였으니 다른 것은 어찌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숙종께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정중한 비답을 내려주어 이르기를 조목조목 논박한 것이 명쾌하다고 이를 만하다. 서명우(徐命遇)는 관직을 삭탈하고 축출하면 충분히 죄가 징계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그 뒤에 보첩을 편수할 적에 노사(蘆沙), 간재(艮齋), 연재(淵齋) 삼현들에게 예를 질문하여 별검공 이하 봉사 자손들을 2세를 띄워서 충장공 각하(脚下)에 기록하였는데 이 홍상공이 지은 비문 중에 이른바 지금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은 홍기(洪基)이다.고 한 것은 바로 별검공의 5개 주손(冑孫)이다.

지금 이 봉사 전말이 원비 중에 누락되었다. 때문에 장차 신도비를 세우려고 할 적에 그 후손 충호(忠浩)가 그 사실들을 숙종대왕실록 및 충장공유사와 한포재, 수촌 여러 문집에서 찾아 모아 실기를 지어가지고 나를 영주(寧州, 천안의 옛이름)의 태화산(泰華山) 기슭으로 찾아와 추기의 글을 지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비록 그 적합한 사람은 아니지만 돌아보건대 선대의 정의(情誼)에 있어서 그 아름다운 일과 훌륭한 뜻을 감시 저버릴 수 없기에 그 이름 붙이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기면서 우()와 같이 서술한다.

공이 돌아간 뒤로 일곱 번째의 갑신년 첫 봄 중완(仲浣, 중순)에 후학 풍천 임용순 삼가 지음. 후학 족후손 선원은 삼가 전을 쓰고 아울러 해서도 씀

공이 돌아간 뒤로 408(2004)이 된 갑신년 중춘 일에 삼가 세움


我宣廟撫運之二十餘載島倭大肆猘躪蹂我八路生靈一時義士服介馬衝鋒鏑用協敭中興績大者表旂常小者疇祿爵磊落不可殫籌唯故忠勇將軍贈議政府左贊成金忠壯公敦義旅四年不獲登一命之賞又横被讒構以死然迄今玆二百歲有尙論當時者必咨嗟扼腕先稱說金將軍雖婦孺皀輿未有不知金將軍名者將軍始起兵受分朝所命翼虎將軍號由是世皆稱翼虎將軍及賜諡忠壯士大夫皆稱忠壯公公諱德齡字景樹光州石底村人也曾祖諱珝戶曹正郞祖諱允孝宣務郞考諱鵬變習讀妣南平潘氏直長季宗女有丈夫子三人公其仲也公世故儒家夙蜚詞藝聲年十七取鄉解既又遊牛溪成先生之門講問儒者之學雖卓犖有大志人莫知也壬辰亂作公兄贈持平德弘首倡義起兵公亦從焉持平公曰吾兄弟皆死奈老母何遂遣公歸養獨與高公敬命偕進戰錦山死之明年癸巳賊退自王京猶據嶺南日益兵圖再逞而官軍及諸義旅率望塵奔避時公丁潘夫人憂己葬矣觀察使及鄰郡宰始稍稍聞公名交薦于朝李忠定貴時爲守長城言公大將才也於是特授官刑曹佐郞公姊夫金應會倜儻士也以大義開公而朝旨又適至公乃以墨縗起斥田宅具器仗傳檄旁邑得敢戰士五千餘人權元帥慄標其軍曰超乘上又遣使賜軍號忠勇時甲午正月也公遂引兵抵嶺南界上移檄言直抵大坂城大坂城倭所都也倭酋淸正潛遣工圖公容貌見之咤曰眞將軍也乃撤諸屯兵合爲大陣以待之當是時諸將士壁壘相望唯郭將軍再祐以忠智特著公移書約戮力殲賊遂偕陣鼎巖津賊夜渉川將刼營公設覆掩擊大創之賊不敢出公在陣嘗生縳兩虓虎以示賊賊愈震龔相戒避翼虎將軍公軍晋州晋州新爲賊所刳積骸如阜自公屯兵後無一人一騎敢近境者以是無斬獲功而嶺湖之間民始得安意操鋤棃流庸漸復軍亦有羡食矣娟公者乃謂公對壘三年迄無寸功嗟乎豈不誣哉公又嘗與郭將軍駕海舶繇東萊前洋直摩倭疊倭死咋閉營不敢動於是公受朝命盡統諸道義兵軍聲大振士皆踴躍思一奮而天朝己厭兵議封貢朝廷亦戒諸將母與倭交兵公屢請戰皆不許公知功不就遂感憤縱酒且成疾公在軍斬軍吏犯罪者或言其殺無辜遂被逮問賴時相鄭公琢力救得釋未幾湖西賊李夢鹤叛流言公與郭將軍及洪季男高彦伯崔聃齡俱與己通謀季男彦伯亦義兵諸將爲賊所憚者而聃齡則公麾下士有義勇者也公方引兵討夢鶴道聞賊己平乃還而朝廷遂用流言逮公公忼慨對薄辭氣自若曰臣居親喪而從金革之事又不能成尺寸功忠孝俱隳罪當死無所惜願無以臣故殺無辜崔聃齡聃齡竟得免時諸將中往往多忌公者而忠淸兵使李時言尤甚公之逮以時言密啓也徐忠肅公渻時爲承旨力保公不及鄭相琢金相應南皆極言公無罪而廟議有陰主時言者公竟以丙申八月受酷刑卒于獄中公旣登成先生之門鄭文淸公澈又公邑人也成先生與鄭公皆方爲黨人所甘心公威聲又獨出諸將上以故與公偕逮者衆而公燭幽揭烈華袞煒煌梨坂之陽碧血在泉毅昆哲季左右連蜷萬口之騰刻此貞石金匱靑簡並詔無斁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左議政 豊山 洪奭周 謹撰

(追記)

嗚呼忠壯金公我海東名將也其神武鬼策未及少展之寃卒誣獄而無後嗣其弟楓巖公德普遺命其子楓溪公璩使之兼奉公祀至次曾孫梨村公守信權奉公廟會寒圃齋李公健命長曹銓肅廟三十八年壬辰十一月二十七日丙午都目政錄用梨村公官至別檢時徐命遇爲掌令上疏彈劾之曰入銓者若非植黨擯異則率是循私蔑公而純用一邊寒圃齋陳疏悉辨之曰忠勇將金德齡卽壬辰倡義之人而被禍寃死事蹟尤著臣之入銓收錄其奉祀孫我族先祖大司諫水村公埅赤陳疏盛辨之曰義兵將金德齡奉祀之人見擬於政注者有何可疑而巧加吹覓他尙何言肅宗頷之而賜優批曰條論可謂明快而削黜徐命遇足以懲罪大哉王言厥後修譜也問禮於蘆艮淵三賢別檢公以下奉祀子孫間二世而錄之於忠壯公脚下此洪相公所撰碑文中所謂今主祀者洪基卽別檢公五代冑孫也今此奉祀顚末原碑中見漏故將竪神道碑也其後孫忠浩搜摭其事實於肅宗大王實錄及忠壯公遺事寒水諸集而撰實記訪余于寧州泰華山鬱而請文之吾雖非其人顧於先誼其美事盛意莫之敢孤而榮其託名叙之如右云爾

公歿後四百八年甲申孟春仲浣後學豊川任龍淳謹撰

族孫 金善源 謹篆竝書

公歿後四百八年甲申仲春日 謹立

※ 광주광역시 서구문화원 누리집 게시물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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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0) 1896광주여행기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광주역사민속박물관(2021) 광주천 광주역사민속박물관
김경수(2005) 광주의 땅 이야기 향지사
김대현.정인서(2018) 광주금석문, 아름다운 이야기 광주문화원연합회
김정호(2014) 광주산책(상,하) 광주문화재단
김정호(2017) 100년 전 광주 향토지명 광주문화원연합회
김학휘(2013) 황룡강, 어등의맥 16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4) 광산의 노거수, 어등의맥 17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5) 광산나들이, 어등의맥 18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6) 설화와 전설, 어등골문화 21호. 광산문화원
김학휘(2018) 광산인물사, 어등의맥 21집. 광산문화원
김학휘(2019) 마을사이야기, 어등골문화. 광산문화원
남성숙(2017) 전라도 천년의 얼굴 광주매일신문
노성태(2016) 광주의 기억을 걷다 도서출판 살림터
노성테.신봉수(2014) 사진과 인물로 보는 광주학생독립운동 광주문화원연합회
박규상(2009) 광주연극사 문학들
박선홍(2015) 광주 1백년 광주문화재단
정인서(2016) 산 좋고 물 맑으니-광주의 정자 광주문화원연합회
정인서 외(2015) 광주의 옛길과 새길 시민의 소리
정인서(2011) 양림동 근대문화유산의 표정 대동문화재단
정인서(2011) 광주문화재이야기 대동문화재단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2016) 광주 역사문화 자원 100(上,下) 지역문화교류호남재단
천득염(2006) 광주건축100년 전남대학교출판부
한국학호남진흥원(2022) 광주향약 1,2,3. 한국학호남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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